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54 95. 전쟁의 서막 1618년 =========================================================================
“그대는 항상 바쁘오.”
“전하! 어인 일로 낮에 오셨습니까?”
오랜만에 주상아 공주의 별궁으로 행차했더니 공주는 침전 아래층 작업실에 있다고 했다.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주상아와 시녀들이 너저분한 작업실 내부를 허둥지둥 치웠다. 작업실에는 갖가지 색상과 모양의 옷들이 옷걸이에 걸려 있거나 바닥에 널려 있었다.
“뭔가 만든다기에 구경하러 왔소. 오호! 격식을 중시한 복장 같구려.”
“이번에 총함장님 모친상을 통해 깨닫는 바가 있었습니다.”
이민호가 시녀들이 보는 앞에서는 후궁들에게 애정표현을 자제하는 편이었지만 주상아 공주에게만은 예외였다. 의식을 안 하고 있더라도 어느새 그녀를 안고 있는 식이었다. 이민호가 다정한 목소리로 나이 들어도 도무지 늙지 않는 주상아에게 물어보았다.
“무엇을 깨달았단 말이오?”
“전하께서 격식을 중시하지 않으시나 그래도 관혼상제에 맞는 복장을 마련해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왕실에서 사용할 복식 외에 일반 백성들이 입을 복장도 몇 가지 다양하게 준비했습니다.”
주상아와 시녀들은 관혼상제에 필요한 복식들을 만들어보는 중이었다. 명나라와 조선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여러 나라와 페르시아, 유럽의 복식도 참조해서 새로운, 그러나 국적 없는 옷이 되었다. 이민호가 남자 복식에서 프릴이나 스타킹 종류를 빼서 단순화시키는 쪽으로 의견을 냈다.
동아시아의 여러 유교 국가들 중에서도 특히 조선이 관혼상제를 중시하는 편이었다. 조선의 하층민과 빈민들이 이주해 세운 고산국은 조선에 대한 반발 심리로 관혼상제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나서는 생활 이외의 것에 시간과 돈을 들여도 아까워하지 않게 됐다. 소비자의 구매 욕구와 구매력은 충분한 편이었다.
“그대는 백성들을 위해 많은 것을 만들어주었소. 마치, 음. 고대 전설의 여신, 여와 같소이다.”
“과찬이시옵니다. 전하께서는 복희를 비롯한 삼황오제 이상으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고 계십니다.”
삼황오제는 선정을 베풀기도 했지만 농경과 사냥 등 인류 문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여러 가지 발명과 제도를 만든 군주들이라는 것에 의미가 더 컸다. 특히 복희와 여와는 창세신이면서 뱀의 몸에 사람 머리 형상을 한 남매 겸 부부로 신화적 인물들이었다.
복희와 여와는 뱀의 몸으로 서로를 칭칭 감은 채 공학과 수학의 상징물인 곡척과 컴퍼스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흔히 묘사된다. 복희와 여와는 아시아의 다른 문화권에도 등장하기에 반드시 중국 역사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그리고 사마천의 <사기>에 복희가 동이족 출신이라는 기록이 있다 해서 한민족과 관계있다고 볼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우린 천생연분인 것 같소. 생각난 김에 복희와 여와처럼 몸을 서로 감지 않겠소?”
“대낮에요? 아랫사람들 보기 부끄럽습니다, 전하.”
혜영이 행정 분야에서 이민호를 많이 도와줬다면 주상아는 혜진이 요리를 다양하게 개발한 것처럼 백성들의 생활을 더 편하고 고급스럽게 만들어주는 일에 일조했다. 명나라 황실의 화장품과 기초적인 주안술이 고산국의 의학 및 한의학과 만나 가일층 발전해서, 지금은 역으로 황실 여인들이 고산국 왕실에 비법을 문의할 정도였다. 그 과정에서 말이 많아 아예 잡지를 통해 미용 비법을 공개해버렸다.
효과는 천천히 나타났다. 왕궁에서 미인들로 둘러싸여 사는 이민호도 시내에 돌아다니다가 가끔 눈이 절로 돌아갈 정도로 고산국에는 미인이 많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간이 갈수록, 즉 주안술이 퍼져 나갈수록 미인이 많아졌다. 그러나 천편일률적인 스타일의 강남 성형 미인과 달리 고산국 미인들은 개성이 훨씬 뚜렷한 편이었다.
“우리 예쁜 태희는 아직 안 돌아왔소?”
“어쩌죠? 요즘 남자친구를 만나나 봐요. 연애는 대학 들어가서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해도 뭐가 그리 좋은지 말을 안 들어요.”
태희는 왕립학교 고등학교 과정에 다니는 주상아의 둘째 딸이었다. 첫째 딸 순희는 천문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남편과 함께 호주 천문대에서 함께 근무하는 중이었다. 국립 천문대에 들어가면 최소 3년 동안 본토 외에서 근무해야 하는 규정이 있었고, 왕실 가족이라 해서 예외는 없었다.
“경호원이 따라다니고 있으니 건전하게 사귈 것이오. 남자 놈이 못된 짓을 할 기색이 보이면 즉시 총으로 쏴버리라고 했으니 걱정 마시오.”
“사위가 될지 모르는 청년을 쏴죽이면 되나요? 그리고 태희가 공주라는 사실이 알려져서 그런지 그 남학생이 태희를 몹시 공손하게 대해요.”
“태희가 워낙 예뻐서 공주인 줄 몰랐어도 공손하게 대했을 것이오.”
고산국은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진학률이 낮았다. 군대를 제대하거나 애를 한둘 낳은 다음 대학에 진학하는 경우가 흔해 전체 대학 진학률은 50퍼센트를 넘어가 높은 편이지만, 고등학교와 대학 교육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큰 편이었다.
그래서 연애도 한국처럼 대학교 다니면서 처음 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처럼 고등학교 때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성년이 만 16세이며 이 시대 다른 나라들처럼 초산 연령이 낮기에 일본처럼 가볍게 연애를 한 번 해보는 개념이 결코 아니었다. 고산국 10대 후반 청소년들에게 연애는 평생 함께 살 배우자를 찾는 중요한 일이라서 남녀 모두 몹시 진지하게 연애에 임했다.
“어마마마! 저 학교 다녀왔습니다. 앗! 아바마마! 안녕하셨습니까?”
“오냐, 새똥아. 초등학교 다닐 때는 그냥 아빠 안녕하세요, 라고 하라니까.”
주상아가 낳은 유일한 아들 고석준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어머니를 닮아 순희와 태희도 예뻤지만 석준은 젖살이 빠지고 나서 유럽이나 아랍 왕자들 못지않게 잘 생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석준을 상대로 여자 옷을 입혀 예쁘게 꾸미는 인형놀이를 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짓궂은 누나들을 쫓아내는 것이 별궁 시녀들의 중요한 임무가 되었다.
“제가 애도 아닌데 아바마마께 어찌 그런 낯간지러운 어린애 말투를 쓰겠습니까?”
“흐이그! 이 영감탱이!”
이민호가 아이의 머리를 마구 흩뜨렸다.
“아바마마께서 어인 일로 별궁에 행차하셨나이까? 혹시 제 소원을 들어주시려고 오셨습니까?”
“네 동생 낳아주는 것 말이냐? 물론이다.”
“와! 정말이죠? 신난다!”
고산국에서는 아동일 때부터 성교육을 제대로 시키는 편이었다. 초등학생들도 어떻게 아기가 생기는지, 아버지가 왜 필요한지 알고 있었다.
주상아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 고개를 숙였고 시녀들은 침전을 정리하기 위해 허둥거리며 밖으로 빠져 나갔다. 주상아는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건강관리를 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직 폐경기가 오지 않았다. 주상아도 노산의 위험을 피하기보다는 가능하면 아기를 더 낳기를 원했다.
석준이 신이 나서 작업실을 뛰어다녔으나 갑자기 약속을 못 지키게 생겼다. 전화를 받은 시녀가 수화기를 이민호에게 바쳤기 때문이다. 예조 판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 나왔다.
“전하! 큰 변란이 일어났습니다.”
“예판, 무슨 일입니까? 보헤미아에서 신교도 귀족들이 반란이라도 일으켰습니까?”
“무순 성이 후금에 항복했습니다. 그 직후부터 후금 기병이 무순 성 주변 지역 주민들을 모조리 납치하고 있습니다.”
“주민들을 납치해요? 당장 외교, 국방 관련 국무회의를 소집하시오.”
얼마 전에 정보국에서 포착한 첩보가 정확했다. 무순 성을 지키던 유격 이영방이 전투도 하지 않고 후금에 항복한 것이다.
무순 성의 항복보다는 후금 기병들이 약탈에 눈독을 들이지 않고 조직적으로 백성들을 납치해간다는 것이 더 충격적이었다. 이민호가 심각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자 주상아가 걱정스레 물었다.
“혹시 전쟁이 났나요?”
“그렇소. 후금이 요동의 무순 성을 포위하자 명나라 장수가 바로 항복했다고 하오.”
“그럴 리가! 전하께서 군대를 일으키시면 성을 다시 되찾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잖아요. 그 장수는 설마 그런 것도 생각을 못했을까요? 전하께서 도와주실 거죠?”
“물론 군을 요동에 파병해 천군을 돕겠소. 그리고 아무리 불합리해 보이는 결정이라도 배반자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는 법이오. 아마 뇌물에 넘어간 것 같소.”
주상아가 이민호의 손을 꼭 붙잡았다. 주상아는 고산국 군대가 강한 것도 알았고, 그 이상을 알고 있었다.
“아녀자인 제가 정치나 전쟁을 어찌 알겠어요? 다만 백성들이 고통을 적게 받았으면 좋겠어요. 억지로 명나라의 명줄을 연장시킬 필요는 없어요.”
“음. 그대의 뜻대로 하겠소.”
명나라의 멸망을 촉진하기 위해 후금을 이용하는 문제를 두고 이민호가 고민하던 것을 주상아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주상아는 명나라가 차라리 빨리 멸망하는 편이 명나라 백성들에게 좋다는, 일부에서 쉬쉬하며 떠도는 의견에 동의하는 편이었다.
“후금에서 보낸 여진 기병 2만이 성을 에워싸자 전투 한 번 없이 유격 이영방이 바로 항복했다고 합니다.”
이민호가 주관한 긴급회의에는 예조판서와 각 군 지휘관, 참모본부장이 참석했다. 해군 총함장과 항공대장이 상중이므로 다른 믿을 만한 사람들이 임시 지휘를 맡았다.
“명나라 조정이나 황실에서 나온 반응은 아직 없소?”
“무순이 바로 어제 함락됐기에 그 소식이 아직 북경에 전해지지 못할 시간입니다.”
“명나라에서 전화기가 무엇인지 알고 고산국이 소식이 빠른 것도 알고 있소. 대사관을 통해 오늘 내로 통보해주시오. 당분간 공동 작전을 수행해야 하니까 급한 정보는 바로 전달하시오.”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전하.”
이민호가 사단장급 이상으로서 오늘 참석한 지휘관들을 쭉 훑었다. 육군 사단이 15개로 늘었다지만 대부분 방어작전에 초점을 맞춘 보병사단이었다. 이민호가 눈짓을 보내자 이런 상황에 대비해 작성한 원정군 편성표를 참모본부장이 제시했다.
“북방과 몽골, 중앙아시아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원정군은 2개 기병사단과 장갑차여단을 중심으로 보병사단 1, 2개를 추가해서 구성하게 돼 있습니다. 남중국에서 반란을 진압할 때는 전원 보병사단이 출정합니다.”
“적 병력이 워낙 많아서 우리도 가용 병력을 최대한 동원해야 할 거야. 특히 무순 동쪽부터 산악지대라는 것이 문제야. 산악지대에 투입할 병력이 특전대대와 구르카 여단 외에는 별로 없는 것이 걱정이로군.”
심양, 즉 선양 동쪽이 무순이고 그 동쪽과 남쪽, 북쪽은 산악지대였다. 그리고 동쪽에 건주 여진의 영토가 있어서 무순을 명나라의 1차 방어선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무순에서 여진족들을 상대로 교역을 했기 때문에 건주 여진이 남하해서 무순 가까이에 자리 잡은 것이었다. 기마 군단을 이끌고 다닌 것으로 인상 깊은 여진족이었지만 이 시기에는 산악지대에 웅크리고 있던 때였다.
“동해국에 속한 여진 여러 부족들이 사냥하느라 평원 외에 산악지대에도 익숙합니다. 생활상이나 전쟁 방식은 건주 여진이나 동해 여진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건주 여진이 두정갑을 좀 더 대규모로 장비한 것뿐입니다.”
“그게 결정적인 차이라니까. 무기와 방어구를 통해 국가전략을 엿볼 수 있어. 1594년에 있었던 아홉 나라 전쟁에서 얻은 교훈이 뭔가?”
현대 미군은 보병 장비는 매우 첨단화되어 있다. 병력을 아끼려는 목적에 무전기와 헬멧카메라, GPS 등을 활용한다. 공군이나 해군 항공대가 강한 것도 승리를 얻기 위한 목적 외에도 병력의 희생을 줄이는데 중심을 두기 때문이다. 구소련군이 전차와 장갑차, 공격헬기 등 기계화 비율이 충실한 것은 넓은 영토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죄송합니다, 전하. 결정적인 여러 작은 전투들에서 건주 여진의 소부대들이 여진이나 몽골 병력을 상대로 물러서지 않고 공세를 유지한 것에 있었습니다.”
“방어거점을 지키고 공세를 유지한 수단이 바로 그 별 것 아닌 것 같은 두정갑이야.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고 다른 여진이나 몽골 부족들이 물러서야 할 때 그들은 두정갑을 믿고 버텼지.”
“시간만 조금 주시면 동해 여진에 두정갑을 대규모로 공급할 수 있습니다.”
“훈련은? 아무리 두정갑을 입었다한들,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는 상황에서 건주 여진 말고 안 물러설 여진족이 있나?”
“없습니다.”
“동해 여진은 평원에서 대규모 기병전이 있을 때 투입한다. 조만간 명나라에서 곧 대규모 토벌군을 징집할 것이다. 우리와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겠지. 그때까지 파병부대는 산악전 훈련을 실시할 것이다.”
명나라와 조선은 상황에 따라 언제든 요동에 총병 위주의 조선군 원정군을 파견할 수 있도록 이미 협의를 마친 상태였다. 명나라에서 요구하는 7천이 1만이 되고 다시 1만 4천으로 시간이 갈수록 늘어났지만 주 병력이 화승총 총병 위주라는 사실에서 벗어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여기서 명나라 지휘부의 전략 미스가 명백히 드러난다. 조선에 총병 위주로 증원군을 요청했다면 이들을 명나라 3군에 분산 배치시켰어야 옳았다. 조선군이 총병 위주로 편성돼 자체 전투력에 문제가 생긴 것을 알고도 압록강을 넘는 조선군의 입장을 감안해 제 4군으로 독립 편성한 것은 큰 잘못이었다. 조선 장수들도 다른 명나라 장수들이 조선군 총병 일부를 빼앗아간다고 열 받을 필요가 없었다.
“기병은 배속되지 않았더라도 총병과 창병의 균형이 잘 맞춰진 부대가 스위스 용병 연대입니다. 적 기병을 상대로 충분히 버텨줄 것입니다.”
“그렇지! 스위스 용병 2개 연대 중에서 1개 연대를, 아니. 유럽도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니 수에즈에서 총병과 창병 혼성으로 1개 대대만 뽑아서 이쪽에 투입하게. 그리고 올해부터 스위스 용병 1개 연대를 증강하게.”
“산악지대에 투입할 부대가 충분하지 않으니 구르카 용병도 증강하면 어떻겠습니까?”
“좋아, 좋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용병과 정규군 가리지 말고 2배 정도로 증강시키세.”
이민호는 설마 고산국이 참전하는데도 명나라와 유럽에서의 전쟁이 수십 년씩 끌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그 예상이 맞을지 지금으로서는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지휘관은 어느 분이 맡는 게 좋겠습니까?”
“이번에는 계복이 본토에 남고 감불이 지휘를 맡기로 하지. 감동은 동해국에서 준비하라. 국왕 친정이다.”
“예!”
아직 시간이 많다고 판단해 느긋하던 지휘관들 사이에서 긴장감이 갑자기 확 올라갔다. 여러 나라의 흥망을 두고 벌어질 중요한 전쟁에서 이민호가 벗어나 있을 수는 없었다.
“후금은 무순 성에서 재산을 약탈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약탈해갔다. 그 의미는 병력은 물론 장기적으로 국세까지 늘리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그럼 어느 한 쪽이 없어져야 전쟁이 끝날 것이다. 우리는 명나라, 조선과 함께 후금과 남몽골 부족들을 쳐부순다. 객관적 전력 비교가 통하지 않는 적임을 명심하라.”
이민호는 명군과 조선군이 고산국 원정군의 발목을 잡을까봐 걱정했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두 나라 군대를 무시하고 고산국 원정군 독자적으로 작전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다.
============================ 작품 후기 ============================
에휴휴
차라리 일찍 전투에 들어가는게 쓰기에 쉽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