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880화 (829/1,000)

00880  97. 1620년, 한 시대의 마감  =========================================================================

건청궁에 몰아친 피바람은 이렇게 끝났다. 합법적으로 책봉된 황태자가 정상적으로 제위를 잇게 됐으니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공귀비 대신 시위내관들을 지휘해 공격을 주도했던 사례감 장인태감이 오랏줄에 꽁꽁 묶였다. 권력을 잃은 환관들이 다 그랬듯이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온몸이 3천 조각 이상으로 저며지는 형을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귀비 마마! 흑흑!”

“황태자! 저 여자는 더 이상 황태자의 어머니가 아니다. 제위를 노린 역도일 뿐이야!”

전에 프랑스 국왕의 모후 마리 드 메디치에 관해 이야기해준 것이 황태자를 설득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황태자 주상락은 잠시 곡을 했을 뿐, 다시는 그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공각황귀비를 태후에 추존하고 묘를 크게 만들어준 것은 한참 나중 일이었다.

- 두다다다다다~

대전에서 교전에 참가한 특전대대원 중에 한 명이 전사하고 두 명이 각각 중상과 경상을 입었다. 건청궁 마당에 착륙한 헬리콥터가 부상자들을 싣고 이륙하는지 굉음이 대전을 크게 울렸다.

주상락이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리자 이민호가 밖으로 나갈 것을 권했다. 유혈이 낭자한 대전에 머물러 있기 싫어서였다.

“우리 이야기 좀 하세. 하늘이 참 푸르군.”

“예, 형님.”

그러나 건청궁 마당 곳곳에 시위내관들의 시체가 쌓여 있었다. 주상락이 잠시 흠칫했다가 금방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특전대대원들이 이민호와 황태자를 호위하는 사이 금의위 위사들은 등을 돌려 벽면을 보고 있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대전 안에서 총성이 울린 순간 바깥에서도 동시에 교전이 시작됐다고 한다. 그러나 대전 안에서처럼 근접전에 휘말리지 않는다면 고산국 군대에 인명피해가 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민호는 황태자도 이런 사실을 인정하고 명나라와 고산국 사이에 괜한 무력충돌이 발생하지 않길 바랐다.

“형님께서 참으로 어려운 일을 해주셨습니다. 어찌 됐건 형님의 장모님 아니십니까?”

“어휴! 상황이 그래서 결단을 내려야 했지만 왕궁에 돌아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하네.”

이민호는 태창제의 통치에 가장 부담스러운 요소를 확실히 제거해준 셈이었다. 그러나 공귀비는 복왕뿐만 아니라 의용공주 주상아의 친모였고, 이민호는 장모와 처남을 한꺼번에 죽인 패륜아(悖倫兒)가 됐다.

이민호는 주상아와의 관계가 껄끄러워질까 두려워 두 사람의 최후를 부하들에게 맡길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역모 와중에 사고로 죽었다고 주상아에게 거짓말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앞으로 나라를 잘 다스리도록 하게. 부황께서 어지럽힌 관료 제도부터 추슬러야 할 거야. 오랫동안 공석이 된 지방관들도 파견해야 해. 동창을 비롯해 환관 조직도 확실히 장악하고. 특히 호위 조직을 가장 먼저 재정비하도록 해.”

“물론입니다, 형님.”

“음식이나 약 같은 것은 함부로 먹지 말고. 백성들의 기대가 크다는 사실을 기억해 둬. 부디 오래 살도록 하게. 그것은 군주의 의무라네.”

“주의하겠습니다. 고산국 왕도에서 공부를 마친 의사들을 황실 주치의로 초빙하겠습니다.”

“그것도 좋겠지. 참! 고산국 군대는 내일 오후에 바로 퇴각시킬 테니까 금의위 병력을 확실히 장악해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게.”

주상락이 좀 더 오래 자금성에 남아달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즉위 초기에 불안하겠지만 반역의 빌미가 될 가능성이 있어서 고산국 군대가 계속 자금성을 장악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명목상 고산국이 대명 제국의 제후국이라 해도 어차피 외국이니, 외국군의 도움을 받아 황제에 즉위했다는 평가를 받으면 정통성에 흠집이 날 수도 있었다.

주상락이 이민호에게 허리를 깊이 숙여 감사를 표했다. 이민호가 더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 날 저녁 이민호가 만력제의 빈소를 방문해 두 시간 정도 곡을 했다. 처음 우연히 알현했을 때 만력제의 선택에 따라 이민호가 죽음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주상아 공주를 얻고 황제의 비호를 받아 고산국을 좀 더 쉽게 발전시킬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민호에게 만력제는 은인이었다. 그러나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는 사람들, 그리고 삶을 거의 포기한 명나라 백성들에게는 이보다 더한 원수가 없었다. 지난날들을 돌이키며 회한에 젖어 통곡하는 이민호를 황태자가 말렸다.

“형님. 감정이 너무 격해지셨습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못해 과하신 것 같으니 옥체를 생각하여 곡은 그만 두십시오.”

“황상께서, 우허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아. 어어어~”

이민호가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애통한 목소리로 곡을 하는 수준에 있어서는 사위인 이민호가 아들인 주상락보다 나았다.

이민호가 하도 애절하게 통곡해서 황태자에 책봉된 이후 황제로부터 20년 동안 괄시를 당했던 주상락이 결국 눈시울을 붉혔다. 빈소 주변에 모인 대신들과 환관들도 이민호의 곡소리에 감응해서 훌쩍거렸다.

“귀비 마마와 복왕의 빈소에도 가셔야지요. 먼저 교태전으로 모시겠습니다, 형님.”

“어. 어?”

주상락의 부축을 받아 일어선 이민호는 내키지 않은 걸음으로 교태전으로 향했다. 자기 손으로 직접 죽인 자의 빈소에 간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공각황귀비는 공식적으로 황실의 어른이며 개인적으로 이민호에게는 장모였기에, 새로운 황제가 귀비의 행위를 역모로 선언하지 않는 이상 이 자리를 피할 수도 없었다.

교태전은 건청궁 바로 뒤쪽에 있었다. 조선의 교태전이 왕비의 생활공간인데 반해 명나라의 교태전은 황후의 공식 행사를 위해 준비된 자그마한 건물이었다. 이민호가 공각황귀비의 위패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공귀비 마마!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이민호가 황제의 빈소에서보다 훨씬 더 구슬프게 통곡했다. 그러나 평생 귀비를 모신 환관들과 궁녀들로 인해 교태전의 분위기는 사뭇 비장했다. 여진족 호위들이 바짝 긴장하며 이민호를 경호했다.

몇 시간째 울어대느라 이민호의 목이 쉬고 눈은 퉁퉁 부었다. 그러나 아직도 부족하다고 여긴 이민호가 주머니에 손을 살짝 집어넣어 고춧가루를 만졌다. 그리고 눈에 부비니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이런 짓까지 해야 하나 싶어 자괴감이 든 이민호가 더욱 구슬피 울었다.

그 사이 환관들이 밤새도록 즉위식에 필요한 물건을 준비했다. 이 시기에는 환관들 숫자가 최대로 불어나 거의 10만에 가까웠다. 환관시험에 낙방한 사람들만 수십만이었다.

그리고 환관 지망자들 중에서 거세 수술 도중, 혹은 직후에 죽는 자가 절반 이상 비율이었다. 명나라 말기에 먹고살기 암담해진 명나라 백성들은 이렇게 남성을 포기하고 황제 개인에게 충성을 바치는 대신 권력과 재산을 얻으려 했다.

이민호는 주상락에게 즉위 축하금 명목으로 은 5백만 냥을 건넸다. 황실 내탕금이 금과 은만 해도 은 기준으로 5천만 냥 이상이라 더 줄 의미가 없었다. 주상락이 황실 수장고에 보관했던 예술적 가치가 높은 보물 몇 가지를 답례품으로 보내왔다.

“황제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다음 날 아침 태화전 앞에서 태창제의 즉위식이 열렸다. 만조백관이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태화전은 화재 이후 아직도 중건 중이었기에 공사 중인 2층을 비단 장막으로 가린 채로 즉위식이 거행됐다. 고산국 특전대대원들은 외부인들 눈에 띄지 않도록 태화전 뒤로 빼두었다.

명나라 최악의 암군으로 꼽히는 만력제가 아니라면 누가 황제가 되더라도 환영할 관료들의 얼굴에는 기대감과 더불어 짙은 불안감이 어렸다. 관료들이 만력제를 설득해 정사를 돌보게 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나중에는 조정이 부패하는데 일조한 탓이었다. 태창제가 즉위한 날부터 동림당과 비동림당이 서로 부패했다고 비난하는 다툼이 시작됐고, 숙청 기간에 살아남기 위한 정쟁이라 더욱 치열하게 진행됐다.

종친부 위치에 선 이민호를 종친들과 대신들이 자꾸 힐끗거렸으나 아무도 말을 걸지 못했다. 종친들은 호기심에 고개를 돌렸다가 이민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얼른 고개를 숙여버렸다. 만에 하나 태창제를 몰아내려면 이민호의 분노와 고산국의 군사력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종친들과 조정 신료들에게 확실히 인식시켜주었다.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행동거지를 바르게 하면 세상이 바로 설 것이다. 하늘의 뜻을 받들어 황제의 보위에 오른 짐이 먼저 솔선수범해서 나라를 바로 세울 것이니 백관과 백성들은 각자 맡은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라.”

태창제 주상락이 윤음을 반포했다. 황제나 군주가 권리만 누리는 자리가 아닌 의무를 수행하는 자리라는 인식을 태창제는 고산국에서 오랫동안 배웠다. 이민호는 태창제가 선정을 베풀 것을 기대하며 제후의 한 명으로서 만세삼창에 동참했다.

어제 자금성에서 일어났던 유혈사태는 명나라 조야를 크게 뒤흔들었으나 황제는 공식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민호를 정난공신으로 책봉하는 일도 없이, 공귀비와 복왕을 역도로 규정하는 일 없이 유야무야 그렇게 넘어갔다.

“배를 타고 돌아가시겠다고요? 왕도까지 겨우 하루 차이밖에 안 나요. 그냥 비행기 타고 가세요, 도련님.”

“아니, 뭐. 언제나 병사들과 함께 해야지. 비행기 타고 가면 나만 편한 것 같아서 말이지.”

이민호가 몹시 곤란한 표정으로 변명을 했다. 그러나 이민호의 고민을 읽은 감동은 가차 없었다.

“공주님이 다른 곳에서 소식을 듣기 전에 먼저 양해를 구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사실과 다른 말을 듣고 공주님이 도련님을 오해하면 더 큰 문제가 생겨요.”

“그렇긴 하다만, 솔직히 말해서 무섭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리고 매는 먼저 맞는 게 낫다죠?”

감동의 권유를 받아들여 어쩔 수 없이 징발된 여객기를 타고 돌아가기로 했다. 왕도가 가까워질수록 이민호의 얼굴이 허옇게 변했다.

입궁하자마자 별궁으로 가서 주상아 공주를 만났다. 주상아는 부황의 붕어 소식을 이미 들었는지 상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단순히 부친상을 당한 딸이 슬픔에 잠긴 모습이 아니라, 무척 초조한 표정이었다.

“북경에서 돌아왔소, 공주. 부황께서 훙하셨다는 소식은 이미 들은 모양이구려. 부황의 장례식 때 같이 갑시다.”

“수고하셨어요, 전하. 그런데 혹시 저희 어머니는 잘 계시나요? 설마 동생이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겠지요?”

“미안하지만 공귀비 마마께서는 궁정 암투 중에 돌아가셨소. 복왕도 마찬가지로 사망했소.”

“아아!”

비틀거리는 주상아를 이민호가 부축했다. 여기서 한 마디 더해야 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진정하고 들으시오.”

“부황께서 붕어하시고 어마마마도 돌아가셨는데 제가 어찌 진정하겠어요. 흑흑!”

그러나 주상아 공주도 황궁에서 자랐다. 궁정의 음모와 암투에 익숙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주상아는 어느새 슬픔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제 어머니와 동생이 제위에 욕심을 낸 모양이군요. 역모로 오인될 행동을 하지 말라고 그토록 말렸는데, 끝내 그렇게 됐다니 안타까워요. 전하께 미안하지만 다른 동생들과 조카들을 살려달라고 새 황상께 부탁이라도 해주세요.”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말이오.”

“네? 설마, 제가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주상아가 이민호의 품에서 벗어나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며 이민호가 할 말을 기다렸다. 눈치는 지독히 빨랐다.

“공귀비 마마와 복왕은 내가 직접 죽였소.”

“예?”

“교전 중에 유탄에 맞은 것도 아니고, 부하들을 시키지 않고, 내가 직접 두 분을 보내드렸소. 새 황상께서도 두 분을 역도로 규정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소. 물론 나머지 동생이나 조카들에게도 아무 죄를 묻지 않겠다고 하셨소.”

“왜 하필 전하께서 직접 손을 쓰셨나요? 너무 원망스러워요.”

“미안하오. 할 말이 없소.”

이민호가 주상아를 안으려 했으나, 주상아는 힘껏 뿌리치고 뛰어 가버렸다. 옆에서 선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선영아!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빌어야죠. 이럴 때는 그저 며칠을 두고 싹싹 빌어야 해요.”

“그럼 공주가 날 용서해줄까?”

“아니요.”

선영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살부의 원수를 갚아주면 노예로서 평생을 모시겠다고 선언했던 동가공주가 갑자기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공주님은 제국 황제의 따님이세요. 마땅히 주인님의 고충과 선택을 이해해주실 거여요.”

“그럼 좀 지나면 나를 덜 미워하겠지?”

이민호가 희망을 담아 물었으나 선영은 끝내 대답하지 않고 어물쩍 넘기려 했다. 명나라 황궁에서 일어난 암투의 후폭풍을 이민호 혼자 고스란히 뒤집어썼다. 한 달 후, 황제가 여러 가지 보상을 해주었으나 이민호는 여전히 손해 본 것 같아 전혀 개운치가 않았다.

============================ 작품 후기 ============================

이렇게 일단락지었습니다. 태창제가 즉위 한 달도 안 돼서 약 먹고 죽는 꼴을 보려니 너무 답답해서 공귀비를 이때 보내고 말았습니다.

주상아는 실존 인물이 아닌 것 같은데 예전에 위키피디아에 그럴듯하게 올라온 내용을 보고 선택해서 썼습니다. 야사인지 몰라도 정식 역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은 위키백과에 만력제의 가족사항이 비교적 자세히 나왔으니 참조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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