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855화 (804/1,000)

00855  95. 전쟁의 서막 1618년  =========================================================================

무순 성이 함락되고 나서 며칠 후, 유럽에서 변이 생겼다고 프랑스 대사관과 베네치아 대사관에서 거의 동시에 급보를 보냈다. 그레고리우스력으로 5월 23일에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보헤미아 국왕 페르디난트가 파견한 대리 통치자 귀족 네 명과 프라하의 프로테스턴트 삼부회 의원들은 이른 아침부터 프라하 시청에서 격론을 벌였다. 고압적인 태도의 가톨릭 귀족들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보헤미아 국왕의 적으로 규정된 프로테스탄트 의원들은 잔뜩 흥분한 채로 가톨릭 귀족 두 명과 명단을 작성한 비서 한 명을 시청 4층 건물의 창문에서 밀어 떨어뜨렸다.

이들이 떠밀린 창문은 21미터 높이였으나 세 명 모두 살아남았다. 가톨릭에서는 떨어지는 사람들을 위해 성모 마리아가 옷자락을 펼쳐 받쳐줘서, 개신교 쪽에서는 이들이 분뇨 더미 위에 떨어져서 살았다고 발표했다. 보통은 창문 아래에 건초 더미가 쌓여 있던 것으로 이해했다.

실제 역사에서 30년 전쟁의 시발점이 되는 사건이었으나 이민호는 한국에 있을 때 들어보지 못해서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유럽 여러 나라에서 전쟁을 준비하고 있어서, 이 사건이 없었더라도 다른 계기로 30년 전쟁이 일어날 만한 분위기가 충분히 갖춰져 있었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을 창문에서 집어던지는 것이 보헤미아 사람들의 전통인가 봅니다.”

“설마 이번과 같은 사건이 또 있었단 말이오?”

예조판서가 보고서를 잠깐 살피더니 이민호에게 간략히 설명했다. 예전에 일어난 사건은 이번보다 훨씬 심각한 유혈사태였다.

“약 200년 전인 1419년 7월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후스파 사람들이 시의회에 동료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던 중에 시청 건물 쪽에서 돌이 날아왔습니다.”

“무책임한 자들은 어디든 있는 것 같소.”

“그렇습니다. 그 직전까지 평화로운 가두시위를 벌이던 후스파가 폭도로 돌변해서 돌이 날아온 시청으로 쳐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판사와 시의회 의장 외에도 시의원 13명을 죄다 창문에서 집어던졌습니다. 시의원들은 떨어져 죽거나, 살았더라도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위 군중들에게 맞아죽었습니다.”

이것은 후스파 전쟁의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이때 보헤미아 국왕 겸 독일 왕, 공식적인 명칭으로 로마 왕이었던 벤체슬라우스 4세가 그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벤체슬라우스는 창문 투척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 두 달 뒤 사냥하던 중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렇더라도 설마 보헤미아 지방의 관습은 아니겠지요.”

“저도 그런 관습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만, 혹시 모르니 조사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아국은 동유럽 쪽 정보가 어둡습니다. 이 기회에 동유럽 국가들과 대사급 외교 관계를 수립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의 정보망은 갖춰야 할 것 같습니다.”

이민호의 상식과 달리 협상이 결렬됐을 때 상대방을 고층건물 창문에서 집어던지는 것은 체코의 오랜 관습이 맞았다. 위의 두 사건은 1, 2차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으로 각각 명명됐고, 3차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은 1948년에 발생한다. 희생자는 체코 외무장관 얀 마사리크였는데 망명 기도를 입수한 소련에서 사주해 집무실 창문 밖으로 내던져진 암살 사건이었다.

유럽에서 보헤미아가 중요한 것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선출권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 황제를 뽑는 7명의 선제후 중에서 3명은 가톨릭 대주교, 3명은 개신교 세속 영주들이었고, 그 균형을 깨뜨리는 나머지 한 명이 보헤미아 국왕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보헤미아 국왕을 겸임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 시기에 후계자 없이 병마로 신음하던 마티아스 황제가 후계자로 지명한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에게 먼저 보헤미아 국왕 자리를 넘겼다. 그런데 조만간 황제가 될 페르디난트가 종교적으로 가톨릭에 강하게 경도된 채 보헤미아의 신교도들을 탄압한 것이 문제였다.

“정보국과 협의해서 그렇게 진행하시오. 그런데 전에 루돌프 황제가 보헤미아의 신교도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소? 정확히는 보헤미아에 신교도 교회를 세워도 좋다는 내용으로 기억하고 있소만.”

“분명히 루돌프 2세 황제가 보헤미아에 신교도 교회 건립을 허락했습니다만 마티아스 황제가 유권 해석을 달리 내렸습니다. 현 황제는 보헤미아 국왕의 직할 영지에 한해서 신교도 교회 건립을 허가한다는 억지를 부린 것입니다. 가톨릭 영주의 영지나 베네딕트 수도회 관할 영지에 건립됐던 몇몇 신교도 교회가 폐쇄되거나 심지어 파괴됐습니다.”

창문 투척 사건은 합스부르크 및 가톨릭 정치인들의 종교적, 경제적, 정치적 차별과 탄압에 대한 보헤미아 신교도들의 집단 대응이며 반발이었다. 사건 이후 프라하 시민들이 가톨릭교회와 수도원에 방화를 하고,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 수도사들을 살해했다. 인권과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구세력의 통치체제에 대한 전형적인 반란의 양상이었다.

그리고 유럽 어느 지역이든 사회적 혼란의 와중에 항상 그렇듯이 유대인 거주 지역이 약탈당했다. 신교도들이 가톨릭 정치세력으로부터 탄압받으며 울분을 토로하는 와중에도 그들보다 더 불리한 처지에 위치한 인종적, 종교적,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증오와 횡포를 멈추지 않았다. 보헤미아 신교도들은 비록 일시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자들이었지만 국민을 ‘분할하여 통치한다.’는 이념을 가진 기득권 세력에게 가장 이상적인 통치 대상이었다.

“그래도 신구 교회 양쪽에서 서둘러 교섭에 나서서 다행이오.”

“우발적 사건이었으니까요. 보헤미아 삼부회인 30인 위원회와 마티아스 황제가 파견한 크레슬 추기경이 협상 중이라고 합니다.”

“크레슬 추기경이라면 매우 뛰어난 협상가라고 들었소. 마티아스 황제가 그를 보냈다면 원만하게 처리될 것 같소.”

“예. 종교 문제에서 극단적인 페르디난트 국왕과 달리 마티아스 황제는 정치적으로 노련한 편입니다.”

양측의 냉정하고 빠른 대처로 인해 이때만 해도 사태가 곧 진정될 줄 알았다. 그러나 마티아스의 후계자인 페르디난트가 신교도 탄압을 강화하고 크레슬 추기경이 실각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종교만큼 중요한 문제가 있었으니, 보헤미아 국왕이 세습제가 아니라 폴란드 국왕처럼 원래 선출직이라는 것이었다. 30인 위원회는 이 사실을 강조하면서 정치 문제에서 양보하는 대신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절대왕정제를 추구하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보헤미아의 요구 자체를 절대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그럼 유럽은 당분간 안심해도 되겠고, 후금만 신경을 씁시다.”

“예, 전하. 그런데 북경에서는 아직도 무순이 함락된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여전히 허둥대고 있습니다.”

“지금쯤 황궁에 급보가 전해졌을 것이오. 그래도 한동안 갈피를 못 잡겠지요. 앞으로 칙사가 우리 왕궁에 수십 번 들락거리겠지만 정작 출정은 빨라야 올해 말이나 아니면 내년으로 미뤄질 것이오.”

“대신에 명나라는 후금을 아예 멸망시킬 작정을 하고 대규모 병력을 모집할 것입니다.”

“성 하나가 떨어지고 요동이 해안지대 빼곤 대부분 후금에 넘어갔으니까 자존심이 크게 상했겠지요.”

지금도 후금 기병들이 요동지대 곳곳을 훑으면서 한인들을 대량으로 납치해가고 있었다. 명군은 대적도 못하고 밀려나 간신히 해안선만 확보하고 있었다. 한족들은 배를 타고 산동으로 도주하거나 해안 성곽에 몰려와 전쟁이 끝나기만 기다렸다.

“그리고 외교 문제는 아닙니다만, 포우하탄 대추장이 전하께서 새강릉에 언제 오시는지 자꾸 문의하고 있습니다. 샛강 교각과 지하도로 건설이 거의 마무리돼가고 있답니다. 전하께 여쭈어 완공식 일정을 정해서 알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으윽!”

이민호의 반응을 본 예조판서가 빙긋 웃었다. 대추장은 다리와 지하도 완공식이 문제가 아니라 딸 포카혼타스를 얼른 데려가라고 눈치를 주고 있는 것이었다.

“대추장의 따님이 그렇게 미인이라면서요? 새강릉 시의원들에 대한 고문과 사형 선고가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포카혼타스님의 미모에 묻혀버린 감이 있습니다.”

“험! 험! 스위스 용병들이 곧 본토에 도착할 예정이오. 무장과 편제, 전술을 손봐준 다음에 훈련을 시킬 것이오. 장기간 파병이 예정된 만큼 스위스에서 가족들이 왕래할 것이오. 그들에 대한 지원을 예조에 맡기겠소.”

로마에서 떠난 스위스 용병 1연대는 현재 베네치아에 전개돼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베네치아는 에스파냐에 속한 나폴리 및 시칠리아 왕국과 바다에서 싸우고 오스만 제국과 육지에서 싸웠다. 그리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가 언제 치고 내려올지 몰랐다. 고산국 입장에서는 베네치아는 물론 베네치아와 전쟁을 한 나라들과 우호관계를 맺고 있어서 개입하기가 영 껄끄러웠다.

이런 상황에서 겨우 1개 연대에 불과해도 고산국에 고용된 스위스 용병들은 적당한 해답이 되어주었다. 본거지 방어를 스위스 용병에 맡긴 베네치아는 그 전에 비해 공세적으로 나오면서 해외 영토를 지킬 수 있었다. 물론 스위스 용병들은 전투에 투입되지 않았다.

주변국들과 휴전조약을 맺어 전쟁이 끝나면서 베네치아에 배치됐던 1연대를 수에즈로 배치했다. 1연대와 그때까지 수에즈를 지키던 2연대 병력 중에서 희망자만으로 2개 대대를 뽑아 고산국 본토로 차출했다.

“어명을 받들어 예조에서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전하. 그런데 유럽 문화권의 전쟁에 익숙한 스위스 용병을 후금과의 전쟁에 투입한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군사에는 문외한이지만 생소한 지역에서 전투를 수행할 스위스 용병들에게 좀 걱정이 듭니다.”

“후금이 기병이 강한데도 그들의 근거지가 산악지대라서 장갑차나 대규모 기병을 투입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소, 그래서 장창의 숲으로 기병 돌격을 막는 동안 단발총을 쏘아 적 기병 세력을 꾸준히 약화시키는 작전을 쓸 계획이오. 스위스 장창방진은 적 보병은 물론 기병 상대로도 효율적인 전술 단위라서 급히 차출한 것이오.”

근대에 폴란드 후사르나 몇몇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보병 장창방진을 상대로 기병돌격이 성공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 권총기병 라이터는 한 줄씩 교대 사격하는 카라콜 전법으로 적 보병방진을 꾸준히 약화시켜 균열을 일으킨 다음 돌격한다. 프랑스의 권총기병은 중기병과 함께 보다 적극적인 돌격작전에 투입되기도 했다.

“듣고 보니 예전 왜군과 흡사한 것 같습니다.”

“어? 정말 비슷하군요.”

실제 역사에서 후금을 상대로 화승총 비율을 높인 조선 원정군이 사르후 전투에서 패한 것은 적에게 기병 돌격을 허용한 탓이라고 생각했었다. 조선군은 투사 무기인 조총과 활의 공격력이 강한 대신 기병 돌격을 막을 만한 근접전 전문 병종이 부족했다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민호는 유럽처럼 장창방진을 앞에 내세워 기병 돌격을 막고, 창병에게 보호받는 총병들이 일제히 총격을 가함으로써 적 기병을 쉽게 물리칠 수 있다고 예상했다. 그러나 이 논리가 성립하려면 유럽처럼 일본 국내 내전에서 장창방진과 조총병으로 구성됐던 왜군이 조선에서는 장창방진을 활용하지 않은 이유를 알아야 했다.

왜군은 국내에서 내전을 벌일 때와 달리 임진왜란 때는 장창방진을 거의 운영하지 않았다. 궁기병 집단이 내달리면서 화살을 비 오듯 날리는 조선에서 장창방진은 몹시 취약했고, 심지어 과녁 역할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조선군이 획득한 왜군의 전리품 중에서 장창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생각해보니 그것 참 문제로군요. 예판께서 중요한 조언을 해주셨소.”

“제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다만 문화권이 다른 이 지역에서 스위스 용병들이 효율적인 전투를 못할까 염려했을 뿐입니다.”

“참모본부에서 그 문제에 대한 개선 방안을 연구 중이오. 그리고 만약 창병이 부족하면 큐슈에서 뽑아 쓰면 될 것 같소.”

한참 고민하던 이민호는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참모본부 주요 구성원들을 불렀다. 이때 참모본부에서는 후금 기병들의 궁시 공격에 대비해 스위스 용병들의 갑옷을 강화할지, 아니면 방패를 앞세울지 선택을 앞두고 있었다.

“전하! 유럽에서 장창방진을 구성하는 창병들은 선두 몇 열에 선 자들은 제대로 된 갑옷을 입고, 뒤에 선 자들은 가볍게 입는 것으로 압니다. 장창방진의 방어력은 기다란 창과 창병들이 입는 갑옷에 의존합니다. 그래서 유럽과 비슷하게 갑옷을 강화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려 했습니다.”

“재고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유럽에서 총이 등장하면서 장궁과 석궁은 급속도로 쇠퇴했어. 유럽 창병의 갑옷은 총이나 활 같은 투사무기에 대비한 방어구가 아니라 같은 창병의 공격을 막는 방어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당연히 선두에 선 창병들만 갑옷을 입어도 됐지. 우리는 후금 기병의 화살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습니다. 후금 기병을 막기 위해 스위스 용병을 멀리 유럽에서 차출했는데 자칫 후금 기병의 밥으로 만들 뻔했습니다. 후금의 주력무기는 활이니까 먼저 관통 시험을 해봐야겠습니다.”

전쟁 준비는 이런 식으로 착착 진행됐다. 거의 얼이 빠진 명나라 칙사들이 수시로 왕도와 북경 사이를 오가는 사이 스위스 용병들이 왕도에 도착했다.

알프스 산골 출신인 스위스 용병들은 로마와 베네치아가 최고인 줄 알았다가 고산국 왕도에 도착한 날부터 턱을 제대로 닫지 못했다. 도시의 크기와 건물의 장대함이 다른 유명한 도시들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 작품 후기 ============================

격일 연재, 사흘 연재가 웬 말입니까? 앞으로 연재주기를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과연? ㅜ.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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