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49 94. 1615년~1617년 =========================================================================
절강성에서 일어난 반란은 고산국 원정군단이 투입되면서 곧 진압됐다. 그러나 원정에서 얻은 교훈을 군에 적용시키는 문제가 남았다. 원정이 끝나고 한 달 후 참모본부에서 건의한 내용을 이민호가 훑어보았다.
“반란군 저격수가 권총을 휴대한 우리 군인을 간부로 인식하고 우선적으로 노렸다는 건가? 반드시 그런 건 아닌데 보병중대 단위에서는 맞는 말이기도 하군.”
“예. 그래서 권총 휴대를 대폭 늘리거나 아예 없앨 것을 건의합니다, 전하.”
고산국 보병부대에서는 중대장과 소대장, 부사관들이 전투현장에서 권총을 휴대했다. 포병이나 헌병, 운전병들은 계급을 가리지 않고 권총과 소총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거나, 혹은 두 가지 다 휴대했다. 후방 보급부대나 최전방에서 활동하는 특수전부대에 가까울수록 권총 휴대 비율이 높아지기도 했다.
“일률적으로 따지기 어려운데 반란군 저격수들은 아주 쉽게 판단했구먼. 우리가 거기에 당했어.”
“전하께서 결정해주십시오.”
이번 참모본부장은 사단장 임기를 마친 신중한 중년 남자였다. 참모본부 인원은 일선 부대장과 순환 보직으로 운영해야 현실적인 전장 감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참모본부가 지금은 비선조직에 불과하지만 나중에는 합동참모본부처럼 전군의 지휘권을 장악하도록 개편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해군 총함장과 육군 총사령관의 카리스마가 너무 강해서 아직은 두고 보기로 했다.
“일반 보병에게는 권총이 거치적거려서 꽤나 귀찮을 거야. 전원에게 권총 휴대를 명하면 간부는 허리에 차고 병은 가슴에 차면서 구별되겠지.”
“적이 아군의 계급 고하를 구분할 수 없게 해야 합니다.”
“그럼 전군에 권총을 보급하고 허벅지에 결착해서 휴대하도록 해. 중대장도 원칙대로 전투현장에서는 소총을 휴대하게 하고.”
장병들에게 좀 귀찮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전군의 간부화를 위해 교육비와 시간을 대규모로 투자하는 것보다는 전군에 권총을 보급하는 편이 훨씬 싸게 먹혔다.
창칼이 난무하던 예전과 달리 총알이 빗발치는 요즘 전쟁터에서 요대에 매달린 권총이 덜렁거리는 것도 보기에 좋지 않았다. 고산국에서는 모든 것이 실전 위주였다.
“권총에 장식을 달지 못하게 하고 전군에 권총 사격 훈련을 시키겠습니다.”
“가끔 검열을 해서 위반자는 인사고과에 반영해.”
“규정을 만들어 장기적으로 검열을 실시하겠습니다, 전하.”
이민호는 소령에 불과한 주제에 승마복 바지를 입고 말채찍을 들고 전쟁터를 돌아다녔다는 맥아더 원수의 젊은 시절 일화를 떠올렸다. 자기는 상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그렇게 하고 다니면서 부하 장교들이 따라하면 무척 싫어했다고 한다.
“교통이 불편한 내륙으로 진입할수록 보급 문제가 심각해진다. 후방에서는 따뜻한 밥 먹고 전방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 애들은 찬밥 먹으면 사기가 떨어져. 직할 보급부대 말고 병참 전문 부대를 따로 창설해야겠어.”
“육해공이 통합된 수송사령부 창설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완성되면 전하께 바로 보고하겠습니다.”
“2년 이내에 전군의 효율성을 한 단계 향상시키는 과업을 반드시 완수하도록 하게나.”
이 시대에 유행하는 대규모 야전에서 효율적인 전투를 수행하고, 게릴라전에서는 인명피해가 적게 나도록 하는 것이 육군의 중점 과제였다. 참모본부에서 유능한 장교들이 머리를 맞대고 작전을 짜낸 다음, 일선 부대에서 직접 훈련을 뛰면서 작전을 차근차근 수정해나갔다.
두 가지 정반대 임무를 수행하려다 보니 훈련이 끊임없이 계속됐다. 최근에는 특정 지역을 정복하거나 큰 승리를 거두지도 못했는데 훈련만 계속하다 보니 군 지원자가 점차 감소하는 추세로 돌아섰다.
“동서양에서 동시에 대규모 전쟁이 발발할 것을 전제로 전략을 수립하고 있습니다.”
“참모본부가 하는 일이 많으면서도 아주 잘하고 있다. 예조에서는 더 많은 우방국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불리한 전쟁터에 우리 군을 투입하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지.”
전쟁은 곧 일어날 테니 지금은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민호가 초조해하는 기색이 다른 지휘관들에게 알려졌는지 장군들이 몹시 조바심을 내면서 부대 훈련에 매진했다.
훈련이 너무 힘들다고 전역하는 장병들이 많아졌지만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이민호는 가장 강한 장병들만 추려서 전쟁에 투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앙리 4세의 왕비 마리 드 메디시스가 4월 하순에 일어난 궁정 쿠데타로 결국 섭정에서 쫓겨났다. 고산국 입장에서 마리 드 메디시스는 아주 훌륭한 고객이었는데 안타깝게 됐다. 이만한 호구는 앞으로 다시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국왕 루이 13세가 성년이 됐다지만 직접 정무를 맡을 정도는 아니라서 총신 샤를 달베르를 내세웠다. 샤를 달베르는 루이 13세에게 궁정 쿠데타를 충동질했으며, 나중에 뤼네 공작이 되는 사람이었다.
종교로 인한 분쟁, 또는 영주들이 일으키는 내란이 잦아들고 프랑스 경제가 차츰 회복되면서 고산국의 대 프랑스 수출이 서서히 증가한다고 이민호는 판단했다. 그러나 월별 무역 현황을 살피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궁정 쿠데타가 일어난 올해 4월이 아니라 작년부터 수출액보다 수입액이 훨씬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었다. 조만간 대 프랑스 무역수지가 적자가 날 수도 있게 생겼다.
“브루나이와 조선에 이어 프랑스가 고산국 상대로 세 번째 무역 흑자국이 될 수도 있어요. 포도주 수입 물량을 줄이는 방법을 연구할까요?”
“아니야, 미카. 무역을 하다 보면 적자가 날 수도 있지. 그런 건 상관없는데, 프랑스 포도주가 갑자기 인기가 좋아진 건가?”
“새인천이나 새 나하에서 좋은 포도주가 많이 생산돼서 그 동안 프랑스 포도주의 소비량이 적었어요. 그런데 요즘 들어서 북미 동해안 원주민들이 다양한 종류의 프랑스 포도주를 찾는 것 같아요.”
정보국 건물은 궁 밖에 따로 있었으나 국장의 집무실은 왕궁 안에 들어와 있었다. 이민호는 2년 넘는 육아휴가를 마치고 다시 정보국장으로 돌아온 미카의 허벅지를 베게 삼아 누워서 보고서를 살폈다.
그 동안 정보국장직을 수행했던 왕명명은 얼씨구나 하고 대 중국 교역 업무로 복귀했다. 그러나 중국 관련 정보의 중요성이 높아져서 업무를 분담시켰더니 왕명명의 입이 댓 자나 튀어나왔다.
“북미 원주민들은 소주나 독한 보드카가 어울리는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북미 원주민들이 술의 풍미를 많이 따져요. 입맛이 예민한 그들에게는 맛과 향이 다양하고 오래 숙성시킨 프랑스 포도주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북미 원주민들이 싸구려 술에 절어 길바닥에서 구르거나 마리화나 연기 속에서 헤매는 이미지는 인디언 보호구역에 갇혀 지내면서 실업과 빈곤에 시달리는 동안에 만들어졌다. 주정부에서 미국 원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충분히 만들어준 다음에는 원주민들이 빠르게 중산층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21세기 북미 원주민들은 독립된 원주민 부족으로 인정받느냐 여부에 따라 주정부로부터 카지노 사업을 허가받거나, 혹은 거부당했다. 특히 미국 역사에 자주 등장해서 유명해진 부족들은 인허가 과정에서 유리한 반면 잘 알려지지 않거나 혼혈된 부족은 카지노 허가를 받지 못했다.
“맞아. 식탁에 여러 가지 요리를 준비한 다음 포도주를 유리잔에 따라서 우아하게 마시더군. 집집마다 지하에 술 저장고가 있어.”
“담배농사를 짓는 원주민들이 북미에서 가장 부자에요. 돈 쓸 곳을 더 다양하게 찾아주는 게 좋겠어요.”
“원주민들이 호사를 누리는구먼. 담배재배 농민이 이탈리아에서 성을 사고 프랑스에서 영지와 귀족 작위를 샀다는 소문이 돌던데 정말이야?”
“그건 포우하탄 대추장이 외국 여행 중에 돈을 뿌리고 다니면서 소문이 과장된 거여요. 담배재배 농가는 일 년 내내 바빠서 국내 여행도 못 가요. 담배 농장에서 일하는 것이 워낙 힘들어서 겨울에는 푹 쉬어줘야 해요.”
담배 가격이 아직 높게 유지되고 있어서 새강릉 주변에 거주하는 북미 원주민들이 떼돈을 벌고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 이 시기에 제임스타운에 정착해서 담배를 재배하던 노총각과 홀아비들은 보급선에서 여자들을 싣고 오면 잎담배 60kg을 선장에게 주고 결혼할 여자를 받았다. 범선을 타고 몇 달 동안 대서양을 건너는 비용임을 감안하면 꽤 큰돈이었다.
“원주민들이 하층민으로 전락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비록 담배 한 작물에 한해서지만 고산국 농민보다 생산효율이 높은 농민들은 처음 본다.”
“담배재배 기술은 원래 북미 원주민들에게서 나왔으니까요. 밭갈이 같은 힘든 일을 농기계로 해주니까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됐어요.”
“잘 됐지.”
북미 전체적으로 곡물 생산량이 넘쳐나는 덕에 포우하탄 원주민들은 옥수수와 호박 재배를 중단하고 담배생산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됐다. 옥수수 씨앗을 파종할 때 뱀장어를 잡아 비료로 삼는 원주민들에게 담배농사는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었다. 2, 3년마다 담배 밭을 옮길 때 경운차로 갈아주니까 담배농사는 더더욱 쉬운 일이 됐다.
덕택에 북미 원주민들은 같은 지역에 사는 고산국 농민보다 더 부유했다. 원주민들에게 담배재배 농법을 배운 조선 출신 농민들은 원주민들을 확실히 존중하게 됐다. 이주민들로부터 가난하다고 경멸을 당하지 않으니 원주민들이 폭력적으로 대응하거나 배타적으로 반응할 일도 없었다.
“다시 포도주 문제 말이야. 작년에 임명된 프랑스 국무장관이 루송의 주교라 했지? 작년에 대 프랑스 수입 한계를 늘려주더니 얼렁뚱땅 자기네들 수출액까지 늘렸어. 프랑스 국내 시장을 다 내준다는 식으로 교섭을 하면서도 아주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은근슬쩍 이익을 취하더군.”
“예. 앞으로 아르망 장 뒤 플레시를 주의 깊게 봐야 해요. 그 사람은 삼부회에서 명연설을 해서 왕권과 교권, 성직자와 농민들의 충돌을 가로막은 사람이에요. 중재와 교섭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어요.”
이 시대의 프랑스 국무장관은 해양과 무역을 관장했다. 현대의 국무장관에 해당하는 직책은 왕실회의 의장에 가까웠으며. 이 왕실회의 의장은 1628년에 총리라는 명칭으로 바뀐다.
“프랑스에도 인재가 있군.”
“하지만 걱정 마세요. 장 뒤 플레시 주교는 이번 궁정 반란 때 루송으로 추방됐다가 지금은 아비뇽에 망명해서 글이나 쓰고 있으니까요.”
“울적한 마음을 글쓰기로 달래나? 훌륭한 인재라도 다른 파벌이라면 쫓아낼 수밖에 없겠지. 그런데 혹시 프랑스에 리슐리외라는 정치가는 없어? 추기경인 것 같은데.”
“아르망 장 뒤 플레시가 리슐리외 영지를 소유한 가문 출신이에요. 하지만 추기경은 아직 아니에요.”
“어. 그래? 내가 잘못 알았나보다. 그런데 이번에 선출된 보헤미아 국왕은 어때?”
“지금까지 그 사람을 조사한 내용을 요약했어요.”
1617년 6월에 유럽에서 최악의 소식이 들려왔다. 자식이 없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마티아스의 사촌으로서 후계자로 내정된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됐다는 소식이었다.
이민호는 정보국에서 제출한 페르디난트 2세의 성향 보고서를 훑어본 다음 혀를 찼다. 성년이 되기 전에 예수회에서 교육을 받은 것이 앞으로 보헤미아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에 큰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예수회에 대한 정보국의 평가는 좀 달랐다.
“예수회면 교황청의 전위부대 역할을 맡고 있잖아. 폴란드에 파견된 예수회가 정교회를 흡수 통합하기 위해 루스 차르국을 노렸던 것처럼 이번에도 페르디난트 2세 때문에 문제가 될 것 같은데?”
“그래도 베네딕트회보다 훨씬 관대한 예수회라서 다행이에요. 명나라와 일본에서 활동하는 예수회 선교사들은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우상숭배가 아니라 동양 각국의 고유 풍습으로 인정하잖아요. 베네딕트회라면 어림도 없고, 유럽에서는 종교재판에도 관여하고 있어요.”
“베네딕트회보다는 낫긴 하겠다.”
이민호 입장에서는 그게 그거지만 동양에서 선교 활동한 것만 놓고 보면 예수회가 베네딕트회보다 관대해 보이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마카오에 거주하며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하는 예수회 선교사들과 자주 만난 이민호는 그들의 개방된 사고방식에 감명을 받았었다. 그러나 베네딕트회는 이들보다 훨씬 교조주의에 가까웠다.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뿐만 아니라 지중해 연안국들도 시끄러워요. 합스부르크 가문과 베네치아는 올 초에 전쟁을 멈췄어요. 에스파냐와 사보이 공국은 아직도 싸우고 있고 시실리와 나폴리를 상대로 베네치아가 가끔 해전을 벌이고 있어요. 오스만 제국과 베네치아는 이번에 종전 조약을 맺었고 오스만 제국과 휴전 중인 페르시아는 코카서스 산맥을 공략하는 중이에요.”
“주변국들과 전쟁을 하지 않으면 내란 중이네. 어째서 한동안 조용하다가 동양과 서양에서 동시에 전운이 드리워지는 걸까? 동서양에서 큰 전쟁이 동시에 터질 것 같아 신경 쓸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야.”
“최근 몇 년 동안 세계 기온이 꾸준히 내려간 것이 영향이 있을까요?”
“음. 가능성이 있겠어. 남미 화산폭발의 영향이 사라지고 나서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다시 세계 곳곳에서 냉해가 자주 발생했지.”
식량이 부족한 지역이 대부분이라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식량이 남아도는 고산국은 매년 돈방석에 앉았다. 그러나 이민호는 불안했다. 고산국의 호황이 이대로 계속됐으면 좋겠지만 무역 흑자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영국이 청나라에 면제품이나 다른 공업제품을 팔아도 계속 무역 적자가 나는 바람에 아편을 팔고, 청나라의 반발을 빌미로 결국 전쟁을 일으켰다. 이렇게 이웃나라들을 거지로 만들고도 오래도록 혼자만 배를 두들기며 살 수는 없었다.
“유럽 농민들이 새로운 작물이나 종자를 잘 안 받아들이지?”
“예. 새 작물이 도입될 때마다 극심하게 반발하면서도 이웃 마을에서 새 작물로 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돌면 어쩔 수 없이 따라서 재배해요.”
“우리가 종자도 나눠줘, 무역을 할 만한 특산품도 키워줘, 돈도 빌려줘, 정말 할 일이 많다.”
“이제는 내수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요? 성장 동력으로서의 무역은 이제 역할을 다한 것 같아요.”
“그렇다고 우리가 고립정책을 쓸 수야 없지. 무역수지 균형을 맞추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할 거야. 그것이 세계 평화를 지키는 일이기도 해.”
민간 무역회사들은 이익을 앞두고 자제할 줄 모르기 때문에 정부에서 조정과 통제가 필요했다. 무역 불균형을 해결할 방법이 정 없다 싶으면 무역적자국에 무이자로 대출을 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물론 채무국이 갚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무역 활성화를 위해 손해를 보는 것이었다. 에스파냐에게서 남북미 대륙을 구매한 것처럼, 갚지 못할 대규모의 부채를 지우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큰 이익이 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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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좀만 더하고 1618년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