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68 96. 1619년 사르후 전투 =========================================================================
압록강 건너 창성부로 돌아온 이민호는 전후 처리를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창성부 관아를 통째로 빌려 이민호와 원정군 지휘부는 주로 객사에서 업무를 보았다. 동헌과 서헌은 도원수 강홍립 등 원정군 지휘부가 차지하는 바람에 창성부사는 남문 옆 쪽방에서 아병(牙兵)들과 함께 뒤섞여서 새우잠을 잤다.
원정군 지휘부가 가장 먼저 처리한 업무는 전사자 운구와 부상자 구호였고, 이들을 실은 병원선이 첫 번째로 왕도에 돌아갈 예정이었다. 동맹군인 조선군에게도 이 문제에서만큼은 여러 가지 편의를 아낌없이 제공했다. 조선군 부상자들은 장갑차에 실려 안전하게 압록강을 건넜다.
“예허부 패륵의 딸이며 동가 공주의 조카라고? 고모와 많이 닮았군.”
그 와중에 손님이 창성부 객사를 방문했다. 여진 지역에 파란을 몰고 다녔던 동가 공주와 판박이로 닮은, 그러나 아직 어린 소녀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예허부 패륵은 여전히 집안의 전통적인 무기인 미인을 정치에 활용하려는 듯했다.
“동가 공주가 살아있었다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수십 년 동안 나라를 위해 살아왔다면 이제 그만 본인 스스로를 위해 살아도 되지 않겠느냐고. 그러나 동가 공주는 이미 고인이 됐지.”
“고모는 참으로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유창한 조선말을 구사하는 것으로 보아 이 여진 소녀가 어디에 사용되기 위해 훈육됐는지 충분히 알만했다. 이민호의 눈이 마주친 호위대장 선영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돌아가라고 하면 패륵에게 목이 베일 거라고 대답하겠지?”
“그, 그러하옵니다. 부디 이 불쌍한 소녀를 거두어주소서, 전하.”
“패륵이 보낸 선물이라 하니, 너에 대한 처분을 내 마음대로 정하겠다.”
“제 모든 것을 전하께 맡기나이다.”
12세 정도로 보이지만 그보다는 많을 것이 분명한 예허부 소녀는 미인은 확실한 미인이었다. 소녀가 관아 정문을 지나서 객사로 올 때까지 창성부 아병 두 명이 손에서 창을 놓쳤고 관노 세 명이 짐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이민호를 경호하는 여진 호위들보다 못한 성적이었다. 여진 호위들이 실외에 나타나기라도 하면 아병과 관노를 가리지 않고 사내놈이라면 죄다 엉덩이를 뒤로 뺀 채 엉거주춤 걸어 다녔다. 여진 호위들의 미모는 명나라 주안술과 인도의 비법, 고산국의 화장품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내 병사들 중에 이번 전투에서 화살을 맞아 팔을 절단한 젊은이가 있다. 겨우 열아홉 살에 그렇게 돼서 장가가기 어렵게 됐다고 무척 낙심하더군.”
“국가를 위해 희생한 영웅이십니다.”
“그렇다. 너는 그 병사가 병원에서 치료받는 기간에 수발을 들어라. 치료를 마친 다음 혼인할지 여부는 둘이 알아서 결정하도록. 만약 그 병사가 죽는다면 사인이 무엇이든 네가 죽인 것으로 알고 벌을 내리겠다.”
“예, 정성껏 수발을 들어 그 분이 건강을 되찾도록 돕겠습니다.”
예허부 소녀는 어전에서 물러나면서 얼굴 표정에 거의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그 소녀가 어쩐지 기뻐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치적 도구에서 해방됐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패륵이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나한테 시집오는 것보다야 훨씬 평화롭게 살 수 있겠지.”
“예. 주인님께 여자가 너무 많아요.”
이민호가 고개를 돌려 선영과 눈을 마주쳤다. 선영이 콧바람을 내뿜으며 고개를 홱 돌렸다.
창성부에서 명 황제에게 바칠 주문을 며칠 걸려서 작성했다. 경략 양호와 총병 유정, 총병 이여백뿐만 아니라 감군으로 참전했던 문관과 태감들이 창성부로 대거 몰려와서 전과 보고와 협의를 빙자한 눈도장 찍기에 바빴다. 특히 전투 없이 퇴각한 남로군의 지휘관, 총병 이여백은 경략의 군령에 따라 퇴각했음을 주문에 기록해달라고 이민호에게 통사정했다.
“본 왕부에서는 동로군 지휘만 맡았기에 다른 곳에서 일어난 전투는 잘 모르오. 그 부분은 양 경략이 주문을 따로 올려야하지 않겠소?”
“주문은 오직 고산국 국왕전하께서 지어 바치도록 칙명이 내려와 있습니다. 황상, 께서는 국왕전하를 가장 신뢰하시지 않습니까?”
양호가 서쪽을 향해 읍을 한 다음 요청했다. 마치 무슬림들이 메카 방향을 살피며 기도를 하듯이 명나라 관료들은 황제를 언급할 때마다 황도 방향으로 읍을 해야 했다.
“그럼 본 왕부에서 주문을 올리되, 양 경략이 쓴 내용을 별지로 첨부하면 어떻겠소?”
“그래 주시면 저야 감읍할 따름입니다.”
이번 후금 원정의 주력이 명군이다 보니 지휘체계가 묘하게 뒤틀려서 지위가 높은 이민호는 동로군만 맡고 총지휘관은 경략 양호였다. 그래서 결국 동로군은 작전 개시일만 같을 뿐 거의 독립 작전을 수행했다.
그러나 다른 부대의 전투상황을 모르는 이민호가 전체 주문을 작성해야 해서 문제였다. 특히 북로군과 서로군은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어서 사실 그대로 주문에 적기에는 부담이 컸다. 만약 동로군이 승리하지 못했다면 경략 양호는 사형에 처해질 뻔했다. 실제 역사에서 양호는 패전 책임을 지고 참형을 당했다.
“서로군과 북로군의 불행은 우리 연합군 전체가 걸머져야 하오. 다행히 건노를 상대로 마지막에 대첩을 거뒀으니 패사한 총병과 군사들의 명예를 위해 경략이 그럴 듯하게 지어보시오. 내가 비록 수급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전리품은 나눠줄 만큼 충분히 얻었으니 절반을 가져가시오.”
“전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복하옵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후금의 영역을 예허부에 넘기기로 경략과 합의한 것이다. 황제에게 주문을 올리고 조정의 결정을 기다려야겠지만 요동에 주둔한 관료와 장수들의 뜻을 하나로 모은다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병력을 많이 잃어 체면을 구긴 명나라 관료와 장수들은 황제의 분노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기세였다.
어차피 명나라는 명대에 축조된 장성을 넘어 영토를 넓힐 의향이 없기에 경략이 그렇게 주문을 올리면 황제가 인가할 가능성이 컸다. 예허부에 대한 영향력이 명나라보다 고산국이 더 커졌지만 명나라 조정에서는 변방의 안정을 최우선 국책과제로 두고 있으므로 이를 바람직한 변화로 인식했다.
“여진족은 평정됐다 치고, 아직 몽골족이 남아 있소.”
“그렇습니다, 전하. 몽골족이 서쪽은 오이라트, 동쪽은 할하로 분열됐다 해도 언제 통일돼서 장성을 넘을지 모릅니다.”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세운 명나라는 대대로 몽골족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후대 사람들이야 여진족이 명나라를 멸하고 청나라를 세운 사실을 알지만, 명나라가 유지되는 기간 동안 몽골족에 비해 여진족은 훨씬 약체로 취급받았다.
후룬 4부는 곧 해서 여진과 같은 집단이었다. 여기서 후룬과 해서라는 말은 원래 흑룡강 지류의 하나에서 비롯된 지명이었다. 이들은 15세기 이후 몽골족의 침공을 받아 남쪽으로 밀려나 현재 위치에 정착한 뒤에도 옛 본거지 이름을 사용했다. 동몽골 일부 부족들에 의해 여진족 전체가 밀려날 정도였으니 당연히 여진족보다 몽골족이 훨씬 강했다.
“참! 오이라트의 토르구트부와 동몽골 일부 부족들이 전하께 복속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소만 토르구트부는 멀리 서쪽으로 이주했으며 원래 오이라트의 주력 부족도 아니오. 오이라트의 나머지 전체가 다시 통일된다면 그것도 참으로 위협적일 것이오. 동몽골 부족들은 이합집산이 심하고, 일부가 고산국에 복속했다 해도 결코 믿을 수 없는 족속들이오.”
“실로 그러하옵니다. 다음 원정의 대상은 동몽골 아니면 서몽골 오이라트가 될 것 같습니다. 다음 번 원정에도 전하께서 힘써주십시오.”
“황상께서 명하시면 마땅히 힘을 보태드려야지요.”
이민호는 경략 양호와 함께 몽골족의 위협에 대해 한참 논의했다. 그래서 홍타이지에 대한 말이 나올 틈이 없었다. 후금의 잔여 세력을 잡지는 못했더라도 몽골 초원으로 쫓아낸 것만으로도 충분한 전공을 세운 것으로 인정받았다.
대승을 거뒀으므로 원정군에 대한 포상을 푸짐하게 실시했다. 전쟁 기간이 짧고 집단전을 수행했기에 승진보다는 주로 상금을 나눠주었다.
용병들은 상금과 함께 전원 참전 기장을 왼쪽 가슴에 달게 됐다. 복무 기간이 3년 이하더라도 언제든 가족과 함께 고산국에 이민 올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서 용병들의 자부심과 충성심이 한 없이 올랐다.
“소령! 강! 한! 일!”
스위스 2연대장과 구르카 여단장 등을 창성부 객사로 불러 훈장과 함께 일계급 특진을 시켰다. 용병 연대장은 소령 중에서도 고참이 맡는 직책이므로 실제 승진에 소요되는 기간을 단축한 것은 겨우 몇 달에 불과했다. 그러나 특진과 훈장을 받은 경력은 군 생활 내내 승진에 유리하게 작용하므로 특진한 장병들은 몹시 기뻐했다.
“이번 전쟁에서 강 소령이 스위스 보병연대를 아주 잘 운용했다. 보병방진이 그토록 빠르게 이동하리라 예상하지 못했어. 적을 격멸한 것도 중요하지만 빠르게 기동해서 동맹군인 조선군을 구해낸 공적이 크다.”
“감사합니다, 전하!”
“하지만 스위스 연대를 유럽의 전장에 투입할 경우 피해가 클 것 같아 걱정이다. 연대장에게 좋은 견해가 있다면 귀담아 듣겠다.”
“그렇습니다, 전하. 여진족은 화기 사용이 적었지만 유럽에서는 대포와 화승총, 수류탄 등 다양한 화약무기가 사용됩니다. 단발총의 한계가 있기에 스위스 용병을 고산국 정규군처럼 3선 대형으로 배치하긴 어렵겠습니다만, 방진을 짜더라도 화약 무기에 대한 대비가 충분히 이루어져야 합니다.”
물론 조선군과 명군이 화약 무기를 다수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후금 기병의 돌입을 막지 못해 큰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이 시기에 화약무기가 기병을 압도하지 못한 면도 있었지만, 모래바람이라는 최악의 변수 탓이 컸다.
그리고 병자호란 때 쌍령 전투에서는 주로 화승총으로 무장한 조선군 4만 명이 소수 청군 기병의 돌격을 막지 못해 붕괴된 사례가 있었다. 지휘부에서 전투 전에 포수들에게 화약을 조금만 나눠줬다가 분배하는 과정에서 화약이 폭발하는 바람에 패했다고 하는데,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인원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탓이 컸다.
“이번에 개량한 방탄복은 여러 모로 부족했어. 화력이 더 강해지면 병사들이 야전에서 몸을 드러낼 일이 줄어들 텐데, 지금은 참으로 어정쩡하군.”
이민호는 나폴레옹 전쟁과 미국 독립전쟁 때 보병들이 양편에 늘어서서 서로 총질하는 영화 장면들을 떠올렸다. 그 라인 배틀에 일개 병사로서 참전해야 한다면 정말 살 떨리는 경험이 될 것 같았다.
원정군 전체가 귀국했다. 후금의 옛 영역이나 조선 땅에서 오래 버티고 있어봤자 명이나 조선으로부터 괜한 의심을 받을까 봐 수송선이 오는 대로 병력과 물자를 실어서 보냈다.
“3월 20일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마티아스가 서거하신 사실은 이미 보고를 받으셨을 거예요. 마티아스 황제가 후계자로 페르디난트 2세를 키우고 있긴 했지만 그를 정식 후계자로 아직 지명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제 와서 문제가 되고 있어요.”
“마티아스는 자기가 좀 더 오래 살 줄 알았겠지. 보헤미아 반란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어?”
내정에 신경을 쓰고 싶어도 전 세계를 뒤흔들 30년 전쟁이 시작될 참이었다. 당분간 내정은 혜영에게 맡기기로 하고, 정보국과 예조 판서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양측이 맹렬하게 동맹군을 끌어들이고 있어요. 페르디난트는 사촌이며 에스파냐 국왕인 펠리페 4세의 도움을 받기로 했어요. 보헤미아 신교도들은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와 사보이 공작 샤를 에마누엘,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그, 트란실바니아 대공 가브리엘 베틀렌 등에게 신교도를 도와주면 보헤미아 왕위를 넘기겠다고 제안했어요.”
“왕위 하나로 여러 사람을 낚으려고 하는군. 신교도가 패하겠어.”
왕위를 여러 정치가들에게 제안했다는 것은 보헤미아 신교도들의 지휘부가 제대로 통합되지 못했거나, 전쟁에 이기기 위해 왕과 귀족들에게 사기를 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어느 쪽이 됐든 보헤미아 신교도들은 분열과 조잡한 외교로 인해 조만간 망할 운명이었다.
“예판 대감! 오스만 제국은 어떤가요?”
“유럽의 분열은 오스만 제국에게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오스만 제국이 북서부 국경에 군대를 증강시키는 것이 아무래도 오스트리아를 노리는 것 같습니다.”
“끄응! 우방이 많다는 것이 이렇게 답답하게 될 줄 몰랐지만 어쩔 수 없소. 당분간은 중립을 유지하면서 지켜보기로 합시다.”
“하오나 전하! 전쟁에서 중립이란 없습니다.”
“물론이오. 결국 어느 쪽으로든 참전하게 되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후금이 명을 공격하는 것을 알면서도 원래는 지켜보려고 했었다. 양쪽이 공멸하면 좋고, 역사 그대로 후금이 승리하더라도 고산국에게 더 좋은 기회가 생길 줄 알았다. 그러나 명나라 황제의 원군 파병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워 참전했고, 결국 후금을 지워버리고 말았다.
이번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에서도 결국은 고산국이 덴마크나 에스파냐를 도와주게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덴마크는 신교, 에스파냐는 구교라서 어느 쪽을 택하든 다른 한 쪽과 원수를 지게 된다는 점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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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가 공주 양산형 1호입니다... 이제는 여진 호위 양산형보다 못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