00901 98. 전란의 시대 =========================================================================
바레인 문제로 포르투갈 대사를 왕궁으로 초치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법적으로 같은 나라가 아닌 동군연합에 불과해 왕도에 주 고산국 포르투갈 대사관이 따로 있었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포르투갈 제국, 혹은 포르투갈 해외영토는 유럽에서 최초로 세계 제국을 세웠으며 가장 장기간에 걸쳐 제국을 유지했다. 1415년 세우타를 시작으로 세계로 영토를 확장했다가 1999년에 마카오를 중국에 양도하고 2002년에 동 티모르가 독립할 때까지 자그마치 600년을 유지했다. 브라질 외에는 그다지 인상적인 식민 지배를 못하고 교역 거점 위주로 운영했지만 세계 곳곳에 흩어진 영토는 현대 기준으로 53개 주권국에 미쳤다.
“후안, 아니 주앙 브라간사 대사 어서 오시오. 국립극장이 아닌 곳에서는 오랜만에 보는 것 같소.”
“전하께서 여전히 강녕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국왕전하의 열정이 식은 것 같아 몹시 안타깝습니다.”
주앙 브라간사는 1604년 3월생으로 18세에 불과했지만 브라간사 공작가의 적통 후계자로서 어렸을 때부터 고위 관직을 수행했다. 이민호가 왕실 가족들과 함께 국립극장에 갈 때마다 주앙 대사를 만나서, 한때는 그가 극장 관계자나 음악가인 줄 알았다.
“요즘은 젊은 작곡가들이 좋은 음악을 만들고 있으니 나는 손을 떼어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소.”
“젊은 작곡가들이 훌륭하긴 해도 마치 미래에서 온 듯이 전혀 새로운 음악 장르를 창조하시는 국왕전하와 비교하기 어렵습니다.”
주앙 대사의 칭찬에 이민호는 살짝 양심에 찔렸다. 순수한 작곡가에 비하면 이민호는 표절범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시간 나는 대로 악상이 떠오르면 새로운 곡을 내겠소.”
“국왕전하께서 내실 어제곡만 기다리겠습니다. 헌데 저를 부르신 것은 바레인 섬 때문입니까?”
인도와 페르시아 만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포르투갈이 이번 일을 모를 리가 없었다. 특전대대가 집결해 수송기 10여 대가 날아갔다가 며칠 만에 돌아오더니 갑자기 왕궁에서 오스만 제국의 공주와 고산국 왕자가 결혼했다. 이것만으로 모든 그림을 짜 맞출 능력이 포르투갈 대사관에 있었다.
“그렇소. 신문에 곧 발표가 되겠지만 오스만 제국과 협의해서 쿠웨이트부터 카타르까지 아라비아 반도 동해안 전체를 고산국 영토로 편입하기로 결정했소. 그런데 바레인 섬은 포르투갈이 지난 100년 동안 점령하고 있다고 들었소.”
“예, 전하. 20년 전에 페르시아가 대규모 함대를 동원해 바레인 섬을 공격하려고 했지만 고산국 함대를 부르겠다고 위협해서 물러서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고산국이 아부다비에 진출한 다음부터 포르투갈 선원들이 약탈행위를 자제한 사실은 전하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아부다비에 포르투갈 배들이 수시로 들락거렸으니 페르시아에서 그렇게 오해할 만도 했겠구려.”
중세에는 동 아라비아 지방, 즉 바스라를 비롯한 이라크 남부부터 호르무즈 해협이 위치한 북 오만까지 아라비아 반도 동해안을 통틀어 바레인 지방이라고 불렀다. 쿠란에도 몇 번이나 언급돼 있다. 포르투갈은 바레인 섬에 작은 요새를 쌓아두고 계절에 따라 비워두기도 해서 그다지 영토 욕심은 없는 것 같았다.
실제 역사에서 1602년 페르시아가 침공하자 포르투갈 군대는 바레인을 버리고 도망간다. 그러나 포르투갈과 고산국이 동맹국인 줄로 오해한 페르시아는 바레인을 침공하지 않았다.
페르시아도 바레인을 영토로서 직접 지배하지 않고 주민들을 간접 지배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포르투갈이 바레인을 거점 삼아 페르시아 남부를 약탈하지 못하게 한 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이 페르시아 남부 연안지대를 약탈하지 않는다면 굳이 바레인을 공격할 이유가 없었다.
“에스파냐도 그렇지만 어마어마한 부국인 고산국에 포르투갈이 팔 것은 영토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에스파냐가 여러 곳을 고산국에 넘기면서 가격이 점차 상승한 것은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흠! 비싸게 팔려고 대사가 아주 작정한 것 같소. 가격을 먼저 제시하시오. 봐서 매입하지 않을 수도 있소.”
“고산국에서 적정한 가격을 제시한다면 팔아도 된다는 훈령을 본국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외교, 특히 영토 인도 협정에서 가격 협상이 가장 골머리 아프면서도 짜릿한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이민호는 많은 영토를 구입하면서 나름대로 경험이 쌓여 때때로 매우 저렴하게 매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이 젊은 대사에게 처음부터 협상에서 밀리고 있다고 판단해 초조해졌다.
어느 곳이든 땅은 세계에서 유일한 상품이므로 영토 매매는 판매자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시장이었다. 구매자가 가격을 낮추려면 판매자가 급한 순간을 노리거나 시간을 질질 끄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아라비아 동해안에서 유전 개발이 본격화된 이후부터 바레인 섬의 가격도 폭등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바레인 섬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바레인이 전쟁터가 되면 외국군이나 함대가 몰려올 경우 조금 거슬려서 말이오.”
“그래도 영토를 지키려면 싸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페르시아 만 주변 지역에서 담수가 나는 곳은 바레인을 제외하면 무척 드문 편입니다. 바스라에 관심을 두고 있는 저희 포르투갈 입장에서는 함대의 중간 보급기지 역할을 하는 바레인을 포기하기 어렵습니다.”
바스라는 샤트 알 아랍 수도라는 훌륭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어서 무역 거점으로 급성장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포르투갈이 오랜 세월 관심을 갖고 기회만 되면 점령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현재는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가 바스라를 두고 싸우고, 현대에는 이란과 이라크가 전쟁을 벌인다. 고산국 입장에서는 유전만 아니라면 그다지 필요 없는 곳이었다. 바스라의 지상은 오스만 제국이 통치하고 지하자원, 즉 석유는 고산국에서 뽑아먹는 방식도 생각해두었다.
“가격이 매우 비싸다는 뜻으로 알아듣겠소. 그런 작은 섬이 담수 때문에 비싸다면 고산국 입장에서 딱히 살 이유가 없소. 아부다비에서 담수가 충분히 산출되며 그게 없더라도 바닷물에서 담수를 정제해서 마실 기술이 있으니 말이오.”
“강대국인 고산국에 바레인 섬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군요. 그럼 전하께 영토 매매 의사가 없는 것으로 본국에 보고하겠습니다.”
“잠깐! 대사는 성격이 너무 급하오.”
속에서 욕이 튀었지만 일단 대사를 붙잡고 봤다. 샘에서 신선한 물을 얻을 수 있다지만 황무지에 불과한 바레인 따위는 아주 싸게, 잘하면 공짜로 얻을 수 있다고 예상했는데 전혀 뜻밖으로 상황이 전개됐다.
“우리 솔직히 이야기합시다. 대사는 얼마를 원하는 거요? 비밀스런 이야기를 해야겠으니 대사의 수행원들은 잠시 나가 있도록 하라.”
대사의 수행원들 중에 에스파냐에서 감시자로 붙인 하급 귀족이 있었다. 감시자는 이민호와 대사가 본격적인 가격 협상을 하는 줄 알고 아무런 의심 없이 알현실에서 나갔다.
“현 상황에 대비해 본국에서 훈령을 보냈습니다. 훈령에 언급된 최소 가격이 있지만 저는 국왕전하로부터 몇 배나 더 받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끄응! 진짜로 원하는 것을 말해보시오. 대사의 할머니께서 참으로 대단한 미인이었다는 기억이 나는구려.”
주앙의 할머니 브라간사 공작부인 카타리나는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의 손녀로서 잉팡타 칭호를 받은 정식 공주였다. 비록 포르투갈 왕위 계승전쟁에서 밀렸지만 아비스 왕가의 혈통이 주앙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할머니는 제가 열 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의 염원을 이제는 제가 간직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포르투갈에 좋은 날이 올 것이오. 포르투갈이 에스파냐의 속국은 아니지 않소? 마카오에는 지금도 포르투갈 깃발이 매일 게양되고 있소.”
지금은 같은 나라가 아니더라도 동군연합으로서 에스파냐 국기, 즉 에스파냐 국왕의 깃발이 마카오에 게양돼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포르투갈 사람들은 다시 국권을 회복할 것을 기대하며 포르투갈 국기를 게양했다. 물론 이 시기에는 마카오가 아직 포르투갈의 영토가 아니었고, 명나라로부터 섬 일부를 빌려 쓰고 있을 뿐이었다.
“마카오 사람들은 실로 애국자들입니다. 그들의 애국심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소, 대사. 그리고 생각을 해보시오. 지금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동군연합으로 묶여 있소. 고산국은 포르투갈이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유리하겠소, 아니면 한 나라로 합쳐지는 것이 유리하겠소?”
“바로 그것입니다. 국왕전하와 우리는 같은 배를 탄 셈입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전하.”
포르투갈 본국에서 보낸 훈령에는 고산국이 바레인 섬을 원할 경우 고산국 화폐로 백만 원 이상을 받고 넘기라고 돼 있었다. 황금 1톤이라면 파트마 공주가 가져온 지참금보다 훨씬 적은 금액이었지만, 시끄러운 아랍계 주민들이 사는 작은 섬의 가격으로는 높은 편이었다.
“그 정도라면 비싸긴 하지만 바가지는 아닌 것 같소.”
“그러나 저는 저의 재량으로 국왕전하로부터 황금 100톤을 받아낼 생각이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가격이오!”
“후후! 그런 말도 안 되는 가격에도 전하께서 흔쾌히 지불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카티프와 카타르 사이 만 깊숙한 곳에 위치하는 바람에 바레인 섬은 목에 걸린 가시나 다름없었다. 바레인 섬을 인수해 영토에 편입하면 아라비아 반도 동해안의 방어를 위해 투입될 병력과 함대를 대폭 줄여도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대사의 생각이 맞았소. 조건을 말해보시오. 오랜 우방인 에스파냐에게 불리한 일을 해야 하는 고산국에도 이익이 돼야 하지 않겠소?”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뇌물이나 개인적인 축재를 원하지 않습니다. 포르투갈의 왕위가 다른 사람에게 가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그저 포르투갈의 독립을 바랄 뿐입니다.”
“영토 판매 대금의 일부를 횡령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겠소. 훈령에는 1톤 이상이라 했지요? 공식적으로 황금 10톤에 바레인 섬을 매입하는 것으로 발표하고 대사에게, 혹은 브라간사 공작가에 황금 20톤을 비밀리에 지급하겠소. 이것을 군자금으로 삼아 유사시에 필요한 병력을 기르도록 하시오.”
“감사합니다, 전하.”
주앙 브라간사 대사가 깊숙이 허리를 숙인 다음 알현실에서 나갔다. 바레인 섬을 매입하는 대가가 얼마인지는 이민호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만약 주앙 브라간사가 포르투갈의 독립을 위해 고산국에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면 그 이상을 공짜로 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주앙이 나이가 좀 더 많았다면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이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멕시코를 더 일찍, 그리고 더 싸게 영토로 편입할 수 있을 텐데, 이민호는 몹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고산국 화폐로 천만 원이나요? 와아!”
알현실 바깥에서 대사의 수행원들이 내지른 환성이 울려 퍼졌다. 본국에서 지정한 금액의 열 배나 받게 됐으니 하급 귀족들은 주앙 브라간사가 엄청난 협상능력을 발휘한 것으로 믿었다. 포르투갈 독립전쟁은 원래 역사보다 좀 더 일찍 시작될 것 같았다.
그 사이에 호조와 공조, 병조에서 합동으로 아라비아 동해안을 영토로 편입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고산국 건국 이래 여기저기 영토를 획득하고 다른 나라로부터 편입시킨 경험이 충분히 쌓여서 지금은 조사 자료를 기반으로 아주 짧은 시간에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사막에 널리 흩어져 사는 유목민 2천여 명 정도라면 힘으로 간단히 누를 수 있겠지만 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목민들을 지속적으로 통제하기는 어려웠다. 이들을 쫓아내거나 다른 지역에 거주시킬 경우 마치 길고양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또 다른 유목민들이 빈 공간에 스며들어오기 쉬웠다.
차라리 이들을 같은 편으로, 이왕이면 백성으로 끌어들여 유전 건설과 영토 지키는 일에 동원하는 편이 좋았다. 유목민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해 담수를 대량 공급해서 오아시스와 목초지를 확장시켜주는 방법을 고안했다.
수니파와 시아파가 어울려 사는 바레인 섬은 다른 종교에 관대하고 아랍 지역에서 유일하게 술과 돼지고기를 허용하기에 현대처럼 휴양지로 개발할 계획이었다. 웬만큼 독실한 무슬림이 아니라면 남의 시선 때문에 못 먹어서 그렇지 비밀만 보장된다면 아주 잘 먹고 잘 마셨다. 현대 바레인의 주요 국가 수입이 비자 발급 수수료라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다.
============================ 작품 후기 ============================
에스파냐에게는 안됐지만 어차피 포르투갈은 독립할 테고, 우방이라도 서로 견제를 하기 마련입니다. 또한 고산국의 국익을 위해서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