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95 98. 전란의 시대 =========================================================================
이민호가 호들갑을 떨었지만 이미 퇴근 시간이 지난 저녁이었다. 아직 대낮인 이집트에 연락해서 수에즈에 주둔 중인 스위스 용병 1개 연대를 배에 태워 출발시켰다. 그리고 아덴만과 홍해에서 해적 정기 토벌 작전 중인 해군 분함대와 해병 1개 대대 병력을 이스탄불로 보냈다.
본토에서는 다음 날 오전에 수송기와 여객기 12대를 동원해 특전대대 병력을 태웠다. 헬리콥터를 동원할 수 없어서 아쉬웠으나 목표가 이스탄불의 황궁에 국한될 경우 이들만으로 이미 충분한 전력이었다.
무스타파 1세 황제에게는 따로 여객기 한 대를 특별기로 내주었다. 후궁들과 환관들이 줄줄이 타는 사이 황제가 이민호에게 여러 가지 부탁을 했다. 누군 죽이고 누군 잡아 가두되 정중하게 대하고, 누구는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는 등등 피아 구분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다 들어주려면 작전 자체가 어려워질 것 같았다.
“제가 무력을 제공하겠지만 주요 인물들에 대한 처리는 파디샤가 직접 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제 친위 병력을 장악한 다음에는 그렇게 하겠지만 초기에는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아 걱정입니다. 저야 전에도 허수아비 취급을 당했으니까요.”
“아무리 허수아비 취급을 당했다 해도 황제는 황제입니다. 대세가 기울었다 싶으면 모두가 황제 편을 들 것입니다.”
이륙 직전에 개똥이가 항공대 기지로 달려왔다. 요즘 참모본부에서 근무하면서 전에 비해 외출이 자유로운 편이었다.
“아바마마! 아바마마께서 왕궁에 남으시고 위험한 원정에는 제가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어제 이미 결정된 일인데도 개똥이가 다시 건의했다. 이민호는 개똥이가 좀 더 어렸을 때 원정에 자주 데리고 다닐 걸 하는 후회를 아주 잠시 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이번 일에 동원될 병력이 해군과 항공대 외에도 육군 1개 대대와 해병대 1개 대대, 스위스 용병 1개 연대다. 이런 일은 온갖 데에서 갖가지 문제가 터져 나올 텐데 네가 지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장교는 부대를 지휘하는 직무를 맡은 사람입니다. 할 수 있습니다.”
“겨우 대위 주제에 잘난 척하는구나. 네 사관학교 동기 중에서 잘 나가는 몇 명은 벌써 소령이더라? 크크!”
“으윽! 그렇다면 전투는 지휘관에게 맡기고 정치적 판단을 제가 담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투보다는 오스만 제국의 여러 세력들에게서 합의를 이끌어 낼 고도의 정치력이 필요하다. 아직 너에게는 무리다. 남아서 어머니를 도와드려라.”
사실은 개똥이가 오스만 2세와 같은 실수를 반복할까 겁이 났다. 자기 목줄을 끊으려고 목숨 걸고 덤벼드는 상대에게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하면 패할 수밖에 없었다. 시무룩해진 개똥이의 어깨를 힘차게 두들겨주었다.
“소방차와 구급차, 인명구조용 사다리차 설계를 가장 먼저 진행하고 있다고 했지? 군용차량 중에서는 전투차량이 아니라 대형 유조차와 수송차, 장갑차량 운반차부터 설계한다고 들었다.”
“통치와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개똥이는 며칠 동안 심사숙고한 끝에 승용차를 생산해 일반 백성들이 사용하도록 하겠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외국에 차량 관련 기술이 노출될 것을 우려해 반대하는 사람들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논리적으로 설득했다. 군 장성들에게는 상용차나 상선에 비해 군용 차량과 군함에 적용되는 기술이 훨씬 앞선다는 점을 밝혀서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민호는 차도에 비해 인도를 높이며 배수구를 만들고 가로등을 설치하는 것 등을 조언해주었다. 개똥이는 도로 중앙에 화단을 만들어 상하행선을 분리해 교통사고를 줄이자고 제안했다. 그 외에 교통법과 운전면허 제도를 손보고 본토 도로변에 일정 거리마다 주유소를 설치했으며 각급 학교에서 도로교통 안전 교육을 실시하는 등 본격적인 자동차 생산 전에 많은 것을 준비했다.
최초로 자동차 보험 제도가 만들어졌다. 해상보험은 필요한데도 선택하지 않았고 기본 소득이 제공되는 고산국에서 생명보험이나 화재보험 등은 필요가 없었다. 의료보험과 연금제도도 없었다. 그러나 승용차나 화물차는 개인 재산이 될 것이므로 자동차 보험에 의무가입을 시키기로 했다.
“맞다. 너는 아주 훌륭한 군주가 될 것이다.”
“국왕이 아니라 군주라고 하셨습니까?”
“험! 험! 지도자는 멀리 봐야 한다. 사실 그리 멀지도 않았다.”
이민호가 개똥이의 세자 책봉에 그다지 열의가 없는 것은, 개똥이를 왕세자가 아니라 처음부터 황태자로 책봉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국제 구도에서는 명나라 황제가 제후의 후계자인 고산국 왕세자를 책봉해야 하는 식이라서, 명나라가 어서 붕괴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일로 우리가 얻을 이익은 무엇입니까? 혹시 각국 왕실로부터 신뢰를 얻기 위함입니까?”
“그것도 있지만, 바스라 남쪽 자그마한 황무지가 진짜 목적이다.”
“혹시 석유가 집중적으로 매장된 곳입니까? 그런데 지금은 페르시아의 영토가 아닙니까?”
“맞아. 원래는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을 중재해주면서 그 땅을 얻으려 했다. 그런데 오스만 2세가 페르시아와 휴전 조약을 체결하고 유럽으로 칼끝을 돌리는 바람에 구하기 어렵게 됐지. 거주하는 인구가 몇 십 명밖에 안 되는 지금 얻으려 한다.”
쿠웨이트의 원유 매장량은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라크의 절반밖에 안 된다. 그러나 단위면적 당 매장량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석유 외에는 경제적 가치가 거의 없는 땅이므로 주변 세력과 충돌하지 않으면서도 최대한의 이익을 얻기 위한 선택이었다.
“지금 당장 유전을 개발할 필요는 없을 텐데 아마 미래를 위한 선점이 목적인 것 같습니다.”
“고산국이 단순히 제국이 되는 것으로 나와 너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다. 고산국이 제국이 되는 순간, 고산국과 나머지 세계가 둘로 나뉘게 될 것이다. 현대와 근대로 말이다. 나를 존경해라, 아들아!”
“아바마마께서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부디 저에게도 할 일을 남겨주십시오.”
“국가 발전 단계에 따라 할 일이 많이 남았고, 공책에 다 적어놓았다. 내가 죽은 다음에도 네놈을 실컷 부려 먹어주마. 과로사나 당하지 마라.”
할 일이 많이 남았다는 말에 개똥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개똥이는 일 욕심이 많은 놈이었다.
고북에서 아부다비까지의 거리는 수송기와 여객기의 항속거리 내에 충분히 들었지만 기상이 악화될 경우 위험할 수도 있는 위치였다. 예전부터 공중급유기의 필요성이 제기됐으나 몇 가지 조작하기 어려운 부품 생산 문제를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
그래도 항속거리가 여유 있는 편이라서 카트만두에 건설된 임시 활주로를 활용할 필요가 없었다. 일반인들은 히말라야 등반대를 위해 카트만두에 활주로를 건설해준 것으로 알겠지만 모든 활주로의 일차 목적은 군사용이었다.
“주인님! 이스탄불의 황궁에 특전대대가 낙하산을 타고 내리면 멋질 것 같지 않아요? 무함마드의 승천 전설이 유명해서 무슬림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을 경외할 거여요.”
“선영아! 무슬림들은 무함마드 외에는 더 이상 예언자가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니 무엄하게 예언자나 천사를 사칭한다고 화낼지도 몰라. 모든 무슬림들이 들고 일어나면 곤란해.”
그보다는 인구밀집 지대에 낙하산 강하를 할 경우 병력 집결이 어려워 조직적인 전투를 수행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낙하산 강하 직후 병력이 모이기도 전에 농부들이 삽과 괭이로 공수부대원들을 때려잡은 사례가 꽤 있었다.
수송기들은 아부다비에 착륙해 급유와 긴급 정비를 마친 다음 다시 이륙했다. 레바논 상공을 지날 때 이스탄불 주재 대사관에서 긴급 연락이 왔다.
“황제를 없애달라고? 변덕이 심하군. 우리가 누명을 뒤집어쓸 우려가 있으니 대재상이 직접 서명한 문서로 정식 요청하라고 권해봐. 대재상이 황제 시해를 기도했다는 증거로 삼아버려야겠다.”
아흐메드 1세의 아들로서 무라트가 열 살, 이브라힘이 일곱 살이었다. 이들은 전 황제 오스만 2세의 형제로, 30살 넘은 무스타파 1세보다는 훨씬 다루기 쉽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스탄불에 접근했을 때 대사관에서 다시 통신이 들어왔다. 황제를 제거해달라는 요청은 대재상부가 아닌 곳에서 요청했다고 잡아뗀다는 것이었다. 고산국과 오스만 제국 궁정신료들은 당연히 서로를 믿지 못하고 있었다.
- 뚜우~ 임시 활주로에 착륙합니다. 안전띠를 확실히 메어 주십시오.
이민호가 탄 수송기가 황궁 서쪽 10km에 위치한 들판에 내렸다. 이스탄불 주재 대사관에서 대리인을 내세워 비밀리에 소유한 농장이었으며, 현대에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이 건설될 곳이었다.
수송기가 몹시 덜컹거리며 지상을 한참 달린 다음 이윽고 멈춰 섰다. 다른 수송기들은 이미 착륙해 있었다.
이민호는 수송기 뒤쪽에 적재된 특전대대 전용의 자그마한 전술 차량에 탔다. 승무원들이 차량을 구속한 쇠사슬을 풀고 수송기 뒤쪽을 연 직후 전술 차량이 수송기에서 빠져 나왔다.
무스타파 1세가 탑승한 특별기 한 대를 제외한 수송기마다 5인용 전술 차량 한 대씩을 토해냈다. 전술 차량 열 대와 특전대대만으로 황제를 호위하면서 10km 동쪽에 위치한 오스만 제국의 황궁을 점령해야 했다.
“사실 어려운 임무야.”
“저기 황제가 있어요.”
거대한 수송기에서 차량과 병력이 내리는 동안 환관들에게 둘러싸인 황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이민호가 창문을 내리고 소리 질렀다.
“파디샤! 후궁들은 이곳에 남겨두시고 신하 한 명만 데리고 이 차에 타십시오.”
“고, 고맙습니다.”
“출발합니다!”
황제와 환관이 좁은 뒷좌석에 타자마자 선영이 차량탑재 기관총을 잡고 차량을 출발시켰다. 운전병은 특별히 투르크어를 배운 호위로 지정했다.
다른 차량들은 이미 동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차에 타지 못한 특전대대 병력은 대사관에서 준비한 말을 타고 따라왔다.
말이 이스탄불 주재 대사관이지, 외교관 외에도 정보국 요원들과 육군, 해군 소속 무관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고산국과 대사급 수교관계를 맺은 웬만한 유럽 국가 궁성은 이런 식으로 유사시를 대비한 공략 작전이 준비돼 있었다.
“전방 500미터에 검문소가 있어요.”
“우리가 선두로 가자.”
이민호와 황제가 탄 전술 차량이 다른 차량들을 추월해나갔다. 기마대 50기 정도는 순식간에 쓸고 갈 수 있지만 총소리를 내면 황궁이 방어태세에 들어갈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기마대에게 황제 얼굴을 보여주기로 했다.
“멈추시오! 고산국 병력입니까?”
“그렇다. 파디샤가 이 수레에 타셨다. 길을 열어라!”
오스만 제국의 기마대가 전투 준비에 들어갔고, 전술 차량 기관총 사수들도 여차 하면 발사 준비를 갖췄다. 뒤에서 말을 탄 특전대대원들이 점차 가까워졌다.
“우리는 그런 명령을 받지 못했습니다. 황궁 방향으로 병력의 통행이 금지돼 있습니다!”
“그대들은 파디샤 무스타파 1세의 적인가, 충신인가?”
이민호가 창문을 열어주자 얼굴이 비쩍 말라 신경질적으로 생긴 무스타파 1세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황제의 얼굴을 알아본 기마대원들이 몹시 기뻐했다.
“우리 사파히는 영원히 파디샤의 충신입니다! 파디샤 만세!”
기마대의 열렬한 환영을 뒤로 하고 차량 행렬이 빠르게 달렸다. 기마대가 여러 곳으로 전령을 보내면서 특전대대 기마행렬 뒤에 합류했다.
한참 달리자 이번에는 기다란 머스킷을 든 보병들이 길을 막고 나섰다. 대재상부는 군사반란을 우려해 사파히와 예니체리 병력을 주요 도로에 교대로 배치한 모양이었다.
“파디샤께서 황궁에 입궐하신다. 어서 길을 비켜라!”
“대재상부에서 그런 명령을 받지 못했소! 통과하고 싶거든 먼저 대재상이 서명한 명령서를 받아오시오.”
예니체리들이 총을 겨누면서 전투 대열을 갖췄다. 그렇다고 이들이 정식 명령에만 복종하는 꽉 막힌 인간들은 절대 아니었다. 직접 황궁에 가서 대재상에게서 통과 허락을 받아올 생각도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황제가 가는 길이 예니체리에 의해 막혔다는 사실을 제국 전체에 알려 황제에게 수모를 주기 위한 꼼수를 부리고 있었다.
“파디샤가 이 수레에 타셨는데도 말이냐?”
“상관없소. 우린 직속상관의 명령만 받겠소.”
황제 무스타파 1세가 고개를 내밀어 확인시켜줬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이들 예니체리 병사들은 명목상 황제의 노예였으나 지금은 대재상의 피고용인, 혹은 동업자였다.
“역적이다. 쓸어버려!”
- 따다다다다당!
몸을 감출 수 없는 평지에서 보병 50명으로는 장갑화되고 기관총을 탑재한 전술 차량들을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예니체리들을 다 해치우기 전부터 전술 차량들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황궁으로 향하는 길을 달리는데 사방에서 기병과 보병이 차량행렬을 향해 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차량행렬에 도착하기 전에 기병과 보병이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창을 앞세운 사파히들이 말을 몰아 돌진하고 예니체리들이 머스킷을 쏘아대는 식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전진!”
언덕을 넘자 예전에 봤던 거대한 모스크와 첨탑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황궁 앞에는 대포 몇 문이 늘어서 있고, 예니체리 수천 명이 머스킷을 겨누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이런 상황에서 피아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