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878화 (827/1,000)

00878  97. 1620년, 한 시대의 마감  =========================================================================

“그래, 공부는 잘들 하고 있느냐?”

명나라 황태자 주상락에게는 비와 선시들이 여럿 있었고, 자식들도 많았다. 명 황실에서 후계자 교육을 담당하는 관료들이 통째로 고산국 왕도로 옮겨와서 왕자들의 교육에 힘썼다.

“예, 전하. 고산국의 중학교 과정과 명나라의 왕자 교육을 이중으로 받느라 힘들지만 원손 왕자님은 진도를 잘 따라가고 있사옵니다.”

“이보게, 환관. 나는 왕자에게 물었네.”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환관이 바닥에 엎드려 이민호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다. 환관이 잘못한 것은 맞으나 과도한 사과를 해서 보는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이민호가 손을 내저어 환관을 물러나게 하고 원손 주유교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냈다. 15세인 주유교는 똘망똘망한 눈을 이민호와 마주한 채 대답했다.

“방금 환관 이진충이 말한 것처럼 왕립학교든 황실 교육이든 학업 자체는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산국의 교육 과정은 공부보다는 사회성을 높이고 체력을 향상시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학교 수업을 마친 즉시 왕궁에 돌아와 명나라 황실 교육을 받는 것은 체육과 사회생활을 중시하는 고산국의 교육 과정에서 벗어난 것으로 압니다.”

“왕자의 말이 맞다. 고산국에서는 학생을 공부벌레로 키우지 않아. 학문에 뜻이 있다면 대학, 아니 대학원에 가서 제대로 공부를 시작해도 늦지 않거든. 하지만 원손은 고산국 교육보다는 황실에 필요한 학문을 닦는 것이 우선일 것 같다.”

이 자리에는 원손 주유교 말고도 초등학교에 다니는 왕자들이 줄줄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태자태부를 비롯해 왕자의 스승을 겸하는 고위관료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서 이민호는 명나라 황실의 교육보다 고산국 교육이 낫다고 주장할 수 없었다. 황제가 될지도 모를 명나라 황실 구성원들에게 고산국 교육을 강요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전하!”

“오! 우리 다섯째 왕자, 할 말 있으면 해봐라.”

“황실의 교육은 큰 형님과 둘째 형님만 받고 나머지 형제들은 고산국 백성들이 받는 일반 교육을 받으면 안 되나요?”

“흠!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왕자들은 황실 교육을 받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리고 황실의 위신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왕자들은 적절한 수준의 교육을 받아야 할 것이다.”

질문했던 다섯째 왕자 주유검이 잔뜩 실망한 표정이었다. 황태자 주상락도 어렸을 때부터 꽤나 똑똑했는데 왕자들 역시 다들 범상한 수준은 넘었다. 대화를 해보면 왕자들 중에서 주유검이 가장 똑똑한 것 같았다.

“같은 반 친구들은 마음껏 뛰노는데 저는 환관들이 뛰기는커녕 빨리 걷지도 못하게 해요. 전하! 저도 농구를 하고 싶어요.”

“황실 혈통이 뛰다가 다치면 안 되니까 그렇다. 아쉽겠지만 환관들은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 거란다.”

“왕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하고 싶은 운동도 못해야 하는 건가요? 차라리 서민으로 태어났다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환관들에게 농구를 가르쳐서 환관들과 함께 공놀이를 하면 어떻겠니? 다른 왕자들과 함께 놀아도 좋겠지. 시설은 궁에 만들어주마.”

“정말요? 헤헤! 고마워요.”

예전에 어린 후궁들을 교육시켰던 왕립여학교가 나중에 고산국 왕자와 공주들을 교육시키는 왕립학교로 바뀌었으나, 지금은 명나라 황실 가족들을 교육시키는 기관으로 다시 바뀌었다. 이민호는 명나라 황손들의 안위와 교육에 신경을 많이 썼으나, 명나라에도 황손들을 위한 교육체계가 있기에 따로 가르쳐줄 수는 없었다.

“알았다.”

호위대장 선영이 밖에서 준 쪽지를 읽은 다음 이민호에게 다가왔다. 이민호는 선영의 표정을 보고 큰 일이 생겼음을 알았다. 그래서 황손들은 환관들과 놀라고 한 다음 밖으로 나갔다.

“주인님. 북경에서 급보를 보냈어요.”

“음.”

이때쯤이면, 그리고 선영의 표정을 보면 무슨 일이 생겼는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도 명목상 명나라가 고산국의 종주국인 만큼 황제의 안위에 대해 조금이라도 불충한 발언을 할 수는 없었다. 호위대장 선영이 귓속말로 내용을 전했다.

“오늘 새벽에 황상께서 승하하셨어요. 그런데 공각황귀비 정씨가 황제의 유훈을 공개하지 않고 건청궁에서 버티고 있대요.”

“미친 짓을!”

“조작하려 해도 이제는 불가능할 거여요. 환관들과 고위 관료들이 건청궁에 구름처럼 몰려와 있거든요. 감동 장군이 항공대 기지에서 부대를 출동시킬 준비를 마치고 주인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어요.”

“나도 같이 가겠다.”

이민호는 호위들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왕도 남쪽 항공대 기지로 급히 달려갔다. 가는 중에 이민호와 호위들이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기지에 도착해보니 어느새 병력이 집결해 수송기에 탑승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감동으로부터 특전대대가 수송기 편으로 벌써 출발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정복이 아닌 전투복을 입고 얼굴에 위장까지 한 감동은 꽤나 멋져 보였다.

“도련님은 왕궁에 계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명나라 고관이나 황비들을 직접 설득해야 할지도 모르거든. 무선통신을 하면 씨알도 안 먹힐 테니 얼굴을 마주보고 설득하는 수밖에 없을 거야.”

“그럼 어서 타십시오. 북경 서쪽 임시 활주로를 본부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거기까지 직행하십시오.”

감동의 안내를 받아 임시로 군에 징발된 여객기에 함께 탑승했다. 여객기 안에는 특별임무부대 지휘부와 참모진이 타고 있다가 깜짝 놀라 이민호와 호위들을 위해 자리를 내주었다. 비행기가 아니라 조종사가 부족해서 현대 국가들이 보유하는 공군 1호기는 아예 만들지 않았다.

- 기이잉~

높은 소음과 함께 여객기가 활주로를 날아올랐다. 순항 고도에 올라선 여객기는 곧바로 북북서로 항로를 잡았다. 고도가 안정되자 이민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참모들에게 다가갔다.

“그 동안 준비를 많이 했군.”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전하.”

“고맙네.”

참모들은 자금성 미니어처를 보면서 작전 계획을 점검하고 있었다. 감동을 특별임무부대 지휘관으로 임명한 이후 도상 작전 연습이 숱하게 치러졌다.

금의위나 동창 등 황궁에서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이 어떤 위치를 잡는가에 따라 작전 내용이 정반대로 달라질 수 있었다. 황위 승계가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면 아무 일도 없이 나올 수도 있고, 여차 하면 자금성이 피바다로 변할 수도 있었다. 이민호 자체가 황실 가족의 일원인 탓에 황위 승계 과정에 고산국의 군세가 개입한다 해도 주상락과 결탁한 외세라고 부르기 어려웠다.

자금성 주위는 성벽과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 해자의 너비는 52미터, 깊이는 6미터나 됐다. 이번 작전에서 이 해자를 건너는 다리 네 개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여기가 건청궁인가? 깃발이 아주 빼곡하게 들어찼군.”

“예, 전하. 황태자가 건청궁에 들어가면서 금의위가 건청궁을 완전히 둘러쌌습니다. 그런데 사례감 병필태감 최문승이나 내각수보 방종철이 공귀비의 사람이라는 점에서 우려하던 큰일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방종철은 동림당이라면서 공각황귀비에게 붙었군.”

“지나치게 우유부단한 사람이라는 평가입니다. 적을 만들지 않아 출세하기에 유리했겠지만 이런 긴급 상황에서는 피아구분이 어렵습니다.”

1597년에 자금성의 3대전과 후3궁이 불탄 이후 정전인 태화전은 현재 중건 공사 중이었다. 그래서 만력제는 임시로 건청궁을 정전으로 사용했다. 만력제가 건청궁에서 죽으면서 건청궁이 역사의 핵심 장소로 떠올랐다.

황태자 주상락은 부황의 부고를 받은 즉시 건청궁에 입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례감 병필태감과 공귀비가 짰는지 주상락을 다음 대 황제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자칫 황태자가 이들에게 포로가 될 수도 있어서 이민호는 몹시 초조했다. 그러나 여객기로 날아가더라도 북경까지 두 시간 정도 걸렸기에 그 동안에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전하! 기내식으로 비빔밥과 라면, 순두부 백반이 준비돼 있습니다. 수라상에 어느 것을 올릴지 하명해 주십시오.”

“순두부 백반을 주게. 그런데 부기장은 조종실에 있지 그러나?”

전시라 스튜어디스의 친절한 봉사를 받지 못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부기장이 조종실을 떠난 것을 보고 이민호는 몹시 불안해졌다.

부기장은 항공대 출신 장교였다가 전역 후 국영 항공사로 옮긴 사람이었다. 기장과 부기장은 전시 임시계급을 부여받고 현역으로 복귀했다.

“여객기가 군에 징발되면서 원래부터 민간인이었던 승무원들은 탑승하지 못했습니다.”

“미안해할 것 없네. 식사준비는 호위들에게 시킬 테니 부기장은 조종실로 돌아가게.”

“신분이 높으신 분들께 식사 준비를 맡길 수는 없습니다.”

“지금은 전시에 준한 긴급사태야. 어서 돌아가서 임무에 충실하게!”

지금까지 숱하게 원정을 다녔다. 이민호와 호위들이 땔감을 직접 주워 모아 모닥불을 피우고 딱딱한 건량을 씹으며 전쟁터를 돌아다닌 적도 많았다. 호위들이 일어나 식사준비를 하러 기수 쪽으로 걸어갔다.

항공기 승무원은 여성들이 맡는 직종 중에서 꽤나 위험한 직군에 속했다. 이들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대신 척추나 무릎 쪽에 문제가 많이 생겼다. 그리고 고고도를 비행하면 방사능도 문제가 되는데, 이민호는 방사능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 대신 조종사와 승무원들의 비행시간을 제한했다.

“곧 북경 서쪽 임시 활주로에 도착합니다!”

기장이 보고한 직후 여객기가 고도를 내렸다. 승객들이 발을 바닥에 짚었으나 허공을 밟는 기분을 느꼈다. 이민호가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다가 소리쳤다.

“이 정도면 정귀비가 허튼 수작을 못 부리겠군.”

지상공격 무기를 갖춘 항공기 네 대가 자금성 상공을 비행하고 있었다. 거대한 비행체가 소음을 내며 날고 있는 동안 음모를 꾸미는 자들의 두뇌가 마비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높이 치솟은 궁궐의 처마에 가려 건청궁 주위를 제대로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착륙합니다! 안전띠를 확인해주십시오.”

부기장이 보고한 다음 조종실로 돌아갔다. 잠시 후 바퀴가 땅을 긁는 굉음과 함께 착륙 충격으로 몸이 앞뒤로 조금 흔들렸다. 비행기가 도착하고 주기장으로 향한 다음 완전히 멈췄다. 참모들이 승강구 문을 열었다.

“으아! 너무 덥다.”

북경의 더위는 고산국 왕도 고북의 더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이곳은 흙바닥이 땡볕에 완전히 노출된 활주로였다.

굉음에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다른 수송기들이 연달아 착륙하고 있었다. 소음 때문에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 감동이 이민호를 잡아끌었다.

“도련님! 이쪽으로 오시지요.”

“뭐? 안 들려. 연료가 부족하다고?”

“예. 예비용으로 빼두었던 저 직승기에 타시면 됩니다.”

“저기에 타라고? 감동이가 잘 지휘해!”

“예. 제가 건청궁에 먼저 내려서 주변을 장악한 다음에 도련님이 착륙하십시오. 불안하다 싶으면 직승기에서 내리지 말고 바로 이륙하십시오.”

이민호는 감동이 뭐라 하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작전계획대로 진행한다면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민호와 호위들이 탄 직후 임시 활주로에 늘어선 헬리콥터 30대가 차례로 떠올랐다. 그리고 채 5분도 되지 않아 자금성 상공에 도착했다.

- 다다다다다다~

“저기가 건천궁이야.”

“뭐라고요? 안 들려요.”

선영의 반응을 보고 이민호가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비행 소음 때문에 의사소통이 어 려운 상황에 대비해 훈련과 예행연습이 필요했다.

건천궁 주위 땅이 넓고 평평해서 패스트 로프 같은 레펠을 하지 않고 헬리콥터가 직접 내려앉았다. 회전익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바람이 건천궁 주위를 에워싼 금의위 위사들을 건물 쪽으로 내몰았다. 헬리콥터에서 고산국 병력이 내리자 위사들이 활과 창을 잡고 바짝 긴장했으나 전투는 발생하지 않았다.

“우리 차례야.”

“별 일 없었으면 좋겠어요.”

“공귀비에게 달린 문제야.”

선발로 착륙한 헬리콥터들이 다시 떠오르고 이민호가 탄 헬리콥터가 건청궁의 공터에 내려앉았다. 승강구가 열리고 이민호와 호위들이 내리자마자 헬리콥터가 떠올라 서쪽으로 날아갔다. 상복에 갈음하는 흰 군복을 입은 이민호의 등에 선영이 흰 망토를 입히는 동안 남자 호위가 중국어로 크게 소리쳤다.

“부마도위 겸 대명 북원왕, 고산국 국왕전하 납시요!”

“천세천세, 천천세!”

금의위 위사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이민호에게 천세를 연호했다. 무역에서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바로 이런 상황을 위해 이민호는 끝까지 명나라 황실의 일원으로 남아있었다.

대충 분위기를 살피니 금의위는 확실히 황태자 편이었다. 그러나 건청궁 궁궐 안에 바글바글한 환관들 중에는 공귀비 편이 훨씬 더 많은 것 같았다. 사례감 병필태감이라는 자가 이민호에게 인사를 올렸으나, 이민호가 갑자기 고함을 질러댔다.

“본 왕은 흉보를 받고 멀리서 달려왔다. 그런데 어째서 정전에서 곡소리가 나지 않느냐?”

“그, 그것은!”

“환관들의 얼굴에 기쁜 빛이 있도다. 혹시 황상께 아무런 일이 없는 것이냐?”

황궁에서 잔뼈가 굵은 자들답게 사례감 병필태감을 비롯한 환관들은 최대한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금의위 위사들은 건청궁 바깥쪽으로 향해 경계하고 있었기에 내부 사정을 잘 알지 못했다.

“그, 그렇지는 않습니다, 전하. 하늘이 무너졌는데 기뻐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환관들은 어째서 상복도 입지 않고 곡도 하지 않느냐? 저 웃는 표정은 뭐란 말인가!”

“오해입니다! 내관들이 울다 지쳐서 곡을 잠시 쉬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상복은 침공국에서 만드는 중입니다.”

“에잇! 불충한 것들! 황태자 전하는 어디에 계시느냐?”

이민호가 태감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건청궁으로 바로 들어갔다. 호위들과 특전대대 요원들이 이민호를 둘러싸고 전진했다.

환관들이 입장을 막으려 했지만 문이란 문은 죄다 걷어차면서 흉흉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밀고 들어갔다. 사례감 태감은 감히 말리지도 못하고 분분히 뛰어 이민호를 안내할 수밖에 없었다.

============================ 작품 후기 ============================

늦게라도 올립니다.

내용이 이어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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