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00 98. 전란의 시대 =========================================================================
회의가 끝나고 황제가 연회를 열었다. 산해진미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지만 독살 가능성 때문에 이민호는 아쉽게 입맛만 다셨다.
이민호는 선영이 준 전투식량이 담긴 종이상자를 뜯은 다음 발열선을 잡아당겼다. 뜨거운 김이 확 치솟아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이민호는 안면 몰수하고 잡채밥과 된장국, 몇 가지 부식이 데워지기를 기다렸다.
“고산국 국왕전하. 제 딸 파트마 술타나의 미모가 어떻습니까?”
“오! 어머니를 닮아 아름다운 처녀로 잘 자랐군요. 제국의 훌륭한 청년들이 줄 지어 술타나에게 청혼할 듯합니다.”
이민호에게 몇 번이나 와서 감사의 인사를 하던 쾨셈 술탄이 이번에는 딸을 데려와 인사시켰다. 자식들의 안전 보장은 물론 차기 황제 계승권까지 얻은 쾨셈 술탄은 몹시 들뜬 것 같았다.
파트마 술탄은 열일곱 살로서 갓 피어나는 꽃처럼 아름다웠다. 이민호는 쾨셈 술탄이 혹시나 파트마를 후궁으로 데리고 가라고 할까봐 미리 선을 그었다. 쾨셈 술탄이 1590년생으로 32세이며 장녀가 17세면 도대체 몇 살에 첫 아이를 낳았는지 계산하다가 혀를 찼다.
“아쉽게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랍니다. 황실의 관례를 따른다면 이 아이는 일이 년 안에 정략결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배우자가 나이가 많든 적든, 부인이 몇이든 상관없이 정치적 이익이 있느냐 여부에 따라 남편이 정해질 것입니다.”
“황실 여성들의 슬픈 운명이군요.”
수백 년을 이어온 오스만 황실에서 태어난 공주들은 대부분 국내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큰 고관대작에게 시집갔다. 그리고 정치적 득실에 따라 이혼과 재혼을 밥 먹듯이 했다.
이민호는 몰랐지만 바로 눈앞에 서 있는 파트마 술탄이 정략결혼의 사례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불행해질 인물이었다. 남편이 반역죄로 처형당하거나 정치적 고려에 의해 이혼함으로써 평생 최소한 일곱 번 결혼하고 마지막 결혼은 50대 후반, 다른 자료에 따르면 61세에 한다. 여동생 아이세 술탄도 여섯 번, 혹은 일곱 번 결혼한다.
“제가 국왕전하께 파트마 술타나를 시집보낼까 걱정되세요? 국왕전하께는 후궁이 200명이 넘는다고 알고 있어요. 호호!”
“조금 많긴 합니다만 오스만 제국 황제의 하렘에 속한 여성들보다는 훨씬 적습니다. 그리고 요즘 들어서는 내 자식들보다 어린 아내를 맞이하는 것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걱정 마세요, 국왕전하. 오스만 황실의 종법에 따라 공주가 시집가기 전에 부마는 홀아비가 되어야 하니까요. 공주는 부마의 유일한 배우자랍니다.”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군요.”
그러니까 오스만 제국 황실에서는 파샤 칭호가 붙은 늙은 관료에게 공주를 시집보내면서 파샤의 아내 넷과 수많은 첩들과 여자 노예들을 파샤에게서 강제로 떼어놓는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비극은 이슬람 율법에서 이혼이 가능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이슬람의 가르침에서는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이혼을 제기할 수 있었다. ‘신이 가장 불쾌하게 여기며 허락하는’ 행위가 이혼이라 쉽게 할 수는 없었지만 황실에서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술타나의 이혼과 재혼을 강제로 반복시켰다.
“어머! 잠시 실례하겠어요, 전하.”
쾨셈 술탄이 다른 후궁과 대화하는 사이 파트마 술탄이 눈치를 살피더니 이민호에게 고했다. 여러 민족을 아우르는 오스만 제국답게 황실 사람들은 외국어를 쉽게 배우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고산국 국왕전하! 저는 어머니가 말한 것처럼 살기 싫어요. 황족으로서 많은 것을 누린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부끄럽지만 저는 제가 존경할 수 있고, 저를 사랑해주실 분과 결혼하고 싶어요. 물론 그 분은 반드시 무슬림이어야 해요.”
“그런데 파트마 술타나께서는 고산국 말을 아주 잘 하시는군요.”
“칭찬 감사해요, 전하. 투르크어와 고산국 말의 문법과 어순이 비슷해서 아주 쉽게 배우고 있어요.”
같은 교착어이며 모음조화가 강하게 살아남았고 존대법이 있으며 문법적 성의 구별이 없다는 점에서 두 언어 사이에는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다른 점도 얼마든지 있어서 두 언어가 마냥 가깝다고만 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쾨셈 술탄과 파트마 술탄이 접근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파트마가 고산국 말을 배운 것도 따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트마 술탄의 노력이 가상해서 이민호는 더 이상 사양하지 않기로 했다.
“배우기 어려운 말인데도 아주 잘 하는 것 같소. 파트마 술타나! 혹시 내 아들 놈들과 선을 보는 게 어떻겠소?”
“어머! 어머! 그런 건 황실의 어른들과 말씀을 나눠보세요. 저는 어른들이 결정한 대로 따라야 한답니다.”
파트마 술탄이 뺨을 붉게 물들이는 것으로 봐서 별로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오스만 제국이 정부 차원에서 고산국 왕자와 공주들을 파악하면서 그 정보를 황실에도 넘겼을 거라고 판단했다.
누가 뭐래도 파트마 술탄은 오스만 제국 역사상 몇 없었던 정식 황후의 딸이었다. 그 전에 황제로 등극한 자들이 대부분 노예나 잘해야 후궁의 소생임을 감안하면 무척 특이한 경우였다.
그에 반해 고산국에서 차별을 하지 않는다지만 무슬림 왕자들은 내명부 품계가 낮은 후궁들의 소생이었다. 파트마 술탄이라면 고산국 왕자의 배우자로서 자격이 차고도 넘쳤기에 아들을 장가보내기 위해 이민호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고산국에 아직 결혼하지 않은 무슬림 왕자가 여섯이 있소. 여기를 보시오. 이들 중에서 골라보는 게 어떻겠소?”
“제가 골라도 되나요? 왕자님들은 다들 너무나 멋진 분들이세요.”
“부마를 고르는 결정권이 황제보다는 술타나의 어머니에게 있지요? 내가 설득해보겠소.”
이민호가 품에서 사진첩을 꺼내 브루나이 공주들과 자바 섬 왕녀들이 낳은 왕자들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 시대 이슬람 문화에서는 결혼할 남녀가 혼인 전에 선을 보는 풍습이 없었기에 신랑 후보들의 사진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파격적이었다.
파트마 술타나가 얼굴을 붉히면서 고산국 왕자들의 사진을 살폈다. 그런데 하필 파트마 술타나가 고른 왕자들은 죄다 장가를 갔다. 여자들이 남자 보는 눈이 비슷해서 그런지 여기서도 빈익빈 부익부가 적용됐다.
“아! 잘 골랐소. 다솜 왕자는 열여덟 살이고 대학에서 범죄수사학과 법학을 전공하고 있소. 졸업하면 백성들의 안전을 지키는 훌륭한 경찰관이 될 것이오.”
“몇 번 들어봤지만 경찰관이 뭔지 정확히 모르겠어요, 전하.”
“경찰이란, 바로 비교하기는 곤란하지만 황도에 주둔하는 예니체리처럼 범죄자를 체포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관리요.”
“치안을 맡았다면 국왕전하의 지배를 공고히 하는데 조력하는 집단이로군요.”
경찰의 임무로 치안 유지나 백성들의 신변 보호 등등 좋은 말만 늘어놓았지만, 가장 중요한 임무는 역시 기존 질서의 고착화에 있었다. 그러므로 파트마 술탄이 경찰의 실체를 정확히 꿰뚫어본 셈이었다.
“사실은 그렇소. 비록 다솜 왕자는 개인적으로 백성들을 지키는 길을 택했지만 경찰 조직이나 법원 조직 자체가 기존 정치체제를 수호하는 집단인 것만은 틀림없소.”
“힘든 일을 스스로 맡은 훌륭한 분이시겠어요. 하지만 고산국에는 이슬람교 신자가 적지 않나요?”
“물론 왕자는 어머니를 따라 무슬림이오. 파트마 술타나를 마다할 남자는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 후보를 몇 명 더 골라보시오.”
“어머나! 국왕전하! 파트마 술타나에게 신랑 후보들을 소개하고 계세요? 와! 다들 너무 잘 생기셨어요.”
다시 이민호에게 다가온 쾨셈 술탄이 돌아가는 상황에 놀라워했다. 그리고 이민호가 예상한 대로 결정을 내렸다.
쾨셈 술탄의 머리에는 황자들의 안전과 차기 제위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쾨셈 술탄은 파트마 술타나의 결혼을 통해 황자들의 미래를 더욱 탄탄하게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 듯했다. 우연을 가장했지만 여기 오기 전부터 파트마 술탄과 짰다고 봐야 했다.
“혹시 제국의 황녀가 다른 나라에 시집간 사례가 있습니까?”
“지금까지 전례가 없지만 제국과 고산국의 국혼이라면 황제폐하와 발리데 술타나께서 쾌히 승낙하실 거여요.”
이 대화를 기점으로 국혼은 급물살을 탔다. 물론 황제와 모후도 기쁘게 승낙했고 대재상을 비롯한 재상들도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며칠 후 귀국하는 비행기에 고양이 200마리 외에도 고양이를 닮은 미녀 공주와 시녀들을 태웠다.
파트마 술타나는 지참금으로 황금 2톤 정도를 고산국에 가져왔다. 신랑이 결정돼 혼약이 성사되고 나면 시아버지인 이민호가 신부 값으로 같은 무게의 황금과 보석 위주의 예물을 신부인 파트마 술타나에게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이혼할 경우에 대비해 위자료 액수도 미리 정했다.
이슬람 문화에서 결혼은 개인들이 아닌 두 집안의 결합이었다. 그래서 지참금과 신부 값을 각자의 집안에서 준비해줘야 했다. 그래서 증여와 상속이 사실상 불가능한 고산국에서 오직 무슬림들만 결혼을 통해 부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부유함은 1대에 그치기에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재산이 파트마 술타나에게 집중돼 있어서 남편이 될 왕자는 결혼 전부터 공처가로 확정됐다. 그러나 황금 4톤과 빼어난 미모, 그리고 높은 신분을 지닌 파트마 술탄을 거절할 총각은 이 세상에 별로 없었다.
“이로써 신랑 고다솜 왕자와 신부 오스만 파트마 술타나의 혼인이 성사됐음을 이 자리에 모이신 모든 분들께 알립니다.”
혼인서약식은 왕궁의 정원에서 진행됐다. 신랑의 부모로 이민호와 브루나이 공주 다나가 참석했고, 신부 측에서는 주 고산국 오스만 제국 대사가 대표로 나섰다. 결혼 공증인 역할을 맡은 무슬림 학자 앞에서 신랑과 신부가 결혼계약서에 서명을 마치는 것으로 결혼식은 간단히 끝났다.
피로연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다나 공주가 손수건으로 연신 눈가를 훔쳤다. 조선 출신 사람들이 명나라를 대국으로 인식하듯이 이슬람 국가인 브루나이에서는 오스만 제국을 세계 최대의 국가로 알았다. 그래서 다나는 파트마 술타나를 며느리로 맞이하면서 몹시 기뻐했다.
“오스만 제국의 고귀한 황녀님을 다솜이의 아내로 맞이하게 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내가 정한 게 아니라 당사자들이 서로를 선택한 거야. 여러 왕자들과 직접 만나서 대화를 해본 파트마 술탄이 보기에 다솜이가 가장 잘 났다는 뜻이지. 아들을 잘 키웠다고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파트마 술탄이 선택한 남편은 브루나이 공주 다나의 아들 다솜 왕자였다. 다솜에게는 조금 고지식한 면이 있어서 이민호는 꽤나 걱정했다. 다솜은 당분간 신혼여행을 떠나지 않겠다고 해서 혼인한 날부터 이민호가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
“아바마마! 젊어서는 학문을 닦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주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신혼여행은 미뤄뒀다가 겨울방학 때 다녀오겠습니다. 외가인 브루나이와 처가인 이스탄불을 들르려면 한 달쯤 소요될 것 같아서 그렇게 정했습니다.”
“정했다고? 파트마 술타나는 뭐라고 반응했지?”
“당연히 남편의 뜻에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어휴! 따르겠다고 해도 며느리가 기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장 휴학하고 일 년 동안 신혼여행을 다녀오너라. 외가와 처가는 물론이고 고산국 영토를 샅샅이 살펴보고 나서 돌아오너라.”
이민호가 한 말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한참을 고민한 다음 다솜의 얼굴이 밝아졌다.
“예. 아바마마께서는 항상 이론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면서도 정작 더욱 중시하신 것은 현장이었습니다. 세상을 돌아다니다 보면 저도 많이 배울 것 같습니다. 책도 잔뜩 들고 가서 여행 중에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
“답답한 것아! 그게 아니라, 학업을 중단할 만큼 아내와의 결혼생활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네 아내에게 보여주란 말이다. 책 따위는 읽지 말고 그 시간에 최선을 다해서 술타나의 마음을 사로잡아라. 애를 만들어 오면 더욱 좋고.”
“험! 험! 당연한 것을 따로 어명으로 내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헤벌쭉한 다솜의 얼굴 표정을 본 이민호가 혀를 찼다. 돌이켜보니 이런 식으로 선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다솜이 장가가기 어려울 뻔했다.
“어휴! 너 같은 고지식한 책벌레는 현업에 종사하기보다는 대학에 남아서 교수나 하는 편이 낫겠다. 괜히 동료들에게 민폐 끼치지 말고 평생 공부나 하는 게 어떠냐?”
“나중에는 교수도 좋겠지만 범죄수사학은 현장 경험이 반드시 필요한 학문입니다. 최소 몇 년 동안은 수사관으로서 국가에 봉사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다솜 왕자는 고산국 국왕의 아들이며 한때 제국을 자처했던 브루나이의 술탄의 외손자로서 오스만 제국 황제의 딸과 결혼했다. 파트마 술탄이 왕자를 낳는다면 혈통 하나 만큼은 세계 최고가 될 것 같았다.
결혼식 피로연은 유쾌하고 떠들썩하게 진행됐다. 왕실 식구들은 물론 고위 관료들의 가족과 왕도에 주재하는 외국 외교관 가족들이 참석해 먹고 마시고 밤늦게까지 춤을 췄다.
신혼부부는 피곤하다면서 초저녁부터 침소에 들었다. 신부는 초야부터 일주일 동안 신방에서 먹고 자며 나오지 않는 것이 이슬람 문화권의 관습이었다. 왕궁을 배경으로 밤늦게까지 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 작품 후기 ============================
이슬람 문화권의 결혼 관습을 충실히 재현하는 편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1000회는 너무 길고 그 전에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