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892화 (841/1,000)

00892  98. 전란의 시대  =========================================================================

의사와 간호사, 한의사 숫자가 충분히 늘어나자 그 동안 미뤄놓았던 의료체계를 전반적으로 손을 봤다. 잔병을 치료하는 1차 진료기관인 의원과 한의원을 동네마다 빠짐없이 개설하고, 보건소에 배치된 의사들이 넓게 흩어진 농어촌 마을들을 주기적으로 방문해 왕진을 실시하게 했다. 산모를 도와 아기를 받고 유아들에게 예방주사를 놓고 유사시 전염병의 확산을 막는 일을 이들 동네의원과 보건소 의사 및 한의사들의 책임과 권한 아래에 두었다.

그리고 지역마다 종합 병원을 세워 중병 치료와 수술을 담당시켰다. 또한 의대에 대학병원을 부설해 2차 진료 기관 겸 의료진의 교육을 담당하도록 했다. 총상과 화상, 정신병 등을 다루는 특수 전문 병원도 지역마다 설립하고 치과도 이원적으로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국무회의에는 대신들 외에 아직 왕자 신분인 개똥이와 왕자빈도 참가했다. 왕자빈은 무연화약 제조의 중대성을 인식해 육군 소령을 끝으로 전역했다. 왕자빈이 무연화약을 개량할 여지가 있다고 건의해서 자동 소화장치가 완비된 비밀 실험실을 차려주었다.

“아바마마! 현재 모든 병원은, 심지어 동물병원도 국영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의료기관의 운영 재원은 전매제에 가까운 담배 판매 대금으로 대부분을 충당한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유럽과 인도에서 잎담배 재배가 확산될 경우 장기적으로 담뱃값이 하락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재원이야 담배가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마련하면 된다. 왕자가 주장하는 바는 무엇이냐?”

“재원 문제를 해결할 겸, 의학발전을 위한 제안입니다. 1차 진료 단계의 의사와 병원들을 민영화시켜 경쟁시키는 것이 의학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알려진 것보다 병원 유지비가 많이 든다는 문제가 있다. 국가가 내주든 환자가 내든 상관없이 치료비나 약값을 더 많이 받아내려고 의사가 과잉진료를 하거나, 의사가 사람 목숨을 가지고 장난치면 어떻게 하려고?”

인간의 몸에서 갑상선이나 쓸개를 제거하면 평생 특정 약품을 복용해야 한다. 만약 제거 수술이 반드시 해야 할 의학적 조치가 아니고 단지 비싼 약값을 장기적으로 받아낼 목적으로 실시됐다면 환자는 멀쩡한 장기를 떼인 채 평생 육체적, 경제적 고통을 받게 된다.

차트 위조 등은 현대 의학계에서 흔히 의심받고 있는 비리의 일부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의료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유족들이 승소하기는커녕 기소율 자체가 낮았다. 모든 의료행위에서 의사의 양심과 실력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의사들이 설마 그러겠습니까?”

“돈이라면 환장하는 인간들이 흔한데 의사라고 해서 성인군자만 있으라는 법이 있겠니? 더 심한 예를 들어 보자. 의사가 임신한 여성의 자궁에 난 작은 혹을 급히 제거하는 수술을 해야 한다면서 태아를 적출한다면 임부와 남편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의사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만한 의학 지식이 일반인들에게 있을까?”

“에, 없습니다. 그런 일이 있다면 매우 심각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치료비나 약값을 올려 받기 위해 과잉 진료를 하지 못하게 하려면 의사들을 경제적인 문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월급쟁이 의사가 나날이 발전하는 의료 기술을 따라잡는 노력을 소홀히 할 가능성은 분명히 있었다.

“병원을 국영으로 해도 긴 시간의 교육과 실습을 받은 다음 현업에 배치되기에 의사들 수준이 떨어질 염려는 별로 없다. 지금도 우수한 인력인 의사들이 다른 직종보다 많은 보수를 받고 환자와 가족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고 있다. 앞으로 의료진이 좀 더 확충된다면 7년이나 십 년 단위로 일 년씩 의과대학에 배치해서 새로운 의료기술을 배울 시간을 주는 방법을 연구 중이다.”

“그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의사들 숫자가 더 늘어나면 종합병원 의사들도 조만간 오후 일곱 시 이전에 퇴근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환자들이 병원비가 없어 각종 질병으로 고통 받거나 죽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의사들도 다섯 시에 퇴근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의료 인력의 확충이 가장 시급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개똥이는 생각나는 것을 일단 입 밖으로 쏟아내는 버릇이 있었다. 개똥이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면 생각을 더해보겠지만 국왕인 이민호를 믿고 의문점을 바로 묻는 것이었다. 이민호는 그것을 전혀 문제 삼지 않았지만 왕자빈은 불안해서 그런지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한숨을 쉬시오? 거울을 봤소? 악!”

개똥이가 당연히 왕자빈에게 꼬집혔다. 그 직후 혜영이 싸늘한 표정을 짓자 왕자빈이 쩔쩔맸다.

개똥이가 왕자빈이 가진 여러 가지 매력에 빠져서 몇 년씩이나 쫓아다녔겠지만 동양 여자들이 흔히 그렇듯 눈이 가늘어서 대단한 미인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 이민호가 며느리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봤다.

“얼굴형이나 눈코입이 오목조목 예쁘게 자리 잡았구나. 코는 오뚝하고 입술이 붉은 것이 무척 건강해 보이는구나.”

“부끄럽사옵니다, 전하.”

왕자빈이 얼굴이 빨개진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왕자빈은 장교로서 몸을 단련했고 사관학교 재학 시에는 산악부에서 활동했기에 몸매는 그야말로 탄탄했다. 얼굴은 반대로 무척 동안이었다.

“제 마누라입니다, 아바마마. 그만 보세요.”

“시끄럽다! 넌 내 아내의 젖가슴을 빨면서 자랐는데 나는 네 아내의 얼굴도 못 보느냐?”

“어머님이 젖이 부족해서 유모 엄마들 젖을 더 많이 먹었다는데요?”

“장남이라 네 어미의 젖이 부족했던 게 아니라 네가 욕심이 많아서 모자랐던 거다.”

한참 혀를 차다가 다시 왕자빈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봤다. 개똥이의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것을 잠시 즐긴 이민호가 원하는 목적을 밝혔다.

“여기에 왕자빈의 눈이 조금만 더 커진다면 훨씬 미인이 될 것 같다. 조만간 세자가 될 왕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예? 왕자빈은 지금도 충분히 미인입니다. 왕자빈의 얼굴에 칼을 댈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특히 유럽인들은 고산국 여성의 가느다란 눈이 매력적이라고 합니다.”

“얼씨구? 내 아들답게 네놈도 팔불출이구나. 당사자인 우리 맏며느리는 어떻게 생각해?”

현재 언청이, 구순구개열에 한해서 대부분 환자가 성형수술을 받고 있었다. 유아기에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안전한 수술 방법과 마취법이 최근에 완성됐기에 성인 여성들도 많이 하는 수술이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수술을 받은 사람들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쌍꺼풀 수술은 안전한 몇 가지 시술 방법이 이미 개발된 지 오래였다. 그러나 필수적인 수술이 아니고 몸에 칼을 대는 것을 껄끄러워하는 유교 관념 때문에 시술을 받는 사람이 극히 드문 편이었다.

치과 전문병원에서 시술하는 치아교정 외에 양악수술은 언청이 수술과 비슷하게 외모 개선 효과가 높을 것으로 기대했다. 양악수술은 외모 개선보다는 환자를 만성편두통과 척추 관련 합병증에서 해방시켜준다는 점에서 더욱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각종 부작용 때문에 양악수술은 시술은커녕 연구마저 지지부진했다. 안전한 시술법이 개발된다면 합스부르크 가문에 큰소리칠 수 있을 것 같아 국가 차원에서 지원해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제 눈이 가늘어서 못 생겼다고 왕자마마께 구박을 받은 지 십 년째이옵니다. 쌍꺼풀 수술은 매우 간단히 끝나고 후유증도 없다고 들었으니 수술을 받겠사옵니다.”

“아니 되오! 내가 그대보다 하나라도 잘난 것이 있어야 하지 않소?”

“왕자마마께서는 그리 잘 생긴 얼굴도 아니신데요?”

“사랑싸움은 둘이 있을 때 하도록 해라. 아가! 수술 전후에 각각 사진을 찍어 광고로 써도 되겠니?”

“부끄럽지만 국가시책이라면 당연히 협조하겠습니다, 전하.”

왕자 부부가 참석한 덕에 국무회의가 오랜만에 화기애애하게 진행됐다. 그리고 흑사병이나 말라리아를 비롯해 각종 전염병의 위협에서 벗어나 의료계가 어느덧 미용을 위한 성형수술로 영역을 넓혀갔다. 이민호에게 쌍꺼풀 수술은 성형수술 축에 끼지도 못하지만 이 시대에는 상당한 거부감이 있어서 크게 유행하지는 않았다.

2월에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 1세가 잉글랜드 의회를 해산했다. 세금을 걷기 위해 소집한 의회인 만큼 의회가 세금징수에 반대하면서 국왕에게 필요 없는 기관이 되었으니 해산은 피할 수 없었다.

3월에 등반대장 이면과 왕자 개똥이를 비롯해 14명이 비행기를 타고 히말라야로 떠났다. 이들은 4월 중순에 칸첸중가에 도전할 계획이었다. 이민호를 비롯해 혜영과 맏며느리가 항공대 기지에 나와 개똥이를 배웅했다. 왕자빈의 쌍꺼풀 수술은 기대한 것보다 훨씬 성공적이어서, 웬만한 후궁들을 젖히고 단번에 고산국 최고의 미인으로 등극했다.

“우리 맏며느리는 장교 출신이라서 그런지 참 씩씩한 것 같아.”

“주인님은 아직도 여자를 모르세요. 며늘아기가 겉보기에는 저래도 속으로 울고 있을 걸요?”

“그런가? 어! 혜영이, 울지 마! 별로 위험하지 않다니까?”

히말라야 14좌 등정에 도전하는 등반대의 올해 목표는 해발고도 8,126미터인 낭가파르바트였다. 그러나 이민호가 어쩐지 익숙한 이름에 꺼림칙함을 느끼고 다른 산에 먼저 도전하라고 강력히 권했다. 이민호의 말을 들어서 나쁠 것은 없기에 등반대는 좀 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는 해발고도 8,586미터의 칸첸중가 주봉을 대신 선택했다.

“히말라야에 다녀올 때마다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서 와요. 신문 기사를 보면 수천 미터나 되는 수직 절벽을 오르는 건 흔한 일이래요. 제발 그만 두게 할 수는 없나요?”

“충분히 훈련을 받았어. 그리고 날씨가 좋은 날을 기다렸다가 산소통을 매고 오르니까 큰 위험은 없을 거야.”

최초의 무산소 등정이라는 영광은 나중에 히말라야에 도전할 산악인들을 위해 남겨두었다. 인류 역사상 첫 번째로 도전하는 등반대인 만큼 안전한 등반이 우선이었다.

후원의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데 갈라티아 궁녀들이 새로 후원을 가꾸게 된 우크라이나 궁녀 셋을 데려왔다. 수영복을 입고 온천에 먼저 들어온 둘은 몸이 아주 늘씬하고 예뻐서 이민호가 물었다.

“너희들은 열아홉이 안 됐겠구나?”

“예, 전하. 저는 열일곱, 카테리나는 열여섯이에요.”

“겨우 몇 달 사이에 말을 많이 배웠구나. 잘했다.”

이민호가 화관을 쓴 우크라이나 궁녀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둘이 헤헤 웃었다. 노예로 끌려와 걱정을 많이 했다가 후원과 궁궐에서 편하게 지내면서 안심한 것 같았다.

“그래. 둘은 이만 숙소로 돌아가거라.”

“네? 왜요? 저희들도 대왕님을 잘 모실 수 있어요.”

“그런 건 조금 천천히, 나중에 해도 돼.”

가슴과 엉덩이에 살집이 붙어 콜라병 몸매인 궁녀가 눈앞에 있는데 날씬하고 예쁘기만 한 어린 궁녀들에게 눈길이 갈 리가 없었다. 어린 궁녀들이 토라지기 전에 입맞춤을 한 다음 떠나보냈다. 그리고 착한 몸매의 궁녀를 가까이 불렀다.

“이름이 무엇이냐?”

“옥사나라 하옵니다, 전하. 나이는 열아홉입니다.”

“교육은 다 받았겠지?”

“며칠 전에 드디어 제 이름을 내명부에 올렸습니다, 전하.”

내명부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올렸다면 교육은 물론 건강 검진까지 다 끝났다는 뜻이 된다. 내명부의 수장인 혜영이 순서를 정하겠지만 이민호가 원한다면 언제든 안을 수 있었다.

“살결이 참 매끄럽구나.”

하얗고 반짝이는 피부를 타고 이민호의 손이 슬쩍 움직인 직후 위쪽 수영복 끈이 풀리며 물살을 따라 흘러갔다. 그리고 사람 머리만 한 하얀 것 두 개가 물속에 철렁 드러났다.

“어느 쪽이 얼굴인지 모르겠다. 아! 초록색 눈이 달린 곳이 얼굴이고 분홍색 유실이 달린 곳이 가슴이구나. 예쁜 것을 손으로 가리지 마라.”

얼굴이 붉어진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옥사나를 잡아당겼다. 이런 미인을 황제나 황자의 후궁 후보에서 탈락시킨 오스만 제국 황실의 미적 기준이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175cm나 되는 키를 감안한다면 옥사나와 다른 궁녀들이 불합격한 이유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시대 기준으로 지나치게 큰 탓이었다. 명나라의 경우 황후를 간택할 때 적정한 키보다 크거나 작으면 후보에서 무조건 탈락했다. 황후의 키가 지나치게 크거나 작을 경우 황제의 위엄을 깎아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민호!”

“응? 왜?”

옥사나가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이민호를 이름으로 불렀고, 이민호는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온천 주변을 경비하는 호위들이 살짝 고개를 돌려 옥사나를 본 다음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경계 방향을 주시했다. 함께 온천에 들어온 갈라티아 궁녀들만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갓 후궁이 된 여자가, 그것도 아직 승은을 입지도 못한 주제에 군주를 이름만으로 부르면 인상적이지 않나요?”

“그래. 나를 이름으로 부른 후궁은 네가 처음이야. 하지만 옥사나 넌 용모만으로도 충분히 인상적이다. 그리고 다른 문화권에서 살다 온 사람이라면 고산국 관습을 잘 모르고 나를 이름만으로 부를 수도 있지. 뭐 어때?”

“아이, 참! 휴렘 술탄 흉내를 내본 건데 전혀 효과가 없네요. 남자가 세상을 지배하지만 그 남자를 여자가 지배한다는 말이 있어요.”

“아! 옥사나가 우크라이나 출신이니까 휴렘 술탄을 잘 알겠구나. 왕비 자리에 도전해보려고? 힘들 텐데.”

휴렘 술탄은 우크라이나 지역 정교회 사제의 딸로 태어났다. 성인이 될 시기에 노예로 잡혀 오스만 제국의 하렘에 진상됐다가 궁중암투 끝에 쉴레이만 대제의 정식 배우자, 황후가 된 여자였다. 쉴레이만 대제의 후계자로 내정됐던 무스타파와 대재상 이브라힘 파샤를 모략으로 죽이는 등 자기 아들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끝내 성공했다.

“웬만한 군주라면 이런 말을 하는 저를 제거할 생각부터 했을 텐데 국왕전하는 전혀 예상 밖이에요. 앞으로 제가 낳을 왕자님이 고산국의 국왕이 될 가능성은 없겠지요?”

“응. 전혀 없어. 그러니 널 제거할 필요도 없지. 권력을 갖고 싶으면 세자의 후궁으로 지원하지 그랬어? 옥사나처럼 매혹적인 여자라면 분명 세자가 될 왕자 놈의 눈에 띌 거야.”

“여자들에게는 왕자보다 왕이 훨씬 매력이 있어요. 그리고 국왕전하는 보통 왕이 아닌 건국왕이시잖아요? 저는 3대 국왕의 어머니보다는 고산국 건국왕의 여자가 되는 선택을 할래요.”

이민호 위에 올라탄 옥사나가 밑으로 손을 내려 더듬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몸을 힘겹게 결합시킴으로써 선택을 완성했다. 옥사나 혼자서 다 해놓고도 아프다고 울고불고 난리였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