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879화 (828/1,000)

00879  97. 1620년, 한 시대의 마감  =========================================================================

“전하! 더 이상 들어가시면 곤란합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제가 태후마마께 고해서 허락을 얻어오겠습니다.”

“비켜라! 황태자 전하의 안위를 먼저 살펴야겠다. 그리고 태후는 누구를 가리키는 게냐? 당장 대답을 해라!”

건청궁은 평상시 황제의 거처 겸 집무 공간이었지만 태화전이 중건 중인 동안 정전 역할도 맡았다. 태화전은 흰 대리석으로 쌓은 3층 월대 위에 정면 11칸의 거대한 2층 건물이었다.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은 2층 월대 위에 정면 5칸의 2층 건물이라 태화전이 훨씬 커 보였다.

그러나 건청궁의 정문인 건청문은 1층 월대 위에 5칸 단층으로 돼 있어서 웅장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건청문을 지나 정면에 놓인 건청궁 본전은 2층의 거대한 건물이지만 역시나 세상의 중심을 다스린다는 대명 황제가 거처하기에는 작아 보였다.

“이제 보니 문제가 많구나. 여름인데 어째서 황상께서는 이화원이나 다른 여름 별궁에 가시지 않았느냐? 하다못해 궁후원의 흠안전에 계실 줄 알았는데, 이것은 상식 밖이다. 그리고 황상께서는 곤녕궁 같은 여러 침전을 내버려두고 건청궁에서 주무셨단 말이냐?”

“옥체를 보하기 위해 가급적 거둥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황상께서 건청궁에 거하신지 오래됐으므로 의심하실 필요 없는 줄로 아뢰옵니다.”

거대한 옥체를 가마에 태워 움직이다가 엎어지기라도 하면 큰 사고가 날 수도 있으니 그럴 듯한 대답이었다. 이민호는 알면서도 일부러 일반 백성들에게 먹혀들 만한 의혹을 제기했다.

사실 만력제 자체가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황제의 공식 침전인 곤녕궁은 화재 후 1605년에 이미 중건됐으며, 궁후원은 청대에 어화원으로 이름이 바뀌지만 후금이 멸망했으니 앞으로 그럴 일은 없었다.

황제가 걷는 대리석 길인 답도를 피해 걷느라 공간이 생기는 바람에 호위들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수백 명이 넘는 환관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이민호 일행을 지켜보았지만 나서서 막는 사람은 사례감 병필태감 최문승이 유일했다.

“여기까지입니다, 전하! 더 이상은 공귀비 마마의 허락 없이 정전에 드시면 아니 되옵니다!”

“시끄럽다! 제독태감이 감히 역적질을 하려 드느냐?”

이민호는 호위, 특전대원들과 함께 마당을 지나 건청궁 본전 안으로 입장을 강행했다. 그 전에 동쪽과 서쪽의 전각이나 건청궁을 사방으로 둘러싼 행각 안에 사람들이 숨어서 지켜보는 것을 알아챘다. 시위내관이나 금의위의 비밀 위사들이 분명했다.

“제가 역적질을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만 궁에서 물러나셔서 유훈이 발표되길 기다리시옵소서.”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황태자 전하의 안위가 확인된다면 언제든 물러나겠다.”

앞을 가로막는 사례감 병필태감을 발로 걷어차려다가 생각나는 게 있어서 참았다. 사례감은 환관 전체를 관리하는 부서였고, 사례감 병필태감은 사례감 장인태감(掌印太監)에 이어 모든 환관들의 두 번째 우두머리였다. 반역에 가담했다는 증거가 없는 한 괜히 환관들 전체와 척을 져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사례감 병필태감은 일반적으로 동창의 우두머리인 제독태감을 겸임했다. 재상이나 정승이 따로 없는 명나라에서 내각대학사들의 우두머리인 내각수보와 맞먹는 권력을 가진 자가 사례감의 장인태감이나 병필태감이었다.

“흠. 이제 보니 노공(老公)은 아주 오래 전에 고산국 왕도에 칙사로 온 적이 있었군. 태후께 바친다는 핑계로 홍삼과 비단을 몇 달 동안 거의 매점매석하다시피 했었지? 은 천만 냥은 족히 벌었겠더군.”

“하, 하하. 예.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어허! 감히 어디서 웃는 건가?”

이민호가 낮은 목소리로 근엄하게 최문승을 꾸짖었다. 국상 중에 웃었다고 큰소리로 꾸짖었다간 아무리 사례감 병필태감이라 해도 간관들에게 탄핵을 받아 목숨을 보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례감 병필태감이 고개를 깊이 숙여 감사를 표했다.

“아! 죄송합니다. 그때 전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제가 이 자리까지 출세할 수 있었습니다.”

“그 똑똑한 머리로 어서 판단하게. 어느 쪽이 든든한 동아줄인지. 어느 쪽에 붙어야 권력과 재산을 보존할 수 있을지 결정하게.”

“다 알고 계신데 어찌 제가 거역하겠습니까? 보좌 뒤를 조심하십시오.”

사례감 병필태감 최문승이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는 사이, 이민호와 호위들이 건청궁 본전 건물에 강제로 들어갔다. 최문승이 엎드리고 있어서 다른 환관들은 감히 저지하지 못했다.

건청궁 본전 건물 안에 들어가서 전면의 금룡보좌 주변에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이민호는 황제가 거하는 27개나 되는 침전을 일일이 찾아다니지 않아도 돼서 잘 됐다 싶었다.

“고, 고산국 국왕전하께서는 어찌 이토록 일찍 오셨습니까?”

“귀비 마마!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단상처럼 바닥보다 높은 금룡보좌에는 공귀비가 거대한 몸집의 복왕을 끌어안고 서 있었다. 몸집이 하도 비대해서 복왕이 아니라 만력제가 건강을 회복한 줄로 아주 잠시 착각했다.

그런데 금룡보좌 앞, 죄인처럼 바닥에 엎드려 있는 인물은 이민호가 익히 아는 황태자, 주상락이었다. 남들이 보면 만력제의 유훈에 의해 복왕 주상순이 다음 대 황제로 정해지고, 황태자 주상락이 동생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모양새였다.

“황태자 전하! 내일 아침이면 세상의 주인인 천자로 등극하실 분이 어찌 엎드려 계십니까?”

“형님! 어서 오십시오. 기다렸습니다.”

이민호가 주상락 옆에 무릎을 꿇고 그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러나 주상락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공귀비 마마도 저의 어머니이십니다. 아들로서 어머니의 소망을 들어드리는 게 효도겠지요.”

“이봐, 황태자. 그게 무슨 개소리야?”

이민호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며 황태자에게 물었다. 아직은 유서가 조작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이민호는 주변 상황을 바로 눈치 챘다. 이민호를 따라 들어온 호위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그 사이 감동이 몇 가지 수신호를 보냈다. 자금성을 둘러싼 해자에 놓인 다리 네 개 모두를 고산국 병력으로 차단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동창에 파견돼 사례감 병필태감이나 장인태감의 관할로 넘어간 인원을 제외하고 금의위 전체가 합법적인 제위 계승자인 황태자를 지지한다고 알려왔다.

“부황의 유훈은 따로 없다고 합니다. 부황께서 저를 황태자로 책봉한 것으로 후계 문제는 충분히 정리됐다고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제가 황제로 등극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래서 공귀비와 복왕에게 제위를 넘기겠다고? 공귀비가 황권과 사치 외에 백성들의 삶에 관심이 있던가? 복왕이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은 사실을 몰라? 황태자라면서 국정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군.”

이민호는 주상락이 얼마 전까지 고산국 왕도에 있을 때, 나중에 황제로 즉위하고 나서 어떻게 정사를 베풀지 그 꿈의 일단을 들은 적이 있었다. 가장 먼저 그 동안 만리장성에서 나라를 지키느라 고생한 장병들에게 내탕금을 풀어 위로해주겠다고 했다. 사르후 전투에서 죽은 병사들의 넋을 위로하고 유족들에게 휼전을 충분히 시행하겠다는 말도 곁들였다. 실제 역사에서 주상락은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내탕금 백만 냥을 풀어 병사들을 위로했다.

주상락이 그 외에 내정을 어떤 방식으로 운영하겠다고 포부를 밝혔으나 이민호는 그저 흘려들었다. 고생한 장병들과 유족들을 위로하겠다는 마음가짐만으로도 주상락이 황제의 자격을 이미 충분히 갖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만력제는 48년 동안 재위하면서 백성이나 병사들의 삶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래서 명나라는 빠르게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자기 생각밖에 못하는 복왕에게 정권을 맡기면 대명 제국이 어떻게 될까? 부황께서는 대신들 눈치라도 보셨지만 복왕은 아무런 생각이 없는 돼지 놈이야.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영토가 분열되어 종국에는 제국이 멸망하고 말겠지.”

“설마 그 정도겠습니까?”

“얼마 전에 내가 황태자에게 태후와 국왕, 모자지간에 편을 나눠서 내전을 두 번이나 벌인 프랑스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나? 권력에 눈이 먼 자들에게는 백성들이 떼거지로 죽든 말든 상관없이 권력이 먼저야.”

“크윽!”

“복왕에게 제위를 넘기면 백성들의 삶이 어떻게 될지, 얼마나 고달파질지 예상이나 해봤어? 오랜 전란으로 인해 명나라 전역에서 대략 3천 만 명 정도가 굶거나 병들어서 죽을 거라고 참모본부에서 보고한 적이 있었어. 누구 책임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주상락이 눈을 감고 부들부들 떨었다. 이로써 충분했다. 이민호가 일어나자 대전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공각황귀비 정 씨와 복왕 주상순, 그리고 수많은 환관들과 동창에 파견된 금의위 위사들이 이민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황태자가 책임을 회피한다는 뜻으로 알겠다. 알아서 해라. 나는 고산국으로 돌아간 즉시 황태자의 가솔들을 북경으로 보내주겠다. 이로써 고산국과 대명 제국의 관계가 끊기겠지만 섭섭할 것은 없다.”

“왕자와 공주들을 북경으로 보내겠다는 뜻입니까?”

“당연하지 않나? 복왕이 황제로 즉위한 다음 알아서 처분을 하겠지. 왜? 백성들 죽는 것은 괜찮고 자식들 죽는 것은 못 견디겠나? 황태자가 겨우 그 정도 그릇이었어?”

이민호가 씩 웃었다. 주상락은 심성이 굳세지 못해서 비난과 경멸이 가득 담긴 이민호의 눈길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했다.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잘 있어.”

이민호가 몸을 홱 돌려서 대전에서 나가려 했다. 공각황귀비와 그녀의 품안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던 30대 중반의 복왕 주상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민호가 병력을 이끌고 내전을 침범했으나 황실의 법도니 제후의 오만이니 하는 소리는 나오지도 않았다. 권력에 민감한 자들은 현재 누구에게 힘이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말은 다른 나라도 아닌 중국에 가장 잘 적용됐다.

“잠깐만요, 전하!”

“뭐야? 나는 이제 대명 황실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야.”

“황제가 되겠습니다. 주변을 치워주십시오. 여기서 벌어질 모든 일을 제 책임으로 하겠습니다.”

이민호가 눈을 크게 뜨고 몸을 돌렸다. 처음에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는 주상락과 눈을 마주쳤다. 그 다음에는 공각황귀비와 복왕이었다. 감동이 이민호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쓸어버려!”

“황태자와 우리를 겨냥하고 있는 놈들부터 사살해!”

- 탕! 탕! 타타타타탕!

호위들이 천장을 향해 총열이 짧아 보이는 불펍식 소총을 자동으로 난사했다. 천장에서 사람들이 후드득 떨어지지는 않았으나 붉고 가느다란 핏줄기가 석주처럼 아래로 흘러 내렸다.

그 사이 특전대대 요원들이 앞으로 뛰쳐나가 금룡보좌 뒤에서 짧은 칼을 쥐고 막 뛰쳐나오던 시위내관들을 사살했다. 그 직후 금룡보좌 옆의 나무기둥이 열리더니 창날이 튀어나와 특전대대 요원의 등을 찔렀고, 호위가 소총을 발사해 암습을 한 자의 머리에 바람구멍을 내주었다.

금룡보좌 주변에서 벌어진 전투는 순식간에 끝났다. 이들에게서 뿜어진 붉은 피가 비단옷을 입은 공귀비와 복왕에게 끼얹어졌다.

“꺄악!”

“고산국 국왕! 이게 무슨 짓이오?”

비명은 복왕이 질렀고, 이민호에게 호통을 친 사람은 공각황귀비였다. 몸무게가 120kg은 확실히 넘어가는 복왕 주상순은 어머니의 품에 파묻혀 오들오들 떨었다.

“감히 황태자를 향해 무기를 겨눈 역도들을 처단하고 있는 중입니다. 복왕이 아닌 황태자가 차기 황제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무기를 버려! 어서!”

황위 계승 중이라는 드립을 치고 싶었으나 꾹 참고 이민호가 고함을 질렀다. 금의위 위사들이 서둘러 무기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공귀비 주변에 서 있던 시위내관들은 무기를 뽑아들고 이민호와 호위들에게 달려들었다. 이들을 향해 두 종류의 자동소총이 불을 뿜었다.

- 투타타타타!

“그만! 제발 이제 그만 하시오!”

복왕이 비명을 지르고 공각황귀비가 두 손을 저었다. 대전 바닥에는 이미 30여 명이 쓰러져서 시뻘건 피가 내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짧은 칼을 뽑아든 시위내관들의 공격은 계속됐다.

그 동안 일반 환관들이 겁에 질려 엎드리거나 대전에서 뛰쳐나갔다. 뒤늦게 대전에 들어온 사례감 병필태감 최문승과 내각수보 방종철이 황태자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귀비마마께서 공격을 멈추셔야 우리도 사격을 멈추지요. 어쩔 수 없군요. 황태자의 안위를 위해 귀비마마를 사살해야겠습니다.”

이민호가 호위대장 선영에게서 넘겨받은 소총의 방아쇠울에 손을 집어넣었다. 불펍 소총은 권총 비슷하게 한 손으로도 사격할 수 있었다.

“고산국왕은 그만 하시오! 장인태감! 시위내관들이 저들에 대한 공격을 멈추게 하라!”

- 탕!

“저런! 늦었군.”

이민호가 소총을 선영에게 넘겼다. 총은 딱 한 방만 쐈으나 복왕 주상순의 머리를 뚫은 총탄이 공귀비의 가슴마저 관통했다. 두 사람은 천천히 쓰러지며 금룡보좌 위에 몸을 기댔다.

“죽는 순간에 소원을 풀었겠군.”

공귀비가 허망한 눈길을 이민호에게 던진 다음 고개를 모로 뉘였다. 복왕을 단순한 짐승으로 본다면 음모에 능숙한 공각황귀비는 책사에 가까운 위험한 인물이었다.

이민호는 황태자와 명나라 백성들을 위해, 그리고 고산국을 위해 무리수를 두어가며 두 사람을 제거했다. 공귀비가 배후인물이었던 홍환안이라는 사건으로 인해 황제가 즉위 29일 만에 급사할 가능성은 줄어들었다.

============================ 작품 후기 ============================

미래를 위한 정리...인데 과연 성공할지 아직은 의문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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