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96 98. 전란의 시대 =========================================================================
예니체리들과의 거리 500미터 정도를 남겨두고 전술 차량을 세웠다. 그리고 뒷문을 열어 황제와 환관이 내리게 했다. 그 사이에 전술 차량들이 횡대로 늘어서고, 잠시 후에 특전대대 병력이 도착해 말에서 내려 전투 준비에 돌입했다.
처음부터 전투만으로 해결할 생각이었다면 수송기에서 폭탄 투하를 하는 편이 빠르고 해군 함대를 이끌고 와서 대구경 함포로 톱카프 궁전에 포격을 퍼붓는 것이 확실한 방법이었다. 장갑이 얇고 차체가 가벼운 전술 차량보다는 중무장한 장갑차들을 몰고 와 쓸어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스타파 1세를 복위시키는 것도 아니고 제위를 확고히 해줄 목적으로 군사작전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성질난다고 무조건 쓸어버릴 수는 없었다.
“파디샤! 저쪽에서 대포를 쏠 기미가 보이면 즉시 수레 안이나 뒤로 피하십시오.”
“이 작은 수레가 대포를 막아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저 많은 불충한 예니체리들을 어떻게 상대하려고 그러십니까? 국왕전하의 안전을 위해 차라리 제가 제위를 포기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파디샤! 제가 이 적은 병력을 이끌고 황궁 앞까지 온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수레와 고산국 군대의 화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저들과 싸우면 5분 이내에 전멸시킬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정도로 강한가요? 역시 고산국입니다.”
무스타파 1세가 너무나 기뻐하며 이민호에게 두 손을 뻗었다. 하마터면 방탄모를 황제에게 빼앗길 뻔했다. 턱끈을 묶어놓아서 다행이었다.
“선영이! 전술 차량에 제국 국기와 황제기, 태극기를 올려라!”
“어가에 태극기와 오스만 제국기, 파디샤 겸 칼리프의 깃발을 게양하겠습니다.”
붉은 바탕에 흰색으로 초승달과 별이 그려진 깃발이 오스만 제국의 국기였다. 현대 터키의 국기와 비교하면 초승달의 뾰족한 부분이 약간 짧고 뭉툭하다는 차이뿐이었다. 색깔도 조금 진한 편이었다. 황제의 깃발은 붉은 태양에서 햇살이 모든 방향으로 비치는 모양인데 꽤나 복잡하고 화려했다.
“선희야! 확성기를 통해 투르크어로 적법한 황제가 도착했다고 외쳐라.”
“예, 주인님. 들어라! 술탄 중의 술탄, 칸 중의 칸, 로마의 카이사르, 신도들의 사령관, 예언자의 후계자인 무스타파 1세 폐하가 도착하셨다.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문을 열고 길을 비켜라!”
방송을 들은 예니체리들이 웅성거렸다. 그러나 약체화된 군대가 다 그렇듯 상대가 만만해 보일수록 강해지기 마련이었다. 고산국 병력이 적다고 판단했는지 예니체리들은 듣던 것보다 훨씬 사기가 넘쳤다.
“파디샤! 아무래도 황제의 위엄을 보여드려야겠습니다. 역도들을 징치하고 황궁까지 빠르게 전진하겠습니다.”
“고산국 국왕전하의 위명을 믿겠습니다.”
예전에 오스만 황제를 구해줄 때 황궁의 건물 배치도를 자세히 기록해두었다. 블루 모스크니 아야소피아, 톱카프 궁전 등을 차례로 다 점령해야 하겠지만, 면적이 넓은 것도 아니고 건물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자금성과 비교해서는 모르겠지만 경복궁보다는 확실히 조금 더 넓은 듯했다.
“대재상이 말을 타고 옵니다.”
선영이 앞을 가리키자 막 공격명령을 내리려던 이민호가 잠시 기다려주었다. 대재상 카라 다부드 파샤가 말 탄 호위병 몇 명을 이끌고 황제 앞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대재상은 황제 앞에서 무엄하게도 끝내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 이민호는 사소한 예의범절 따위를 무시하는 편이었으나 주인을 물어뜯는 신하들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한 제국의 정당하고 합법적인 주권자는 누가 뭐래도 황제이기 때문이다.
“성하이시며 황제폐하이신 술탄 무스타파 칸, 모든 왕들의 주인, 오스만 황가의 가주, 술탄 중의 술탄(Sultan-es-selatin), 칸들 중의 칸(Khakan), 신도들의 사령관이며 우주의 주인의 예언자의 계승자, 세 성지의 관리인, 로마의 카이사르(Kayser-i-Rûm) 겸 최고 사령관, 콘스탄티니예와 에드리네, 헥헥!”
우주의 주인의 예언자는 무함마드를 뜻하므로 그 계승자는 칼리프였다. 세 성지는 메카와 메디나, 그리고 예루살렘을 나타냈다. 대재상이 이스탄불과 아드리아노플을 비롯해 45개 도시와 지역, 키프루스를 비롯한 지중해의 큰 섬들과 바다와 국외 영토 이름들을 줄줄이 열거했다.
해가 뉘엿뉘엿 져가고 있었다. 이스탄불에서는 이제 겨우 오후였으나 이민호와 특전대대원들은 오전에 이륙해 태양을 따라 열 시간 넘게 비행해서 졸음이 쏟아질 시간이었다. 그러나 대재상이 황제의 칭호를 나열하다가 숨 막혀 죽을까 봐 바짝 긴장하게 됐다.
“킵차크의 초원, 타타르의 모든 나라, 케페와 주변 지역들, 보스니아, 벨그라데, 세르비아 지방의 모든 성채와 도시들, 알바니아, 에플락, 보그다니아, 그 외에 모든 영지와 속국들, 그리고 다른 나라들과 도시들의 황제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흐으악! 헉! 헉! 끄르륵!”
대재상이 정식으로 인사 한 번 했다가 죽을 것처럼 호흡을 몰아쉬었다. 이민호는 그 긴 칭호를 숨 한 번 안 쉬고 암송해야 하는 황제의 신하들에게 애잔함을 느꼈다. 그리고 루스 차르국의 차르보다 칭호가 훨씬 긴 탓에 오스만 제국 황제가 더 높은 사람이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케페는 크림반도 남동부의 페오도시아를 가리키므로 케페와 주변 지역은 크림한국 전체를 지칭했다. 에플락은 왈라키아, 보그다니아는 몰다비아였다. 황제의 칭호 마지막에서 지칭하는 다른 나라들과 도시들은 외국이 아니라 제국의 모든 총독령과 직할령들을 뜻했다.
단순한 도시와 영토의 나열이 아니라 차르의 칭호와 같이 제국 확장 과정에서의 역사를 담은 칭호였다. 이래서 제국의 영토를 함부로 침범하기 어려웠다. 점령하더라도 황제의 칭호에 영토 이름이 담긴 이상 반드시 탈환하려고 몰려오기 때문이다.
“대재상! 그대는 내게 제위로 복귀하라고 요청하지 않았소? 마음이 바뀌었다면 그대는 어린 황제를 꼭두각시로 삼을 셈이오?”
대재상의 호칭은 와지르-이 아잠에서 사드라잠으로 대체되는 중이었다. 대재상은 제국 술탄의 대리인인 최고 행정관 겸 최고 재판관으로서 국새로 사용되는 황제의 반지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죄송하지만 파디샤의 혈통은 방계가 아니라 아흐메드 1세의 적통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 여러 세력들의 합치된 결론이었습니다. 새장에 갇혀 정신이상이 된 파디샤보다는 차라리 모후와 대신들이 보좌해줄 수 있는 어린 파디샤가 낫습니다.”
“어린 파디샤가 되면 내가 복위하는 것보다 더 쉽게 권력을 농단할 수 있어서 당신들 입장에서 더 좋겠지요.”
“저희들은 그저 제국에 대한 충성심만으로 결정한 것입니다.”
대재상이 인사도 없이 말머리를 홱 돌려서 돌아갔다. 군주가 곧 나라인 이 시대에 나라를 위해 군주를 바꾸거나 시해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고 용납되기도 어려웠다.
이민호는 신임 교육부장관의 임기 초기에 행사 참가 일정을 과도하게 짜서 장관의 진을 빼놓는 대한민국 교육부 공무원들의 텃세를 떠올렸다. 그들은 교육행정을 하나도 모르는 정치인 장관을 교육정책 결정 과정에서 아예 배제해 교육행정의 안정을 기하기 위해서라는 핑계를 댔다.
그러나 교육행정을 관장하는 헌법기관은 교육부나 교육부 공무원들이 아니라 국무위원인 교육부장관이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교육부나 교육부 고위 혹은 실무 공무원들이 아예 없더라도 교육부장관만 있으면 교육정책 결정과 집행에 하등의 지장이 없었다.
대재상은 황제의 대리인 혹은 부속기관인 주제에 황제를 바꾸고 새로운 황제를 꼭두각시로 만들려 했다. 2인자로 행세하지만 그 권력의 원천을 황제의 신뢰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명나라 환관 위충현과 똑같았다.
물론 대재상이 오스만 제국의 정치 체계에서 황제는 이름뿐이고 모후와 대재상부의 여러 재상들, 그리고 군부와 총독들의 정치적 합의체라고 우길 수도 있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국왕 찰스 1세가 의회파와의 내전에서 패한 다음 대역죄로 처형된 것과 논리는 비슷했으나 실체는 정반대였다.
“황제폐하!”
이때 대재상부를 지지하는 예니체리를 격파하고 합류한 시파히 지휘관들이 말에서 내려 황제를 알현했다. 머스킷을 사용하는 한, 사르후 전투에서 증명됐듯이 야전에서는 기병이 총병보다 우세했다. 그러나 건물이 많이 세워진 이스탄불 시내에서는 시파히보다 예니체리들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이민호가 전에 봤을 때보다 시파히들의 갑옷이 얇아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파히들이 경제적으로 몰락한 탓도 있었지만, 화약무기가 천천히 전장을 지배하게 되면서 무거운 갑옷을 입을 이유가 점점 줄어든 것이 더 결정적인 이유였다.
“폐하! 언제든 돌격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충성스런 시파히들은 언제나 든든하구나!”
시파히 기병들이 황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적이 한 번도 없다지만 항상 충성스러운 것만은 아니었다. 중세 유럽처럼 영지를 나눠주어 기병을 전쟁에 동원하는 것이 티마르 제도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영지에서 세금만 걷고 뇌물을 써서 참전 의무를 면제받는 등 예니체리 못지않게 시파히의 군제가 몹시 문란해졌다. 또한 화약무기의 발달과 야전보다 공성전이 많아지는 전장 환경의 변화로 인해 기병보다는 총병이 훨씬 유용했다.
이 시대 오스만 제국은 구조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예전과 달리 영토가 늘어나지 않은 반면 16세기 후반에 인구가 폭증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인플레이션으로 살인적인 물가상승에 시달리고 고정 월급을 받는 예니체리의 불만이 커졌다.
공식 발행 은화에서 은 함량을 절반으로 줄이는 바람에 예니체리 병사가 봉급으로 받은 은화를 바다에 던지자 물위에 둥둥 떠다녔다는 소문이 돌았다. 또한 중앙정부에서는 직접 세금을 받는 영토를 늘리기 위해 시파히들의 영지를 꾸준히 환수했다. 이 모두가 군사반란이 일어나기 쉬운 조건을 만들었다. 예니체리와 시파히들이 서로를 원수 대하듯 하는 경쟁관계라지만 어느 쪽에서 먼저 반란을 일으켜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황공하게도 파디샤에 대한 나쁜 소문을 들었습니다만,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돼서 기쁩니다.”
“기뻐할 것 없다. 그 소문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파디샤가 무릎 꿇고 있던 시파히 지휘관의 터번을 벗겨 땅에 굴려버렸다. 황제를 수행하던 환관과 호위 선영이 동시에 손을 이마에 짚었다. 한참 동안 말을 잃고 있던 시파히 지휘관이 물었다.
“혹시 폐하께서 즉위하시면 제국의 국사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닐지 걱정됩니다.”
“잠깐! 파디샤께 아주 약간의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고산국에서 치료를 받아 지금은 증세가 심각하지 않다. 파디샤는 자신이 누구의 아들이며 오늘이 며칠인지도 아신다.”
이민호가 급히 나서서 시파히 지휘관들을 설득했다. 이민호가 제시한 두 가지 문제는 오스만 제국에서 정신병자에게 흔히 하는 질문이었다.
실제 역사에서 이스탄불의 종교 지도자 울레마들이 다시 황위에 오른 무스타파 1세에게 같은 질문을 했고, 무스타파 1세와 모후는 이 쉬운 질문에 대한 답변을 거부하고 스스로 퇴임했다. 답변을 했다가 틀릴 경우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터번이 벗겨지는 것이 약간 모욕적이긴 하나, 제국의 모든 관료와 군인을 노예로 둔 주인인 파디샤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노예들은 수치를 감수해야 합니다.”
“역시 시파히는 충신이다. 앞으로 시파히들의 터번을 벗기지 않을 것을 황제로서 약속하겠다.”
말처럼 쉽게 된다면 정신병자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다른 시파히 지휘관의 터번으로 향하는 두 손을 필사적인 의지로 막아냈다. 무스타파 1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간신히 내릴 수 있었다.
“파디샤의 증세가 호전됐음을 알 수 있겠습니다. 병마를 이겨내려는 폐하의 의지가 대단하십니다.”
“고산국 국왕전하께서 의사들을 보내 돌봐주신 덕택입니다.”
이민호와 무스타파 1세가 서로 공치사를 한 다음 황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간을 줬더니 아까보다 늘어난 20여 문에 달하는 대포가 발사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대재상이 위험을 무릅쓰고 괜히 이쪽으로 왔던 것이 아니었다.
“사격개...... 시!”
공격 명령을 내린 이민호가 급히 황제를 전술 차량에 태웠다. 예니체리들 사이에 배치된 대포에서 시뻘건 불길을 토해낸 것과 함께 허연 연기가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 따다다다당! 쾅!
- 까앙!
전술 차량에서 반격하는 동안 커다란 원형 포탄 대부분이 이민호가 탄 전술 차량으로 날아왔다. 몇 가지 눈에 띄는 깃발을 세움으로써 확실히 예니체리 포병대의 집중표적이 된 듯했다.
포탄 몇 발이 전술 차량에 정통으로 명중했으나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각종 테스트를 통해 장갑 두께를 정했다. 장갑판 무게를 줄이기 위해 최초로 복합장갑을 채용한 것이 바로 이 전술 차량이었다.
- 두두둥! 투두둥!
전술 차량에 탑재된 무기는 자동 유탄발사기 2문, 3인치 야포 2문, 나머지는 기관총이었다. 야포와 자동 유탄발사기가 예니체리의 포대를 차례로 제압하는 동안 나머지 기관총은 보병들을 노렸다.
발사를 마치고 머스킷에 화약을 장전하던 예니체리 대열이 총격을 받아 줄줄이 쓰러졌다. 기관총탄은 갑옷이나 투구를 착용하든 말든 사선상에 걸리는 모든 물체를 뚫고 뒤에 선 대여섯 명을 더 관통할 정도로 강력했다. 황제 오스만 2세를 멋대로 갈아치운 후 이스탄불 시내에서 마음껏 약탈하며 횡포를 부리던 예니체리 병사들은 압도적인 힘 앞에 무너져갔다.
“국왕전하! 이건 마치 전쟁이 아니라 학살 같습니다. 맙소사! 고산국 보병들은 수레 뒤에 숨은 채 응사도 안 하고 있군요. 제가 듣던 것보다 훨씬 강합니다.”
“파디샤! 세상이 바뀌면 적응해야 합니다.”
요란한 총성이 울리자 무스타파 1세가 손으로 귀를 가린 채 비명을 질렀다. 이민호는 기관총을 쏘는 선영이 신호를 보낼 때마다 탄창을 올려주었다. 특전대대원들은 예니체리들이 무장한 머스킷의 사정거리 바깥에서 오직 포탄을 피하기 위해 전술 차량 뒤에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교전 시작 몇 분 만에 예니체리 포병대가 전멸했다. 황궁 안에서 청동대포를 힘겹게 끌고 나오던 포병들은 전장 상황을 파악한 다음 다시 황궁 안으로 도주해버렸다.
겨우 2문밖에 안 되는 3인치 야포가 이번에는 총병 대열로 향하자 황궁 앞에서 재앙이 일어났다. 인마 살상용 신형 벌집탄의 위력은 갑옷을 입지 않은 총병 대열을 목표로 할 때 더욱 위력적이었다. 3인치 야포가 불을 뿜을 때마다 자그마한 강철 화살 수백 개가 예니체리 대열을 덮쳤다.
예니체리들은 머스킷을 들고 대열을 갖춘 자들이 절반, 도주하는 자들이 절반이었다. 바닥에 누운 자들은 아직 몇 백 명 되지 않을 때였다.
============================ 작품 후기 ============================
개똥이에게는 정치력 운운해놓고 결국 황궁 바깥에서부터 전투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