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51 94. 1615년~1617년 =========================================================================
최근 고산국에서는 1인 기업이나 가족 기업 같은 소기업 육성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대 독일의 마이스터 같은 공인된 장인 제도를 실시하기 위한 준비과정 중에 있었다. 고산국에서는 조선과 달리 상공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아주 좋은 편이라 다행이었다.
사업이 망한다 해서 온가족이 길거리에 나앉고 자본을 빌려준 친척들까지 패가망신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청년들은 20년 동안 저축한 개인의 자본 전체를 투자하는 만큼 창업 준비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직업학교 외에도 창업학교를 만들어 창업에 나서는 청년들을 돕기로 했다.
“창업이 얼마나 어려운 건데. 기업 백 개가 창업해서 2, 3년 내에 대부분이 망해. 겨우 열 정도가 몇 년 더 살아남는데 그 중에 한둘만 성공해도 다행이라더라.”
이민호가 예전에 들었던 말을 했다가 아차 싶었다. 지금 이곳은 생존경쟁이 치열한 현대 대한민국이 아니었다.
“자세한 조사결과는 모르겠지만 기업 생존율이 아바마마께서 말씀하신 것보다는 훨씬 높은 것 같습니다.”
“맞다. 고산국이 건국 초기라서 기회가 넘쳐나니까 기업 생존율이 좀 더 높겠지. 국방연구소 기술자들이 새로 창업한 기업들의 생존율 향상에 기여를 가장 많이 한 것 같다.”
주요 기업들의 지분 절반 이상을 국가가 소유하면서 자행되는 정경유착 관행도 무시할 수 없었다. 국내외 경제정보를 기업에 제공하는 일은 정보국의 주요 업무 중 하나였으며 대서양과 태평양을 오가는 순양함들은 무역회사들의 수출입 화물 적재를 환영했다. 기업과 국가가 결합한 수준은 잉글랜드나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저리 가라였다.
“건국 이래 기술자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몇몇 기계 종류는 민간에 판매를 하지 않는다면서요?”
“새로운 기술이나 기계가 무조건 환영받는 것은 아니야. 기술자들이 성과를 올리면 나도 기쁘지만 나라를 다스리다 보면 정책적 고려를 해야 할 때가 있단다.”
긴 시간 간격을 두고 관찰해보면 특정 산업에서 자동화 수준이 높아질수록 자본가는 고용 인력을 줄여 이익을 늘리려고 혈안이 된다. 전통적으로 인력이 많이 소요되는 대표적인 산업이던 방적이나 방직 산업도 현대에 들어서서 대부분 공정이 자동화되면서 고용 인력이 대폭 감축됐다.
그러나 고산국 산업설비는 아직 그렇게까지 높은 자동화 수준을 이루지 못했다. 사실은 공작기계류 개발을 주도하는 국방연구소에서 인력을 줄이는 여러 가지 기계장치를 개발하고서도 일부러 판매하지 않거나 가격을 아주 높이 책정하는 식으로 인력 절감 추세의 확산을 막았다. 그래서 공장에서는 항상 인력이 부족했고, 만성적인 인력 부족 현상은 당연히 임금 상승 압력으로 작용했다.
필연적으로 고산국 노동자들은 노동 시간에 비해 이 시대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높은 임금을 받았다. 여차하면 고용주가 얻는 이익보다 더 높은 임금 수준을 누렸고, 이익을 못 올리는 한계기업이 빠르게 망하면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장점도 가지게 됐다.
임금이 오를수록 노동자들은 노동 시간을 줄였으며, 그래서 더더욱 노동의 가치가 올라가는, 고용주들이 보기에는 최악의 악순환에 빠져들었다. 결국 17세기 초반의 고산국에는 21세기 선진국들처럼 인건비가 들어가는 서비스는 비싸고 1, 2차 생산품은 싼 가격구조가 정착됐다.
“혹시 농어민의 소득을 끌어올리고 노동자들의 임금을 꾸준히 올리는 정책도 인구 증가 정책과 관련됐습니까? 임금이 오르면 물가도 따라서 올라 수출에 불리할 텐데 아바마마께서 무역수지는 중시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당연하지. 짐승이나 사람이나 삶에 여유가 생겨야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은 마찬가지야. 생존 자체가 버거우면 자식을 아예 낳지 못하거든. 이제는 건국 초에 목표했던 생활수준에 거의 도달한 것 같아.”
“인건비 오르는 것보다는 물가가 적은 비율로 오르는 것 같습니다.”
“인건비는 생산 요소의 일부에 불과하니까. 그리고 물가는 일부러 유럽 수준에 맞췄다. 물가가 비싼 지역에 수출하면 수출하는 쪽이 사회 전체적인 단위로 따지면 손해 보는 셈이 되니까.”
대항해시대 이후 19세기까지 중국은 세계를 상대로 비단과 도자기, 차 등을 수출해 꾸준히 무역흑자를 유지했다. 이들 상품은 높은 생활수준을 상징하고 유럽과 중동 상류사회의 유행을 주도했기에 세계에 수출한 사실을 자랑스러워할 만하다. 그러나 현대 중국 경제사학자들 중 일부는 과도한 노동력을 투입해서 많지 않은 은을 벌어들인 것은 오히려 손해라고 비판한다.
건국 초기 이민호는 유럽 상인들에게 자꾸 바가지를 씌운 것 같아 양심에 꺼린 적이 많았다. 그러나 상인들은 유럽에 도착하면 매입 가격의 몇 배 혹은 몇 십 배나 되는 가격에 팔았다. 통화 기준인 은의 가치가 유럽에서 훨씬 낮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같은 고산국 영토라도 유럽과의 거리에 따라 물가수준을 다르게 해서 적정한 가격에 수출하고 무역수지도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스코틀랜드에서 캔 석탄이나 스웨덴에서 생산한 조악한 수준의 철을 고산국에서 수입하는 것은 유럽 지역의 경제가 무너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역할도 했다.
“예전에 저는 다른 나라 백성들의 생활수준도 본국과 비슷할 줄 알았습니다. 저야 인도와 네팔 지역에만 가봤습니다만, 무역하는 상인들이 그러던데 외국과 비교 자체를 못한다더군요.”
“후후! 나를 존경해도 된다. 지난 세월 너희 어머니들과 함께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20세기 중후반 선진국에서 소득이 오르면서 삶의 여유를 즐기려는 개인주의가 만연하는 바람에 중산층이 자식을 낳지 않는 대신, 가난하고 무식한 이민자나 하층민, 열등 인종이 자식을 줄줄이 낳는다는 주장이 한때 상식으로 통용됐다. 20세기 후반에 출산율이 급격히 떨어져 국가 소멸 위기에 처한 프랑스가 대표적인 사례로 지목됐다.
그러나 이는 임금인상을 억제하고 소수인종이나 이민자 출신 하층민에 대한 증오를 유발시키려는 거짓말이었다. 어느 나라나 지배층은 이민자를 대량으로 받아들여 국민들의 임금 수준을 하락시키는 동시에 이민자나 외국인 노동자들의 이미지를 나쁘게 몰고 가 기존 국민들과 대립시킴으로써 분할 통치의 수단으로 삼았다.
프랑스의 예를 들자면 북아프리카나 이슬람권 출신 이민자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피임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이주한 흑인들은 비록 프랑스에서는 하층민으로 살지만, 고향에서 굶기를 밥 먹듯이 했던 산모의 건강과 영양상태가 급속히 향상됐다. 이들은 기존 프랑스인들에 비해 아기를 많이 낳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 언론에서 반복해서 세뇌시키는 저출산에 관한 상식과 선진국들의 현실 사이에는 거리가 있었다. 2014년 4월 현대경제연구소에서 저출산 문제를 다룬 보고서에서 밝혔듯이,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인구 감소는 시민들이 아기를 낳지 않고 삶의 여유를 추구했기 때문이 아니라, 과도한 육아 비용과 교육비 부담이 주요 원인이었다.
프랑스 정부가 보육 예산을 증액하고 공교육 관련 예산 지출을 꾸준히 늘림에 따라 출산율도 점차 높아져 21세기에 들어와서는 2.0 이상으로 상승했다. 물론 이민자들의 출산 비율이 여전히 높았으나 자국민들도 출산을 기피하지 않게 되면서 국가 소멸 위기에서 벗어난 것이다.
“아바마마께서는 역사상 어느 성군에 비해 결코 못지않다는 말씀을 드리려 했습니다만, 아부하는 것 같아서 하지 않겠습니다.”
“사내자식이 가리는 것도 많다. 사실이니까 아부가 아니야. 해도 돼! 괜찮아. 어서 해봐! 응?”
“싫습니다! 아들한테서 칭찬 받아서 어디에 씁니까? 군주라면 마땅히 백성들한테 칭송을 받아야죠.”
“일반 백성들보다는 아들한테 칭송을 받고 싶은 것은 세상 어느 아버지나 다 마찬가지일 거야. 너도 애비가 되면 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 저도 내년에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이민호의 아버지로서 종친부의 수장인 이응화는 손자, 손녀들이 눈이 너무 높아 성년이 돼서도 시집 장가를 못 간다고 걱정이 태산 같았다. 이민호나 후궁들이 자식의 연애나 혼사 문제는 당사자에게 맡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할아버지가 직접 나섰다. 그럴 듯한 총각이나 재원으로 알려진 처녀들을 뒷조사해서 손주들에게 선을 보게 하는 일은 늘그막에 이응화의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여자는 구했어? 저번에 그 사관생도는 어쩌고? 할아버지가 소개해주셨나?”
“아닙니다. 예전에 바로 그 여 선배입니다. 헤헤!”
몇 년 동안 열심히 스토커 짓을 하더니 기어코 여자의 마음을 돌린 것 같았다. 아버지인 이민호가 보기에 개똥이는 키도 크고 잘 생기고 사관학교에서 꾸준한 산악부 활동을 통해 몸도 멋지게 만들었다.
조만간 초급 장교로 임관해서 한동안 고생하겠지만 고산국에서 군인, 특히 장교에 대한 대우는 확실한 편이었다. 비록 아들이지만 개똥이는 훌륭한 신랑감이었고 여자들에게 인기도 좋았지만 뜻밖에 한 여자만 바라보는 순정파였다.
“드디어 며느리를 들일 수 있겠구나. 여자 사관생도라니, 잘 됐다.”
“올해 봄에 임관해서 지금은 육군 소위입니다. 그런데 전투 병과 지휘관 보직을 여 장교가 맡을 수 없습니까?”
“남자 장교와 동일한 체력이라면 언제든 가능하다.”
“차라리 안 된다고 하세요.”
원래는 여자 장교를 전투병과에 아예 배치하지 않으려 했다. 남녀 문제에서 보수적인 이민호는 독일 헌법재판소 판사들처럼 출산 가능한 젊은 여자를 전쟁에서 소모하는 것을 사회적인 낭비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 장교들이 꾸준히 요구하기에 남자와 동일한 체력 검정 시험을 통과할 것을 전제조건으로 달아 허가했다. 결코 쉽지 않겠지만 미 해병대의 사례로 볼 때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해 늦가을에 오스만 제국 황제 아흐메드 1세가 서거했다. 고산국에서는 황제의 동생 무스타파 1세가 제위를 이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문 겸 즉위 축하 사절단을 이스탄불에 급히 파견했다.
“그런데 오스만 제국 황제의 동생이 제위를 물려받다니, 이런 경우는 처음인 것 같아. 그런 위험 분자가 안 죽고 살아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해. 부황 메흐메드 3세는 형제 19명을 처형했다면서?”
“아흐메드 황제가 1603년에 제위에 오를 때 겨우 열세 살인데다 아들이 없었거든요. 그때 무스타파는 열두 살이었어요. 아흐메드 황제가 잘못됐을 경우 유일한 후계권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27세의 젊은 나이에 오스만 제국 황제가 갑작스럽게 서거하는 바람에 정보국에서 아주 난리가 났다. 그래도 그 동안 축적된 정보를 통해 이민호의 궁금증을 어느 정도 풀어줄 수 있었다.
“황가의 단절을 우려한 건가?”
“예. 더욱이 무스타파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어서 불쌍해서 내버려뒀다고 해요. 그리고 아흐메드 황제가 즉위한 다음해에 장남 오스만이 태어나긴 했지만 지금도 아직 어려요. 그리고 오스만이 황제가 되고 나서 자기 자식들을 죽일 것을 우려한 쾨셈 술탄이 황제가 즉위하는 동시에 형제들을 모조리 죽이는 것은 야만적인 풍습이라고 남편 아흐메드를 설득했다고 해요.”
“맞다! 오스만을 비롯해 아흐메드 황제의 어린 자식들이 줄줄이 있는데도 동생이 제위를 이어받았어. 이거, 문제가 생기겠는데? 잘못하면 삼촌인 황제와 정당한 후계자임을 주장하는 조카들 사이에 제위 다툼이 벌어질 수도 있겠어.”
아흐메드 1세의 애첩이었다가 나중에 정부인 자리를 꿰찬 쾨셈 술탄, 다른 호칭으로 마흐페이커 술탄의 정치적 조언이 무스타파를 살렸다. 그리스 출신으로 처녀적 이름이 아나스타샤인 쾨셈 술탄은 아흐메드 1세의 부인으로서, 그리고 황제 무라트 4세와 미친 황제 이브라힘의 어머니인 발리데 술탄 겸 공식적인 섭정으로서 오스만 제국 역사에서 가장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여자였다. 말년에는 손자 메흐메드 4세의 통치에 간섭하다가 황제의 모후가 암살자를 보내 죽였다는 소문을 남겼다.
“이스탄불의 우리 대사관에서 무선통신으로 보고한 내용에 실제로 그런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대요. 정당한 후계권을 가진 아흐메드의 아들들, 특히 장남 오스만에게 명분이 있으니까 이번에 프랑스에서 그런 것처럼 궁정 반란을 일으키라고 가신들이 충동질하나 봐요.”
“정치모리배들이 날뛰고 있겠군. 조선 같으면 정난공신이 되어 권력을 쥐게 될 기회니까 어중이떠중이들이 죄다 달라붙었겠지.”
“혹시 오스만 제국의 후계 분쟁에 개입하실 건가요? 외부적으로는 주인님이 황제 아흐메드의 후견인으로 알려져 있잖아요.”
“아흐메드가 죽었으니 명목뿐인 후견인 역할도 끝났어.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황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외국에서 내정 간섭을 할 이유가 없지. 내버려둬.”
“이집트의 통치권 문제와 관계가 있어서 여쭤보는 거여요.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의 안전 통행 문제와 직결되고요.”
“신탁통치는 제대로 끝났어. 능력이 되면 언제든 가져가라고 해.”
그 사이 이집트 총독 대리 옥남이 이집트를 완전한 국가체제로 발전시켰다. 군대와 행정조직, 종교 시설과 교육 기관을 정비하고 이집트인의 정체성을 갖도록 옥남이 꾸준히 노력한 결과, 이집트인들은 이집트가 어느 나라의 식민지가 아닌 독립국가가 되길 열망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이집트는 기원전 6세기부터 현대까지 식민 역사로 점철됐다. 페르시아, 로마제국, 아랍, 오스만 제국 등이 이집트의 주인으로 군림했다. 오랜 식민지배로 인해 이집트인들은 지극히 피동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옥남이 고산국 출신 행정관은 극소수만 채용하는 대신 군대와 행정기관, 종교 조직에 이집트인들을 대량으로 활용하면서 분위기가 점차 적극적으로 바뀌었다. 이집트인들만으로 국가를 꾸려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권력욕에 불타는 장군들이 군사 반란을 두 번이나 일으켰다. 그러나 소수에 불과한 이집트 주둔군과 수에즈 운하를 지키던 스위스 용병이 간단히 진압하면서 이집트인들은 화약무기와 근대적인 전술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 또한 군사 반란이 진압되는 과정에서 종교인들과 민간인들이 총독부를 지지하면서 돈으로 살 수 없는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었다.
“오스만 제국이 정벌에 나서면 인구가 적은 이집트가 오래 못 버틸 거여요.”
“지금이야 인구가 적지. 이집트를 지배했던 국가들이 이집트에서 인구가 불어나지 못하게 정책적으로 막았더군. 하지만 인구가 20배 정도로 늘어나도 식량이 부족하지 않을 거야.”
“그 좁은 나일 강 유역과 삼각주에 8천만이나 산다고요? 가능하더라도 그건 나중 일이고 지금이 문제잖아요.”
“응. 그 전에는 돈으로 때워야지 어쩌겠어? 오스만 제국에서 군대를 파견해 직접 통치하는 것보다 지금처럼 간접 통치하는 편이 훨씬 이익이라고 납득시켜야 해. 장기적으로 이집트는 독립국가가 될 거야. 고산국에 보호를 요청하겠지만, 우리나 이집트나 굳이 오스만 제국과 충돌할 필요는 없어.”
19세기에 무하마드 알리가 이집트 독립을 이끌었으나, 이스탄불에 세폐를 바침으로써 군사적 충돌 가능성을 낮출 수 있었다. 나일 삼각주의 농경과 수에즈 운하 통행료만으로 세폐를 바치고도 이집트의 재정은 충분했다.
“뿌듯하신 것 같아요.”
“그럼! 해남도에 이어 두 번째로 위임 통치를 성공시켰잖아. 옥남이 확실히 왕재는 왕재야.”
“왕재라면 주인님께 위험한 인물이 아닌가요?”
“그래서 정여립의 아들이라는 핑계로 옥남을 외부로만 돌리고 있잖아. 옥남이 자기 한계를 확실히 인지하고 있으니까 정보국에서 지나치게 감시할 필요는 없어.”
정보국장 미카가 빙긋 웃으면서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민호에게 반역할 가능성이 가장 큰 인물이 옥남이기 때문이었다.
이민호도 옥남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의 능력과 성향을 잘 알고 철저히 가능성을 제한시켰다. 옥남이 이집트를 장악해서 아무리 부강하게 만든다 해도 이 시대에는 이집트의 인구 자체가 적어서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또한 이집트에는 방어에 적합한 산지도 없었다.
“나중에 총독 대리께 나라를 세울 땅을 떼어주기로 약속하셨다면서요?”
“은퇴하면 자그마한 섬에서 왕 노릇이나 하라고 농담처럼 말했지. 지금처럼 일을 잘하면 약속을 지켜줄 수도 있어.”
한국에서 대학 다닐 때 여행갔었던 제주도 관광지 우도가 떠올랐다. 면적과 인구로 볼 때 그 정도 섬이 옥남의 왕국으로 딱 적당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다음부터 30년 전쟁과 후금의 명나라 침공 챕터에 들어갑니다. 그렇다 해도 그 기간 중에 전쟁 외에 다양한 사건을 묘사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