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81 97. 1620년, 한 시대의 마감 =========================================================================
고산국 왕도에서 아침 일찍부터 브루나이 술탄의 두 번째 즉위식을 거행했다. 브루나이 주변국 군주들이 보낸 축하사절들과, 여러 종교 지도자들이 술탄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참석했다.
브루나이의 국내 문제는 브루나이 왕실에서 알아서 결정하라고 했더니 이 사람들이 마음대로 고산국 왕궁 앞 주작대로와 광장을 즉위식 행사장으로 결정했다. 술탄이 사신들을 여러 차례 보낸 외에도 브루나이 공주들이 열심히 애교를 부려서, 결국 남의 나라 술탄의 즉위식에 이민호가 끌려나와 행사를 주재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선물을 잔뜩 받았으니 이제 와서 남의 일이라고 한 발 빼기도 곤란해졌다.
국내에서 권력이 약한 술탄이 고산국에 심하게 의존하려 해서 술탄의 권좌 쟁탈전부터 대관식까지 호가호위의 극을 달렸다. 고산국은 석유와 목재, 석탄 등 천연자원을 의존하고 있으므로 브루나이를 중요한 동맹국으로 대우했다. 물론 약탈적 착취가 아닌, 이 시대 평균이나 브루나이 기준에서 보면 정당한 교역을 넘어 숟가락으로 떠먹여주는 수준이었다.
“브루나이의 새로운 술탄에게 알라의 가호가 있기를.”
“고산국 국왕전하께 알라의 가호가 있기를.”
술탄 무하마드 하산은 몇 달 전에 노환으로 사망했고 후계자는 그의 아들 압둘 잘릴룰 아크바르였다. 삼촌 및 사촌 형제들과 약간의 다툼이 있었지만 고산국 후궁이 된 브루나이 공주들의 지원과 중재를 받아 비교적 평화롭게 술탄에 즉위할 수 있었다.
압둘은 20년 넘는 오랜 기간 왕세자로 지내면서 술탄의 명을 받아 남부의 반란군을 소탕하고, 사라왁과 사바 지역에서 독립을 추진하던 삼촌, 혹은 사촌들과 귀족들을 무력으로 진압해 확실히 무릎을 꿇렸다. 또한 노쇠한 술탄 대신 농업과 임업, 특히 무역을 장려해 브루나이를 부국으로 성장시켰다.
브루나이의 귀족 자제들이 다 그렇듯 새 술탄도 2년 넘게 고산국 왕도에서 유학 생활을 보냈다. 그리고 술탄의 자식들 중에서 절반은 항상 고산국에 남았다. 인질을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브루나이 왕실 입장에서 뒷배를 든든히 하기 위한 행위였다.
“알라시여! 브루나이의 새로운 술탄을 축복하소서. 오랜 삶과 더불어, 술탄의 위엄과 권위로써 공정하게 나라를 통치케 하소서. 그리고 브루나이의 술탄과 백성들을 영원한 행복에 이르게 하시고, 이들이 빛나는 왕국에서 평화롭게 살도록 하소서. 알라시여! 술탄과 브루나이를 평화의 땅에서 지켜주소서!”
배를 타고 온 브루나이 사람 5만 명에 고산국 구경꾼들 30만이 광장을 가득 메운 가운데 이민호가 확성기에 대고 선창했다. 수십 만 명이 종교를 가리지 않고 술탄에게 신의 축복을 빌었다.
“타크비르!”
“알라후 아크바르! 알라후 아크바르! 알라후 아크바르! 알라후 아크바르! 알라후 아크바르!”
브루나이 백성 5만 명이 주도해서 나머지 구경꾼들까지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리고 비단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흰 코끼리 열 마리가 일제히 코를 들어 큰소리로 울었다. 이민호는 귀청이 터지는 것 같아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런데 문제는 즉위식이 이슬람 양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었다. 신부와 목사, 스님들이 새로운 술탄을 축원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브루나이의 국교는 이슬람교였지만 대대로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이때에도 종교 선택은 자유였다.
“성직자 여러분들이 축원을 간략하게 해줬으면 하는 소망이 있소.”
“물론입니다, 전하.”
대답은 참 잘도 했다. 그러나 종교마다 기본적인 형식이 있어서 최소 30분씩 행사 시간을 끌었다. 끝날 때쯤 되니 벌써 오후 두 시였다. 구경꾼들은 광장에 넘쳐나도록 공급되는 공짜 음식을 실컷 먹으며 구경했지만 이민호는 체면 때문에 음료수만 마셔서 이쯤 되니 배가 고팠다.
“수고했네, 술탄. 이제 단상으로 올라오게.”
“제가 어찌 국왕전하와 같은 단 위에 오르겠습니까?”
“괜히 빼지 말고 어서 오르게. 브루나이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무릎이라도 꿇을 텐가?”
“원하신다면 그 이상도 할 수 있습니다.”
이민호가 혀를 차며 술탄을 단상으로 이끌어 옥좌에 앉혔다. 그 다음 이민호가 다른 옥좌에 앉았다. 당연하게 축하객과 구경꾼들이 환성을 질렀다.
“내란을 그나마 짧게 끝내서 다행일세. 그런데 새로운 술탄이 즉위할 때마다 매번 이렇게 내란을 겪어야 하나?”
“다른 나라도 대부분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이번에 명나라 황궁에서도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고 들었습니다. 고산국에서 명나라의 새 황제를 지원했다는 소문이 사실입니까?”
“황태자를 지원한 건 아니야. 선황의 빈소에 곡을 하러 갔다가 자위권 차원에서 총 몇 방을 쐈다네. 시위내관들이 먼저 우리를, 에이! 그만 두세.”
이민호가 구구절절 변명하려 했으나 술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봐서 중간에 끊었다. 술탄이 세자 시절 왕도에서 대학원에 다닐 때 이민호와 자주 대화를 했기에, 무슨 말을 해도 금방 진의를 알아들었다. 그런데 술탄은 뜻밖에 좋게 여기는 듯했다.
“국왕전하께서 합법적인 왕통을 잇도록 명나라를 도와주셨다고 주변국들에서 칭송이 자자합니다. 고산국이 명나라의 종주국은 아니지만 전하께서 오랫동안 새 황제의 보호자를 자임하셨으니 당연한 권리입니다.”
“몰라. 국내 문제는 제발 알아서 하라고 해. 남의 나라 국내정치에 신경 쓰고 싶지 않네.”
“전하의 뜻을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저를 위해 조언을 해주십시오.”
“술탄이 정치를 잘하면 자연스럽게 백성들의 지지를 받게 될 걸세. 그러니 앞으로는 나한테 의존하지 말게.”
“예, 전하. 즉위 초에만 조금 더 의존하겠습니다.”
능청스런 술탄의 대꾸에 이민호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 사이 술탄의 여동생, 고모, 고모할머니들인 브루나이 공주들이 흐뭇한 표정으로 이민호와 술탄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러 가지 선물을 하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대포와 화승총은 국내 정치를 안정시켜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왕족이나 귀족들의 힘을 빼놓는 대신 경제적인 면에서 적당히 양보해주게. 그들은 자기들에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다 빼앗으려 들면 술탄을 상대로 악착같이 싸울 걸세.”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장자가 모든 재산을 독점하되, 장자가 차자 이하 형제들을 돌봐줘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두고 장자와 차자 이하 형제들 사이에 다툼이 심하게 일어난다. 브루나이 왕실도 이와 비슷해서 부와 권력에서 부당하게 소외됐다고 여긴 삼촌과 사촌들이 끊임없이 술탄의 자리를 노렸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답례품이라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유전이 있는 세리아 주변 영토를 고산국에서 직접 지배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루손 섬 북부를 고산국 직할 영토로 삼은 것처럼 말입니다.”
“영토가 술탄 개인의 것이라 해도 다른 나라에 넘기면 안 돼. 반역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거든.”
“캬아~ 감탄했습니다. 전하께서는 역시 영토에 욕심이 없으시군요. 그렇다면 다른 것으로 준비하겠습니다.”
“나를 시험하지 말게나. 그리고 저번에 조약을 맺었지? 브루나이 북쪽, 필리핀 서쪽, 안남 동쪽에 떠 있는 섬은 다 내 거야.”
“예! 물론입니다.”
북미와 아부다비에서 석유가 나면서 브루나이에서 나는 석유는 예전보다 중요성이 떨어졌다. 그러나 고산국 본토에서 가장 가까운 원유 생산지인 브루나이는 고산국 입장에서 전략적 중요성이 매우 높았다.
남중국해에 점점이 떠 있는 섬들, 현대의 남사군도 등에도 미리 침을 발라놓았다. 주변국들은 이런 작은 무인도들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나중에 자원의 보고가 될 수 있기에 주변국들과 외교문서를 교환하는 방법을 통해 확실히 선점해두었다.
그런데 이민호는 브루나이는 물론 열대 지방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에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열대열 말라리아가 의외로 강력한 전염병이었기 때문이다. 현대 열대지역에서는 5세 미만 아동과 임산부를 중심으로 매년 백만 명 가까이 말라리아로 사망한다. 말라리아는 백신도 없고 예방약을 복용하더라도 말라리아에 걸릴 수 있으며 예방약의 부작용이 심각한 편이었다.
전 세계에 유전적으로 말라리아에 내성을 가진 사람들이 4억 명 정도로 추정되며, 이 유전자는 중증 말라리아의 위험을 58퍼센트 감소시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것을 인류의 진화라고 하기 어려웠다. 말라리아에 내성을 가진 사람끼리 결혼하면 태아 단계에서 사망해서 2세를 볼 수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 영토에 욕심 부릴 이유도 없지만, 나는 추운 곳도 싫고 더운 곳도 싫네. 브루나이는 너무 더워. 그러니 걱정 말고 브루나이를 부강하게 키우게나.”
“국왕전하께서는 역시 따뜻한 곳을 좋아하시는군요.”
물론 국왕 개인이 선호하는 기후대의 영토만을 중시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살기에는 온대 기후가 가장 좋다고 생각했기에, 백성들을 추운 곳이나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열대 지방에 보내서 살게 하기 싫었다.
요즘 고산국에서는 남미의 농업 개발에 몰두하고 있었다. 소빙기가 되면서 앞으로 백년 혹은 2백 년 동안 식량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고산국의 모든 영토에서 농업 증산 계획이 발동됐지만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남미 대륙에서도 브라질이나 열대에 가까운 지역이 아니라 남쪽, 현대의 아르헨티나 저지대 평야인 팜파스가 농업 개발의 중심이 되었다. 백 가구 단위로 이주한 농민들이 밀 씨앗을 들판에 뿌려 몇 달 뒤에 대충 거두고 소와 양 수만 마리씩을 풀어놓고 키웠다. 고산국 농민들의 정착에 항의하던 소수 원주민들은 쇠고기와 양고기, 밀가루 포대에 파묻혀서 항복을 선언한 다음 지금은 충직한 일꾼으로 활약했다.
브루나이 술탄의 즉위식을 고산국에서 여는 바람에 이민호가 주변국 축하사절들을 일일이 만나보고 짧게나마 대화를 나눴다. 알현은 간단히 끝내고 예조판서와 실무 협의에 들어가도록 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주로 약소국들이 고산국에 보호해달라고 요청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트르나테와 티도레 등 몇몇 강국에 국서를 보내 주변 지역을 평온하게 만들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포르투갈, 에스파냐 상선들이 향료제도에서 거래할 때의 입항 절차와 분쟁 해결 방법도 자세히 규정해서 모든 이들이 수용하게 만들었다. 고산국은 이미 실질적으로 제국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조선국 예조판서가 알현을 신청했습니다.”
“들라 하라.”
대북파의 수장으로서, 정인홍의 아바타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예조판서 이이첨이 이민호에게 절을 올렸다. 이언적과 이황을 문묘에 모시는 문제에서 반대 입장에 선 것 때문에 선비들이 올리는 상소문에서 집중 공격의 표적이 되고 있는 사람이었다.
“대명 북원왕 겸 고산국 국왕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오랜만이오, 예판. 브루나이 술탄의 즉위를 축하하러 오셨소?”
“이번 알현과 우연히 맞아 떨어진 것뿐입니다. 조선국 주상전하의 국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호위를 통해 국서를 받아 읽었다. 장황한 인사말 외에 여러 가지가 언급됐지만, 명나라 황위 계승 분쟁에 빠르게 개입한 이민호를 칭찬하는 것이 결론이었다.
국서에서는 정당한, 합법적인, 선 황제폐하께서 책봉한, 등등 태창제가 제위를 계승해야 마땅한 당위성을 여러 번 강조했다. 합법적인 계승자인 황태자, 또는 세자로 책봉된 이래 부황 또는 부왕에게 괄시를 받으며 오랫동안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니까, 전에는 미덥지 못했는데 이제 와서야 고를 믿게 됐다는 뜻이오?”
“하하. 전에도 고산국 국왕전하를 형제처럼 믿고 의존하셨습니다.”
“형제처럼? 갑자기 임해군 마마가 떠오르는군요.”
“아! 그건 절대 아닙니다. 사실 왕실에서 우애로운 형제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개국 이래 왕좌를 두고 형제끼리 숱하게 피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야 좀 솔직해지셨구려.”
이민호가 똑바로 바라보면서 이이첨에게 핵심을 말할 것을 강요했다. 이이첨이 진땀을 뻘뻘 흘렸다.
“조선국은 개국 이래 가장 융성한 시기를 맞고 있습니다. 임진년의 전란으로 인해 입은 피해는 모두 복구했고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도 중건했습니다. 동쪽의 왜국과 서쪽 국경선을 어지럽히던 후금이 멸망해서 이제는 외적이 침입할 걱정을 덜었습니다. 백성들은 배를 두드리며 편안히 살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대명 황제폐하와 조선국 주상전하, 그리고 고산국 국왕전하의 은덕입니다.”
한성을 기준으로 남동쪽인 동래는 동쪽이고 북서쪽인 의주는 서쪽이었다. 북극성이 북쪽의 기준점이었고 정동진은 지금 기준으로도 서울에서 정확히 동쪽이었으니 다른 나라와 방위가 다른 것은 아니었으나, 조선에서는 남북이 아니라 동서를 방위의 기준으로 삼았기에 이런 표현이 가능했다.
“백성들이 노력한 것은 왜 빼는 것이오? 모름지기 군주란 백성들이 열심히 일하며 살 맛이 나도록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 가장 큰 책무라고 생각한다오.”
“무, 물론 백성들도 고생을 많이 해서 현재의 부를 일궜습니다. 고산국에 이민 간 백성들도 열심히 일한 줄로 압니다.”
“물론 열심히 일했지요. 그래서 조선에서 유랑민과 노비였던 자들이 고산국에 와서는 조선 양반들보다 더 잘 살게 됐소.”
서로 잘 났다고 말로 티격태격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민호가 계속 독촉하자 이이첨이 한숨을 내쉰 다음 고개를 들었다. 물론 이민호가 예상했던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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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올린 다음 저녁에는 좀 쉬고 싶은데 따라주지 않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