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93 98. 전란의 시대 =========================================================================
1622년 4월 22일 호르무즈 해협에서 큰 사건이 일어났다. 포르투갈이 100년 넘게 무역 거점으로 삼았던 호르무즈 섬이 페르시아 함대와 잉글랜드 동인도회사의 연합군에 의해 점령된 것이다. 포르투갈은 1507년 아폰소 알부케르케가 처음 상륙하고 오르무스 도시국가의 수도인 이 섬을 1515년에 점령해 속국으로 삼았었다.
페르시아 군의 사령관 이맘 쿨리 칸은 호르무즈 섬의 무역항을 파괴하고 바로 옆 굼부룬에 반다르아바스 항을 건설해 무역과 페르시아 해군의 거점으로 삼았다. 호르무즈 해협 건너편에 위치한 아부다비 항과 경쟁할 만한 무역항의 등장이었다.
“페르시아의 공격이 시작되기 직전에 포르투갈 상인들이 전 재산을 배에 싣고 아부다비로 탈출했습니다. 해협 중간에서 페르시아 군함들이 포르투갈 범선을 약탈하려고 했습니다만 저희 전대 함정들이 페르시아 군함을 위협해 포르투갈 범선 몇 척을 구해줬습니다.”
“잘했네. 호르무즈 요새를 지키던 포르투갈인들은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겠군.”
아부다비 경비 전대가 교대하면서 5월 초에 귀국한 전대장이 이민호에게 당시 상황을 보고했다. 강 건너 불구경이란 바로 이런 것을 뜻하는지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었다.
인도양에서 해적을 상대하기 위해 고산국과 포르투갈이 협조관계를 맺은 것은 사실이지만 해적 문제에 국한됐다. 인도와 페르시아 등 지상에 대한 포르투갈의 욕심으로 인해 다른 적을 상대할 때는 서로 구원해줄 의무가 없었다. 그래서 호르무즈 섬이 함락될 동안 고산국 해군 함정들은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포르투갈이 바스라에 욕심을 내다가 페르시아의 신경을 거슬린 모양입니다. 더 큰 문제는 포르투갈이 호르무즈와 바스라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점입니다.”
“지나친 욕심이 화를 부른 셈이지. 잉글랜드 동인도회사가 눈에 불을 키고 참전한다면 포르투갈이 탈환하기 쉽지 않을 텐데.”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의 합류지점 남동쪽에 위치한 바스라를 떠올린 이민호가 침을 꿀꺽 삼켰다. 바스라는 국제무역항으로 크게 성장할 지역이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남쪽과 남서쪽 해안에 위치한 쿠웨이트였다.
이민호는 이라크 지역을 점령할 생각은 없었지만 자그마한 쿠웨이트라면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의 관계를 이용해 얻어낼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거의 황무지였던 이 지역에 자그마한 어촌마을이 건설된 것은 겨우 1613년, 채 10년도 되지 않았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아부다비가 호르무즈 해협의 최대 무역항으로 성장할 것 같습니다. 전하의 의향에서 벗어난 상황 전개가 아닙니까?”
“그러게 말이야. 우린 석유만 채굴하면 그만인데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 아무래도 아부다비를 방어하려면 중대 병력만으로는 부족하게 될 것 같아. 그런데 대대 병력을 어떻게 교대로 주둔시키지?”
한때 오르무스 도시국가가 해군 함정 500척을 보유했고 페르시아 해군과 잉글랜드 동인도회사의 해군 전력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고산국 1개 전대 4~5척이면 방어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적이 지상으로 아부다비를 침공할 경우가 문제였다.
아부다비에 지상군 대대 병력을 3개월마다 교대 파병하려면 최소 연대 이상이 필요했다. 아부다비에서 생산하는 석유와 무역으로 인한 이익을 감안하더라도 주둔비와 병력 교대에 드는 비용을 생각하면 고산국에 확실한 손해였다.
물론 비용이 얼마가 들든 아부다비를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만수르의 재산은 그의 가문이 보유한 재산의 20분의 1도 안 된다는 이야기도 떠올랐다. 이민호가 그 지역 주민들을 모집해 용병을 고용할까 고민하는데 전대장이 제안했다.
“아부다비 주변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라도 무역항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사막에 사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아부다비는 군항 겸 석유 수출항으로 남겨두고 북동쪽 두바이를 무역항구로 개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큰 강이 있어서 잘하면 담수화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항구를 둘로 나누면 방어 부담이...... 아냐! 계속해보게.”
“무역항을 다른 곳으로 이전시키면 아부다비는 1개 중대로 충분히 경비가 가능합니다. 두바이는 용병을 고용하거나 부족장들을 시켜 지키게 하고 아부다비 경비 중대장이 통제하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좋아. 아주 좋아! 중대장이 총독 역할을 하게 되겠지만 지금도 비슷한데, 뭐 어때?”
두바이에서 석유가 나더라도 그리 많은 양은 아니라고 들었다. 그러나 그 적은 양의 석유만으로도 두바이는 대규모 건설 사업을 벌이고 중동의 금융 허브로 성장했다. 현재 두바이도 역시 고산국의 영향 아래에 있었고, 주민들은 자기들이 고산국 백성이라고 믿었다.
지금까지 방어 부담 때문에 점령지역을 최소화했지만 장기적으로 두바이는 물론 무인 지대인 카타르까지 영토를 확대할 필요가 있었다. 아부다비 주변 지역의 땅은 이미 얻었으나 제대로 된 통치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두바이로 무역항을 옮기면 아부다비 항의 방어문제가 확실히 해결될 것 같았다. 지금도 원유를 유조선에 실을 때마다 외국 상인이나 주민으로 위장한 적에게 화공을 받을 가능성 때문에 전전긍긍하던 차였다.
“전대장! 혹시 해군에서 전역하고 총독이 돼 볼 생각은 없나? 아부다비를 지키고 두바이를 건설하는 임무를 맡기고 싶네.”
“예? 저는 20년 넘게 해군 장교로 살아서 건설이나 행정은 잘 모릅니다. 그런 일은 전문화된 관리에게 맡기십시오.”
“행정의 기본은 사관학교에서 배웠을 테고, 어차피 행정 관료란 업무를 배워가면서 일하는 사람이야. 처음부터 익숙한 사람이 어디 있겠나?”
총독은 중앙관서의 참판이나 참의급 정도 예우를 받으며 군대 계급과 비교하면 최소 장성급이었다. 상황에 따라서는 총독이 장군이나 제독을 통합 지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총독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일단 전역하면 다시 군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새동래에서 그랬던 것처럼 군인 신분을 유지하면서 임시로 총독을 맡을 수도 있지만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서 지금은 무조건 민간인으로 총독을 임명했다.
“전하! 이런 식으로 인사를 하시면 제안자가 사라질 것입니다. 지금은 자기 직분에 만족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끄응!”
“인재 부족 문제가 상당히 해결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직 아닌 모양입니다.”
“이제 영토는 거의 고정됐지만 인구가 미칠 듯이 늘어나고 있으니까 항상 부족해. 알겠네. 대신 일계급 특진을 해주겠네. 다른 분야라도 국가 발전에 기여했다면 자격이 있지.”
“곤란하지만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페르시아 만의 사정을 잘 아는 전대장을 곱게 놓아줄 수는 없었다. 아부다비를 군항과 석유 수출항으로 역할을 제한시키는 대신 두바이 개발을 앞두고 구성한 연구조직에 전대장을 포함시켰다.
전대장 입장에서는 불만이 많겠지만 어느 조직이든 유능한 사람이 고생을 더하게 돼 있었다. 인사권자가 할 일은 고생한 사람이 일에 보람을 느끼도록 빠르게 승진시켜주는 것이었다. 전대장이 지금까지 전투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군사행정 개혁 분야에서 유능할지도 몰랐다.
4월 27일에 하이델베르크 남쪽에서 밍골스하임 전투가 벌어졌다. 신교도 군대는 만스펠트 장군과 바덴-둘라흐 변경백 게오르그 프리드리히가 지휘했고 가톨릭 군대는 틸리 백작이 지휘했다.
두 부대가 합류함으로써 신교도 군대가 약간 우세하게 끝났지만 이 전투는 열흘 후에 벌어진 빔펜 전투의 전초전에 불과했다. 전투 마차를 대규모로 동원한 프리드리히 변경백의 군대는 박격포를 쏘아 병력이 두 배나 되고 막강한 테르시오를 투입한 가톨릭 군대를 번번이 패퇴시켰다.
그러나 전투 마차 대열은 적뿐만 아니라 아군의 기동력마저 제한시키는 문제가 있었다. 결국 바덴군이 패주했으나 가톨릭 군대가 악착같이 추격해 인명피해를 대폭 늘렸다. 14,000명 중에서 12,000명 이상이 사상을 당한 바덴군은 30년 전쟁에서 더 이상 역할을 할 수 없게 됐다.
히말라야 등반대가 해발고도 8,586미터의 칸첸중가 주봉 등정에 성공한 다음 5월 초에 귀국했다. 활주로에 착륙한 비행기에서 등반대원들이 내리자 왕자빈과 혜영이 뛰어갔다. 얼굴이 시커멓게 탄 개똥이를 안고 울어대는 왕자빈과 혜영 뒤에 이민호가 뻘쭘하게 서 있었다.
“아바마마! 칸첸중가 정상 등정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수고했다. 다음에 등반하기 더 어려워질 것 같구나.”
“출발 전에 어머니께 허락을 받았는데도 이러시네요.”
“두 사람에게 네가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라. 그리고 이 문제는 네가 해결해라.”
항공대장 이면과 개똥이, 등반대원과 그 가족들을 승합차에 나눠 태우고 마치 종합경기장처럼 생긴 거대한 구조물로 향했다. 이동하는 동안에도 왕자빈과 혜영은 개똥이를 껴안고 펑펑 울었다.
“이곳은 마차 경주하는 곳입니까?”
“비슷해. 설명해도 이해하기 어려울 테니 직접 봐야 할 것이다.”
경기장 건물 바깥으로 포장도로가 길게 나 있기에 개똥이가 자연스럽게 의문을 품었다. 승합차에서 내려 건물 내로 들어가는 동안 굉음이 울려서 더더욱 궁금증을 유발했다.
이민호가 사람들을 이끌고 간 곳은 경기장의 귀빈석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타원형의 경주로에 납작한 차들이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저건 도대체 뭡니까? 승합차나 장갑차보다 작은 것이 화살보다 빠르게 달리는 것 같습니다.”
“화살보다 빠르게 달리는 게 맞다. 개똥아! 고산국의 과학기술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발전하고 있단다.”
커다란 바퀴가 차체 바깥에 달린 경주용 차들이 굉음을 울리며 질주하고 있었다. 포뮬러 원에 참가하는 차량과 비슷하게 생긴 경주용 차량을 생산한 것은 차량 제조 기술과 부품을 극한까지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괴하게 생긴 차량들이 차고로 들어가고 다른 차들이 출발선에 섰다. 같은 경주용 차량이라도 현대의 승용차와 비슷한 모양을 한 승용차들이었다.
“저건 비포장도로에서도 달릴 수 있겠습니다.”
“야지에서 빠르게 달리지는 못한다. 그런 건 용도가 다르지. 전 영토에 포장도로가 필요해.”
커다란 깃발이 내려가면서 승용차들이 일제히 출발했다. 단 몇 초 만에 시속 100km에 달한 차들은 계속해서 속도를 높였다.
“이런 훌륭한 기술과 생산 능력이 있는데도 활용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은 너도 알고 있겠지.”
“기관과 발전기의 비밀이 외국에 누설될까 두려우십니까? 외국과 기술 격차가 크게 벌어져서 수십 년 안에 따라잡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장기적으로 보면 기술이 외국에 누출되거나 외국에서 모방에 성공하기 마련이다. 지금도 여러 나라에서 우리 배나 장갑차를 베끼려는 시도를 하고 있지만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외국의 해군 함선에 기관이 장착될 경우 속도가 높아지고 항행거리가 대폭 늘어난다는 점이 가장 큰 걱정거리다.”
“해군의 규모가 작아 대서양 같은 큰 바다를 완벽하게 차단하기 어렵겠습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비행기와 전파탐지기를 만들었다. 아이슬란드를 영토에 포함시키고, 아일랜드의 독립을 도와주고, 에스파냐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대서양을 지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일반 백성들은 모르겠지만 지금도 바다를 지키기 위해 많은 비용을 지출하고 있는 셈이다.”
이민호가 고개를 돌려서 히말라야 등반대원들과 그 가족들을 살폈다. 마치 외계인에게 납치돼서 고도의 기술로 제작된 우주선을 구경하고 있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이면이 가장 먼저 최면에서 깨어났다.
“전하! 무엇이 걱정이십니까? 전하 덕택에 우리는 출발선 한참 앞을 달리고 있습니다. 외국에서 뒤늦게 추격해오더라도 기술 격차가 더욱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말이야.”
문제는 고산국의 앞선 기술이 고산국 내부의 필요에 의해 발명되고 점진적으로 축적된 것이 아니라 이민호 개인에 의해 갑자기 튀어 나왔다는 점이었다. 기술자들이 돕긴 했으나 앞으로도 지금 수준만큼 꾸준히 기술발전이 이뤄진다는 보장이 없었다.
“저 수레의 이름이 승용차라고 하셨습니까? 저 차들이 백성들의 실생활에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인간의 수명을 몇 배로 늘리는 효과를 볼 것입니다.”
“항공대장의 의견을 잘 들었다. 왕자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훌륭한 발명품이긴 하지만 국방에 도움 외에 위협이 될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조금 더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좋다. 나는 이 문제를 결정하지 않겠다. 개똥이와 이면 항공대장을 비롯한 젊은 세대가 이 기술을 공개할지 여부를 선택해라.”
자동차 산업은 에너지 산업과 제철, 금속 가공, 부품 산업, 운송업과 도로건설 등 다양한 후방산업을 발전시킬 파급력이 큰 산업이라는 설명을 일부러 하지 않았다. 말을 타거나 마차를 몰던 때와 비교해 문화와 생활 자체가 급변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민호가 이면과 동갑이라는 사실도 어물쩍 넘어갔다. 이면이 부친의 시묘살이를 돕는 동안에도 많은 공부를 한 사실을 이민호는 알고 있었다. 이면은 앞으로도 수십 년 더 국가를 위해 봉사할 준비가 된 사람이었다.
또한 이면은 개똥이가 국왕 직책을 수행하는 동안에 젊은 장교들과 함께 가장 강력한 지지 세력을 이끌어줄 사람이었다. 이런 식으로 이민호는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를 차곡차곡 해나갔다.
============================ 작품 후기 ============================
30년 전쟁이 유럽 여러 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만 주인공은 개입할 타이밍을 재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