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61 96. 1619년 사르후 전투 =========================================================================
“찾아 계시옵니까, 전하?”
“오! 어서 오시오. 승첩을 축하하오.”
좌영장 김응하가 막사로 찾아오자 이민호가 기쁘게 맞았다. 김응하는 이민호에게 꼬박꼬박 전하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김응하는 원래 역사에서 좌영이 전멸한 후에도 마지막까지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한 장수로 유명했다. 여진족들은 그에게 유하(柳下) 장군이라는 별명을 붙였고 명나라 황제는 요동백을 추증했다. 조선에서는 강홍립이 후금에 항복한 일을 가리기 위해 끝까지 싸우다 전사한 김응하 헌창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감사합니다, 전하. 작은 전투였을 뿐입니다.”
“군졸들 움직임을 보니 좌영장이 훈련을 아주 잘 시킨 것 같소. 내가 동로군의 총대장으로서 좌영장에게 상을 내리고, 좌영에서 공을 세운 군졸들에게 상을 내리라는 명을 내리기 위해 불렀소.”
좌영장 김응하는 커다란 활을 세 개씩이나 차고 다녔다. 이민호는 연개소문이 칼 다섯 자루씩 몸에 지니고 다녔다는 이야기와, 어떤 해적 만화에서 칼 세 자루를 사용하는 캐릭터를 떠올렸다.
원래 조선군에서는 모든 장병이 활 두 장, 활시위 네 줄을 기본으로 갖고 다니도록 규정돼 있었다. 그러나 궁대에 활 두 개를 넣고 다니는 사람을 보기는 쉽지 않았다.
“상을 받기 위해 싸운 것은 아닙니다, 전하.”
“그러나 공을 세운 장졸들에게 상을 제대로 주어야 잘못했을 때도 역시나 제대로 벌을 받을까봐 두려워할 것이오. 그리고 군졸들은 좌영장이 내리는 상에 관심이 많을 것이오.”
“그렇다면 감사히 상을 받겠습니다.”
조선에서도 고산국에서 발행한 10원 금화와 1원짜리 주화가 잘 통용됐다. 이민호는 김응하 개인에게 천 원을 상으로 주고, 공을 세운 군졸들에게 나눠주라며 5천 원을 건네주었다.
김응하가 묵직한 돈주머니를 휘하 군관들에게 넘겼다. 돈에 전혀 관심 없는 표정을 보아 김응하 개인에게 준 상금도 군졸들에게 나눠줄 것 같았다.
“전하께서 제 활에서 시선을 못 떼시는군요. 큰 활 두 장은 일반 각궁을 크게 한 것에 불과합니다.”
“영장의 팔 힘이 무지하게 센 모양이구려. 그런데 왜 활을 세 개나 갖고 다니는 것이오?”
“예비용이라기보다는 활마다 탄성과 용도가 각각 다릅니다. 하나는 장거리용, 하나는 관통력 강화형, 마지막으로 일반 각궁은 연사용입니다. 제가 아직 활을 다루는 게 서툴러서 세 개씩이나 필요합니다.”
“영장은 명궁이면서 지나치게 겸손하신 것 같소.”
이민호는 김응하와 차를 마시며 한 동안 대화를 가졌다. 돈을 주고 모집하거나 갑작스레 징병해서 훈련이 제대로 되지 못한 명군과 비교하면 원정군으로 차출된 조선군은 조직력이 잘 갖춰져 무척 강한 편이었다.
임진왜란 직후 훈련도감이 설치되고 척계광의 <기효신서>에서 비롯된 삼수병 제도가 조선에 정착됐다. 사수와 살수, 포수가 유기적인 연계를 하며 적을 상대하는 것이 삼수병제의 요체였다. 삼수병이 기병을 상대로도 잘 싸우는 것을 오늘 전투에서 확인해서 다행이었다.
“전쟁에서는, 특히 원정일 때는 보급이 가장 중요하다고 배웠습니다. 고산국은 커다란 쇠수레를 이용해서 진창길도 거뜬히 지나가는 것을 봤습니다. 혹시 그것이 제갈량의 수레라면 만드는 법을 조선에 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역시 영장은 장군답게 총이나 포가 아니라 수송 수단을 눈 여겨 보는군요. 수송 장갑차는 제갈량의 수레가 아니라서 제작법을 가르쳐주기 어렵소. 그리고 고산국에서는 군사 기술이 외국에 유출되지 않도록 신경 쓰고 있소.”
“정 그러시다면 할 수 없겠습니다. 이번 원정에서 고산국에서 군량을 나눠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김응하를 잘 몰랐다가 대화를 해보니 고산국으로 영입하는 것이 절대 불가능할 것 같았다. 유능한 장군이라 몹시 아까웠지만 무리하게 영입할 필요는 없었다.
“버일러 홍타이지가 고산국 국왕전하께 처음으로 인사 올립니다.”
“반갑네. 자네 부친을 처음 만난 날 자네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지. 그 날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이렇게 장성했군 그래.”
김응하가 좌영으로 돌아가고 나서 예기치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호위병 둘만 거느리고 적진에 인사하러 온 홍타이지는 20대 중후반의 야심 넘치는 청년이었다. 이민호는 누르하치의 아들인 이 청년이 나중에 청 태종이 되든 말든 별 관심이 없었다.
홍타이지(皇太極)가 에센 타이시처럼 몽골에서 관명으로 활용되는 타이시(太師)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본명이 아니라고 보는 설이 있다. 그러나 후계 문제가 아직 확정되지 않은 때에 누르하치의 여덟 번째 아들에게 후계자 명칭을 줄 수는 없었다. 그리고 1621년 실록에서 조선 비변사가 홍타이지를 홍태주(洪太主)라고 언급하며 형제들의 위상이 비슷하다고 평가했으니 후계자의 위상을 나타내는 특별한 이름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국왕전하께서는 명나라 원정군의 서로군과 북로군이 전멸한 것은 알고 계시겠지요?”
“물론. 남로군이 퇴각한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국왕전하께서 후금의 영토에 남아 계시는 것은 어떤 이유이신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황제폐하로부터 금을 치고 허투알라를 점령하라는 칙명을 받았다. 불가능하지 않다면 칙명을 받들어 임무를 완수할 계획이다.”
“남조의 군대가 패해 물러났는데도 말씀입니까?”
“물론이다. 전국이 단순해져서 내 입장에서는 아주 편하게 됐다.”
홍타이지가 이민호의 말에 감탄하는 듯했다. 물론 명군이 패퇴함으로써 쉽게 승리하지는 못하겠지만 고산국 원정군을 이끄는 이민호 입장에서 후금 군대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결코 허세는 아니었다.
“고산국은 이미 대국인데 어째서 명나라의 제후국을 자처하는지 그 이유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황상의 부마니까. 그리고 이웃나라와 사이좋게 지내려면 이웃나라의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주는 게 좋지.”
여기서 누가 말 몇 마디 한다 해서 어느 쪽이 물러나거나 항복할 계제는 아니었다. 그런 사실은 이민호도 알고 홍타이지도 알았다.
“인사하러 오긴 했는데, 사실 나한테 별로 할 말이 없지? 총지휘관이 아니니 결정권도 없을 테고.”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본진에 남아있는 전사들은 제 용기를 칭송할 것입니다.”
“후계 경쟁에서 유리해지겠군.”
“그렇습니다. 세계를 주도한다고 소문 난 국왕전하께서 도대체 어떤 분인지 궁금한 점도 있었습니다.”
“버일러에게 충고하겠네. 이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일세. 만약 공개된 장소에서 자네 엉덩이를 까서 곤장을 친다면 전사들 사이에서 자네 권위가 뚝 떨어질 거야.”
“설마 그렇게 하지는 않으시겠지요?”
“후후! 내게 여유가 없었다면 그렇게 하고도 남았겠지.”
“남들 보는 앞에서 곤장을 맞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민호가 여유 넘치는 표정으로 홍타이지를 돌려보냈다. 그러나 현재 동로군은 그리 여유가 있는 편이 아니었다.
다르한 히야의 선발대는 물론이고 수르하치의 아들 아민이 이끄는 부대가 동로군 후방에서 보급로를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버일러 아민은 그 짧은 시간에 산을 타고 넘어서 후방에 출몰하고 있었다.
“후방에서 총소리가 연이어 울리니까 다들 불안해하는 것 같아. 어떻게 대응하고 있나?”
“보급로에 창병을 집결시켜서 기병 돌격을 막고 외곽에서 활동하는 구르카 용병들은 중대 단위로 활동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잘했다. 감불이 너도 이럴 때는 신중하구나.”
일부러 저돌적인 감불을 원정군 지휘관으로 선정했으나 감불은 후방 보급로를 지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부차 남쪽이 산악지대라 해서 기병이 활동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비좁은 계곡과 숲에서 여진 기병들이 날뛰는 꼴을 보니 어이가 없습니다. 말이 작다 해도 힘이 약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작고 강한 말들 덕택에 저들은 산악기병이 됐습니다.”
“후금 기병이 타던 말 몇 마리를 잡아온 걸 봤어. 말이 작아도 다리가 굵더군. 어렸을 때부터 훈련을 시켰겠지.”
“옛날 고구려나 산악 지역 여진족들이 망아지 때부터 말발굽에 뾰족한 징을 박아서 산길을 오르내리며 힘을 키운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여진족 기병이라면 당연히 드넓은 평원에서 집단으로 몰려다니는 것을 예상했는데 후금 기병은 전혀 달랐다. 소규모로 흩어져서 말을 타거나 끌고 산길과 계곡을 오가면서 유격전을 하는 후금 기병을 막느라 원정군 병력의 절반이 보급로 경비와 외곽 경계에 투입됐다.
“도련님은 왕도에 계시지 그랬습니까? 우리가 패하지는 않겠지만 도련님이 계시니까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길까봐 불안합니다.”
“어쩔 수 없지. 감불이 네가 조선국 도원수나 명나라 총병관을 지휘한다면 저들이 따를 것 같아?”
“지휘권 문제 때문에 원정 나갈 때마다 도련님이 계셔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웃깁니다.”
“그렇다고 우리 군대를 저들의 지휘에 맡길 수도 없잖아.”
감불이 투덜거렸지만 대안이 없었다. 감불은 외곽 경계에 투입할 병력을 교대시키고 시간별 야간에 근무할 당직 사령을 선정했다.
“나도 당직 사령을 해볼까? 산골이라 밤이 너무 길어서 말이야.”
“도련님이요? 그럴 시간에 호위 애들 엉덩이나 두들겨주세요. 그게 왕실의 번창을 위해서 좋겠어요.”
“쳇!”
후금은 8기 중에서 4기를 동원했으나 동로군 병력이 더 많았으므로 함부로 싸움을 걸지 못했다. 제대로 된 전투는 누르하치가 칸 직속의 상3기를 거느리고 와야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으로 예상됐다.
“누르하치가 허투알라에 들렸다는데 때맞춰서 비행기로 폭격해버리지 그랬어요?”
“그렇지 않아도 내성 지역에 폭격을 했다만, 누르하치는 비행기에서 관측하지 못하는 곳에 거처를 마련한 모양이야.”
“정찰을 하면서 후금 지역에서 비행기를 너무 자주 사용한 것 같습니다. 비행기의 눈과 공격을 피하는 방법을 연구했겠지요.”
“후금은 20년 넘게 전쟁을 준비했어. 쉽게 끝날 전쟁이 절대 아니다.”
밤이 되어 이민호는 여진족 호위들과 함께 장갑차로 들어갔다. 선자 돌림 호위들은 예전 호위들과 달리 장갑차를 직접 몰았고 웬만한 정비도 호위들이 스스로 할 정도였다.
- 찰싹!
이민호가 호위대장 선영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선영이 황당한 얼굴로 이민호를 돌아보았다.
“어머나! 왜 제 엉덩이를 때리세요?”
“사령관 감불의 군령이다. 왕실의 번창을 위해서래.”
“뭐라고요? 깔깔깔!”
선영이 목젖이 보일 정도로 크게 웃었다. 10대를 고된 훈련과 교육으로 보내고 이민호를 지키는 것을 일생의 사명으로 여기던 고지식한 선영도 그 동안 많이 밝아졌다.
- 타탕! 탕! 탕!
자정쯤 돼서 가까운 산에서 총소리가 연속 울렸다. 후금 기병이 야습을 하기 위해 본진에 접근하다가 구르카 용병에게 걸려 전투를 진행하는 소리였다.
총소리와 말이 달리는 소리가 계속 가까워졌다. 접근하다가 발각되면 웬만해서는 야습을 포기하고 퇴각할 텐데, 다른 팔기 부대와 연계된 작전인지 외곽 경계망을 억지로 뚫고 들어오고 있었다.
- 두두두두두~
“오호! 돌파에 성공했군. 후금 기병이 어디까지 들어왔어?”
“조선군과 1사단 사이 경계 지역을 통과해서 깊숙이 진입하고 있어요.”
선영이 잠망경을 돌리며 장갑차 바깥에서 진행되는 전황을 살폈다. 두 부대가 포진한 중간의 빈 공간을 활용해 적진 깊숙이 들어가는 것은 옛날부터 훌륭한 작전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양쪽으로부터 총격을 당한다는 점에서 시대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 퍼엉~
후금 기병이 전진하는 앞쪽 하늘에서 조명탄이 터지면서 침입자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들을 향해 총탄과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갔다. 자그마한 말이 총탄에 맞고 울부짖으며 쓰러졌다.
“야습에 얼마나 동원된 것 같아?”
“일천기가 안 돼요.”
“다르한 히야가 지휘하는 선발대인 모양이야.”
고산국 1사단과 조선군 좌영 사이에 낀 후금 기병들은 양쪽에서 가해지는 사격에 거의 몰살당했다. 천여기에 달하는 말과 기병들이 무더기로 쓰러져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동로군의 주둔지 외곽에서 활을 쏘거나 징을 치는 후금 기병들이 있었다. 지금 당장 대규모 야습이 없다면, 동로군 병사들이 잠을 자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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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며칠 이어질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