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99 98. 전란의 시대 =========================================================================
“짐은 이미 성년이 됐고 정신병에도 차도가 있으니 저번처럼 모후께 섭정을 맡겨 짐을 떠안겨드릴 수는 없소. 모든 정치는 대재상을 비롯한 재상들과 협의를 해서 짐이 직접 이끌어 나가겠소. 여러분이 많이 도와주시기 바라오.”
황제 무스타파 1세가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선언했다. 그리고 이민호 얼굴을 살짝 훔쳐봤다. 국내 권력 기반이 취약한 황제 입장에서는 외세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비용을 수반했다.
“위태로운 황실을 바로 잡아주신 고산국 국왕전하께 뭔가 보상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대재상이 제안한 황금 외에 말입니다.”
“파디샤! 혹시 제국의 영토를 그린 지도를 볼 수 있겠습니까? 오스만 제국에서 직접 제작한 지도 말입니다.”
오스만 제국이나 아랍 지역에서 제작한 지도는 정밀도가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아랍이나 인도 등 외국 지도는 정밀한데 반해 오스만 제국 영토를 그린 지도는 비밀로 취급하는 바람에 구하기 어렵거나 축척이 지나치게 높았다.
“환관은 가장 최신의 지도를 가져오도록 하라. 그러나 전하! 군주가 자국 영토를 외국에 떼어드릴 수는 없습니다.”
“물론입니다. 폐하. 그래서 제가 관심을 가진 지역이 혹시 제국의 영토가 아닌지 확인하고자 합니다. 제국의 이익이 걸린 지역에도 욕심을 내지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전하께 최대한 협조를 하겠습니다.”
동양에서는 명목상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하고 조공무역을 하는 나라들은 기본적으로 동격이었다. 그런데 군주끼리 국서를 주고받을 때 전하 같은 칭호를 붙이지 않고 서로를 제삼자화시켰다. 대표적으로 조선 국왕이 유구국왕에게 보내는 자문 내용을 살펴보면 주어를 생략하거나 ‘귀국’과 ‘폐방’으로 뭉뚱그리는 식이었다. 그러나 문화권이 다르다는 핑계로 이민호와 황제는 서로 호칭을 마구 붙였다.
“역시 황궁에는 정밀한 지도가 있었군요. 이곳 쿠웨이트는 제국의 영토에 포함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알 쿠와잇이라면 9년 전에 작은 어촌이 만들어진 외에 유목민들이 지나가면서 잠시 머무르는 곳에 불과합니다. 이곳을 잘 아는 재상이 고산국 국왕전하께 설명해주길 바라오.”
“예, 폐하! 고산국 국왕전하께 고합니다. 바니 칼리드 씨족이 100년 전부터 동쪽으로 이동해 바스라 남쪽부터 알 카티프 북쪽까지, 아라비아 반도의 페르시아 만 연안지대를 느슨하게 장악하고 있습니다.”
“제국이나 다른 나라는 이 지역에 전혀 진출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전하. 100여 년 전에 포르투갈이 바레인 섬을 차지해 작은 요새를 세웠습니다. 제국에서는 포르투갈의 침략에 대비하느라 바레인 섬 건너편 알 카티프에 요새를 건설했습니다.”
시파히로서 이 지역에 참전 경험이 있던 대재상이 대답했다. 이민호는 바레인 섬을 포르투갈로부터 구매하거나 공짜로 얻을 생각에 잠시 골몰했다. 1521년에 포르투갈이 쿠웨이트에 요새를 건설했지만 지금은 그 흔적도 남지 않았다. 현재 포르투갈은 쿠웨이트보다는 교통 중심지인 바스라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바니 칼리드 씨족은 16세기 초반부터 아라비아 반도 중앙 고원지대인 나지드를 떠나 바스라와 쿠웨이트, 아라비아 반도 동해안 지역으로 점진적으로 이주하고 있었다. 나중에 1650년쯤에는 씨족 연합인 바니 우투브가 형성돼 바스라 남쪽부터 카타르 북쪽까지 아라비아 반도 동해안 전체를 장악한다.
바스라는 1546년에 오스만 제국이 처음 점령했으며, 현재는 포르투갈로부터 침략 위협을 받고 있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1624년에 페르시아가 바스라를 공격할 때 오스만 제국은 포르투갈의 도움을 받아 방어해낸다. 1625년부터 독립적인 지방 족장들이 바스라를 지배하다가 1668년에 오스만 제국이 다시 점령하고, 오스만 제국이 페르시아 만으로 진출하지 못하게 하려고 페르시아가 끈질기게 공격한다.
“그럼 제국과 바니 칼리드 씨족과의 관계는 어떻게 됩니까?”
“군대를 보내 지켜야 할 확실한 영토는 아니지만 제국에 신속한 영토 외의 백성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혹시 그 지역에 관심을 두고 계십니까? 땅은 온통 사막이고 주민이라고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소수 유목민들뿐입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이곳 리야드는 아랍인의 마을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라비아 반도는 여러 세력 간에 다툼이 잦아서 누구의 땅이라고 고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시로 주인이 바뀌는 곳입니다.”
고산국 자원 탐사대가 나중에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가 될 리야드와 카타르 중간 지역에서 대규모 유전을 발견했다. 지금도 탐사가 진행 중이라 아직 확실한 판단을 내릴 수는 없지만 이곳이 초대형 유전이라는 증거가 몇 개나 드러났다.
실제로 가와르 유전은 남북으로 280km, 동서로 26km에 매장량 750억 배럴 이상이며 21세기 사우디아라비아 원유생산량의 절반을 책임지는 초대형 유전이었다. 현재 리야드는 아랍인들이 거주하는 자그마한 도시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리야드 동쪽을 영토로 편입해도 반발할 세력이란 게 아예 없을 수도 있겠습니다.”
“주변 유목민들에게 적당히 힘을 보여준 다음 다독이는 의미에서 선물을 돌리는 정도로 충분할 것입니다. 알 쿠와잇이나 바스라 남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재상! 이 지역 인구가 어느 정도 되겠습니까?”
“아라비아 반도 동해안 지역을 통틀어 인구는 유목민 가구 2천 호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이 합류해 페르시아 만으로 흘러드는 강이 샤트 알 아랍 수로이고, 이곳 주변에 이라크에서 최대 규모인 루메일라 유전이 위치한다. 쿠웨이트 남부에는 부르간 유전, 사우디 동부에는 가와르 유전이 있다. 페르시아 만 서안에 길게 이어진 초대규모 유전지대 셋 중에서 하나만 장악해도 세계에서 손꼽히는 산유국이 될 수 있다.
만약 고산국에서 이들 유전지대를 차지한다 해도 이라크,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의 자원을 빼앗는 것이 아니었다. 이 지역은 앞으로 주민 구성원이 수시로 바뀌거나 쿠웨이트의 경우 주민이 거의 거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세 나라는 생기지도 않았고,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건국 후에 영토를 동쪽으로 확장한 경우였다. 현재 고산국이 장악한 아부다비와 두바이도 20세기와 비교할 때 주민 구성이 전혀 달랐다. 그만큼 아랍 지역은 좋은 말로 역동적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생존하기 버거웠다.
“혹시 고산국이 아부다비에서 채굴한다는 석유를 얻기 위해서입니까? 바스라 서부에서 검은 기름이 땅으로 흘러나와 목초지를 망친다는 보고를 받은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꿀꺽!”
현재 브루나이와 우랄 산맥 동쪽 유전, 북미 서부 새인천과 이리 호 남쪽에서 생산한 석유만으로도 남아돌았다. 자동차를 본격적으로 생산해 석유 수요가 급격히 증가한다 해도 충분히 감당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민호는 국가의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시기에 세계 최대급 유전 세 곳을 손쉽게 얻을 수 있는데도 당장 필요하지 않다고 해서 내버려둔다면 의무를 방기하는 것이라 믿었다. 전기 말고 가스를 이용한 강력한 화력으로 라면과 볶음밥을 해먹고 싶은 마음도 물론 있었다.
“제국의 영토는 아니지만 속민이 이따금 유목을 하며 지나가는 곳입니다. 그들에게 어느 정도 보상을 해준다면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국에서 고산국을 적극 도와드리겠습니다.”
“오오! 감사합니다.”
“그러나 지키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그 땅의 주인이 수시로 바뀌지 않습니까? 고정적인 정치세력이 지속되지 못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바스라부터 쿠웨이트를 거쳐 바레인 서쪽까지 페르시아 만 연안은 300km 정도였다. 바스라는 바그다드와 함께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가 각축을 벌이는 지역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나지드에서 발흥한 사우디아라비아가 동쪽으로 확장할 것이다.
항상 그렇듯 고산국은 병력이 부족해 세계 곳곳에 주둔시킬 수 없었다. 이민호가 오스만 제국에게서 도움을 받고 싶었지만 하필 이즈음에 제국은 유럽 전선에 병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30년 전쟁이 진행되면서 유럽의 상황이 극히 유동적이라 함부로 병력을 뺄 수가 없었다. 오스만 2세가 페르시아와 휴전 조약을 체결한 배경이었다.
“땅이 아니라 고산국 외의 지역에서 거의 무용지물인 석유 때문이라면 유목민들과 충돌할 염려가 없습니다. 어느 정도 당근만 제시한다면 오히려 유목민들을 부려서 기름 나는 땅을 지키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부다비에서 그와 비슷하게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유목민들을 백성으로 두시겠다면 제국에서 관리를 파견해 협조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유목민들과 협상을 해야겠습니다. 쿠웨이트 이남의 해안지대를 고산국 영토로 편입하더라도 제국에서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물론입니다. 고산국은 예전에 제국과 페르시아 사이에서 진행되는 전쟁에서 중립을 지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고산국과 영토가 맞닿으면 제국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페르시아가 쳐들어올 방향 하나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얻을 보상은 고산국이 아라비아 반도 동해안 전체를 영토로 편입하는 것을 양해해주는 것에 불과했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황제가 미안해서 다른 보상을 챙겨주려 했지만 받을 만한 것이 없었다.
“앞으로도 황실이 고산국에 의존하면 좋을 테니까 영토만 빼고 뭐든 더 말씀을 해보십시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오스만 제국 황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도 고산국의 국익에 합치하니까 앞으로도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언제든 요청만 하십시오.”
“바스라는 국경의 작은 요새에 불과하지만 페르시아 만으로 진출해서 무역을 하려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영토를 내어드릴 수는 없지만 그 근처에서 석유가 난다면 채굴해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것도 좋겠지만 국제 관계가 복잡해질 우려가 있어서 별로 내키지 않습니다. 쿠웨이트 땅과의 경계만 확실히 그어주십시오.”
잠시 욕심이 생겼지만 바스라는 나중에 페르시아가 침공하거나 오스만 제국에서 지배하지 못하는 시기에 고산국에서 확보할 수도 있었다. 그 주체가 반드시 이민호 자신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바스라를 비롯한 유전 문제는 후손에게 남길 유훈에 기록해두기로 했다.
세계 6대 유전 중에서 이미 3곳, 쿠웨이트 남부 부르간 유전과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가와르 유전, 그리고 베네수엘라 북서부 볼리바르 해안 유전을 챙겼다. 나머지 세 곳은 바스라 인근 루메일라 유전, 카스피해 북동부 텐기즈 유전, 멕시코 동해안 칸타렐 유전인데 상황에 따라 고산국이 확보할 수도 있었다.
유전지대를 반드시 고산국 영토로 편입할 필요는 없었고, 20세기 석유 메이저 회사들이 그렇듯이 유전 개발을 해주는 대신 산유국과 이익을 분배할 수도 있었다. 다만 석유회사는 반드시 국영으로 독점시킬 결심이었다. 국가안보와 직결될 중요한 자원을 관리하고 유사시 군대를 파병해야 하는데 민간회사가 그 이익을 누리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자원은 누구에게 주더라도 특혜가 된다.
“아! 청하고 싶은 것이 또 있습니다.”
“무엇이든 말씀해보십시오.”
“황궁에서 키우는 흰 고양이 몇 마리만 구해주십시오. 털이 복슬복슬한 게 아주 예쁩니다.”
어느새 이민호 무릎에 앉아 재롱을 피우는 고양이의 눈이 한쪽은 노란색, 다른 쪽은 파란색이었다. 앙카라 지방의 고양이가 16세기에 이미 프랑스로 건너가 터키시 앙고라라는 이름이 붙었다. 리슐리외 추기경이 이 품종의 고양이를 애지중지한다는 보고를 정보국을 통해 받은 적이 있었다.
“그거야 당연히 구해드리겠습니다. 거기 환관! 당장 흰 고양이를 200마리쯤 잡아와!”
황제의 명령이 떨어지자 환관들이 황궁 안을 돌아다니면서 고양이를 붙잡느라 큰 소란이 벌어졌다. 황궁 곳곳에서 앙칼진 고양이 울음이 터졌다.
요즘 여러 나라에서 고유한 품종의 애완동물을 구하고 있었다. 노르웨이와 에티오피아, 시암과 이집트에서도 고양이를 수입해 백성들에게 분양했다. 세월이 흐르면 다른 품종과 자연스럽게 혼혈될 것이므로 품종관리와 일반 분양을 해줄 국영기업을 설립했다.
개도 여러 나라에서 수입했지만 인명피해의 가능성 때문에 도시 지역에서는 소형견 위주로 분양했다. 미국에서 개로 인한 사망 사고를 조사한 논문에 따르면 늑대와 개를 교배한 늑대개를 키우는 알래스카를 제외하면 인구 천만 명당 한 명 비율로 희생자가 발생했다. 물론 사망 사고보다 훨씬 많은 부상 사고가 날 것으로 추정했다.
순하기로 유명한 리트리버나 자그마한 요크셔테리어에게 물려죽은 사람도 있었다. 개에 물려 사망한 피해자는 주로 어린아이나 여자, 노인이었고 뜻밖에 자기 집 개에게 공격받은 경우가 절반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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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