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871화 (820/1,000)

00871  96. 1619년 사르후 전투  =========================================================================

가택연금 중인 최 선생에게 이민호가 벌을 주면서 물었다. 물론 어느 누구도 이 행위를 벌로 인식하지 않았다.

“혹시 교사 봉급이 부족하오? 최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럴 리가요. 교사는 국초부터 군인, 경찰, 소방관만큼 전하께서 신경 쓰신 직종이에요. 급여수준이 높고 방학을 이용할 수 있어서 해외여행을 가장 많이 다니는 직업이잖아요?”

“자세를 바꾸시오. 아무래도 일부 교사들이 특권을 가졌다는 과시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오. 아니면 남을 공격하는 수단이거나.”

이민호가 한국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학생 부모들에게 촌지를 받으면서 촌지를 주지 않는 학생들을 공개적으로 괄시한 교사가 있었다. 겨우 몇 마디 말로 학생들에게 세상을 더럽고 비관적으로 보게 만든 대단한 교사였다.

다른 공무원도 마찬가지였지만 교사가 비리를 저지를 경우 현직에 복귀시킬 수 없었다. 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사회가 비리로 얼룩진 더러운 곳이라는 편견을 심어준다면 그야말로 최악의 교육환경이었다.

교육 행정과 밀접한 업무 관계에 놓인 출판국도 특별 감사에 들어갔다. 도서 발행과 인쇄, 유통을 맡은 출판국에는 일반적으로 큰 문제가 없었으나 외국인 작가와 작곡가 등 저작권자들과 출판 계약을 맺는 부서가 감사에 걸렸다.

저자가 생존 중에는 인세를 정상적으로 지급했으나, 사망할 경우 유족에게 제대로 된 저작권료를 지급하지 않은 것이다. 셰익스피어와, 같은 날 사망한 세르반테스의 유족에 대한 인세 지급을 끊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렇다고 지급해야 할 인세를 출판국 직원들이 사적으로 횡령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외국인 저자의 사망이 확인되면 출판국장을 비롯한 공무원들이 자체적으로 인세 지급 중단을 결정하고 인세를 국고로 반환했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전하! 억울하옵니다. 저희들은 그저 국가의 예산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 저자의 생존기간에 한해서 인세를 지급하기로 내부적인 시행방침을 정해 집행하고 있었습니다. 각종 서류와 회의록에 그 증거가 명백히 남아 있습니다.”

“저자 사후 50년 동안 유족에게 지급하라고 법에 명시된 것을 공무원들이 자의적 판단으로 지급하지 않았단 말인가?”

“저희들은 그게 더 합리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외국인이라도 작가와 작곡가들이 인류문화 발전에 공헌했고 고산국 백성들의 행복에 기여했기에 그 작가는 물론 유족에게도 저작권료를 지급하는 것이다. 만약 앞으로 외국의 저자들이 고산국과의 번역 출판계약을 꺼린다면 순전히 너희들 탓이다.”

천문관측 자료를 두고 티코 브라헤의 유족들과 케플러 사이에 진행된 재판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 유럽에도 희미하게나마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 물론 유족들은 그 관측자료 뭉치를 상속 가능한 재산권의 하나로써 주장했다.

“전하! 유족들이라 해서 저자의 직계비속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배우자나 형제, 사촌들의 경우 저자의 사망에 직간접적으로 책임이 있는 경우도 흔합니다.”

“변명은 필요 없다. 너희들은 법을 어긴 범법자들이다.”

이민호가 단순명쾌하게 유죄로 결정했다. 이를 바탕으로 합의부 판사들이 독직죄 항목의 직권남용죄에 해당한다며 출판국 공무원들에게 징역 1년을 선고했다.

출판국 공무원들은 억울하다면서 선처를 호소했다. 하지만 저자나 유족에게 저작권료를 지급함으로써 저작권을 정당하게 이용하는 것이 고산국에 훨씬 이익이기에 읍참마속하는 심정으로 이민호가 판결을 승인했다. 과잉충성이 아니라 공무원들이 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번에 적발된 공무원들의 비리로 인해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전하. 하오나 다른 나라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공직사회는 대단히 깨끗한 편이라고 감히 진언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오, 재판장. 범죄자 비율로 따지면 일반 백성보다 공무원이 조금 더 높은 것 같소. 아무래도 공무원들이 비리 유혹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오.”

“그래도 지금처럼 꾸준히 숙정 작업을 진행하면 공무원들이 비리를 저지르는 경우가 앞으로 많이 줄어들 것입니다.”

고산국에서도 공무원이 정책을 개인적인 목적에 이용하거나 정보를 빼내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금지를 반복했는데도 이사하거나 자식들이 결혼할 때 부하 직원들을 동원해 일을 시키는 경우도 흔했다. 정보국과 감사원에서 꾸준히 숙정작업을 벌였으나 권력을 과시하려는 자들은 지속적으로 적발됐다.

“그런 희망이라도 가져야겠지요.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오.”

그래서 권력에는 견제와 균형이 필요한데 공직사회를 견제해야 할 추밀원과 지방의회 의원들이 오히려 권력기구화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한국에서 살 때나 지금이나 의원들이라면 이가 갈렸다.

대의제가 성공적으로 정착하려면 아직도 멀었다. 과연 이민호가 살아있는 동안 입헌군주정으로 체제를 전환하는 일이 가능할지 심히 의문스러웠다. 경제적 이익을 악착같이 추구하지 않고 어렸을 때부터 남들과 평등하다고 교육받은 젊은 사람들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고산국 건국 이후에 태어나 제대로 교육받은 젊은 사람들마저 그런 비리를 저지를지는 몰랐소.”

“사람의 본성은 어디나 같습니다, 전하. 다만 해도 되는 곳과 해서는 안 되는 곳이 따로 있습니다. 고산국은 비리를 저지르면 절대 안 되는 곳이라는 공감대가 백성들에게 형성돼야 합니다.”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 법관들이 힘써주시오. 세상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오.”

“물론입니다, 전하. 저희 판사들도 세계 최고의 국가 건설에 이바지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정치인과 공무원, 기술자들뿐만 아니라 판사나 교사, 학자, 가수, 소설가들도 새로운 나라 건설에 기여한 바가 컸다. 이들은 국가의 철학을 만들고 강화하는 정신적 직무를 수행하는 자들이었다.

요즘에는 고산국에서 성리학이 영향력을 거의 잃어서 예전처럼 답답하지 않게 됐다. 능력도 없으면서 이민 와서 괜히 험담만 늘어놓는 유학자들은 이미 다 늙어 죽었다.

유럽에서 30년 전쟁이 시작되면서 에스파냐의 국가재정이 또 다시 파탄 직전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궁정 연회와 사치를 즐기는 에스파냐 국왕이 손을 벌릴 데라고는 오스트리아와 고산국밖에 없었다.

그리고 펠리페 3세의 총신 우세다 공작 크리스토발 데 산도발은 지금까지 고산국 영토라고 생각했던 필리핀 북부가 법적으로 고산국에 완전히 넘어가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부친 레르마 공작을 실각시키고 총신의 위치를 차지한 우세다 공작은 필리핀 북부 영토를 완전히 매입할 의사가 있는지 여부를 확인해달라고 고산국에 요청했다.

“예판! 형식적으로는 조차지로 계약했지만 사실상 영토 양도가 아니었나요?”

“사실상 영토 매매에 해당하는 계약이 맞습니다. 하지만 당시 필리핀 총독이 정치적 부담을 느껴서 계약서에는 분명 조차로 명시했습니다.”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령의 수도, 즉 멕시코 시까지 조약문이 왕복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탓에 완전한 영토 매입 계약을 체결하지 못했다. 그러나 영토 매입 계약이 아닌 조차 계약이라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고산국이 싼 값에 필리핀 북부를 손에 넣은 것도 사실이었다.

“이 기회에 정식 계약을 맺고 사버립시다. 에스파냐에서는 얼마 정도를 원하는 것 같습니까?”

“그들 입장에서는 많이 받을수록 좋겠지요. 하지만 조차 계약 당시에 에스파냐가 필리핀 북부를 완전한 영토로 획득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 증거를 제시해서 가격을 후려쳐야 합니다.”

“그게 좋겠소. 에스파냐로부터 영토를 사들인 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소. 미래를 생각한다면 실로 고마운 일이오.”

고산국은 북미와 남미 대륙을 에스파냐로부터 사들였다. 호주의 경우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존재 자체를 몰랐지만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인정하면서 고산국에서 매입한 셈이 되었다.

“하오나 전하! 남미의 페루 부왕령 일부를 제외하면 에스파냐가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는 영토를 판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에스파냐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전하께서 매입 형식을 빌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면도 있었소. 혹시 멕시코는 어떨까요?”

“멕시코 영토는 에스파냐에서 백년 넘게 공을 들였습니다. 이미 완전한 영토로 간주하기에 팔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예조 판서가 필리핀 북부 영토 구매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에스파냐로 떠났다. 이민호는 혹시 에스파냐가 멕시코를 팔지도 모른다고 기대해서 예조 판서에게 필리핀 북부 외에도 멕시코 구매 계약에 대한 전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멕시코에는 에스파냐의 국익이 크게 걸려 있기 때문에 예조 판서의 판단 대로 팔 가능성은 적었다. 그래도 에스파냐가 궁지에 몰리면 혹시라도 멕시코를 팔지도 모른다고 이민호는 기대했다.

필리핀 북부를 고산국 영토로 완전히 편입하기 전에, 그 동안 미뤄두었던 토지 제도를 손봤다. 토지 소유권을 국가로 이관하는 경제적인 문제였지만 이는 신분 제도의 개혁으로 나타났다. 지역 유력자들이 토지를 잃는 순간 백성들에 대한 지배력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술탄과 라자를 가리지 않고 특정 정치 세력 내에서 경작하는 농토의 면적에 따라 유력자에게 금화를 지급하고 국가에서 토지를 환수하는 것이 이 사업의 핵심이었다. 보상 대상에서 산과 호수, 강 등의 자연물은 제외했다.

술탄과 라자들을 소집해서 합의를 통해 적당한 가격을 정했다. 시골의 작은 왕에서 졸지에 엄청난 부자가 될 술탄과 라자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된다고 생각한 순간 심각한 사건이 발생했다.

“필리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반란은 아니고 내란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술탄이나 라자를 자칭하는 지역 유력자들이 국가에 토지 소유권을 이관하기 전에 더 많은 토지를 차지하려고 경쟁하는 것 같습니다.”

“이 인간들이 토지 보상금을 더 많이 받으려고 서로 싸운단 말이지?”

필리핀으로 출동할 준비를 마친 계복과 군 장성들이 필리핀에서 일어난 소요사태의 본질을 확인한 다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이민호의 결정을 기다렸다. 이민호는 골치가 지끈지끈 아팠으나 결단을 내렸다.

“자치권을 주되 다른 지역에 대한 군사적 침공을 금지시켰는데 감히 왕명을 어겨? 대원수! 당장 대원수 명의로 마을 경계선 원상회복과 무장해제를 하라고 포고령을 내려. 1개 사단을 파병해서 포고령을 위반한 집단을 무력으로 제압하도록!”

“1개 사단은 과하고 1개 연대와 밀림전을 상정해서 특전대대를 파병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해. 토지 보상금이 충분한데도 욕심을 부리는군.”

필리핀 북부가 면적은 넓어도 인구 밀집 지역은 농경지로 국한돼 있었다. 그리고 이 시대에는 필리핀 북부의 인구가 백만 명도 채 되지 않았다. 더욱이 지방마다 정치 집단이 산재해서 단결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고산국을 지지하는 유력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아서 더 많은 병력을 파병할 필요도 없었다.

“우세다 공작이 은 천만 냥을 요구했습니다만, 여러 가지를 지적해서 4백만 냥으로 깎았습니다. 매입대금은 가지고 간 은으로 결제했으며, 전하께서 서명하시면 매매조약의 효력이 발효됩니다.”

“오! 잘하셨습니다.”

필리핀 북부에서 발생한 소요사태를 진압하는 중에 예조판서가 돌아왔다. 예전 통화 기준으로 은 4백만 냥이면 부담 가지 않는 금액이었다. 물론 고산국의 모든 영토는 왕토이므로 국가가 아닌 국왕 개인이 사야 했다.

“혹시 멕시코는요?”

“그쪽에서 언급하기 전에 제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으려 했습니다만, 우세다 공작이 먼저 언질을 주었습니다. 지금은 아니라도 상황에 따라 리오그란데 강 인근을 비롯해 멕시코 영토의 일부를 팔 수도 있다고 합니다. 다만 멕시코 시와 몇몇 항구도시, 그리고 은광이 소재한 곳은 절대 판매하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전쟁이 불리해지면 야금야금 팔아치우겠지요.”

에스파냐라는 나라 자체가 딱히 수입원은 없고 지출은 엄청나게 많았다. 꾹 참고 기다리면 에스파냐가 멕시코를 팔 수밖에 없었다. 30년 전쟁의 전황이 만약 어렵게 돌아간다면 멕시코 전체를 싸게 매물로 내놓을 것으로 이민호는 기대했다.

============================ 작품 후기 ============================

적당한 시기에 유럽에 개입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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