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66 96. 1619년 사르후 전투 =========================================================================
“주인님! 명군 유 총병이 조선군 진영에서도 명군이 전장 정리를 하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어요.”
“간신히 살아난 주제에 욕심도 참 많아. 아군 사상자의 목을 자를지도 모르니 접근을 금지시켜.”
지휘장갑차에서 통신을 맡은 호위에게 이민호가 지시했다. 전투 전에 도원수 강홍립은 물론 총병 유정에게도 통신반을 파견했었다. 그러나 후금 기병이 진지에 쇄도하는 그 급한 상황에서도 전령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더니 전투가 끝난 후에야 이렇게 통신을 사용했다.
“좋은 말로 후금의 잔적이 역습할 우려가 있으니 위치를 지키라고 할게요.”
“진짜로 잔적이 남아있어서 저놈들을 쓸어버리면 좋겠다.”
임진왜란 때 조선 민간인들의 목을 벤 다음 머리를 깎아 왜군 수급으로 위장한 것은 주로 여진족 출신 명군 병사들의 소행이라고 한다. 그러나 명군 지휘부에서 눈감아줬기에 그런 행태가 지속 가능했다. 이번에도 명군이 조선군이나 스위스 용병 전사자의 목을 벨 수도 있어서 이민호가 민감하게 반응했다.
명군과 조선군에서 발생한 전사자가 너무 많고 일일이 아군 전사자 숫자를 셀 수가 없어서 생존자들을 점고했다. 포로에서 석방된 2천을 포함한 명군 1만 2천 중에서 8천이 전사했다. 고산국 원정군이 구원해주지 않았다면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조선군 1만 3천 중에서 5천이 전사했고 부상자가 3천이었다. 조선군 우영은 거의 전멸하고 좌영은 전사자와 부상자를 빼면 반도 안 남았다.
고산국 전사자는 400여 명이 나왔는데 주로 구르카 용병에서 발생했다. 지난 며칠 동안 산악지대에 분산 투입된 구르카 용병들이 가장 격렬하고도 힘겨운 전투를 치른 것 같았다.
“동로군 전사자가 만 단위야. 쳇! 모래바람만 안 불었어도!”
“대신 팔기와 동맹 몽골족 기병 대부분을 전멸시켰잖아요. 후금의 전력이 예상 이상이었어요. 우리가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조명 연합군은 전멸했을 거여요.”
조선군과 명군은 전투 현장에 남아 전장정리를 실시하고 있었다. 후금 전사자들에게서 벗긴 갑옷과 투구, 무기 등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전사자 수만 명의 갑옷을 한 곳에 쌓는다면 주변 산보다 높이 쌓일 수도 있었다.
도원수 강홍립이 이민호에게 전령을 보내 후금군의 수급을 베어도 괜찮은지 물었다. 조선군 전사자는 따로 수습하고 부상자는 고산국 원정군 야전병원에 수용해서 치료 중이었다.
“전령! 조선군 방어진지 이내, 그리고 바깥 400보까지 범위에서 죽은 적군의 수급을 취하라. 나머지 지역에서 죽은 후금군 기병들은 조선군의 전공과 상관없으니 땅에 묻어주도록.”
“도원수에게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전하.”
조선군이 보유한 활과 조총의 사거리를 감안해 그 범위 안에 든 후금군 전사자를 조선군의 전공으로 인정해주기로 했다. 조선군 진영에서 싸운 고산국 보병 연대나 스위스 용병은 전리품을 따로 챙길 필요가 없었다. 병사나 용병들이 각자 단검이나 투구를 기념품으로 슬쩍 챙긴 것 같았지만 눈감아주었다.
전령이 돌아가고 나서 얼마 후 강홍립이 수하 장수들을 이끌고 직접 찾아왔다. 총병 유정도 예물을 갖고 와서 알현을 신청했다.
“대첩을 경하드립니다, 전하.”
“고맙소. 조선군도 열심히 싸워주었소. 다만 운이 나빠 모래바람에 휩쓸리는 바람에 전사자가 많이 생겼소. 동로군 최고지휘관으로서 내게도 책임이 있소. 은 10만 냥을 낼 테니 유족과 부상자들을 잘 구호해주길 바라오.”
“주상전하께 고해서 사상자들에 대한 휼전을 시행하되 전하께서 하사하신 은은 골고루 나눠주도록 하겠습니다.”
전쟁터가 된 부차 들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나절 전투치고는 어마어마하게 많이 죽었다.
“하온대 전하께서 명하신 지역에서 죽은 후금군이 2만 가량 됩니다. 절반 이상은 고산국 군대의 전공임을 아뢰옵니다.”
“조선에서도 이제는 나를 잘 알지 않소? 그 수급을 조선국 국왕전하께 바쳐 확인한 다음 천조에 보내시오. 소금에 듬뿍 버무려야 할 것이오.”
강홍립과 이민호가 동시에 인상을 찌푸렸다. 옆에서 침을 꼴깍 삼키는 유정과 달리 수급을 베어 바쳐야 전공으로 인정해주는 위정자들에게 혐오감이 든 까닭이었다.
“대인께 보고합니다. 험! 험! 건노들의 수급을 2만 과 정도 얻을 것 같습니다.”
“축하하오. 사상자가 많이 생겼지만 전공이 두 배 이상이니 유 총병은 상을 받을 것이오.”
국왕인 이민호가 지휘해서 그런지 동로군에만 유일하게 문관이나 환관 신분인 감군(監軍)이 따라붙지 않았다. 총병 유정에게 전공을 과장하지는 못하더라도 아군 사상자 숫자를 줄일 기회가 생겼다는 뜻이다.
실제 역사에서 1597년 말부터 1598년 초까지 벌어진 울산성 전투에서 아군 사상자 숫자를 줄여 승전으로 보고했다가 경리 양호가 탄핵을 받아 파면된 사례가 있었다. 명나라의 군제가 문란해지면서 돈으로 군사를 모집하다 보니 전과를 과장하는 것보다는 아군 사상자 숫자를 줄이는 일이 더 수월해졌다.
“북로군과 서로군에서 전사자들이 많아서 이 정도 전공으로는 황상께서 불 같이 노하실까 두렵습니다.”
“그렇다고 이미 땅에 묻은 후금 전사자들을 파내 목을 벨 수는 없지 않소?”
“그게 왜 안 되겠습니까? 작은 노고로 황상께 즐거움을 안겨드릴 수 있다면 그 이상의 일도 하겠습니다.”
이민호는 어이가 없어서 속으로 한참 웃었다.
“황상께 올리는 주문에 유 총병의 전공을 참급 4만으로 해주겠소. 수급이 너무 많아 운반하기 어려워서 절반은 불태우고 절반만 바친다고 하시오.”
“그래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명나라 장수들이 전공 욕심이 과한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괜히 말다툼하는 것이 귀찮아서 주문에 유정의 전공을 높이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 한가하게 전공을 두고 논할 때가 아니오.”
“맞습니다. 건노의 수도 허투알라를 점령해야 합니다.”
“허투알라는 이미 동해국 기병들이 점령했소. 하지만 그 전에 후금 사람들은 다 빠져 나간 모양이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살아남은 건노들이 몽골로 도주할 것 같습니다. 당장 추격해야 합니다.”
유정이 후금을 자꾸 건노(建奴)라고 불렀다. 건주 오랑캐라는 뜻이었다.
“마땅히 잔적을 추격해야 하나 후금은 기병이 주력이고 천군과 조선군은 기병 비율이 낮은 편이오. 특히 이번 전투에서 말이 많이 죽었소. 잔적이 많이 남지 않았을 테니 고산국 단독으로 추격할까 하오.”
“혹시 대인께서 전공을 독차지하시려는 것은 아닌지요. 앗! 실례했습니다. 건노 기병을 10만 가까이 쳐부순 것 이상의 전공은 없을 것입니다.”
이민호가 노려보자 유정이 얼른 말을 바꿨다. 이민호는 누르하치와 버일러들의 신상을 유정에게 넘겨 귀국시키려고 했다가 마음을 바꿔 먹었다.
명나라 장수 아니랄까봐 유정의 전공 욕심은 끝이 없었다. 욕심쟁이에게 양보를 해주는 것은 이민호가 몹시 싫어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포로로 잡힌 누르하치와 버일러, 아들들은 이민호가 직접 북경에 보내기로 했다. 본진과 창성부를 왕복하는 보급대를 불러 누르하치 등 포로 호송을 맡겼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잘 시간이 됐다. 내일 새벽부터 후금의 잔당을 추격하기로 했기에 오늘은 일찍 자기로 했다. 비좁은 장갑차라서 불편하지만 적이 야습을 가할 수 있는 지역에서 천막을 칠 수는 없었다.
“오늘 다들 수고했다. 특히 선희! 종군기자들이 네 이야기만 하더군.”
“네? 제게 벌을 내리실 건가요? 각오하고 있었어요.”
이민호가 칭찬을 하는데도 호위 선희가 무릎을 꿇고 오들오들 떨었다. 이민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사실 선희가 저지른 실수는 치명적일 수도 있었다.
나중에 심하 전투가 고산국 신문과 잡지에 기사화됐을 때 후금 기병들이 들판을 가득 메우며 몰려오는 장면과 시커먼 모래바람, 그리고 선희가 보급대 장갑차로 뛰어가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인 사진으로 실렸다.
이 장면들은 기록영화로 찍히기도 했다. 국왕의 호위 겸 후궁이 화살이 빗발치는 전장을 뛰어다니고 부대를 직접 지휘해 적 기마대를 전멸시키는 모습을 본 고산국 백성들은 국왕에게 후궁이 너무 많다는 소리를 다시는 하지 않게 됐다.
“보급대를 지휘해 적을 섬멸하는 모습이 마치 양떼를 지휘하는 암사자 같다고 하더라. 혼자서 화살 밭을 뛰어가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대.”
“잘못했어요. 방석이 그렇게 불에 잘 탈 줄 몰랐어요.”
“됐어. 지난 일은 잊어버려. 조종수 좌석을 인체공학적으로 바꿔달라고 국방연구소에 지시하마. 여기에 더해 난연성 재질로 만든 방석을 조종수들에게 보급하도록 할게.”
선희가 여전히 훌쩍거리기에 가까이 끌어당겼다. 선희 입장에서는 전과보다 실수가 커보였고, 이민호에게 버림받을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듯했다.
며칠에 걸쳐 대규모 전투를 치르느라 피곤했지만 이민호는 힘을 써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선희만한 조종수 겸 야전 지휘관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됐다니까, 참. 어쩔 수 없네. 벗어.”
“예, 예?”
선희의 바지를 속옷과 함께 벗긴 다음 위에 앉혔다. 나머지 호위들은 일제히 침낭 속으로 들어간 다음 모포를 머리 위로 잡아당겼다. 선희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필사적으로 신음소리를 참았다.
“너희 호위들은 내 가족이면서 동시에 전우야. 간혹 실수하더라도 꾸짖을지언정 벌을 주거나 버리지 않아. 그러니 걱정 마.”
“네. 흑~”
선희가 눈을 질끈 감은 채 두 팔로 이민호의 목을 꼭 껴안았다. 끝나고도 일인용 침낭에 같이 들어가 끌어안은 채로 잤다. 그제야 선희의 얼굴에 내려앉았던 어둠이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고 장갑차 연대와 기병 여단, 포병연대 순으로 출발했다. 구르카 용병과 스위스 용병이 뒤이어 따라오기로 하고 나머지 부대도 이어서 출발했다. 조선군과 명군은 전장 정리를 목적으로 부차 벌판에 남겨두었다.
매복을 주의하면서 산길을 지날 때 동해국 기병을 지휘하는 감동으로부터 무선 연락을 받았다. 계곡 사이에서 무선 통신을 유지하기 어려워서 어제 간단히 통화만 하고 말았다. 지금도 잡음이 잔뜩 끼어서 대화하기 어려웠다.
- 치익! 옥산, 설산이다. 들리는가?
“옥산 여섯이다. 말하라.”
- 도련님! 후금 잔당이 마구간 북서쪽으로 도주하고 있습니다.
무선통신 체계가 갖춰지면서 점차 현대 군대와 비슷한 호출부호와 암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마구간은 허투알라였고, 현재 동해국 기병이 점령 중이었다.
“그 방향은 무순 아닌가?”
- 서로군과 북로군이 전멸하는 바람에 명군은 무순을 방어하기도 벅찹니다. 무순 바로 앞을 지나 남몽골로 빠져 나가려는 것 같습니다.
“알았다. 설산은 마구간 주위에서 잔적을 소탕하라. 민간인에 대한 살상과 약탈을 금한다.”
- 민간인과 적을 구별하기 어렵지만 명을 받들겠습니다.
유목민들 중에서 군과 민간을 외형으로 구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무기를 들고 저항하면 적이고, 무기를 들었더라도 가만히 있으면 민간인이었다.
“감동님이 추격하는 쪽이 빠르지 않을까요? 아! 죄송해요.”
선영이 상식선에서 당연한 것을 물었다가 이민호가 눈을 찡긋하자 입을 다물었다. 홍타이지와 후금 잔당을 추격해 섬멸하는 것이 아니라 몽골로 쫓아내는 중이었다. 다만 명나라에게는 고산국이 추격하다가 놓치는 것으로 보여야 했다.
산길로 100km를 천천히 지나 이틀 후 낮에 무순 성 앞을 지나갔다. 무순 성은 작년에 후금에 의해 파괴됐으나 명나라 수비군 3천여 명이 해자를 복구하고 무너진 성벽에 목책을 두른 다음 주둔하고 있었다.
기다란 대열에서 고산국 태극기를 발견한 명군 병사들이 성벽에 몰려나왔다. 이민호에게 지시를 받은 통역관이 백마를 타고 무순 성벽 가까이 달려갔다. 감불은 1, 2사단을 지휘하며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고, 이민호가 직접 나서기 귀찮아서 통역관을 보냈다.
“우리는 동로군에 속한 고산국 원정군이다. 후금 잔당을 추격 중이다. 후금 놈들이 이곳을 지나갔지?”
“예! 건노들이 몰려와 무순을 공격하려다가 갑자기 부랴부랴 도망쳤습니다! 그것이 바로 한 시진 전입니다!”
통역관이 확성기를 대고 묻자 성벽 위에서 명나라 장수가 대답했다. 명나라 장수는 못해도 유격에서 부총병 정도는 되는 고위급 장수 같은데 고산국 육군 대위인 통역관에게 몹시 공손하게 대했다.
“고산국 장수께 여쭙겠소! 혹시 건노를 상대로 이겼소?”
“당연히 이겼다. 후금 기병 10만 정도를 섬멸하고 노적을 사로잡았다. 나머지 패륵들도 대부분 죽이거나 생포했고 일부 잔당을 추격 중이다.”
“오오! 역시 고산국! 승첩을 경하드립니다. 누르하치를 사로잡았다니 대단합니다.”
“급히 추격하느라 자문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으니 이곳 장수가 심양의 양 경략에게 급히 알려라. 그런데 적은 얼마나 되던가?”
“그래서 건노 집단에 여자와 아이들이 포함됐었군요. 건노는 기병과 아녀자, 아이들을 다 합해서 3만 정도 돼 보였습니다.”
“알았다. 성을 잘 지키도록 해라! 전군, 전진!”
통역관이 지휘봉을 앞으로 내뻗는 순간 백마가 뒷발로 서서 힘차게 앞발을 굴렀다. 고산국 원정군은 즉시 북쪽으로 출발했다.
통역관이 호가호위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했다. 이민호는 저 통역관이 전역한다면 예조 외교관으로 추천해주고 싶었다.
============================ 작품 후기 ============================
어제 못올려서 죄송합니다. 전자책 두 권을 교정보느라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후금이 완전히 끝장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하지 않지만 나중에 또 나올 겁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