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98 98. 전란의 시대 =========================================================================
대재상은 황궁 관료 학교에서 죽었고 나머지 관료들은 재상이거나, 재상의 칭호를 받은 고관들이었다. 특전대대 민사참모가 오스만 환관의 도움을 받아 재상들의 이름과 담당 부서를 기록하고, 오스만 2세 시해 사건에 가담한 정도와 정치적 위험도에 따라 재상들을 분류했다.
재상들의 절반 이상이 지하 감옥으로 직행했다. 그 중에서 무스타파 황제가 직접 지명한 몇 명은 분노한 시파히들에게 던져졌다. 특히 노예 출신 환관으로서 재상으로 출세했던 백인과 흑인은 이번 일에 비록 적극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예외가 없었다. 시파히 수십 명이 몰려들어 칼로 내리치는 바람에 이민호는 재상들의 비명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선희야! 재상은 보통 최고위 신하 한 명을 가리키는 말 아니야? 와지르 숫자가 많으니 명나라 직제로 상서나 일반적으로 활용되는 대신이라 번역하는 게 맞을 것 같다.”
“맞는 말씀이긴 한데 그렇게 번역하기도 곤란해요. 오스만 제국과 이슬람 국가들 특유의 관료제로 이해해주세요.”
재상, 와지르는 오스만 제국 초기에 단독으로 군주 바로 밑의 최고 국정 책임자인 수상을 지칭했다. 그러나 무라트 1세가 와지르의 숫자를 대폭 늘리면서 그 위에 대재상 직제를 신설하며 명칭이 꼬여버렸다. 결국 오스만 제국의 역사성 때문에 재상들 위에 대재상이라는 이상한 번역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30대 초반의 후궁이 어린 흑인 노예들에게 옷자락을 들린 채로 걸어왔다. 이슬람권에 사는 여자들은 히잡뿐만 아니라 부르카로 전신을 감싸는 경우가 흔한데 이 후궁은 서유럽의 궁중 여성들과 비슷한 차림이었다. 환관이 허둥거리면서 황제와 이민호에게 알렸다.
“국왕전하! 저 분은 전전대 파디샤 아흐메드 1세의 후궁이신 쾨셈 술탄이십니다.”
“알았네. 그런데 내관의 얼굴이 왜 붉어지나?”
“저도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국왕전하.”
이민호도 쾨셈 술탄의 미모와 묘한 매력에 잠시 빠져들었다가 선영이 꼬집는 바람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괜히 흑인 노예들의 귀여움에 감탄하는 척했다.
“와! 저 흑인 아이들 정말 예쁘게 생겼다. 이봐, 환관! 당연히 여자아이들이겠지?”
“저렇게 예쁜 애들이 여자일 리가 없잖습니까? 지금은 남자도 아니게 됐습니다만.”
“아! 환관 시동들이구나.”
아흐메드 1세의 후궁이었던 쾨셈 술탄이 도착하면서 시파히들은 물론 목숨이 경각에 달린 재상들마저 홀린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특전대대에 속한 사진병이 감광지 여유를 생각하지도 않고 미친 듯이 사진을 찍어대서 이민호가 사진병의 발등을 지긋이 밟아주었다.
“전 세계의 절반 이상을 정복한 위대한 군주께 인사 올립니다.”
“정식 인사는 나중에 드리겠습니다. 쾨셈 술탄의 황자님들을 구출하는 중입니다. 이제 곧 지붕을 통해 나올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새장에서 나온다고요? 아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스계로 본명이 아나스타샤인 쾨셈 술탄이 눈물을 흘리며 연신 감사를 표했다. 눈물을 흘리는 여성에게 아름다운 보석을 땅에 흩뿌리지 말라고 수작을 거는 이탈리아 놈팽이들의 표현이 지금처럼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파디샤는 왜 고개를 돌리고 계십니까?”
“국왕전하! 날씨가 참 좋지 않습니까?”
“예. 잔뜩 흐려서 비가 올 것 같습니다.”
무스타파 1세 황제가 깡말라 늙어 보여서 그렇지 1591년생으로, 쾨셈 술탄보다 한 살이 어렸다. 비록 형수와 도련님 사이였지만 두 사람은 잘 어울려 보였다.
마침 황자들이 특전대대원들에 의해 새장(Kafes)에서 구출되면서 곤란해진 무스타파 1세를 도왔다. 오랫동안 햇빛을 못 봐서 눈을 제대로 못 뜨는 황자들에게 쾨셈 술탄이 달려갔다.
“오! 알라흐 아크바르, 알라흐 아크바르, 알라흐 아크바르. 무라트! 이브라힘! 살아있었구나. 알라흐 아크바르!”
“어마마마!”
“이 어미는 너희들이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기쁘단다. 아아! 알라흐 아크바르, 알라흐 아크바르!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을. 나는 항상 너희들에게 미안한 감정뿐이란다.”
열 살과 일곱 살의 황자들이 쾨셈 술탄의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 무스타파 1세가 무라트와 이브라힘인 쓴 작은 터번을 슬쩍 보고도 손을 뻗지 않고 금방 고개를 돌렸다.
“험! 험! 쾨셈 술타나! 자리를 옮겨서 고산국 국왕전하와 함께 국정을 논하시지요.”
“명을 따르겠사옵니다, 폐하. 황자들은 내가 데려온 시녀들과 함께 있어라.”
“아닙니다, 술타나. 황자들도 국정에 참가할 자격이 충분합니다.”
“폐하! 설마!”
쾨셈 술탄이 화들짝 놀라 황자들을 품에 숨겼다. 황제가 친형제는 물론 권력에 위협이 될 만한 친아들도 죽이는 비정한 황궁에서 조카 따위는 그저 파리 목숨이었다.
쾨셈 술탄은 아들 셋을 새장 안에서 잃었다. 오스만 제국의 전임 황제들이 그랬듯이 젊은 오스만 2세도 형제와 조카들을 다수 죽였다. 쾨셈 술탄의 아들 셋은 비록 실권이 없다 해도 무스타파 1세의 재위 기간에 죽었으니 황제의 말에 쾨셈 술탄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스타파 1세가 쾨셈 술탄과 차마 얼굴을 마주 하지 못한 것은 자식들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 해도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걱정 마세요, 술타나. 제가 황자들에게 결코 해를 입히지 않을 것임을 신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그리고 다른 세력으로부터 술타나의 자식들을 보호해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쾨셈 술탄이 다시 한 번 기쁨과 슬픔이 섞인 눈물을 흘렸다. 이때 40대 중반의 여성이 부리나케 뛰어왔다. 시녀들과 환관들이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그 여성을 쫓아왔다.
“무스타파! 내 아들아!”
“엄마!”
무스타파 1세도 황제이기 전에 어머니의 귀여운 아들이었다. 황제가 발리데 술탄, 즉 다시 모후가 된 알리메 술탄에게 안겨 펑펑 울었다. 그 동안 알리메 술탄이 무스타파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팡팡 때리고 있었다.
“험! 험! 폐하! 어서 회의장으로 가시지요. 발리데 술타나도 이만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유일하게 황실의 체면을 챙기는 환관이 황제와 모후에게 권했다.
황제 무스타파 1세가 회의실 탁자 상석에 앉고 이민호가 황제 옆에 앉았다. 발리데 술탄과 쾨셈 술탄 등 후궁들과 황자들 여럿, 외유 중이었다가 오스만 2세의 시해 순간에 때마침 이스탄불을 떠나있던 재상들, 그리고 주변 총독령에서 급히 병력을 이끌고 와준 총독들 등 파샤 칭호를 받은 자들이 다수 참가했다.
이미 저녁인데도 회의장 바깥에 잉글랜드 대사 토마스 로 경 등 외국 대사와 외교관들이 몰려들었다. 새로운 황제에게 알현을 신청한다는 명목을 내세웠으나 무스타파 1세가 제정신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예니체리의 포위에서 벗어난 고산국 대사도 알현장에서 대기하는 중이었다.
“대재상이 없는 관계로, 시급히 대재상을 지명해야 하겠습니다. 마침 대재상으로 합당한 인물이 참석해서 다행입니다.”
황제가 이렇게 선언하자 회의 참가자들이 아주 잠시 당황했다. 무스타파 1세의 첫 번째 치세 때 황제의 정신이 온전하지 않아 여러 정치세력의 합의로 대재상을 뽑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민호는 황제가 대재상을 지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와 이민호의 표정을 번갈아 살펴보고, 다시 회의실 벽면에 완전 무장하고 서 있는 고산국 병사들을 본 후궁들과 파샤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민호는 별 생각 없었는데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경구를 실현하고 말았다.
“새로운 대재상은 여러 정치 세력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시파히들의 지지를 받는 후세인 파샤로 정하겠습니다. 이의 있으십니까?”
참석자들 사이에 동요가 일었으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의는 방금 황제에 의해 대재상으로 지명된 후세인 파샤에게서 나왔다.
“폐하! 제가 투르크어를 전혀 구사하지 못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제국의 개창 이래 투르크어를 못하는 대재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통역관을 통해서 짐과 의사소통을 하는데 지장이 전혀 없지 않소? 제국의 영토 내에서 모든 백성이, 혹은 관료가 투르크어를 구사해야 할 필요는 없소.”
대재상으로 지명된 후세인 파샤는 알바니아 출신으로서 투르크어를 배우지 못했다. 전임 카라 다부드 파샤가 보스니아 출신임에도 투르크어를 유창하게 구사한 것과 달리 후세인 파샤는 죽을 때까지 투르크어를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 처음 오스만 제국의 황궁에서 맡은 일은 요리사였고, 시파히로 복무하면서부터 점차 지위가 올라갔다.
나중에 후세인 파샤의 별명이 메레 후세인 파샤가 되는 것을 회의 참석자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메레는 알바니아어로 ‘가져와’라는 뜻으로, 정치적 반대자의 머리를 베어서 가져오라는 뜻이었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흔히 별명으로 구분했다.
“황공하오나 폐하! 예전보다 정신이 맑아지신 것 같습니다.”
쾨셈 술탄이 아주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다른 참석자들도 어리둥절한 시선을 황제에게 던졌다.
원래 역사에서 정신병을 앓는 무스타파 1세는 재위 2기 때에도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무스타파는 오스만 2세가 아직 살아서 무스타파 1세를 찾아 온 황궁을 뒤지고 다닌다고 믿었다. 그래서 단순한 노크 소리에도 놀라고, 나중에는 제국을 통치하는 부담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이미 죽은 오스만 2세에게 울부짖으며 호소했다.
“회의장에 모인 분들은 제가 오랫동안, 자그마치 14년 동안 새장에 갇혀 정신병을 얻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관대한 오스만의 도움으로 고산국에서 병을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오오! 신의 도우심입니다.”
“특히 고산국왕 전하께서는 제 병증을 간파하여 모든 문이 개방된 넓은 별궁을 내주셨고 벽으로 둘러싸인 침전에 있더라도 두렵지 않도록 약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이번에 반역도인 예니체리들을 칠 때도 온통 쇠로 만들었다는 그 유명한 고산국 장갑차가 아니라 유리를 통해 바깥을 내다볼 수 있는 쇠마차에 저를 태움으로써 좁은 곳에 갇히는 공포를 느끼지 않도록 해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고산국 국왕전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천만에 말씀입니다, 폐하.”
고산국은 땅이 넓고 인구가 부족해 건물을 넓게 짓는 편이었다. 이민호는 오스만 제국의 상황에게 지위에 걸맞은 널찍하고 허전한 바닷가 별궁을 내줬을 뿐이었다. 폐소공포증의 치료법인 행동 치료법이나 노출 요법, 최면 요법은 이민호는 생각도 못해봤다.
그리고 무스타파 황제가 만병통치약으로 오해하는 알약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심장박동수를 낮춰주는 간단한 약에 불과했다. 장갑차 대신 전술 차량을 이번 전투에 동원한 것은 수송기에 실어 비행하는 것이 가능한 가벼운 무게 때문이었다.
“증세가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저는 여전히 불안합니다. 제가 다시 예전처럼 정사를 돌보지 못했을 때 제국의 백성들이 고통을 받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폐하! 그 따뜻한 마음만으로도 폐하께서는 이미 성군이십니다.”
“그래서 다소 뜬금없지만, 우리 착하고 똑똑한 무라트가 성인이 되는 순간 제위를 물려줄까 합니다.”
“아니되옵니다, 폐하!”
가장 놀란 사람은 무라트의 어머니 쾨셈 술탄이었고, 얼굴이 허옇게 질려 있었다. 후계자로 지명된 자는 가장 먼저 군주가 파놓은 함정이 아닌지 의심해야 하고, 마치 죄를 지은 자처럼 군주에게 사죄해야 하는 것이 동서고금의 진리였다. 어머니의 다급한 마음이 전해졌는지 어린 무라트가 무스타파 앞에 부복하며 눈물을 흘리며 사양했다.
“폐하! 제가 감히 제위를 넘볼 마음은 전혀 없어요. 제발 살려만 주세요.”
“무라트! 네가 황제가 되면 내 자식들을 살려다오. 신의 이름으로 약속해줄 수 있겠니?”
대화를 들은 쾨셈 술탄이 다시 눈물을 흘렸다. 쾨셈 술탄이 남편 아흐메드 1세를 설득해 무스타파를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이 보상을 받는 순간이었다. 이제 오스만 제국의 황실은 황족끼리 죽고 죽이는 비극에서 벗어나게 됐다.
그러나 무스타파를 새장에 오랫동안 가둠으로써 정신병을 앓게 하고 말았다. 예비 후계자인 동시에 제위를 위협할 수 있는 황족들을 가둬두고, 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면서도 동시에 황제가 제위를 보존하려는 목적으로 운영된 새장은 그런 문제점을 드러냈다. 정신병은 나중에 무라트 4세의 동생인 이브라힘 1세의 치세에 다시 문제가 된다.
“알라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제가 황제가 되든 말든 제 사촌 형제들을 보호하겠습니다.”
“고맙구나. 너는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제국 최고의 학자들에게서 배울 것이다. 몇 년 안 남았으니 공부에 충실하도록 해라.”
이민호는 그저 보상을 받기 위해 하품을 꾹 참으면서 지켜봤다. 무라트가 열여섯 살에 황제로 즉위하면 스스로 뭘 할 수 있을까 싶었다. 당연히 모후나 친척들에게 휘둘릴 가능성이 높았다. 군주가 최소 20세 정도는 돼야 친정이 그나마 가능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다.
그러나 무스타파 1세는 왠지 서두르고 있었다. 황제는 아직도 정신병이 완치되지 않은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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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줬으니 이제 보상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