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85 98. 전란의 시대 =========================================================================
98. 전란의 시대
연초에 국립 수의과대학 졸업식에 참석해 졸업 축하연설을 했다. 농업대학 소속 축산학과와 낙농학과가 가축과 낙농제품 생산에 주력한다면, 수의과대학은 동물의 치료와 전염병 예방, 육종 등에 집중했다. 축산학과와 합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수의과대학이 의과대학과 깊은 관계에 있어서 독립시키자는 의견이 더 강했다.
수의과대학 졸업생들은 예과 2년과 본과 4년, 일부는 대학원 과정을 마쳤다. 다른 기술 관련 대학에는 3개월 혹은 6개월의 직업학교 과정이 따로 개설돼 있어서 주로 현업에 종사중인 성인들이 교육을 받았으나, 의사와 수의사는 전문성이 중시돼서 직업학교를 따로 두지 않았다.
“마의학과, 가축의학과, 애완동물학과, 인수공통 전염병 예방학과 전공 과정을 마친 모든 학생들의 졸업을 축하합니다. 여러분들은 앞으로 현업에 종사하면서도 진리 탐구와 인류의 발전을 위한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한민족에게 수의학의 전통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고구려 혜자법사가 쇼토쿠 태자에게 요마법을 전수해 태자류라는 일본 고대 수의학을 발전시켰고 고려시대에 발간된 <축마요식>이라는 책은 사료 급양 표준에 해당하는 책이었다. 고려 말기의 사복시에는 수의(獸醫) 5인이 소속돼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경국대전>에 따라 취재(取才)를 통해 마의들을 선발했으며, 축산학이나 수의학 관련 저술이 다양하게 발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방 의원이나 일반 학자가 말이나 소의 치료와 관련한 책을 내는 정도였고, 동물 치료 전문가는 군사적 목적이 강한 마의(馬醫) 외에는 아예 없는 편이었다.
고산국의 국립 수의과대학에서 가장 중요한 학과는 역시 마의학과였다. 고산국 군대 일부가 장갑차와 자주포 등으로 기계화됐다 해도 아직 군마의 중요성이 여전히 높았기 때문이다. 여진족과 토르구트 족, 북미 원주민들이 특히 마의에 대한 수요가 높아 인재를 골라 유학을 보냈다.
“졸업생 여러분은 주로 국가기관이나 국영기업에서 현업에 종사하게 될 것입니다. 공무원은 국가와 백성에게 봉사하는 직책입니다. 각자 분야에서 책임을 다한다면 국가는 여러분의 생활을 최대한 지원할 것입니다.”
수의과대학 학생들은 의대생들처럼 공부와 실습을 많이 하는데도 수의사가 된 다음에는 의사보다 사회적으로 존경을 덜 받았다. 사람의 병을 고치고 평생 공부해야 하고 밤늦도록 고생하는 의사들이 당연히 존경을 더 받고 보수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졸업 후 국가나 지방정부 소속이 되면 근무시간이 일정해서 젊은 층에 직업으로서의 수의사가 인기가 더 높았다. 고산국 젊은이들은 사회적 지위보다는 여가시간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축 사이에 돌림병이라도 유행하면 몇 달 동안 집에도 못 들어가고 고생하는 직업이었다.
왕궁에서는 애완동물을 키우지 않았지만 본토에만 해도 각 가정마다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이 유행이었다. 개와 고양이를 선호하는 가정이 많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품종을 들여왔고, 새나 파충류, 설치류도 검역과 등록을 마치면 가정에서 키우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호주에서는 여전히 토끼가 반입금지 동물 목록에 남았다. 생태계 변화를 우려해 애완동물을 제외한 살아있는 다른 동물들의 대륙간 이동도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편이었다.
그리고 애완동물을 분양받기 전에 주인이 지방정부에서 실시하는 교육을 받고 애완동물의 목걸이에 주인의 인적 사항을 적어야 했다. 또한 관청에 등록해야 해서, 웬만한 정성이 아니고선 애완동물을 분양받기 어려웠다.
덕택에 길거리가 개똥으로 뒤덮이지 않게 됐다. 대형견과 몇몇 견종의 사육이 금지돼 어린아이가 길거리에서 개에게 물리는 경우도 거의 사라졌다. 고양이가 발정기 때 집을 나가면 주인이 벌금을 물기 때문에 고양이는 첫 발정기 전후로 중성화 수술을 시키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올해 설날에 조선의 고향에 갔다 온 사람들이 처음으로 20만 이하로 줄었습니다. 예전에는 이주민들이 추석과 설날, 중요한 제사를 포함해 일 년에 서너 번 이상 조선에 갔었는데 지금은 일 년에 한두 번으로 줄이는 추세입니다.”
“이주했던 이들이 그새 다 늙어죽지는 않았을 텐데, 이유가 뭐라고 보시오?”
설날 휴가기간이 끝나고 나서 해안경비대 제2 차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고산국과 조선을 오가는 사람들의 동태를 파악하는 것은 해안경비대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다.
고산국 배가 빠르기 때문에 조선 사람들의 해외여행이 비교적 손쉬워졌다. 심지어 조선 관료들은 한성에서 삼남지방에 갈 때도 고산국 배를 이용했다.
“생활 기반뿐만 아니라 정서적 고향도 조선이 아니라 고산국으로 완전히 옮겨진 탓입니다. 오히려 조선의 친척들이 초청을 받아 고산국 본토나 북미에서 명절을 쇠는 경우가 더 많아졌습니다. 조선의 본가 입장에서는 역귀성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시대 조선 사람들은 평생 살 나라를 선택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졌소. 큰 전란도 겪지 않은 셈이오.”
“그렇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임진왜란 때 많이 죽고 사르후 전투 때도 수천 명이 죽었다고 슬퍼하지만 우리가 참전하지 않았다면 전황이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17세기 후반 저술된 <김영철유사>에서 비롯된 <김영철전>은 이 시대 조선에서 태어난 남성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그를 둘러싼 역사의 흐름을 서사화한 소설이다. 1600년생인 김영철은 왜란과 호란 양 시대에 걸쳐 고생한 <최척전>의 주요 등장인물들보다 훨씬 고달픈 삶을 살았다고 평가된다.
김영철은 사르후 전투 와중에 포로가 된 뒤 후금에서 여진족 여자와 가정을 이뤄 아들 둘을 낳고 살다가 등주로 탈출한다. 거기서 다시 결혼해 아들 둘을 낳고 살다가 조선 사신선을 타고 귀국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전 세계에 태극기를 꽂고 다닌다며 우쭐해대는 자칭 대한 남아가 연상된다.
그러나 병자호란과 개주 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쟁에 참전하고 평생 군역을 지며 가난하게 살다가 불행한 인생을 마친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오고 싶은 마음에 처자식들을 두 번이나 버린 사실을 마지막에 후회하면서 끝난다.
“조선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사소한 거나 헛소문이라도 철저히 탐문해서 채록하시오. 특히 반정 가능성에 유의하시오.”
“예, 전하. 조선의 당금 국왕은 최고라는 평판은 못 얻더라도 비교적 명군이라는 칭송을 받는 정도입니다. 쉽게 반란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어디든 불만 세력이 있을 테니 유의해서 탐문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기 반란은 조선이 아니라 명나라와 프랑스에서 진행되고 있었으며, 특히 프랑스 남부에서 전운이 짙게 드리웠다. 앙리 4세에게서 비교적 보호를 잘 받았던 위그노들은 루이 13세나 그 전에 섭정을 맡았던 모후 마리 드 메디시스로부터 끊임없이 핍박을 받았다.
서남부 피레네 산맥 가까운 지역은 위그노들이 다수였으나 가톨릭교도만이 의회에 진출할 수 있게 바뀌어서 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나중에는 위그노들이 신앙뿐만 아니라 목숨을 지키기 위해 일어서야 하는 지경으로 내몰렸다. 결국 1620년 12월 25일에 라 로셸에서 열린 위그노 집회에서 국왕에게 군사적으로 저항하기로 결의했다.
위그노의 지휘는 열렬한 반국왕파인 로한 공작이 맡았다. 로한 공작은 네덜란드 공화국이 에스파냐를 상대로 쟁취한 것처럼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길 원했다. 위그노들과 프랑스 중앙정부와의 충돌은 피할 길이 없었다.
“프랑스에서 이민이 늘고 있다면서요?”
“예, 전하. 프랑스 국왕도 위그노들이 반란에 참가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북미로 이주하길 원해서 우리 여객선이 ‘생 마르탱 데 레’나 보르도 하구에 입항하는 것을 막지 않습니다.”
“해군과 협력해서 여객선의 항로에 대한 보호를 강화하시오.”
“예, 전하. 우리 여객선에 대놓고 해적질하는 경우는 없습니다만, 혹시 모르니 여객선의 항로를 이용하는 외국 상선들에 대한 임검을 강화하겠습니다.”
에스파냐에서 추방당한 모리스코의 대량 이주는 단기간에 그쳤고 아일랜드 사람들은 장기간 이주해도 수가 생각보다 적었다. 실제로 아일랜드에서 배를 타고 건너온 이주민보다 북미에서 태어난 2세들이 더 많았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위그노를 중심으로 단기간에 대규모 이주를 할 가능성이 있었다.
위그노들에 더해 30년 전쟁 기간 동안 독일 이주민들을 꾸준히 받아들인다면 북미와 호주의 인구 부족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될 것 같았다. 그 다음에는 자체 인구증가로 충분할 테니 차차 이민의 문호를 좁히기로 했다. 그러나 종교의 자유를 찾아 망명하는 사람들은 당분간 무한정 받아들일 계획이었다.
3월 말에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국왕 펠리페 3세가 40대 초반의 나이로 사망했다. 펠리페 3세는 정치를 왕실 회의와 그 산하의 각종 위원회, 그리고 총신 레르마 공작 등에게 떠맡기고 사치스러운 궁정생활을 즐기는데 바빠 정무를 돌보지 않았다. 레르마 공작도 펠리페 3세와 비슷하게 게으른 인간이라 에스파냐는 20년 동안 급속히 쇠퇴하고 있었다.
새로 즉위한 펠리페 4세도 부왕의 뜻을 받들어 정치는 총신 올리바레스 백작에게 맡기고 국왕은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일에만 전념했다. 이민호는 멕시코 땅에 군침을 흘리면서 에스파냐 왕실에 채무를 잔뜩 지우는 일에 골몰했다.
전쟁으로 영토를 빼앗으면 나중에 탈환하려는 나라와 계속 충돌해야 하지만, 영토 매입 조약을 통해 얻으면 바로 그 순간부터 완벽한 영토가 되기 때문에 오히려 싸게 먹혔다. 태평양 전체와 대서양 서부 해역을 고산국의 내해로 만들면 해군에게도 방어 부담이 적었기에 이민호는 꾸준히 멕시코를 주시했다.
“북미에서는 범죄율이 무척 낮군. 강도나 절도는 물론 흔한 폭력행위나 경범죄조차 드물어.”
새강릉에서 시장 임기를 마치고 중앙정부로 돌아온 병조참의를 알현했다. 참의는 북미 여대공 비올레타의 명을 받아 북미 통치 전반에 관해 작성한 보고서를 이민호에게 제출했다.
“예, 전하. 인종을 불문하고 북미 백성들은 예의바르기로 유명합니다. 상인은 물건 값을 속이지 않고 기업가는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끼리 인사를 정겹게 잘합니다. 무역하러 온 외국 상인들이 지상낙원으로 오해할 정도입니다.”
참의는 국왕의 선정과 은덕 때문이라는 아부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관료들은 일이 바빠서 아부할 틈이 없었고 승진할수록 일이 많아 애써서 승진하려 하지도 않았다.
“교육 수준은 원주민 비율이 적은 본토가 훨씬 높은데 왜 그러지? 북미 원주민과 유럽 이주민들이 원래 예의가 바른가?”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예의보다는 총기소지가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누가 사소한 잘못만 저질러도 바로 총을 꺼내서 쏘려고 합니다.”
“형벌은 국가에서만 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나?”
“사형(私刑)을 하면 국가로부터 벌을 받는다는 것을 압니다만, 화를 참지 못하는 바로 그 순간에 총을 갖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고산국에서는 민간인들도 총은 쉽게 구입할 수 있으나 총알은 무지막지하게 비싼 편이었다. 그러나 뭔가를 이유로 화를 내는 동안에는 총알 값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였다. 총알 값을 벌기 위해 적금을 들고 몇 달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수준이 아니라면 욱하는 순간에 방아쇠를 당기기가 쉬웠다.
그리고 사냥용으로 공기총을 대대적으로 보급한 이후 총기 사용에 더욱 부담을 덜었다. 공기총이 사거리는 짧다 해도 적당한 구경만 되면 곰이나 대형 동물을 상대로도 위력이 충분한 편이었고, 공기 압축기가 싸고 총알을 쉽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인기가 좋았다.
“북미 전역에서 단발총과 화승총이 총알이나 화약과 함께 벽장 안에 들어간 대신 성인이라면 누구나 공기총을 메고 다닙니다. 예전과 달리 요즘에는 민가에 맹수가 접근하지 않고 북미 원주민들도 대충 정착했으니 이제부터 총기소지를 제한하면 어떻겠습니까?”
“북미 땅이 워낙 넓어서 백성들에게 완벽한 치안을 제공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라네. 유럽 전체가 전쟁으로 엉망이 된 틈을 노려 어느 외국에서 북미를 침략할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공기총은 외적 방어에 큰 도움이 안 됩니다. 만약 휴대하기 편한 공기권총 소지까지 자유화시켰다면 큰일이 날 뻔했습니다.”
서부시대의 로망, 권총 결투가 고산국 영토인 북미에서는 거의 불가능했다. 권총은 군용 무기로 제한했기 때문이다. 원주민들은 화승총을 사용해 들소를 잡고, 이주민들은 공기총으로 농가를 지켰다. 둘 다 총열이 길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처벌도 강해서 공기총을 사람에게 쉽게 쏘지 못한다.
현재 북미에서 총기를 사용해 살인 또는 상해죄를 범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 매해 열 건도 안 됐다. 다만 심리적인 불안감을 크게 자극해 사람마다 무장을 하게 만들 뿐이었다.
“이주민 마을에 원주민이 뒤섞이고 유럽에서 꾸준히 이민이 오는데도 범죄율은 여전히 낮은 수준이야. 아직은 지켜보도록 하세.”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마경찰을 증강해서 외딴 마을까지 순찰을 돌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게 좋겠군. 인구 비율에 따라 지방경찰을 채용하도록 명하겠네.”
이민호가 가장 좋아하는 정책 제안이라 당장 수용했다. 행정인력 부족에 시달리지 않더라도 공무원이나 경찰, 군인을 늘리는 일은 북미 지역의 안정에 큰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특히 원주민이나 이민 1세를 경찰로 임용할 경우 그 경찰의 친지나 마을사람들의 충성심이 높아진다.
북미에서 인종 간 불평등이나 차별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여성의 미에 대한 기준이 이민호가 살던 시대와 약간 달라졌을 뿐이었다. 검은색 염색약은 유럽 이주민 여성들에게 여전히 잘 팔렸다.
============================ 작품 후기 ============================
전기 공사 문제로 연재가 늦춰졌습니다. 전기 공사는 오늘 오후로 끝났으니 연재속도를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