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850화 (799/1,000)

00850  94. 1615년~1617년  =========================================================================

멀리 동해국 북쪽에서 출발해 곰나루에서 배를 타고 온 사신 행렬이 고산국 왕도에 도착했다. 그런데 고산국에 입조하면서 몹시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일반적인 외국 사신들과 달리, 이들은 구경하러 나온 시민들에게 털가죽과 원색의 천으로 장식된 창끝을 들이대고 쉭쉭 소리를 내가며 위협했다. 분노한 시민들과 충돌하는 사고가 나기 전에 경찰들이 사신단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채 서둘러 왕궁으로 안내했다.

에벤키 족이 주축이 된 사신단은 예하 부족인 솔론 족, 동맹 부족인 다우르 족 외에도 생활양식이 비슷한 종족인 오로첸 족 통역을 대동했다. 오로첸 족은 몽골 남동부 지역에도 거주하기 때문에 몇 단계를 거쳐 말이 통하길 기대해서였다. 그러나 에벤키어와 다우르 언어에 능통한 시베리아 탐사전단 소속 제5 탐사대장이 이들의 말을 바로 통역해주었다.

“황망하지만 에벤키 사신이 전한 바를 그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에벤키 부족연합과 다우르 족의 위대한 왕 박목박과이가 고산국 국왕에게 항복을 요구한다. 고산국왕 고민호는 다가오는 정월 초까지 정성껏 공물을 준비해서 야크샤로 입조하라. 본 왕의 명령을 어기면 천벌을 받기 전에 3,000명이 넘는 대군의 공격을 받을 것이다.’ 이런 내용입니다, 전하.”

“3천이나? 오오! 엄청난 강대국에서 사신을 보냈구나.”

이민호가 과장해서 감탄하는 동안 대전에 자리한 대신들이 고개를 숙인 채 웃음을 꾹 참았다. 어느 구석에서 살다 보면 그곳이 세상의 대부분인 줄로 착각해서 세계정세에 몹시 어두운 경우가 흔했다.

그리고 이렇게 찔러보는 식으로 고산국 국왕인 이민호에게 나라를 들어 바치라거나 입조를 요구하는 부족들이 지금까지 몇 있었다. 물론 그들도 눈치가 있는지라 국왕인 이민호에게 직접 입조하길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주변 부족들이나 피지배종족들에게 큰소리치기 위해서 만용을 부려보는 것에 불과했다. 당연히 그들이 원하는 결과는 얻지 못하고, 그 대신 해병 원정대의 뜨거운 답례 방문을 받았다.

“탐사대장! 에벤키 추장의 이름이 뭐지? 한자 이름 말고.”

“둘라 봄보고르라고 합니다. 지배하는 인구가 적고 세력이 작은데도 불구하고 군사 활동 범위가 시베리아와 동몽골까지 포함해서 굉장히 넓습니다. 봄보고르는 최근 전쟁과 정략결혼으로 실카 강과 아무르 강 상류 지역에 분포하는 원주민 세력들을 빠르게 흡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조금 더 성장하면 시베리아 철도에 실체적 위협이 될 수도 있습니다.”

둘라 봄보고르는 청나라 기록에 한자로 博木博果尔 또는 博穆博果尔로 기록된 에벤키 족 추장이었다. 1630년대 말에 청나라와 몇 년 동안 전쟁을 벌이면서 일부 승리하기도 했으나, 대군을 동원한 청나라에 끝내 패배한 다음 선양에 끌려가서 참수 당한다.

동시베리아 지역에는 에벤키 족보다 다우르 족이나 오로첸 족이 인구가 훨씬 많았다. 그런데도 최근에는 에벤키 족이 실카 강 인근에서 다른 부족들을 누르며 슬슬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원래 산악지대에서 사냥하던 사람들이 말을 타게 되면서 급속도로 영토 확장을 한 사례로는 학자들이 몽골족의 근원이라고 추정하는 실위족이 있었다. 에벤키 족은 조랑말 크기와 비슷한 순록을 썰매 끄는 외에도 직접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라 말을 타는 일에도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실카 강 유역은 실제 역사에서 서양에 다우리아로 알려지고, 러시아 탐험대에 의해 트랜스바이칼이라는 이름이 붙은 아무르 강 상류의 지류 유역이었다. 주변 광대한 지역에서 유일하게 농경이 가능한 가로 세로 천 km 정도의 넓은 땅이라 새로운 나라를 건국할 만한 토대를 충분히 갖췄다. 다만 추운 지역이라 인구가 극히 희박했다.

봄보고르의 현재 근거지는 다우리아 북동쪽 산악지대에 가까워서 영토를 맹렬히 확장할 경우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측면에 노출될 우려가 있었다. 시베리아에 분포하는 웬만한 부족들을 전투 없이 고산국에 평화롭게 복속시켰으나 현재 에벤키 부족 연합은 그 규모가 큰 편이었다.

“야크샤라면 탐사대가 꾸준히 접촉하고 있는 지역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전하. 모피를 팔고 고산국 상품을 수입하는 지역인데 일부 전사들이 고산국이 부유하다는 소문을 듣고 정복하겠다는 야욕에 불타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힘 차이를 확연히 느꼈을 텐데 과한 욕심을 부리는군. 사신과 대화할 테니 통역을 부탁하네.”

울긋불긋한 털가죽옷을 걸친 에벤키 사신 대표가 고위관리들과 호위병들이 늘어선 대전 한가운데에 당당히 서 있었다. 탐사대장을 통해 에벤키 족 사신단의 의도를 들은 이민호가 사신들을 훑어보다가 물었다.

“왕도에 오기 전에 동해국에 들렀겠지? 동해국에서 보고 느낀 바가 없나?”

“동해 여진족은 둘라 봄보고르 대왕의 지배를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수준의 문명을 일구었습니다. 학살하거나 추방하는 것보다는 대왕의 신민으로 받아들여줄 만합니다.”

“오, 그래? 그럼 이곳 왕도는 어떤가? 인상 찌푸리지 말고 솔직히 평가해보게.”

“고산국 본토에서는 말을 타고 다니는 사람이 극히 적고, 기껏해야 마차를 타는 수준입니다. 봄보고르 대왕이 고산국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면 돌로 만든 고북 시의 건물들을 다 밀어버리고 사람들이 따뜻한 천막에서 살게 하고 어린아이들도 말을 타고 다니게 교육시킬 것입니다.”

“시멘트, 아니 돌로 지은 집은 인류 문명의 상징인데 말이지.”

이민호는 퉁구스 일파인 에벤키 족과 한민족이 공통적으로 보유한 문화에 대해 인터넷을 통해 본 적이 있었다. 일본의 2채널 우익들은 한국 문화가 시베리아 숲속에 사는 야만인과 같다고 비웃었고, 한국 네티즌들은 한국 문화의 원류를 찾았다고 환호했다.

그러나 에벤키 족이 한국인의 조상이라고 판명된 적은 없었다. 샤먼의 옷차림과 북, 솟대나 아리랑 등이 한국과 비슷하다 해도 공통 조상으로부터 각자 따로 전해져 내려왔거나, 혹은 문화 전파에 의해 외부로부터 수용됐을 가능성도 있었다.

“사람은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야 합니다. 인공적인 건물이나 물건은 이 세상에 사라지지 않는 쓰레기로 남을 것입니다.”

“훌륭한 교훈을 내려줘서 고맙네. 입조 여부를 결정하는 동안 사신단은 고산국 곳곳을 살피면서 쉬도록 하게.”

“예? 저, 전하.”

이민호가 화를 내지 않고 입조 여부를 고민하겠다고 하자 사신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야크샤에 대규모 사신단을 보내 국력 차이를 실감나게 하거나, 아니면 입조를 핑계로 해병 원정대를 보내려고 했던 이민호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사신은 왜 놀라나?”

“에이! 알면서 그러십니까?”

“뭘 말인가? 나는 잘 모르겠네.”

“입조하라는 요구는 그냥 앞으로 잘 지내기 위해 서로 사신을 보내 우의를 다지자는 뜻으로 이해해주십시오. 고산국이 강대국인 것을 설마 저희가 모르겠습니까? 다만 고산국과 동등한 국가로 인정받으면 다른 부족들을 다스리기 쉬워질 것 같아서 이런 민망한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별로 마음에 안 드는데. 조만간 큰 전쟁이 일어날지도 몰라. 나는 후방에 우호적이지 않은 세력이 도사리고 있는 꼴을 볼 수가 없어.”

머지않아 에벤키 부족연합을 치겠다는 뜻이었다. 조금 전까지 당당했던 사신 대표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국왕전하! 고산국 같은 문명 대국에서 어찌 오지의 원주민들을 핍박하려고 하십니까?”

“자연과 일체가 되는 에벤키 부족연합이 문명국이라며? 나 솔직히 꽤나 감동했어. 에벤키 사람들을 모조리 왕도로 잡아와서 진정한 문명이 무엇인지 야만인인 내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박제로 만들어도 좋고.”

미국 자연사 박물관에서 북미 원주민을 박제로 만들어 전시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20세기 초반 오사카와 도쿄의 박람회에서는 아이누인, 대만 생번 등 야만인으로 취급되는 인종들과 함께 조선인, 중국인들을 전시했다. 자칭 문명국이 야만 행위를 한 역사가 유구했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말로만?”

“동해국을 통해서 판매하는 물품을 보면 고산국이 문명국인 줄 누가 모르겠습니까? 동해국의 수만 기병을 보고도 군사대국인 줄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저희 에벤키 족 주민들이 고산국에 복속하고 싶어도 미친 망아지처럼 날뛰는 봄보고르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어떻게든 처리해주시면 국왕전하께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오호! 그러니까 봄보고르를 고산국에서 제거해주면 사신 대표가 정권을 장악하겠다, 이건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국왕전하께서 저를 믿지 못하시겠걸랑 제가 고산국 왕도에 평생 인질로 남겠습니다.”

“사신 대표가 왕도에 남아있을 필요는 없네.”

“국왕전하의 관대함에 놀랐습니다.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이민호가 신호를 보내자 남자 호위가 창 한 자루를 가져왔다. 사신 대표가 보곤 흠칫 놀랐다.

“이건 설마 봄보고르의 창입니까?”

“맞아. 봄보고르가 기병 수백 기를 동원해 철로를 뜯어가려 하기에 동해국 철도경비대와 한 판 붙었어. 반은 죽고 반은 항복했다더군.”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가 출발할 때 봄보고르가 살아있는 것을 확실히 봤었습니다만.”

“전투는 사흘 전에 벌어졌어. 자네가 곰나루에서 배를 탄 날이었지.”

“그렇군요. 고산국 사람들은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말이 사실이었군요. 봄보고르가 정말로 죽었다면 이제 우리 에벤키 족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얼이 빠져 있는 사신 대표를 보면서 이민호가 혀를 찼다.

“돌아가는 길에는 비행기를 타고 가게. 전사가 부족해서 부족을 지키기 어려울지도 몰라.”

“전하! 저는 봄보고르의 후계자로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에벤키 부족연합 전체가 고산국에 귀순하겠습니다. 받아들여주십시오, 전하!”

“받아들여주십시오, 전하!”

사신 대표가 선창하면서 무릎을 꿇자 다른 사신들도 함께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불쌍하지만 에벤키 족이 잠시나마 웅비할 기회마저도 이렇게 사라졌다.

그러나 봄보고르가 전사들을 이끌고 원정을 나왔다가 죽는 바람에 에벤키 족 민간인들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다만 에벤키 부족 연합 전체가 거친 동해국 여진족들의 감시 아래에 놓이게 됐다.

“아바마마! 젊은 층에서 나라에 불만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오! 그래? 젊은이는 원래 나라에 불만을 가져야 돼. 그래야 나라가 발전하지. 그런데 어떤 불만이야?”

저녁 식사 시간은 누군가의 생일 연회이거나 아니거나 항상 토론하는 시간이었다. 16세가 넘은 왕자와 공주들이 점차 늘면서 토론도 더욱 실제적인 주제를 갖고 진행됐다.

“삶에서 보람을 찾지 못하겠다는 불만이 가장 큽니다. 국가로부터 큰 책임을 지는 게 없으니 소외됐다고 느끼나 봅니다.”

“조선처럼 군역과 부역을 지고 싶은가? 지금은 농민과 상인 외에는 세금이 없으니까 앞으로 모든 직업에 세금을 물리면 어때? 의무적으로 10년 정도 군대에도 가고. 아주 보람찰 거야.”

“어, 어! 그렇지는 않습니다.”

“빵과 서커스를 원하는 로마의 빈민이 아니라면 놀 것이나 인생의 즐거움은 스스로 찾아야지. 바로 그것 때문에 교육을 받는 것 아닌가?”

그러나 개똥이는 생각이 깊은 젊은이였다. 왕자라고 밝히지 않아도 특유의 친화적인 성격 덕택에 친구도 많았고, 그래서 꽤나 민주적인 리더십을 발휘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특히 노동자들 중에서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수확의 기쁨을 누리는 농민이나 목동은 그나마 낫습니다. 그러나 공장에서 단순한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일수록 이직도 잦고 일에 대한 애착도 적습니다.”

“흐음! 분업 때문에 그런가? 지나친 분업화가 오히려 생산성을 떨어뜨리기도 하니까 실태 파악을 해보마. 노동자는 기계가 아닌 고용주들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논리로 고용주들을 설득해봐야지.”

“감사합니다, 아바마마. 일부 분야에서는 과학적인 실험과 실제가 다른 것 같습니다.”

“뭐, 지겨운 것을 참기 힘들어하는 것이 인간이니까.”

고산국 노동자들은 높은 임금을 받으면서도 생산시설이 적당히 기계화된 덕택에 외국에 비해 생산성이 높은 편이었다. 그래서 임금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수출상품이 외국에 비해 충분한 가격 경쟁력을 갖췄다.

그러나 값싼 인력을 대규모로 투입하는 명나라의 비단 산업이나 몇몇 분야에는 여지없이 밀리기 때문에 고산국에서는 고급화 전략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동일한 상품을 두고 중국과 가격 경쟁을 벌이는 것은 바보짓이었다.

그리고 명나라에서 외국에 수출하는 상품이 있어야 수입할 자금이 생겼다. 특히 요즘처럼 극심한 불황에 빠진 명나라에서 비단 수출길까지 막히면 경제가 완전히 붕괴될 우려가 있기에 고산국에서 일부러 보호해주었다.

“하지만 개똥아! 농민들이 일하는 게 즐거워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절대 아니야. 힘들어도 즐겁게 일하려고 노력하는 것뿐이지. 다른 나라 농민들처럼 자식들 먹여 살리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억지로 일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야.”

“그래서 젊은이들이 창업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망하더라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동안에는 즐거우니까요.”

============================ 작품 후기 ============================

이어질 내용이 있습니다.

연재 속도가 불만이겠습니다만 공부 때문에 그러니까 잠시만 기다려보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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