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62 96. 1619년 사르후 전투 =========================================================================
동로군은 밤새도록 후금 기병의 야습에 시달렸다. 10일 넘는 힘겨운 행군을 마치고 몇 시간 동안 주둔지 진채까지 건설한 3국의 병사들은 몹시 지쳤지만, 교대로 야간 경계임무를 수행하며 후금의 산발적인 야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서쪽 산에 가까이 주둔한 조선군이 걱정됐으나 야전에서는 만만해도 주둔지를 지키는 일은 참 잘했다. 방어력은 높지만 화력이 약한 명군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강가에 배치시켰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매일 밤 야습에 시달린다면 며칠 이내에 피로가 쌓여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자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몸이 굼떠지기 마련이었다.
동로군은 우모령 고개를 넘은 다음 계곡을 따라 이어진 약간 넓은 들판인 부차 남쪽에서 후금의 주력을 기다리기로 했다. 더 이상 전진하지 않는 것은 기병이 활동하기 좋은 부차 벌판에서 싸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금은 예상 외로 산악지대에서도 기병을 충분히 활용해서 골치가 아팠다.
“여긴 춥다.”
“북쪽이니까요. 실내 온도를 더 올릴까요?”
“아니, 괜찮아.”
이민호는 에픽 하이와 이하이가 같이 부른 인상적인 노래를 떠올렸으나 선영이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장갑차 내부는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지 않았지만 앞으로 일을 생각한 이민호는 마음이 추웠다.
눈치를 채고 선영이 이민호가 들어간 일인용 침낭 안으로 억지로 파고 들어왔다. 그리고 엄마가 아이를 안듯이 이민호를 꼭 껴안아주었다. 이민호는 선영의 마음이 고마워서 불편해도 꾹 참았다. 남녀의 몸이 밀착했으나 동계 전투복은 방탄조끼를 벗더라도 두툼한 편이라 전혀 감흥이 일지 않았다.
“답답하세요?”
“추운 것보다는 낫지. 고마워.”
이곳 부차나 후금의 수도 허투알라는 압록강에서 가깝기에 평안도보다 더 추운 것은 아니었다. 양력 4월에도 산간에 눈이 쌓이고 길이 진창인 것은 전 지구적인 기온 하강 때문이었다.
잦은 홍수와 가뭄, 요동과 후금, 평안도의 만성적인 흉년도 기온 변화와 관계가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서 30년 전쟁이 시작되고 아시아에서 후금이 공세로 나선 것도 기후 변화로 인해 살기가 어려워지면서 남의 것에 욕심을 내는 탓이었다. 그러나 기후 변화는 인간이 어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더 답답했다.
항상 그랬듯이 다시 아침이 돌아왔다. 여러 지휘관들이 점고한 바에 따르면 밤새 야습에 시달린 것치고는 사상자가 많지 않았다. 진채 일부가 기병 돌격에 뚫려 위기에 몰렸던 명군에서도 아침에 확인하니 사상자는 겨우 30명을 넘지 않았다. 다만 외곽에서 가장 격렬하게 싸운 구르카 용병부대에서 사상자가 백여 명 정도 발생했다.
“으악~ 아악! 나를 구하라~”
“저건 또 무슨 소리야?”
웬 영어 문장을 직역한 것 같은 말투에 이민호가 호기심을 품었다. 말 타고 갑옷을 입은 후금 기병이 갑옷은 물론 군복도 입지 않아 종인(從人)이 틀림없을 만한 조선인을 뒤쫓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숲에서 땔감을 채취하던 종인들이 후금 기병들에게 기습을 당한 것 같았다. 도주하는 종인이 숲에 들어간 종인 수십 명 중에서 유일한 생존자일지도 몰랐다.
후금 기병이 내지르는 기병창이 종인의 등을 꿰뚫으려는 찰나, 화살이 날아가 말 옆구리에 꽂혔다. 말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순간 두껍고 무거운 갑옷을 입고도 후금 기병은 중심을 잡으며 땅에 착지했다. 몽골족과 여진족은 낙마 과정에서 부상을 입거나 죽는 경우가 다른 문화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드물었다.
그러나 뒤이어 날아온 화살이 그 기병의 목을 꿰뚫었다. 먼 거리에서 활을 연달아 쏘아 명중시킨 사람은 역시나 조선군 좌영장 김응하였다. 김응하가 급히 기병들을 모아서 종인들이 일하던 숲으로 보낸 다음 이민호에게 찾아왔다.
“송구합니다, 전하! 종인들을 호위하기에 충분한 병력을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습격을 받아서 다 죽은 모양입니다.”
“후금 선발대가 시간을 끌기 위해 우리 보급선과 비전투원인 종인들을 집중적으로 노리는 것 같소. 불이 필요하면 우리 취사대가 사용하는 화로를 빌리시오.”
“전하께 또 신세를 지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김응하가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아 다행이었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종인들을 숲으로 들이민다면 또 다시 수십, 수백 명을 무의미하게 잃을 수도 있었다. 명군과 조선군 중군과 우영에도 고산국 화로를 사용하도록 전령을 보냈다.
마침 강홍립과 유정이 아침 문안인사를 하러 찾아왔다. 둘 다 밤새도록 야습에 대응하느라 눈이 퀭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후금 본군이 정말로 오겠습니까? 우리가 좀 더 들판 쪽으로 이동하길 기다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후금 기병이 6만에서 10만으로 추정되오. 몰살당하기 싫으면 우린 우모령과 이곳, 부차 들판이 시작되는 곳에서 기다려야 하오. 어떻소, 도원수? 후금 기병 때문에 병참선을 유지하기 어렵겠소?”
조선에서 제공한 지도에는 창성에서 허투알라까지 100리라고 돼 있었다. 그러나 창성부 관아가 아니라 창성부 영역인 압록강을 기준으로 부차까지가 이미 직선거리로 100리 정도였다. 실제로 거리를 재지 못했기에 오차가 크게 발생했다.
물론 꼬불꼬불한 산길을 가야 했으므로 평지보다 실제 이동거리가 몇 배나 됐다. 그리고 가파른 오르막과 진창에 더해 후금 기병이 주변의 나무를 길에 쓰러뜨려서 치우면서 이동하느라 치중대가 몹시 힘겨워 했다.
치중대는 무엇보다도 후금 기병의 습격을 두려워했다. 무장이 빈약한 치중대 입장에서는 눈 덮인 숲에서 기병들이 창을 꼬나 쥐고 한꺼번에 튀어나오면 기겁하면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다가 기병에게 따라잡히면 다 죽은 목숨이었다.
“상당히 어렵습니다, 국왕전하. 후방 병참선 중간 중간에 보루를 쌓고 기병을 배치했습니다만, 기병 천여기로는 완벽하게 방비하기가 불가능합니다.”
“마침 고산국 원정군에 필요한 연료와 탄약, 식량 등 무거운 보급품의 운반을 끝냈소. 오늘부터는 조선군과 명군이 쇠마차를 이용하도록 하시오.”
“오오! 감사합니다, 전하!”
도원수 강홍립이 기뻐한 것과 달리 유정은 시무룩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후금 기병에 의해 병참선이 완전 차단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천군도 조선 영토를 통해서 보급선을 유지하시오. 창성부 관아에만 도달시키면 적지는 쇠마차로 이동시키면 될 것이오. 그 동안 부족한 보급품은 나눠주겠소.”
“지난 수십 년 동안 매번 대인께 신세를 져서 대국의 체모가 말이 아닙니다. 대인께서는 황상의 진정한 충신이십니다. 감사합니다.”
“어허! 천조나 조선이나 고산국이나 다 같은 식구이니 고마워 할 필요 없소.”
수십 년 동안 명나라 관리나 장수들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아왔으나 이민호는 일관되게 명나라에 우호적인 정책을 쓰고 황제가 요구할 때마다 매번 병력을 파견했다. 이민호가 명나라 영토에 야심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던 관리와 장수들도 이제는 지칠 때가 되었다.
쇠마차로 흔히 칭하는 차량은 수송용 장갑차였다. 전투용 장갑차는 상대방 공격무기의 위력에 맞춰 현대 장갑차에 비해 방어력이 턱없이 낮았고 기동력을 중시해서 차체가 무척 가벼운 편이었다. 심지어 초기형인 무한궤도 대신 바퀴가 여럿 달린 장륜형이었다.
그런데 수송용 장갑차는 비포장도로와 험지를 통과하기 위해 엔진 추력이 높고, 게다가 무한궤도였다. 적지에 고립될 것에 대비해 장갑이 두껍고 무장도 충실히 달았다. 현대에 병력 수송 장갑차는 장륜형, 전투용 장갑차는 장궤형이 일반적인 추세임을 감안하면 고산국에서는 거꾸로 된 셈이었다.
“어제 후금 팔기 중에 2기가 이미 도착했고, 다이샨과 홍타이지가 이끄는 2기를 포함해 총 4기가 도착할 예정이라고 했소. 그러나 오늘 보니 병력이 늘어나지 않았소. 아마도 뒤늦게 도착한 2기는 후방으로 돌아가고 있는 듯하오.”
“그럼 큰일입니다. 후금 기병은 산지와 평지를 가리지 않고 빠르게 기동합니다. 잘못하면 병참선이 차단되겠습니다.”
“기병임을 감안하면 2기는 독립 작전 수행도 가능한 대군이오. 그런 대군이 병참선 차단 역할을 할 리가 없지 않소? 병참선을 괴롭히는 역할은 기병 1, 2천기로 족할 것이오.”
“그럼 설마 기병 2만 정도가 후방에서 우리 본진을 칠 수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저 들판에 대기 중인 기병 2만과 동시에 공격하기로 작전을 짰겠지요. 동뜨기 직전이나 식사를 마치지 않은 아침나절이 기습하기에 딱 적당한 시간일 것이오.”
이민호는 말을 하다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지금까지 이민호가 했던 재수 없는 예상은 항상 여지없이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전투를 하더라도 아침밥이나 먹고 시작하길 바라는 것이 전장에 나온 모든 군인들의 한결같은 소망이었다.
- 타탕! 탕! 탕! 쾅!
“후방에서 총성입니다, 전하.”
강홍립이 불안하게 남쪽 고개를 바라보았다. 총병 유정은 살아남기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이 허옇게 변했다. 역시나 시간에 맞춰 전방에서도 기병 2만 기가 몰려오고 있었다.
“우모령 쪽이오. 구르카 용병들이 기습을 성공한 모양이오.”
“그 작달막한 산사람들 말입니까, 전하? 하오나 후금 기병은 척후를 잘 운용해서 기습당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건노들의 안마당 아니겠습니까?”
“과연 그럴까요? 자기 땅인데도 지리를 모르는 경우가 더 많소. 그리고 아무리 경계하더라도 기습하려고 작정하면 당할 수밖에 없소.”
이민호가 땅에 발을 쿵 하고 굴렸다. 그러자 강홍립과 수하 장수들 사이, 그리고 유정과 가정들 사이에 쌓여 있던 작은 눈 언덕 여러 개가 위로 솟구치더니 흰 위장복을 입은 자객 여섯 명이 앞으로 휜 칼을 강홍립과 유정에게 들이밀었다.
만약 이들이 적이었다면 두 사람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현재 우모령 남쪽에서는 이런 식으로 적에 대한 기습작전이 실시되고 있음을 두 사람에게 가르쳐준 것이었다. 구르카 용병 2개 연대가 후금 팔기 2기를 효율적으로 막아낼 것으로 믿었다.
“허억! 이런 작은 눈 무더기에 설마 사람이 숨어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물론 땅 밑을 파서 몸 대부분을 숨겼지요.”
호위대로 편입된 구르카 용병들이 허리를 굽혀 사과하곤 뒤로 물러났다. 구르카 용병은 총을 갖고 있을 때보다 칼을 갖고 있을 때 더 위협적이었다. 구르카 용병에게 쿠크리 단검 하나를 쥐어주면 몇 십 명으로 구성된 악독한 인도의 열차강도단 따위는 혼자서도 쉽게 때려눕혔다.
“전하! 적의 기병들이 몰려옵니다. 전하께서 지휘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고산국 육군 중장 감불이 조선군과 천군을 비롯한 동로군 전체를 통합 지휘할 것이오. 조선군과 천군의 본대에 각각 통신대를 파견할 테니 오늘 전투는 감불 장군의 군령에 따르시오.”
“예, 전하!”
후금 기병 2만기가 지축을 울리며 남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도원수 강홍립은 마음이 급해서 얼른 수용하고 허둥지둥 본대로 돌아갔다. 총병 유정은 뭔가 할 말이 많은 듯했지만 체념했는지 이민호에게 공손히 읍을 하고 돌아갔다.
- 쿠쿵! 콰앙~
본대 뒤에 배치된 기병연대에서 포를 발사했다. 기계화 우선순위가 항상 가장 높은 포병연대는 경포 2개 대대와 중포 1개 대대, 대대는 3개 포대 24문으로 구성됐다. 포탄이 낙하하는 곳마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후금 기마병들을 말과 함께 마구잡이로 쓰러뜨렸다.
그러나 빠르게 달려오는 후금 기병 군단은 포탄이 낙하하는 지점을 통과하고 좌측에 전개된 조선군 좌영과 본영을 목표로 삼아 떼 지어 돌격해왔다. 후금 기병이 자꾸 조선군을 공격하는 것은 조선군 보병이 만만해 보였기 때문이었고, 서쪽의 산에서 가까워 포위공격을 하기 쉬워서였다. 그러나 남쪽과 서쪽에서 동로군을 포위하기 위해 이동했던 2기는 구르카 용병에 의해 차단됐다.
조선군 살수들이 장창 뒤축을 땅에 꽂고 창날을 앞세워 기병 돌격에 대비했다. 후금 기병을 향해 조총탄은 간간이, 그러나 화살은 끊임없이 날아갔다.
- 뚜루루루룩~
예전보다 훨씬 빠르고 부드러워졌으나 여전히 귀에 거슬리는 소음이 연속 울렸다. 고산국 무기는 끊임없이 개량돼서 같은 이름이 붙은 화기라도 시간이 지나면 성능 자체가 달라졌다.
고산국 장갑차 수십 량에서 기관총을 발사하자 후금 기병들이 줄줄이 낙마했다. 말이 총알에 맞아 쓰러지는 동안 기수가 제대로 착지하더라도 뒤에서 동료가 탄 말이 밀쳐 넘어뜨리고 다른 동료의 말발굽이 기수를 짓밟고 지나갔다.
- 피비비비빗!
여진족도 몽골이나 조선 기병처럼 훌륭한 기마궁사였다. 하늘을 까맣게 뒤덮으며 날아온 화살의 비가 조선군 좌영과 본영을 덮쳤다.
- 터터터텅!
참나무 방패는 관통 가능성이 높은 쇠방패보다 화살 공격에 더욱 적절한 대응책이었다. 화살이 잇따라 꽂히는 방패 뒤에 숨은 살수들이 창을 내밀어 기병 돌격을 저지하는 동안 살수들 양 옆에서 포수들이 조총을 쏘고 뒤에서는 활을 쏘았다.
“적이 물러가요. 준비된 방어진에 기마 돌격을 감행한 결과가 몹시 참혹하군요. 잠깐 벌어진 전투인데도 후금인 사상자가 수천이나 발생했어요.”
“이런 공격을 당해본 적이 없어서 많이 놀랐을 거야. 하지만 이것으로 오늘 전투가 끝나는 것은 아니겠지.”
전투가 시작되면서 이민호는 호위들에 의해 강제로 장갑차로 끌려왔다. 차량 밖으로 머리를 내미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해 겨우 잠망경으로 전황을 살피다가 이제는 아예 드러누워 버렸다. 호위들이 교대로 잠망경을 통해 바깥을 살피면서 전황을 중계했다.
“주인님! 북쪽에서 기병들이 끊임없이 몰려와요. 못해도 3만 이상, 뒤에 보병도 많아요. 후금의 본진이 도착한 것 같아요.”
“드디어 본격적인 전투가 되겠군. 먼저 협상을 해야겠지만.”
이민호가 벌떡 일어났다. 손님을 맞이할 차비를 갖추기 위해서였다. 이민호는 누르하치가 제안할 것이 무엇이 있는지 머릿속으로 검토했다. 그러나 협상은 단지 후금이 주둔지를 건설하기 위한 시간 끌기에 불과하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결전은 이 다음 날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