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887화 (836/1,000)

00887  98. 전란의 시대  =========================================================================

조선에서 모친의 시묘살이를 마친 이순신이 돌아왔다. 3년 동안 시묘살이하는 부친을 도운 장남 이회와 막내 이면도 함께 돌아와 원래 자리인 해군 작전부장과 항공대장으로 원대 복귀했다.

“정려를 세워주셔서, 으흠! 감사합니다, 전하.”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형님. 당분간 자택에서 머물며 건강을 추스르십시오.”

조선 조정에서 그러는 것처럼, 시묘살이 3년을 마친 이순신의 저택 앞에 효자문을 세워주었다. 충효를 강조하는 조선에서도 3년 시묘란 그만큼 힘든 일이었다. 칠순이 이미 넘은 이순신에게 명나라와 조선, 고산국과 오스만 제국에서 책봉한 군호 외에 효자라는 칭호가 덧붙었다.

대명 구국공(九國公) 수군도독부 좌도독 겸 흠차 제독 절강 복건 광동 고산 조선 유구 섬라 등처 군무 방해 어왜총병관, 조선국 선무공신 덕풍부원군 대광보국숭록대부 원임 경상전라충청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고산국 여송 공작 해군 총함장 겸 추밀원 상임의장, 오스만 제국 알리 파샤 해군 연합함대 총사령관 겸 이집트 총독, 에스파냐 북 루손 공작 겸 누에바 에스파냐 연합함대 총함장이 현재 이순신의 공식 직함이었다. 세계 어딜 가든 군인으로서 최고로 대우 받을 만한 다양한 직함을 보유했다.

이순신이 천수를 누린 다음에는 여기에 더해 서너 나라에서 각종 증직이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물론 부인과 부모, 조부모에게도 추증이 이루어진다.

“제 나이에 효자라는 칭호가 덧붙으니 몹시 민망합니다.”

“효자는 나이가 몇이든 상관없이 국가 차원에서 예우를 해드려야 마땅합니다. 말로만 충효를 부르짖으면서 부모의 삼년상도 제대로 치르지 않는 썩은 선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렵게 삼년상을 마친 분께 효자 정려를 세워드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 문제는 감사히 여깁니다. 그런데 제가 이제 나이가 들고 건강이 나빠져서 더 이상 현직에 종사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총함장 직위를 이만 내려놓을까 합니다.”

이순신이 1545년생이니 어느덧 76세에 이르렀다. 이만 쉬면서 노후를 편히 보내도 충분할 만큼 오래도록 국가에 봉사하고 전쟁 때마다 전공을 세웠다. 이민호가 섭섭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서운해 하지 마십시오, 전하. 저보다 젊은 사람에게 해군을 맡겨도 충분합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전하께서 이룩하신 대업에 저도 작게나마 거들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60대라면 몰라도 이미 70대 중반을 넘어선 이순신에게 더 이상 국가에 대한 봉사를 요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순신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렇게 하세요. 다만 추밀원 상임의장 자리는 유지하고 계십시오.”

“예? 그 직함은 공작이나 파샤처럼 명예직이 아니었습니까?”

“일 년에 겨우 며칠 열리는 추밀원입니다. 개회식 때 얼굴만 비쳐주세요.”

“어명이라면 받들겠습니다. 하오나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이순신의 장남부터 막내, 조카들까지 대부분이 고산국으로 이주했다. 장남 이회는 조선에서 문과를 응시하다가 이면이 설득해 지금은 고산국 해군 사령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회와 사촌 형제들은 임진왜란 때 삼도수군통제사 시절의 이순신 밑에서 갖가지 궂은일을 도맡았었기에 해군 업무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다만 가장 어린 서자 훈과 신은 조선에 남아 무관으로 출세 중이었다. 이순신 가문 전체가 한 사람씩 고산국으로 옮기는 것을 불안하게 지켜보던 조선 조정에서 뒤늦게 훈과 신 형제를 붙잡아 벼슬을 내렸다. 조선에 남아 선산을 지킬 혈족이 필요하고 조선 조정에서 훈과 신에게 섭섭지 않은 대우를 하기에 이순신도 문제 삼지 않았다.

“한 가문이 국가의 중요한 직책 여러 곳에서 봉사한다면 물론 가문의 입장에서는 영광이겠지만, 전하께서는 군벌이 출현할 가능성을 경계하셔야 합니다.”

“형님께서 뭘 걱정하시는지 알겠습니다만, 조선에서도 전의 이 씨나 평산 신 씨, 진주 류 씨, 능성 구 씨 같은 무관 명문가가 있지 않습니까? 명문 무관 가문을 경계하기보다는 대대로 우대하는 정책을 취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형님 가문에서 여러 분들이 무관으로 봉사해주신 데 대한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형님의 가문이 앞으로도 영원히 왕실과 협조관계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해주 오 씨는 조선에서 문벌로 이름 높았으나 고산국에서는 오응태와 오응정이 각각 육군과 수군에서 이름을 드높였다. 이순신의 첩 해주 오 씨의 동생들과 서출 신분인 친인척들은 고산국에 이주해서 주로 해군에서 활약했다. 같은 해주 오 씨로서 이민호의 자형인 오윤겸은 현재 첨지중추부사로서 조선 조정에서 봉직 중이었다.

그 외에 계복과 감동, 감불의 자식들이 자라나 군문에 들어섰다. 국성인 고 씨 성을 사사받은 세 장군의 후예들은 이순신 가문과 함께 고산국 왕실의 친위 세력을 형성할 것으로 기대됐다.

물론 고산국에서 군 인사는 비교적 공정하게 행해지는 편이었다. 하지만 현대 대한민국 국군에서 장성으로 자주 진출하는 몇몇 가문이 두드러지듯이 출신 가문이 출세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전하께서는 저 하나만이 아니라 가문 전체에 충성을 요구하시는군요.”

“그래서 섭섭하십니까?”

“아닙니다. 각자 알아서 직업을 선택하겠지만, 무관이 될 아이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실제 역사에서 이순신의 후예들이 적성과 취향을 불문하고 거의 강제로 무관이 됐듯이, 고산국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됐다. 왕실과 덕수 이 씨 가문이 혼인관계로 엮이지는 않았지만 그 이상으로 두터운 신뢰 관계가 쌓였다.

명나라에서 국혼을 맺자는 제의가 와서 이민호를 무척 당혹케 만들었다. 태창제 주상락이 태자 시절인 1614년에 태자비 곽 씨가 사망했으나 만력제가 무관심으로 일관한 탓에 태자의 계비를 들이지 못했다. 태창제에게는 자식들이 이미 많았고, 제국 전반에 걸쳐 산적한 문제가 많아 황제로 즉위한 후에도 황후가 빈자리로 남아 있었다.

주상락에게는 자식 7남 10녀와 후궁인 선시들이 생존해 있었다. 원래 역사에서는 자식들 17명 중에서 10명이 어렸을 때 죽을 운명이었지만 의학이 발달한 고산국에서 자란 덕택에 죄다 살아남았다. 고산국 건국 초기의 국시가 애를 많이 낳자는 것이었기에 아기나 어린아이가 죽는 것을 국가적으로 용납하지 않았고, 그래서 의학 중에서 특히 소아과가 발달했다.

정식 태자비인 효원정황후나 효화태후, 효순태후는 태창제 즉위 전에 이미 사망했다. 효원정황후는 태창제가 즉위한 후에 황태자비 곽 씨에게 내린 시호였다. 효화태후로 추증된 재인 왕 씨는 천계제의 모후였고, 효순태후가 될 숙녀 류 씨는 숭정제의 모후로서 나중에 태후로 추증된다.

“국왕전하! 저희들이 모실 고산국 공주님은 조선처럼 세자의 후궁도 아닌 황제폐하의 반려, 만백성의 어머니인 황후가 되실 분입니다. 황후폐하께서는 대명제국과 고산국의 우애를 상징할 것입니다.”

“영광이긴 하지만, 대명제국에는 황후를 간택하는 절차가 따로 있지 않소? 그리고 황후도 부마처럼 고관대작이나 왕실이 아니라 서인의 가문에서 뽑는 것이 관례라고 알고 있소.”

명나라에서 황후 간택령이 내려지면 각 성에서 처녀 4천 명에서 5천 명을 골라 황도로 보낸다. 수십 단계에 걸쳐 후보자들의 건강과 인성을 검사하고 엄밀한 기준 아래 선택해서 최종적으로 후보 3인을 고른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황제가 한 사람을 황후로, 나머지 두 사람을 황비로 삼는 것이 명나라의 황후 간택 제도였다.

명나라 기록에 남은 황후의 부친에게 후나 백 같은 관작이 붙었다 해서, 처음부터 고관대작들의 딸이 황후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황제의 장인이 된 다음 후(侯)에, 태자비의 장인이 된 다음 백(伯)에 봉해지기 때문이다.

“당금 황상께서 태자비를 간택하셨던 20년 전에 이미 간택령을 써서 말입니다. 혹시 싫지는 않으시지요? 국왕전하께서는 고산국 공주님들에게 25세가 넘으면 후처 자리나 알아보라고 공언하셨습니다. 마침 아주 좋은 후처 자리가 났습니다. 자그마치 황후입니다.”

왕도에 칙사로 온 명나라 태감이 실실 웃었다. 고산국에 처음 와서 멋모르고 행패를 부렸다가 혼쭐 난 환관들과 달리 이 늙은 환관은 고산국 사정을 꽤나 자세히 알고 있었다. 당연한 것이, 주상락의 자식들을 돌보던 환관으로서 고산국에서 오래 생활했기 때문이었다.

조선 세자의 후궁으로 공주를 시집보낸 마당에 대명 황제의 황후 자리를 거절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이민호는 거절할 명분이 당장 생각나지 않아 이마에 손을 짚고 고민했다. 그 사이에 태감이 미운 소리만 골라서 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소신이 보기에 백인 후궁들의 소생은 용모가 지나치게 튀는 편입니다. 브루나이나 수라바야 등 동양 출신 후궁들의 소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쪼록 조선이나 여진족 후궁 소생의 공주님을 대명의 황후폐하로 옹립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황상께서는 과분하게도 과인과 동기간이라오. 그럼 내 딸은 황상의 조카뻘이 되오.”

고산국 공주를 황후로 세울 경우 족보가 꼬인다는 문제를 이민호가 제기했다. 그러나 환관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즉각 답했다.

“전혀 상관없습니다. 황법에서는 황제와의 관계가 최우선으로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국혼을 맺으면 전하께서는 황제폐하의 매형이 아니라 장인어른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좀 생각해봅시다. 으으! 공주들의 혼처가 왜 다 이 모양이야!”

“예? 방금 뭐라고 하명하셨습니까?”

“아무 것도 아니요.”

고산국 공주들은 뛰어난 지혜와 아름다운 용모로 유명했다. 일례로 루스 차르국에 시집간 마르그레타는 미모와 지혜, 그리고 자애로움으로 백성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고산국 자체가 부강해서 외국 황실이나 왕실의 결혼상대로 부족할 게 없었다.

그래서 유럽 왕족이나 귀족 영주들은 물론 오스만 제국 황제나 인도 무굴제국 황제가 청혼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공주들은 고국에서 너무 멀다는 이유로 모조리 퇴짜를 놓았다. 비행기를 타면 하루에 도착할 수 있으므로 이는 고산국을 떠나기 싫어서 내세운 변명이었다.

결국 이곳저곳 다 퇴짜를 놓고 지역에 따라서는 공주들 체구가 너무 크다고 퇴짜를 맞다 보니 이런 혼처만 남았다. 조선에 시집간 공주 지은도 고산국과 거리가 가까워서 승낙한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렇다고 친정에 자주 올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명제국 황제의 배우자인 황후라면 천하 어느 여인에게도 결코 부족한 자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국왕전하께서는 고산국 공주 저하의 배우자는 공주 저하께서 직접 간택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국왕전하께서 이토록 고민하시는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그야 당연히 명나라가 조만간 망할 것으로 봤기 때문이었다. 이민호는 딸이나 외손주들이 망국의 황후나 황족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태창제의 자식들이 이미 장성했기에 공주 소생이 적장자가 된다 해도 황제가 될 가능성이 적었다. 오히려 새 황제에게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가능성이 높았다.

“당금 황상께서는 몹시 훌륭하신 분으로서 즉위 초부터 성군이라는 칭송을 받고 계시다오. 하지만 도교에 심취하셔서 몹시 불안하다는 문제가 있소.”

“황상께서 선단이니 선약이니 하는 황당무계한 약을 구해서 드시는 문제가 분명 있습니다. 아마도 옥체를 보하시려는 목적이 아닌가 합니다.”

고산국 의대 출신 주치의가 아무리 진언을 해도 소용없었다. 황제는 도사들이 만들어 바쳐서 성분이 정체불명인 선단의 복용을 멈추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주치의는 황제가 복용하는 선단의 일부를 잘라 고산국 왕립의과대학에 꾸준히 보냈다. 예상했듯이 선단의 정체는 각종 세균에 오염된 최고급 약재와 수은과 납을 비롯한 중금속 덩어리였다.

“옥체를 보하기는커녕, 망극한 말씀이지만 자칫 요절하시게 생겼소. 즉위하실 때도 과인이 그토록 진언했건만 황상께서는 제국을 바로 세우기 위해 빠른 시간 내에 선인이 되고 싶으셨던 모양이오.”

“그렇게 심각한 상황인 줄 몰랐습니다. 고산국의 발전에 자극을 받아 초조해지신 모양인데, 너무 위험합니다. 황상께 선단의 복용을 재고해달라고 진언을 올리겠습니다. 황상께서 건강을 회복하신 다음에 다시 국혼을 추진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때 알현실 문이 열리며 호위가 쪽지를 들고 급히 들어왔다. 쪽지를 받은 선영이 놀란 얼굴로 즉시 이민호에게 바쳤고, 이것을 읽은 이민호가 벌떡 일어났다.

“태감이 진언할 기회가 없을 것 같소. 하늘이 무너졌소이다.”

“예에에? 황제폐하아~”

태감이 북쪽을 향해 절을 두 번한 다음 넋 놓고 통곡했다. 태창제가 어렸을 때부터 키우다시피 하고 부황 만력제로부터 괄시를 받을 때도 성심으로 주인을 모셨던 태감에게는 실로 하늘이 무너질 일이었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황태자로 살았던 태창제는 즉위 일 년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실제 역사인 재위 29일보다는 훨씬 길게 제국을 통치한 셈이지만, 역시나 단명에 그친 불행한 군주였다. 만력제가 망쳐놓은 제국을 제 위치로 되돌리기 위해 노력했고 성군이 될 가능성을 내비친 건 사실이지만 통치 기간이 너무 짧았다.

============================ 작품 후기 ============================

명나라는 이때부터 막장으로...

결혼문제를 무조건 공주들에게 맡기는 것은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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