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876화 (825/1,000)

00876  97. 1620년, 한 시대의 마감  =========================================================================

97. 1620년, 한 시대의 마감

왕자 개똥이가 산악부원들과 함께 히말라야에서 돌아왔다. 총함장 이순신은 삼년상 시묘살이 중이며, 항공대장 이면은 부친의 수발을 드느라 아직도 휴직 중이었다.

그래서 이면의 사관학교 동기와 1, 2년 후배들 위주로 정상 공략조를 선발해서 히말라야 산맥의 봉우리 하나를 또 다시 정복했다. 개똥이는 산악부 동료들과 함께 좀 더 낮은 곳에서 공략조를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공략조 네 명이 정상을 정복한 다음 내려오는 길에 두 명이 크레바스에 추락해 사망했다. 마침 기상이 악화돼 시신을 운구하지 못하고 철수 예정 시간에 맞춰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쯧쯧! 그나마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다.”

“이것아! 위험하니까 제발 그만 둬라. 어미의 속이 타들어가는 것을 모르느냐? 그리고 며늘아기를 청상과부로 만들 셈이야?”

이민호가 혀를 차고, 혜영은 눈물을 흘리며 아들의 고집을 꺾으려 했다. 혜영에게만 효자인 개똥이는 그러나 오직 등반하는 일만큼은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오스만 2세는 그 어린 나이에도 아랍어, 페르시아어, 그리스어, 라틴어, 이탈리아어에 능통하다고 하더라. 투르크어와 오스만 궁정 수화까지 합하면 7개 국어를 하는 셈이야.”

“저는 스와힐리어와 힌두어를 외국어로 선택했습니다만, 필요할 때마다 전문 통역사를 고용하는 편입니다.”

“그렇지. 외국어에 능통할 필요는 없어. 그런데 오스만 2세는 언어 외에도 여러 가지 제왕학을 익힌 모양이더라.”

“제가 제왕학을 익힐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똑똑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왕자들을 골라 후계자 교육을 시키는 게 어떻습니까?”

“어휴! 녀석!”

지난 연말에 예조판서가 오스만 제국에 다녀왔다. 아흐메드 1세의 아들로서 열네 살에 삼촌 무스타파 1세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켜 제위에 오른 오스만 2세는 의외로 매우 사려 깊은 군주였다.

오스만 2세는 페르시아와 평화협정을 조인하고 폴란드와의 전쟁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오스만 제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사이에 위치한 트란실바니아와 왈라키아, 몰다비아는 이 시대의 화약고였다.

예조판서는 임무에 충실한 사람이었고, 이는 외교 업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이스탄불의 시장에서 회전목마가 인기 있는 것을 알고 자세히 그려온 것이다. 놀이공원의 기구 중에 회전목마를 빼먹었던 이민호가 국방연구소 기술자들에게 전기 동력으로 움직이는 기계장치를 만들게 했다. 의자가 매우 다양했는데, 목마 외에 비행기나 장갑차, 마차도 있었다.

“그래. 이번 일로 많이 느꼈느냐?”

“예. 보다 철저하고 신중한 철수경로 선택이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

“네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이제 그만 둘 생각은 없고?”

고산국 영토 안에서 편하게 살 수 있는데도 고산국 젊은이들은 의외로 온실 속의 화초가 되려 하지 않았다. 군인이나 탐험가, 모험가를 지원하는 젊은이들이 꽤나 많았다. 이민호의 결정에 따라 외국을 정복하는 일은 없더라도 건국 초기라서 그런지 모험가 정신이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왕실 가족들 중에서도 개똥이 외에 여러 명이 왕실을 떠나 위험한 일을 도맡아서 했다. 지금도 몇몇 왕자와 공주들은 태평양과 대서양, 남미의 밀림과 아프리카의 초원지대를 누비고 다녔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도전입니다. 누군가 한다면, 그 일을 제가 하고 싶습니다. 내년 초의 등정에는 제가 정상 공략조에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그건 안 된다! 아아~”

“어마마마!”

“어서 어의를 불러라!”

그 말을 듣고 혜영이 실신했다가 일주일 동안 드러누웠다. 개똥이와 맏며느리인 육군 대위가 퇴근하고 나서 교대로 혜영이 입원한 병실을 지켰다. 이민호도 자주 병실을 찾았다.

“며늘아기가 고생이 많다.”

“아니옵니다, 주상전하.”

“아범이 아직도 철이 없지?”

며느리가 고개만 숙였다. 이민호는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왜 말이 없느냐?”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누군가 해야만 하는 일이고 그것이 위험한 일이라면 민간인보다는 군인이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군인은 왕실과 백성들을 지키는 소명의식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군인이라는 신분 앞에 왕실 가족이라는 의식은 거의 없었다. 이민호가 놀라서 혀를 찼다.

“그래. 부창부수로다. 아니! 생각이 같으니 결혼했겠지.”

“죄송합니다, 전하.”

“며늘아기 생각도 일리가 있으니 전혀 미안하게 생각하지 말거라.”

17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의 모험가들 중에는 현역 군인 신분이 많았다. 이 시대에는 모험 자체가 군사적 임무이기도 하고, 군인이 일반인보다 모험에 적합한 신체적 조건을 갖췄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서는 모험 자체가 전문화돼서 군인 비율은 대폭 줄어들게 된다.

갑자기 병실 복도가 시끌벅적해지더니 서너 살에서 예닐곱 살 먹은 어린애들 넷이 몰려왔다. 고산국에서 보기 드문 명나라 관복을 입은 아이들이었다. 이들 뒤로 명나라 궁녀들이 허겁지겁 쫓아오다가 이민호를 보고 멈춰선 다음 고개를 숙였다.

“고모부 마마!”

“오! 그래. 우리 왕자님, 공주님들 오셨어? 병원에서 뛰면 안 된다. 환자들이 놀라면 아야 하거든.”

명나라 왕족 아이들이 뛰어와 반쯤 주저앉은 이민호에게 안겼다. 돌덩이 같은 머리에 부딪혀 심영 흉내를 내지 않으려면 잽싸게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춰야 했다.

“네! 고모 병문안 왔어요.”

“어이구! 우리 착하고 예쁜 조카님들.”

명나라 황제 만력제의 장남이며 황태자인 주상락은 아들 일곱, 딸 둘을 낳았다. 주상락은 현재 북경 황궁에 거주하고 있으나 자식들 몇은 교육을 핑계로 고북에 남겨두었다. 1615년 정귀비의 측근에게서 사주를 받은 사냥꾼이 황태자의 거처인 자경궁에 난입해 각목으로 태감들을 두들겨 팬 정격안(梃擊案) 때문에 불안감을 느낀 탓이었다.

주상락의 장남 주유교는 아직 학교에 있을 시간이라서 동생들과 함께 병문안을 오지 않았다. 주유교는 나중에 천계제가 되는 인물로, 교육을 못 받아 목공 일로 허송세월을 보낼 가능성은 적었다. 어린 왕자와 공주들이 병실 문을 열고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고모 마마! 쾌차를 빌어요. 얼른 일어나세요.”

“고마워요, 왕자님들, 공주님들.”

침대에 누운 혜영은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눈 밑이 어두웠고 입술은 바짝 말라 터 있었다. 어의들이 자리를 피해주었다. 혜영이 고모가 아니라 고모부의 다른 아내에 해당했지만 호칭은 적당히 넘어갔다.

왕자와 공주들은 어린 나이에도 중국어와 조선말을 다 능숙하게 구사했다. 그래서 황제의 핏줄에 언어 습득 능력이 특화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어이없는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라서 외국어를 금방 배우는 것뿐이었다.

“개똥이 형님이 속을 썩여서 병을 얻게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비록 동생이지만 불효를 저지른 개똥이 형님에게 효경 구절을 인용해 엄히 꾸짖겠습니다. 그러니 얼른 일어나십시오.”

“호호! 고마워요, 왕자님. 제발 그렇게 해주세요. 개똥이보다 훨씬 어른스러우시네요.”

혜영이 어린 왕자와 공주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과일과 초콜릿을 나눠주었다. 역시 아이들이라 과일보다는 단 것을 더 좋아했다.

명나라 황제 만력제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주상락을 태자로 책봉한 이후에도 만력제는 여전히 정귀비의 소생 복왕 주상순을 총애하고 있었다. 황제의 총애를 업은 정귀비와 주상순이 만력제 사후 환관들과 함께 음모를 꾸밀까봐 주상락은 북경을 떠날 수가 없었다.

이민호와 황태자 주상락은 얼마 전 비밀협약을 체결했다. 유사시 주상락의 제위 승계를 도와준다는 내용이 협약의 핵심이었다. 이를 위해 특수전대대가 모종의 훈련에 돌입했다. 당연히 북경의 자금성을 장악하는 군사훈련이었다.

“현장 지휘는 누가 할래?”

국왕 집무실로 불려온 계복과 감동, 감불이 서로 얼굴을 바라봤다. 만약 고산국이 군을 투입했는데도 황태자 주상락이 제위에 오르지 못한다면 명나라와 전쟁이 날 수도 있었다.

주상순이 명나라 황제에 즉위한다면 그 동안 주상락을 비호했던 고산국과 반드시 전쟁이 난다고 봐야 했다. 고산국 본토가 명나라 해안에서 가까운 탓에 어려운 전쟁이 될 가능성이 컸고, 그래서 이번 작전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했다. 지휘관이 감당해야 할 부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민호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명나라와 전쟁을 하는 것보다는 정당한 후계자인 황태자 주상락을 옹립하는 궁정쿠데타를 일으키는 게 훨씬 나았다. 명나라의 정난공신으로 책봉돼 명나라 정치에 개입할 여지가 생기길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황제의 뒤를 봐줌으로써 여러 가지 이권을 얻을 가능성까지 배제하지는 않았다.

“다른 장군에게 맡기기 어려워. 셋 중에서 한 사람이 나서도록 해.”

“제가 하겠습니다, 도련님.”

“그래. 명예롭지 않은 임무지만 반드시 완수해내도록 해. 지원은 최대한으로 해주겠다.”

만력제가 죽은 다음 몇몇 황제가 즉위했으나 이자성의 난과 후금의 공격으로 명나라가 멸망한다고 이민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 역사에 관심이 없어서 태창제가 즉위 한 달 만에 죽은 것도, 천계제가 목공 일만 한 사실도 몰랐다.

그리고 이민호의 개입으로 인해 역사가 달라져서 천계제가 될 왕자는 일자무식이 아니라 고산국 왕도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명나라 황실에서도 원래 역사와 달라진 부분이 있을지도 몰랐다. 후금이 멸망했기 때문에 명나라가 멸망하지 않고 목숨 줄을 이어갈 가능성도 있었다.

“그건 그렇고, 지금 당장 안휘성에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칙사가 곧 우리 왕궁에 당도할 것입니다. 올해에도 명나라 반란 진압군을 꾸려서 보내야 합니다.”

“손해를 볼 일은 아니니까 파병하지 뭐. 그런데 절강과 안휘, 섬서와 사천 등등 반란이 일어나지 않은 곳이 없군.”

“절강과 안휘에서는 특히 반란이 자주 일어납니다.”

고산국 본토 바로 건너편 복건성은 명나라 영토이지만 지금은 이민호의 개인 영지나 다름없었다. 기후가 온화한 곳인데도 농경지 면적이 적어 인구가 적고, 산악지역 다수가 차밭으로 개간돼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어 반란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복건 순무는 임명된 직후 고산국 왕궁부터 찾아와서 부임인사를 하는 것이 관례화됐다.

“그거 알아? 복건의 산지에서 차 생산 효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 지난 10년 사이에 150미터나 산 아래쪽으로 내려왔어.”

“기후가 점점 추워진다는 뜻입니까?”

“그래. 황제와 환관들의 가렴주구도 문제지만 명나라의 농업생산량 자체가 줄어들고 있다는 뜻이야. 전에는 쌀이 남던 곳이 이제는 외지에서 쌀을 사서 먹어야 하는 곳으로 변해가면서 그 한계선이 점점 남진하고 있어.”

“앞으로 대규모 반란이 더 거세게 일어날 수밖에 없군요.”

“토지의 인구 부양 능력이 급속도로 저하하고 있어. 예전에 인구 부족이었던 지역이 지금은 인구 과잉이야. 반란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을 거야. 우리가 식량을 지원하더라도 내륙 쪽 교통이 불편해서 구제에 한계가 있겠지. 부패 문제도 있고.”

고산국 군인들은 명나라에 원정을 떠나 반란을 진압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상적인 군대끼리의 격돌이 아닌, 무장이 빈약한 반란군과 싸우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군인들도 흔했다. 반란군 상대로 싸우다가 부상이라도 당하면 창피해서 어디 가서 말도 못했다.

그리고 원정 기간 중에 식수 공급 문제도 심각했다. 고산국에서 원정군에 식수를 보낼 수 없어 현지에서 구한 물에 정수약을 타서 먹어야 하는데, 물맛이 끔찍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정군 병사들은 중국인들처럼 물을 끓여 찻잎을 타서 마셨다. 이뇨 작용이나 카페인 축적 문제 때문에 군대에서는 커피보다 차를 권하는 편이었다. 이민호가 복건성 대규모 차밭의 소유자라서 차 소비를 촉진하기 위한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차피 군인에게는 전투와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이 무료로 보급됐다.

============================ 작품 후기 ============================

앞으로 명나라 문제, 조선 광해군 반정 문제, 30년 전쟁 종결이 남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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