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858화 (807/1,000)

00858  95. 전쟁의 서막 1618년  =========================================================================

9월 초에 알프스 남쪽 사면에서 거대한 산사태 겸 눈사태가 발생해 이탈리아 북부 피우로 읍에서 2천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집트에 주둔한 스위스 용병 1개 대대와 의료진을 급파해 구조작업에 나서려 했으나, 사보이 공국에서 외국 군대의 입국을 불허하는 바람에 무위에 그쳤다.

고산국이 에스파냐는 물론 그 적대국인 베네치아하고도 가까워서 사보이 공국에서 피아를 구분하기 어려운 탓이었다. 사보이 공국에서 왕도로 사절을 보내 사과했으나, 여러 강대국들이 원정군을 보낼 때 길목에 위치한 사보이 공국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겠다고 답신을 보냈다.

9월 19일부터 보헤미아의 플젠 시가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가 이끄는 신교도 군대에 의해 포위됐다. 프라하 시청 4층 창문에서 보헤미아 국왕의 대리인들을 집어던질 때 이미 예기된 사태였다. 이것은 30년 전쟁에서 최초로 벌어진 주요한 전투였으며, 두 달 뒤에 플젠 시가 함락되면서 보헤미아 반란을 본격적으로 촉발시켰다.

고산국은 보헤미아와 외교관계가 없었고, 플젠 시가 함락되더라도 최종적으로 에스파냐가 이길 것으로 판단해 참전무관단을 에스파냐 쪽으로 파견했다. 이민호는 보헤미아 반란이 끝날 때까지 무관들을 교대로 전장에 파견하라고 육군과 참모본부에 지시했다.

“학생들끼리 싸우는 일이야 워낙 흔하고 화해를 하면 없던 일로 하고 넘어갑니다. 그런데 본안 사건은 다수의 학생들이 몰려다니며 소수의 학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해 정기적으로 금품을 갈취했다는 점에서 특수 강도죄의 상습범에 해당합니다.”

“판사님들 표정이 안 좋으시군요. 계속하세요.”

판사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골치 아픈 사건이 생겨서 오랜만에 이민호가 법정에서 재판을 친람했다. 피고석에는 척 봐도 어려 보이는 10대 중후반 아이들 다섯 명이 죄수복을 입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다섯 명은 모두 고등학교 1학년이며 현재 기준으로 만 16세 넘은 아이가 셋, 생일을 앞둔 아이가 둘이었다. 만 16세가 성인이라지만 이민호가 보기에는 다 애들이었다.

“비슷한 상습범이라도 절도는 경제적 범죄라서 개별 범죄 형량의 두 배 정도로 감경되는 반면, 강도는 사회적 범죄라서 개별 형량을 합산한 형량의 두 배로 가중됩니다. 사회적 범죄를 가중 처벌하는 아국 특유의 형법 체계에 따른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경우입니다. 특히 사회적 범죄에는 미성년자도 예외가 되거나 감경 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합산하면 몇 년이오?”

학교생활이 여유로운 고산국이라 해서 학원폭력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 치기 어린 장난으로 시작된 금품갈취가 제재를 받지 않다 보면 도를 넘어서는 경우가 흔했다.

가해 학생들이 강요하는 액수가 점점 커지면서 부모들이 주는 용돈으로 감당을 못하자 피해 학생들이 기본 소득 통장에 손대게 됐다. 그리고 출금액이 기존 예금액의 반을 넘어서는 날, 규정에 따라 은행에서 경찰로 신고가 들어가는 바람에 사건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문제는 학교에서 교사들이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피해 학생들은 물론 같은 반 학생들도 가해 학생들로부터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가해 학생들의 아버지 중에 고위 공무원과 경찰 간부가 있어서 이들을 직위 해제시킨 다음 검찰과 정보국에서 다시 세세히 조사했다. 그러나 부모들이 권력을 이용해 사건을 무마하거나 학교에 압력을 가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 부모들은 소복을 입은 채 죄인처럼 방청석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합산하여 가중치를 적용한 형량이 120년을 넘어갑니다. 선고 형량이 100년을 넘으면 개정 형법에 따라 사형을 집행해야 하나 피고 다섯 명 전부가 범행 당시 미성년자라는 점이 걸립니다.”

“일단 법대로 선고하시오.”

법을 개정할 때는 명나라의 흑도 방파 등 강도질을 업으로 삼은 성인 범죄자만 염두에 두고 정했다. 그런데 개념 없는 고삐리들이 약한 애들 삥 뜯다가 걸려서 여차 하면 사형 당하게 생겼다. 재판장이 사형 판결을 내리는 동안 방청석에 나온 가해 학생 어머니들이 일제히 정신을 잃으며 쓰러졌다.

“용서해주세요, 판사님! 국왕전하! 잘못했어요!”

“판결을 바꿀 생각 없어. 나가!”

가해 학생들이 눈물을 펑펑 쏟으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그러나 이민호가 차갑게 한 마디 내뱉자 법원 경찰이 사형수로 확정된 학생들을 끌고 퇴장했다. 아버지들이 통곡하고 어머니들이 혼절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이민호가 판사들을 불러 모았다.

“아무래도 강력 범죄에도 미성년자 감경 제도가 있어야겠소. 미성년자들의 민법, 상법상 권리가 제한되는 대신 미성년자라는 신분만으로도 법적 보호를 받듯이, 강력 범죄에도 미성년 범죄자에게 감형을 시키는 제도를 법원에서 연구하도록 하시오. 물론 살인이나 강간 등 인륜을 저버리는 행위는 형량 감경 조항이 없어야 하오.”

“예, 전하. 하오면 이번 사건은 어찌 하오리까? 전하께서 사면 방식으로 감형을 시켜주시겠습니까?”

“아니오. 그래도 법은 법. 현행법에 따라 판결을 유지하되, 사형을 집행시키지 말고 수감만 해놓으시오. 다음에 법이 개정되고 나서 그것이 수형자에게 유리한 경우에 한해 감형을 해주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만약 피해 학생들 중에 자살하는 경우가 생겼다면 용서할 생각이 없었으나, 이번 사건은 비교적 피해가 경미했기에 아량을 베풀기로 했다. 그래도 가해 학생들은 탄광에서 최소한 몇 십 년 썩을 각오를 해야 했다.

사람에게 6, 7세 이전의 기억이 거의 남지 않는 것은 두뇌가 성장하면서 뉴런이 끊어지기 때문이며, 사춘기에 중2병 등으로 지랄을 떠는 것은 호르몬의 이상 분비 때문이라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리고 미성년자들이 사회생활에서 권리가 제한되는 만큼 법적 책임도 적게 지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지나치게 관용을 베풀면 청소년 범죄의 피해자가 더욱 억울하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본안 사건 같은 경우 어느 정도가 적당하겠습니까?”

“범죄자의 인권보다는 피해자 구제를 우선해야지 어쩌겠소? 그런 의미에서 감형하더라도 사회에서 충분한 기간 동안 격리시키시오. 이번 경우는 20년 정도가 적당하겠소.”

피해 학생들은 폭력에 노출되거나 무참한 굴욕을 겪었다. 몇 번이나 자살할 생각을 하거나 가해 학생을 하나라도 죽인 다음 죽을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피해 학생들에게 신중한 구호 조치를 실시하기로 했다.

피해자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노련한 상담 교사가 전면에 나서고 정신과 의사는 뒤로 빠져서 조언만 해주기로 했다. 범죄피해자 구호위원회는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린다고 오해받을 가능성을 최소한으로 줄이려고 노력했다.

“직위해제 중인 경찰간부와 고위 공무원은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오해하지 말아주십시오, 전하. 법원 기록에 남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직자 두 사람은 현재 자의로 사직했다고 알려졌습니다.”

“현직으로 돌아가면 피차 불편할 테니 다른 적당한 일자리를 알선해줘야겠소. 피고와 그 아버지들을 익명으로 처리하고 이번 사건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시오. 형법에 연좌제는 없더라도 아버지, 혹은 아들로서 책임감을 느끼겠지요.”

나중에 20년 정도로 감형해주기로 했지만 공식적으로는 고1 학생 다섯 명이 학교에서 코 묻은 돈을 삥 뜯다가 사형선고를 받은 셈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성교육을 시키듯이 이번 사건도 고산국 영역 내의 모든 학교에서 교육시켰다.

미성년자나 학생 신분은 둘째 문제였고 본질은 상습 강도였기에 가해자들을 동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명나라의 대명률이나 이를 그대로 수용한 조선에서 강도에 대한 징벌이 가혹했기에 과다한 처벌이라고 느끼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늦가을에 새강릉을 비롯한 북미를 순행했다. 유럽에서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면서 유럽과 가까운 북미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어서 가는 곳마다 자세히 살폈다. 피난민 수용 시설도 항구도시마다 대규모로 확장했다.

새강릉에 도착해보니 항구로부터 넓은 샛강 하구 중간의 인공 섬까지 거대한 다리가 완공돼 있었다. 인공 섬부터 강 하구 건너편까지는 기차가 다닐 만한 규모의 지하도가 완성됐다. 포우하탄 원주민들뿐만 아니라 이리의 모리스코들과 명나라 출신 건설 노동자들까지 수만 명이 동원돼 대공사를 마무리 지었다.

완공식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절반은 여러 부족에서 구경 나온 북미 원주민들이었다.

“대추장은 대단한 업적을 세운 거야. 다리 이름은 자네가 이끄는 부족연맹의 이름을 따서 포우하탄 대교라고 짓겠네.”

“영광입니다, 전하! 하오면 제 딸과의 혼인식 날짜는 언제로 잡으시겠습니까?”

완공식에서 테이프 커팅을 하기 위해 이민호와 대추장 외에 몇몇 귀빈들이 가위를 들고 있었다. 대추장이 들고 있는 가위가 햇빛을 반사해서 이민호가 조금 섬뜩함을 느꼈다.

“거참 집요하군 그래. 포우하탄 영역에 들어온 다른 부족이나 이주민들이 많다며? 그들을 잘 안정시키도록 하게.”

“딸 가진 부모 입장에서 딸의 혼사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시청과 협의해서 이주민들에게 북쪽과 서쪽 땅을 내주었습니다.”

포우하탄 대교 완공식 날부터 일주일 동안 새강릉 일대에 축제를 선포했다. 음식과 술이 무제한으로 제공되고 볼거리도 풍성했다.

북미 원주민들이 태양춤을 추고 고산국 농민들이 농악대를 조직해 원주민 마을마다 꽹과리 소리로 들쑤시고 다녔다. 야외무대에서는 아일랜드 청춘남녀들이 리버댄스를 추고 에스파냐 남부 출신 모리스코들은 집시들과 비슷한 춤을 추었다. 여기에 왕도의 왕립 교향악단과 새강릉의 왕립 교향악단이 시립극장을 전장으로 삼아 전쟁에 돌입했다.

“우왕~ 워낙 북새통이라서 우리가 결혼하는지 아는 사람이 더 드물어요. 전하께서는 이걸 노리셨죠?”

“축제 분위기가 절정일 때 결혼하는 게 낫지 않겠어? 그리고 결혼을 기념해서 축제를 일주일 더 연장했잖아.”

이민호는 결국 포카혼타스를 신부로 맞아들였다. 새강릉 시민들과 원주민들이 축제 기간에 벌어진 각종 행사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별궁에서 조촐하게 혼인식을 올렸다.

항상 어리게만 보였던 포카혼타스가 대추장 대신 포우하탄 부족의 행정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별궁 분수대 곁에서 포카혼타스가 비올레타와 함께 정겹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이민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운동 좀 하세요, 전하. 배가 볼록 나왔어요.”

“오랜만에 맛본 청게를 너무 많이 먹어서 그래.”

포카혼타스가 이민호의 배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다가 킥킥 웃어댔다. 허니문은 샛강 하구가 잘 내려다보이는 별궁의 별관 2층에서 보냈다. 새강릉 주변으로 도심 지역이 점점 확장되다가 다리 건설을 계기로 강 건너편도 빠르게 시가지로 변모하고 있었다.

“옥체에 손가락질을 하다니, 국왕 모독죄다. 이리 와! 벌을 내리겠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버둥거리며 도망가는 포카혼타스의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침대에 엎드린 채로 잡혀있는 작은 여체를 이민호가 몸으로 눌렀다.

“싫어요! 아직도 아프단 말이에요. 씻지도 않았잖아요.”

칭얼거리던 포카혼타스가 잠시 후에는 숨을 색색 쉬면서 이민호의 애무를 얌전하게 받아들였다. 작은 몸이 꽤나 탄탄해서 몹시 마음에 들었다. 대추장의 말에 따르면 포카혼타스는 어렸을 때부터 쉬지 않고 뛰어다녔고, 호기심이 많아 온갖 사고를 치고 다녔다고 한다.

“히익! 이런 자세로도 가능해요?”

“성생활백과를 열 번 넘게 봤다며?”

“다른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중간 자세로 알았어요.”

신기한지 고개를 자꾸 뒤로 돌리던 포카혼타스는 잠시 후 눈을 감고 손으로는 침대보를 움켜쥐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성인 버전을 보는 것 같아 이민호도 기분이 묘했다.

촬영기와 영사기가 완성된 다음 영화를 찍고 도시마다, 읍마다 극장을 세웠다. 지금은 연극배우나 연극 연출을 하던 자들이 초기 영화계를 이끌어갔으나 조만간 영화학과를 졸업한 자들이 배출될 예정이었다. 5년 걸려서 간신히 제작한 만화영화 홍길동도 호평을 받았다.

영화 소재는 무궁무진했고 이민호가 절반 정도 소재를 제공했다. 그래서 어제(御製) 영화를 상영하기 전에 관객들이 일어나 화면을 향해 일제히 절을 하는 웃지 못할 광경이 날마다 연출됐다.

“배상금으로 금화 12만 굴덴과 성곽 수리비 4만 7천 플로린이라니.”

“뭐가요, 전하? 플젠이 함락됐나요?”

“그렇소. 저항이 거세서 두 달 약간 넘게 걸렸소.”

이민호가 전보용지를 비올레타에게 내밀었다. 신혼 초부터 밤마다 못 살게 굴었더니 참다못한 포카혼타스가 친정으로 도망가 버렸다. 다음 날 대추장이 낄낄거리며 딸을 데려왔지만 신부가 잠을 잘 여유 정도는 달라고 해서 그렇게 해주었다.

“보헤미아에서 시작된 전쟁이 주변으로 확대될 것 같아 걱정이에요. 지금도 실레지아와 상하 루사티아에 반란이 확대되고 있어요. 모라비아에서는 그 전부터 반란이 일어났었어요. 신교도 연맹 쪽에서 많이 참가할 것 같아요.”

“보헤미아가 오스트리아에서 가까우니 금방 해결될 것 같소. 에스파냐와 오스트리아 외에도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있지 않소?”

이민호는 그렇게 판단했고, 비교적 정확한 정세 판단이었다. 그러나 신성 로마 황제 마티아스가 다음해인 1619년 3월에 사망하면서 모든 것이 엉망이 된다는 것을 몰랐다.

그리고 이 해에 신성 로마 제국 소속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영토인 프로이센 공작령을 상속받았다. 앞으로도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의 후계자들이 폴란드 국왕의 가신으로서 프로이센 공작령을 상속할 수 있도록 폴란드 국왕이 정식 승인했다. 유럽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칠 일대 사건이었지만 보헤미아 반란에 가려 크게 주의를 끌지 못했다.

“올해는 덴마크에 가지 않으시나요?”

“고산국이 신교도 국가를 지원한다고 오해받을 것 같아서 가지 않기로 했소. 그리고 내년 초에 조선 북방에서도 큰 전쟁이 있을 것이오.”

“친정을 하신다면서요? 부디 옥체 보중하세요.”

이민호가 비올레타의 얼굴과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명나라와 조선, 후금과 몽골까지 일대 격변이 일어날 전쟁이었지만 고산국은 겨우 한 발 걸치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민호의 선택에 따라 고산국 병력이 이 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