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52 95. 전쟁의 서막 1618년 =========================================================================
95. 전쟁의 서막 1618년
연초에 소규모 정부 직제 개편이 있었다. 관상대를 이조 산하의 기상천문청으로 승격시키면서 기상대와 천문대를 분리해 예하 조직으로 두었다. 유럽에서 귀족이나 지식인들이 자유 학문으로 배우는 점성술은 고산국에서 인정하지 않았다.
본격적인 소빙기가 다가오면서 지난 십여 년간 지구 기온이 요동치고 있었다. 태풍과 지진해일, 냉해 등 자연재해에 대비할 목적으로 기상대 인원을 대폭 증강했고, 교육을 마친 직원들은 세계 곳곳에 건설된 측후소에 교대로 파견됐다.
“기온이 매년 들쭉날쭉하지만 대략적인 추세는 파악할 수 있을 거야. 날이 더워지면 홍수나 가뭄이, 추워지면 냉해가 생겨.”
“어느 쪽이든 농사에 치명적이에요. 그래도 홍수와 가뭄에는 어느 정도 대비할 수 있겠지만 냉해는 어쩔 도리가 없어요. 전 세계가 추워진다니 식량 생산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겠어요.”
이민호는 아침식사를 하면서 혜영, 혜진, 미카 등과 함께 작은 국무회의를 열었다. 지난 몇 년간 폭염과 폭설, 가뭄과 냉해가 교대로 북반구를 엄습해서 지역마다 식량 생산량이 들쑥날쑥했다.
영토가 넓어서 좋은 것은, 한 지역에서 자연재해나 병충해로 농사를 완전히 망쳐도 다른 지역에서 생산한 식량으로 쉽게 보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마을마다, 혹은 농가마다 재배하는 품종을 달리해서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노력도 했다. 그리고 논밭에 농약을 치기보다는 오리농법과 우렁이농법 등 친환경 농업을 시도했다.
“냉해와 병충해에 강하면서도 소출이 좋은 품종을 만드는 것은 아무래도 꿈이겠지.”
“농업연구소 연구원들을 믿으세요. 꽃가루 배양법으로 새 품종 개발에 드는 기간이 대폭 단축됐잖아요.”
현대 온대지방에서 벼 한 품종을 개발하는데 보통 15년이 걸렸다. 그러나 꽃가루를 실험실에서 배양하고 온실에서 일 년 내내 벼를 재배함으로써 그 기간을 절반 이하로 줄일 수 있었다.
“가끔 농산물 생산이 과도하다 해도 경작지를 줄이면 안 돼. 3년 넘은 쌀을 가축에게 먹이거나 심지어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여유분을 충분히 준비해둬.”
“물론이에요. 각 지역마다 식량창고를 여유 있게 지어놓았어요. 그리고 농부가 부족해 농사를 짓지 못하더라도 농지 개간은 꾸준히 진행하고 있어요. 북미 중앙 평원이 안정되면서 개간할 농지와 목초지는 얼마든지 있어요.”
“오응태 대감이 그 동안 고생 많이 했지.”
조선에서 함경북병사로 활약했던 오응태는 북미에서 원주민들을 상대로 강온양면 정책을 적절히 구사해 단시간에 평정할 수 있었다. 지금은 서부 산맥 일부분을 제외한 원주민 부족 대부분을 고산국 지배하에 두는데 성공했다. 처음에 해안지대 가까이 위치했던 여진 기병 정착촌은 점차 내륙으로 이전해서 지금은 철도 교차로 주변에 큰 거점도시를 건설하고 있었다.
“전 세계에 분포한 측후소에 보급을 추진하고 인원을 교대하는 것도 큰일이에요. 오지에 등대나 천문대를 운영하는 일도 인력이 많이 들어요.”
“격오지 근무지를 지키는 문제 때문에 탐사전단들이 기상천문청 예하 무력집단이 된 것 같아서 불만이야.”
역사상 대규모 전쟁이나 민족의 이동은 전 지구적 기후 변화 현상과 밀접하게 연관됐다고 알려져 있었다. 훈족의 유럽 침입과 게르만족의 이동 등은 기온 하강이, 바이킹의 유럽 약탈과 확장은 기온 상승이 주요 원인이라는 주장이었다. 세계 각지에서 측후소를 운영하느라 국가예산이 많이 소모되더라도 기후 변화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와 독일을 비롯한 중부와 북부 유럽에서 특히 기온 하강 폭이 커요. 작년에는 남프랑스 지역에 폭염이 덮쳐서 수백 명이 일사병으로 죽었지만요.”
“기온은 추세가 중요하니까 더 지켜보자. 그런데 조선에서는 웬 궁궐을 이리 많이 지어? 임진왜란 때 불탄 종묘는 당연히 중건한다 치더라도 창덕궁, 창경궁, 경덕궁, 정릉 행궁, 인경궁에 자수궁 등등 끝이 없네.”
“신기하게도 경복궁은 무너진 그대로 방치해두고 있어요. 게다가 조선 국왕께서 새로 지은 궁궐로 옮긴 것이 아니라 정릉 행궁에 머무르고 계세요.”
경덕궁은 경희궁, 정릉 행궁은 덕수궁이었다. 경복궁은 조선 왕조의 정궁으로서, 부지 면적만으로 따지면 명나라와 청나라의 정궁인 자금성의 83퍼센트 정도였다. 경복궁 자체만으로도 그리 작지 않은데 주변에 배치된 궁궐들을 합하면 면적만으로는 오히려 자금성을 압도했다. 물론 황제국의 정궁인 자금성이 훨씬 웅장한 편이었다.
“궁궐 재건에 브루나이 목재하고 시멘트를 사용하는 문제로 예전에 한참 논쟁을 벌였었지.”
“조선 대신들 고집 센 것은 알아줘야 해요.”
조선에서 여러 궁궐을 재건하면서 조선 전통의 석회와 금강송이 아니라 강원도에서 생산한 시멘트와 브루나이에서 벌채한 티크 목을 사용하겠다고 해서 이민호가 기겁한 적이 있었다. 조선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일지 몰라도 이민호에게는 시멘트와 철근을 사용해 날림으로 재건하고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한다면서 내부에 엘리베이터까지 설치한 오사카 성이 연상됐다.
물론 조선 조정 나름대로 고민이 많았다. 티크 목이 비싼 목재에 속했지만 금강송은 이 시대에도 훨씬 더 귀하고 비쌌기 때문이다. 결국 겉에서 보이는 곳에는 금강송을, 안쪽에는 티크 목을 사용하라고 조선 조정을 설득하면서 티크 목재 수입 가격을 깎아주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시멘트는 비를 맞으면 오래 못 간다는 이유를 대서 궁궐에 사용하는 것을 간신히 막을 수 있었다.
“과도한 토목 공사는 나라가 망하는 지름길인데 큰일이야. 혹시 조선 국왕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는 것 아냐? 명나라 광세사처럼 조도어사와 독운별장들이 지방에 파견돼 횡포를 부린다든지 말이야.”
“수많은 사람들이 부역에 동원되고 각지에서 금강송을 베어 운반하는데도 의외로 반발이 적어요. 임금을 주고 부역에 동원하고 소나무값을 지불한 다음에 벌목하니까요. 조선은 고산국 덕택에 부자 나라가 됐잖아요.”
“하긴, 조선은 우리나라 상대로 몇 안 되는 무역 흑자국이지.”
조선은 고산국과 교역을 하면서 얻는 아주 약간의 무역수지 흑자 외에도 수입을 많이 얻었다. 고산국에 개방한 남해안과 서해안 각지의 항구에 출입하는 상선과 여객선에 부과하는 입항세와 수출입 상품에 징수하는 관세 등으로 왕실의 내탕고와 정부 재정이 아주 충실한 편이었다. 그래서 이번 궁궐 재건 과정에서 백성들에게 임금을 주며 부역을 시키고 금강송을 제값을 주고 매입하면서 오히려 성군이라는 칭송까지 받았다.
실제 역사에서 광해군의 가장 큰 실정이 과도한 궁궐 재건 공사였다. 여러 궁궐을 동시에 재건, 혹은 신축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부역에 동원했기 때문이다. 금강송 하나를 한성으로 운반하는데도 무수히 많은 한강 주변 백성들이 생업을 도외시한 채 고달픈 노역에 종사해야 했다. 당연히 여론이 나빠질 수밖에 없었으나 고산국과 교역을 하면서 자금 여유가 생긴 탓에 상황은 실제 역사와 정반대가 됐다.
“미카! 후금에서 말을 돌려받겠다고 했다지?”
“예, 주인님. 허투알라 현지에 잠입한 요원들의 평가로는 조만간 누르하치가 명나라를 상대로 군사행동을 시작할 것 같다고 해요.”
“저당 잡힌 말에게 곡물을 먹이는 공작이 성공했어야 했는데.”
“말을 돌보겠다고 따라온 건주 여진 목부들이 그것만큼은 철저히 막았어요.”
조선의 말은 건초 외에도 콩이나 좁쌀 같은 잡곡을 일정 비율 먹여야 제대로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여진 말과 몽골 말은 철저히 건초나 풀만 먹여 길렀다. 심지어 겨울에는 말이 직접 눈을 헤치고 말라붙은 풀을 뜯어먹도록 했다. 이는 야전에서 보급소요를 줄이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저당 잡혔던 말 2만 마리는 예비용이겠지?”
“예. 전마로 쓰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대부분 짐말이에요. 여진족과 몽골족은 전마를 남의 손에 맡기지 않으니까요.”
농경지대의 기병은 보병과 기동속도에서 차이가 사실상 없었다. 유럽에서는 전마와 승용마, 짐말이 구별됐고 기사는 승용마에 타더라도 종자는 말과 함께 걷거나 뛰어서 따라와야 했다.
조선에서도 기병 갑사나 기병 정병이 한 명씩 대동하는 군장이나 복마 때문에, 그리고 보병과 함께 편성된 군제 탓에 보병의 기동 속도를 넘지 못했다. 유럽이나 조선에서도 기병 단독으로 빠르게 기동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으나 몽골족이나 여진족처럼 기병만으로 장기간 작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곡식을 다 갚았으니 말은 돌려주도록 해. 그리고 명나라 조정에 이 사실을 알려. 조만간 후금이 군사행동을 일으킬 조짐이 보인다고 말이야.”
“명나라 예부에 자문을 보낼게요. 그런데 무순 성을 지키는 유격 이영방이 후금에서 보낸 사람들과 몰래 만난 정황을 포착했어요.”
“설마 아무리 명나라가 막장이라도 장수가 뇌물을 받고 무순 성을 홀랑 넘겨주지는 않겠지.”
그러나 설마 했던 일이 겨우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일어난다. 이민호는 이영방이 전투 한 번 없이 무순 성을 들어서 후금에 항복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후금을 계속 주시하도록 해. 보헤미아는 어때?”
“국왕 페르디난트 2세가 신교도들을 압박해서 강제로 개종시키려고 해요. 당연히 반발이 매우 심해요.”
“신교도들이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우면 들고 일어날 거야. 동서양에서 동시에 전쟁이 터질지도 모르겠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무순 성 함락은 음력으로 윤4월 10일,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은 그레고리우스력으로 5월 23일에 발생한다. 동서양의 역사를 바꿀 거대한 두 전쟁의 시초가 10일 사이 거의 동시에 발생하는 셈이다.
“전하! 일이 생겼습니다!”
“무슨 일?”
호위대장 선영이 서둘러 집무실로 들어와 이민호에게 전화 통지문을 건넸다. 이민호가 읽기도 전에 선영이 말로 전했다.
“해군 총함장님의 모친께서 돌아가셨답니다. 주치의가 전화로 보고한 바에 따르면 총함장님께서 아침 문안인사를 올리려는데 안 깨어나셨다고 합니다. 주치의가 최종 사망을 진단했습니다.”
“으음!”
이민호가 낮게 신음소리를 냈다. 이순신의 모친은 실제 역사보다 20년이나 더 천수를 누렸다. 모친은 병으로 오랫동안 고통 받지 않고 편히 주무시다가 조용히 영면하셨으니 분명 호상이었다. 그러나 홀어머니를 떠나보낸 이순신의 심정을 생각하면 호상이라는 말을 입에 담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이순신은 확실히 효자였다. 어느덧 이순신의 나이가 칠순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모친의 무덤 옆에 여막을 치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할 것이 뻔했다. 추운 겨울에도 베옷을 입고 무덤을 돌보다 보면 당연히 건강을 해치게 된다. 과연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살아남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총함장님은?”
“사택에서 곡을 하고 계십니다.”
“정부 대신들과 3군 수뇌부로 장의위원회를 구성해서 국장에 버금가는 장례를 준비하도록 해. 상복을 꺼내줘. 나는 바로 총함장님 사택으로 가겠다.”
노인이나 병자들은 연말에 웬만해서는 죽지 않는다. 살아서 새해를 맞이하고 말겠다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모친은 고산국으로 이사 왔던 해부터 아들, 손자들과 함께 수의도 맞추고 관도 준비했다. 당사자부터가 죽음을 미리 준비한 지 오래라서 주변 사람들은 물론 모친도 어느덧 나이를 잊어먹고 있었다.
왕실 전용 승합차가 이순신의 사택으로 향했다. 호위들이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이민호를 맞이했다.
“총함장님은?”
“아직도 곡을 하고 계십니다.”
“알았다. 상주 식구들이 다들 경황이 없을 테니 예조에 연락해서 조문객을 받을 준비를 해달라고 해.”
그렇게 지시를 내린 이민호는 바로 빈소로 향했다. 안방에는 어느덧 병풍이 쳐져 있고 향불도 준비돼 있었으나 시신은 이불에 누운 채 그대로였다. 평화로이 잠든 노모의 머리맡에서 칠순의 이순신과 막내아들 이면이 통곡하고 있었다.
이민호는 한국에서 대학에 다닐 때 난중일기를 읽었다. 정유년 편에서 모친의 부고를 듣고 이순신이 통곡하는 장면을 지금도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주저앉아 가슴을 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는 표현이 특히 기억났다. 그 후에 기록된 일기 곳곳에도 모친을 잃은 비통함이 절절이 담겼다.
이순신이 체포된 다음 한성에 끌려갔다가 옥에서 나온 날이 4월 1일, 부고를 들은 것은 4월 13일이었다. 백의종군을 하러 금부도사와 함께 남도로 내려가는 도중 고향에 잠깐 들렀을 때였다. 작은 배를 타고 아산으로 오던 모친은 아산에 거의 도착하기 직전에 운명했다.
모친이 자기 탓에 돌아가셨다고 자책한 이순신은 정말 처연하게 통곡했다. 입관 절차가 끝나고 나서 나중에 일기를 적었는데도 그때 감정의 편린이 일기에 고스란히 묻어 있음을 이민호도 느낄 수 있었다. 1598년에 이순신이 누명을 쓰고 체포된 탓에 모친이 돌아가시고 조선 수군이 해체되다시피 패하고 삼남지방 전체가 정유재란의 전화에 시달렸다.
“국왕전하. 어머니를 고향 땅 선산에 뫼시겠습니다. 앞으로 3년 동안 총함장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음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형님.”
상주와 문상객 자격으로 무릎을 꿇은 채 서로 맞절을 했다. 이민호는 속으로 울컥해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시묘살이하는 동안 건강을 해치지 않도록 따뜻한 집에서 지내라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고, 최소한 주치의로부터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아달라는 요청도 하지 못했다.
“3년 뒤에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형님! 안 돌아오셔도 괜찮습니다. 아니! 반드시 돌아오셔야 합니다. 그 동안 해군 총함장 자리는 비워두겠습니다. 3년 뒤에 총함장 직무를 수행하시려면 건강에 신경 쓰셔야 합니다.”
“걱정 마십시오. 나의 국왕이시여.”
이순신이 다시 이민호에게 절을 올렸다. 이민호도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맞절을 했다. 이번 절은 군주와 신하의 예라기보다는 동지의 예였다. 옆에서 이면과 그의 부인이 처연하게 통곡하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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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두 전쟁이 동시에... 왔다갔다 하겠습니다. 중요한 전쟁이니 친정을 해야겠지요. 주인공 국가가 개입하면서 실제 역사와 많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