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857화 (806/1,000)

00857  95. 전쟁의 서막 1618년  =========================================================================

후금에서 보낸 사신이 왕도로 찾아와 공손히 인사하더니 국서를 내밀었다. 후금 사신은 후금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에서 가장 안전한 길, 동쪽 동해국 영역을 지나 곰나루에서 배를 타고 왔다. 이미 왕도에 몇 번 왕래한 사신이라 처음에 왔을 때처럼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지는 않았다.

명나라 황도에서 줄줄이 보낸 칙사가 세 명이나 왕도에 머물고 있어서 칙사들이 후금 사신과 마주치지 않도록 신경을 쓰게 되었다. 물론 명나라에서도 고산국에 후금 사신이 들락거리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명나라에서 후금 사신의 목을 베어 바치라고 요구하지는 않겠지만, 후금 사신들이 공공연히 칙사들의 눈에 띄어서 좋을 일은 없었다.

“칠대한(七大恨)을 칠종뇌한(七宗惱恨)이라고도 하는 모양이군. 여진족은 한을 가슴이나 배가 아니라 머리로 느끼는 모양이지?”

한에 사무칠 때 가슴이 에이는 듯 아프다는 말은 조선에, 창자가 끊기는 것 같다는 표현은 중국에 있었다. 그런데 뇌는 머리나 두뇌 외에도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했다.

“저희들을 여진족이 아니라 만주족으로 칭해주시길 바랍니다, 전하. 예허부나 동해국 여진족과 다른, 건주 여진과 그 속민으로 구성된 겨레붙이가 만주족입니다.”

“원한다면 그러도록 하지. 만약 금국이 몽골처럼 승승장구한다면 영토를 확장하면서 민족 개념도 확장되겠지?”

“오해입니다. 국왕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희들은 생존을 위해 나섰을 뿐입니다. 대국의 천자는 하늘이 내리신 분이므로, 저희들은 천자께 거역할 마음은 없습니다. 저희들은 천자가 아니라 그저 부패한 천조의 대신과 변방의 잔혹한 장수들을 징치하려고 군대를 일으켰을 뿐입니다.”

국서는 당당하면서도 꽤나 정중한 문체로 작성됐다. 조선에 보내는 국서에는 후금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 천명 2년에 후금국 칸이 조선 국왕에게 통유한다면서 깨우칠 유(諭)자를 썼다고 들었다.

그러나 군사 강국인 고산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인지 후금이 고산국에 보낸 국서에는 명나라 연호 만력을 그대로 사용했다. 후금은 심지어 명나라에 국서를 보낼 때도 천명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었다.

“천조의 영토를 침범한 것만으로도 이미 죄를 지었다고 보는데.”

“요동 변방의 장수들은 지금까지 숱하게 금의 영역을 침범해 짓밟고 백성들을 빼앗아 갔습니다. 저희들은 잠시 변방의 썩은 장수들을 쳤을 뿐입니다. 무순 주위에 투입됐던 병력은 바로 거두어들였습니다.”

“물러갔다 해도 천조에서 보복을 할 것 같은데?”

국서에서는 후금이 명나라를 상대로 들고 일어날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원한을 열거했다. 그러나 국서에 명시하지 않은 후금에 대한 명나라의 경제적 압박, 즉 마시 철폐가 후금에 가장 치명적이었다.

본거지가 산악지대라 농경지가 좁은 후금은 명나라와의 무역에 경제를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요동에서 그 교역로를 막아버리자 각지에서 모은 인삼과 모피가 썩어 들어갔고, 결국 후금이 들고 일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천조에서 침략하면 저희 대금국은 당연히 맞서 싸울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인삼과 모피 교역만 제대로 됐어도 저희끼리 어떻게든 평화롭게 살아가려고 했을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야.”

“전하! 북미에서 인삼을 대량 수출한 이래 금국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천조에서도 북미 인삼이 충분한 양이 수입되는 것을 알고 나서 안심하고 금국과의 교역을 막은 것 아니겠습니까?”

“잠깐! 무슨 소리야? 그래서 이번 전쟁이 우리 탓이라고? 고려 인삼과 여진 인삼은 양기가 강한 반면 북미 인삼은 음기가 강해서 전혀 다른 약재로 활용하는데.”

북미 북부에서도 인삼이 채취됐다. 고려 인삼과 거의 비슷하게 생기긴 했는데 문제는 너무 큼직해서 약효가 떨어질 것 같다는 데에 있었다. 신라에서 커다란 인삼을 채취해서 당나라에 진상했다가 가짜 같다고 해서 당나라에서 수취를 거부한 적이 있었다.

조선이나 만주처럼 추운 지역에서 자라는 인삼 혹은 산삼은 양기가 강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인삼은 주로 양기를 보하거나 과도한 음기를 제어하는 용도의 약재로 활용됐다.

그래서 이민호는 일부러 명나라 남부에서도 덥기로 소문난 광저우에서 북미 인삼을 판매하면서, 북미 인삼은 매우 더운 지역에서 자라는 탓에 음기가 강하다고 홍보했다. 이런 식으로 고려 인삼과 직접적인 경쟁을 피하고, 인삼 두 종만으로 음과 양을 보하는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

덕택에 처음에는 무처럼 너무 커서 상품성이 없다고 판단했던 북미 인삼이 판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북미 인삼은 고려 인삼과 반대로 음기를 보하고 지나친 양기를 억제하려는 목적으로, 같은 무게일 때 고려 인삼에 비해 훨씬 싼 절반 이하 가격에 명나라에서 약재로 사용됐다.

그러나 북미 인삼은 상대적으로 온화하거나 선선한 지역에서 자라기에 조선 인삼과 성장 환경에서 차이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여차 하면 가난한 자의 인삼이라는 당삼과 비슷하게 싸구려 취급 받았을 북미 인삼을, 그저 포지셔닝을 잘해서 고려 인삼의 반값에라도 팔 수 있었다. 지천으로 깔린 야생 북미 인삼은 조선에서 정성 들여 재배해야 하는 인삼보다 무게 단위당 원가가 훨씬 적게 들었다.

“하여튼 이번에 고산국은 중립을 지켜 주십사 청합니다. 명나라는 성 하나를 잃었으니 당연히 국경에 병력을 집결할 것입니다. 조선도 임진왜란 때 명나라로부터 도움을 받았으니 병력을 파병해 명군을 도울 것이 분명합니다. 이들만으로도 저희들은 이미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고산국은 대금국과 원한 관계가 없지 않습니까?”

“나야 뭐, 황상께서 병력을 보내달라고 하시면 보내드려야지 어떻게 하겠나? 나는 명나라 황제폐하의 부마일세.”

고산국이 명나라와 완전히 다른 독립국이라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었지만 동양의 관행상 모든 나라가 형식적으로는 명나라의 속국이었다. 이민호가 황제의 부마라는 지위도 이 속국 개념에 어울려서 필요할 때마다 속국이라는 개념을 이용해먹었다.

“그럼 조선처럼 병력은 파견하되 전투에 가담하지 않는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오호? 정말 조선하고 그렇게 하기로 짰어?”

“비밀로 해주십시오.”

1619년 4월에 발생한 사르후 전투에서 명군과 조선군은 후금에게 패배한다. 그런데 광해군이 사전에 후금과 밀약을 맺은 다음 병력을 파견했기에 실제 전투에서 조선군이 전투에 소극성을 띄었다거나, 광해군이 도원수 강홍립에게 상황을 봐서 후금에 항복하라는 밀지를 주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증거는 없었다.

“조선과 밀약을 맺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면 나도 고려해보지.”

“밀약은 분명히 있습니다만, 그 내용을 전하께서 황상께 고하시면 조선 국왕의 입지가 불안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안 보여주겠다고? 그럼 믿기 어렵겠군 그래. 금국에서 조선과 명나라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으로 이해해야겠지. 그런데 그건 뭔가?”

후금 사신이 펼친 종이는 지도였다. 그런데 고산국과 동해국을 가른 경계선이 현재 잠정적으로 인정된 국경선과 약간 다르다는 차이가 있었다. 고구려 옛 수도와 광개토대왕비가 위치한 집안 근처를 동해국에 넘긴다고 해서 약간 호기심이 들었다.

“고산국이 참전하지 않는 조건으로 이 영토를 양보하겠습니다.”

“나는 땅 욕심이 없네. 그렇지 않아도 영토가 너무 넓어서 골치야.”

“대금국이 망하면 그 영토를 네 나라가 나누겠다는 뜻입니까?”

“미안하지만 고산국은 물론이고 천조나 조선에서도 대금국의 영토에는 관심이 없을 걸세. 만약 영토를 얻으려 했다면 대금국이 건국되기 이전에 여진족이 분열됐을 때 공략해서 일부라도 차지했겠지.”

이번 정벌에 참가하면서 후금의 영토에 관심을 가진 정치세력은 예허부밖에 없었다. 명과 조선은 후금이 주변국을 침략하지 않는다면 여진족이 어떻게 살든 관심이 없었다. 명나라가 여진족의 일에 개입하면서 후금을 압박한 것은 후금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경계한 탓이었다.

사신이 금은보화를 바쳤으나 이것도 거절했다. 비록 주변 여진족과 몽골족 사이에서 힘깨나 쓰는 후금이었지만, 정복 왕조가 되기 전의 가난한 유목민 국가에 불과했다. 결국 후금 사신은 울면서 돌아갔다.

“후금을 멸망시키실 건가요?”

“글쎄. 후금이 좀 더 오래 버티는 쪽이 좋긴 한데.”

혜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옆에 서 있었다. 이민호가 혜영의 손을 잡았으나 심각한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실제 역사에서 이 시기에 후금이 명나라를 집어삼키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후금은 사르후 전투에서 승리한 다음에도 요동 지방을 공략하는데 애를 먹어야 했다. 명나라와 후금은 체급 차이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여기에 고산국까지 있으니 명나라가 자체 붕괴하지 않는다면 후금은 살아남을 가망성이 전혀 없었다.

“후금이 동해국 영역을 공격하면 어떡하죠?”

“누르하치가 명분도 없고 실리도 없는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후금의 명분은 7대한에서 언급됐듯이 오직 명나라와 예허부에게만 있었다. 고산국의 속국이긴 해도 동해 여진의 독립 국가인 동해국을 칠 이유도 없었다. 차라리 오랜 원수인 예허부를 치는 게 나았다.

명나라의 요청을 받고 조선에서도 후금에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윤4월에 좌참찬 강홍립을 도원수로, 평안병사 김경서를 부원수로 임명했고, 동원한 병력은 평안도와 충청도, 전라도, 황해도에서 소집한 포수와 사수, 살수 1만여 명이었다.

명나라에서 포수가 부족하다고 지적해서 포수 3천 5백을 5천으로 증강시켜서 원정군 총병력은 1만 3천으로 늘었다. 그 외에 보급로를 지키는 기병과 치중대를 포함하면 총 병력은 2만에 가까웠다.

조선은 7월에 원정군을 북상시켜 언제든 압록강을 넘어 후금 토역군으로 임무 전환할 수 있도록 평안도에 배치해 방어임무를 부여했다. 이때 도원수 강홍립의 벼슬을 좌참찬에서 형조 참판으로 바꾸었다.

“하하하! 경략 양 보가 국왕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어서 오시오, 양 경략.”

명나라 정벌군의 총지휘관 양호가 인사차 왕도에 들렀다. 양호의 공식 직함은 흠차 경략 요동 등처 군무 병부 좌시랑 겸 도찰원 우첨도어사(欽差經略遼東等處軍務兵部左侍郞兼都察院右僉都御史)였다. 임진왜란이 일찍 끝나는 바람에 양호는 조선에 파견될 기회가 없었다.

“고산국 배는 하늘을 날 듯이 빨리 다녀서 멀리 요동에 있다가도 국왕전하께 인사를 올릴 수 있게 됐습니다.”

“인사는 됐고, 병력 모집은 잘 돼 가오?”

“그게, 바로 그 문제 때문에 전하께 도움을 받을까 해서 왔습니다.”

“설명을 해보시오.”

결론은 돈 달라는 소리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명나라의 병력 동원 체제가 얼마나 무너졌는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양호가 우물쭈물하더니 곧 솔직히 말했다.

“원래는 병적에 든 천하의 장정들 3백만 명 중에서 일부를 소집해 정벌군을 편성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병적이 부실해지고, 병적과 현실이 부합하지 않게 되면서 장수들이 보유한 가정을 중심으로 군대를 편성하게 되었습니다.”

“가정은 사병이지만 필요하니까 눈감아주었겠지요.”

이 시기 조선과 명나라의 병력 동원 체계는 동일했다. 조선에서 명나라의 군제를 베꼈으니까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군제가 비록 문란해지면서 병적과 현실이 부합하지 않게 됐더라도 그래도 규정된 병력은 쉽게 모을 수 있었다. 임진왜란 내내 류성룡을 비롯한 대신들이 명나라 장수들과 주고받은 서신에서 병력은 모을 수 있는데 군량이 부족하다고 토로했다. 조선의 병력 동원 체제는 아직 살아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명나라는 그렇지 못했다.

“지난 수십 년 간 병적 자체를 개정하지 못했습니다. 병적에 오른 장정이라곤 죄다 수십 년 전에 이미 늙어 죽은 사람뿐입니다. 그래서 현재는 원임 총병이나 부총병 같은 전직 장수들이 여전히 거느리고 있는 가정들과 돈을 주고 군사로 모집한 자들을 중심으로 군을 편성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병력은 거리에서 강제로 끌어와서 숫자만 맞추는 식입니다.”

“그래서야 제대로 전투나 하겠소?”

“그러게 말입니다. 이들을 무장시키고 훈련하는데 시간이 걸리고 있습니다. 군량도 몹시 부족합니다.”

명나라는 병력이 부족하면 흔히 마을에서 장정들을 두들겨 패면서 끌어오거나, 시장이나 거리를 차단한 다음 남자들을 모조리 끌고 가는 방법을 썼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도 썼던 방법이며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도 급하면 이 방법을 썼다고 <난중잡록>에 기록돼 있었다. 병력이 항상 부족한 영국 해군의 전통적인 수병 모집 방법이기도 했다.

“이번 정벌에 천병을 무려 40만이나 동원한다고 들었는데 이런 식이면 곤란하겠소. 나도 황상의 신하로서 당연히 파병하기로 했지만, 주력이 될 천군의 병력 소집 문제는 경략 혼자서만 책임질 문제가 아닌 것 같소.”

“고산국 국왕전하의 충성심은, 에, 황상께서도 잘 알고 계십니다.”

양호가 두리번거리기에 황도가 위치한 북쪽 방향을 가르쳐주었다. 양호가 북쪽을 향해 공손히 읍을 한 다음에 말을 마쳤다.

“좋소. 내탕금에서 은 백만 냥을 내드리겠소. 음. 소국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내탕고를 채워 넣어야 할 텐데 말이오.”

“감사합니다. 세상에 공짜란 없으니 저희도 당연히 준비했습니다. 원래 소금판매권은 장성에 주둔한 천군에 군량을 보급하는 상단에 발부하고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군자금을 내주신다면 이 소금판매권을 발부해드리는 것이 마땅하겠지요. 전하께서 상단을 지정해서 그 상단에 일정한 기간이 적힌 소금판매권을 주십시오.”

명나라 초기에는 병사가 만리장성에서 근무하더라도 병사의 재정적 지원을 맡은 호가 어떻게든 병사에게 군량과 봉록을 지급해야 하는 식이었다. 당연히 문제가 많아서 나중에는 상단에게 군량 수송을 맡기고 소금판매권을 주는 방식으로 변경됐다. 이 제도로 인해 명나라 후기에 대상으로 성장한 상인들이 절강성 출신 상인 집단, 즉 절상이었다.

양호가 바친 소금판매권 여러 장을 살펴보니 다 합해서 매년 백만 섬, 유효기간 20년으로 적혀 있었다. 은 백만 냥을 현대의 방위성금 개념으로 자진 납부했지만 사실은 몇 배나 남는 장사였다. 경략 양호가 급하지 않았다면 천천히 상인들에게 제값을 받고 팔았을 소금판매권을 싸게 매입한 셈이었다.

“고맙소. 그런데 정확한 정벌 일자는 언제요? 내게도 말하지 못할 군사기밀이오?”

“사실은 그렇습니다. 후금을 오랫동안 긴장시키기 위해 조선에는 여름까지 정벌군을 준비하라고 통보했지만 수확하는 가을이나 추운 겨울에 군사를 움직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내년 초봄에 정벌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경략은 말이 잘 통하는 분이구려.”

이때부터 대화가 아주 훈훈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덤으로 조선 원정군의 지휘권까지 이민호가 맡아서 명군과 협조하되 독립적인 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 작품 후기 ============================

1618년에 일어난 일로 한 편 더 써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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