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848화 (797/1,000)

00848  94. 1615년~1617년  =========================================================================

“도련님! 어? 접반사가 계시는군요.”

“오늘도 고생했다. 내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도련님이라 부르냐?”

“헤헤! 도련님도 나이가 들면서 잔소리가 느셨군요. 그래도 도련님은 영원히 저의 도련님입니다.”

군단장 감불이 작전 성과를 보고하기 위해 이민호가 기거하는 막사로 찾아왔다. 감군 명목으로 감불을 따라온 환관은 이민호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호위들의 눈총을 받으며 막사 구석에 쭈그려 앉았다. 요즘 들어서 문관보다 환관이 감군을 맡는 경우가 늘어나 장수의 작전권을 다방면으로 침해했으나, 여기서는 일개 환관이 감히 이민호 앞에서 뭐라 할 처지는 아니었다.

경덕진과 남창에서 일어난 반란군 주력은 남경으로 북상하는 길목에 긴급 전개한 고산국 2개 사단에 의해 차단당하고, 지금은 다시 남쪽으로 밀려나는 중이었다. 강과 호수, 늪지가 천지에 깔린 남중국 지역에서는 기병을 주력으로 동원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원정군 주력이 보병이다 보니 반란을 진압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작전 진행 과정은 비교적 순조롭습니다만, 적 주력이 붕괴된 이후에 실시되는 잔적 토벌 작전에 오히려 시간이 더 많이 걸리고 있습니다. 원정 군단의 진격 속도가 이틀 전보다 확연히 줄어들었습니다.”

“마을이나 숲에 숨어든 반란군 도망병들은 명나라 군대에 맡기라고 했잖아?”

“바로 그게 문제입니다. 명나라 지방군과 민병으로는 이번에 일어난 반란군을 상대하기 벅찹니다. 반란군 다수가 화승총으로 무장했기 때문입니다. 2사단에서 병력을 빼내 중대 단위로 투입할 때마다 서너 명씩 부상을 입고 있습니다.”

“시가지나 숲에서 싸우면 인명피해가 늘어날 수밖에 없지. 사상자가 중대에서 서너 명이면 예상한 숫자 이내인데 뭐가 문제지?”

감불이 접반사를 본 다음 이민호와 눈을 마주쳤다. 이민호는 접반사가 조선말을 모르니 상관없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반란의 주모자들은 절강의 염상들이었다. 부유한 자들은 대체로 체제에 순응하기 마련이었지만 환관들이 소금장수라고 우습게 여기고 재산을 강탈하려 한 탓에 한꺼번에 들고 일어났다. 염상들이 풍부한 자금을 동원해 포르투갈제 화승총을 대량으로 사들여 반란군에게 무장시키는 바람에 명나라 지방군으로 진압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부상자 겨우 서너 명이 하필 소대장이나 부소대장들이라서 큰 문제입니다. 간부들이 반란군 총병들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고 있습니다. 간부가 선두에 서거나 뒤에서 지휘만 하거나 상관없이 반란군 총병이 가장 먼저 우리 간부를 노립니다.”

“어휴!”

이 시대 고산국 군대만의 특징으로, 전투복만으로는 간부와 병을 구별할 수 없었다. 계급이 조금만 높아도 아예 다른 원색의 군복에 온갖 휘황찬란한 휘장이나 장식물을 달고 다니는 다른 나라 장교들과 전혀 달랐다. 고산국 초급 장교들이 장교의 명예 운운하며 대놓고 불만을 토로했으나 바로 이들을 헛되이 잃지 않기 위한 방책이었다.

전투현장에서는 저격을 우려해 상급자에게 경례하거나 상급자 앞에서 차렷 자세를 취하지 못하게 훈련을 시켰다.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미군 장교들 중에서 뒤통수에 총알을 맞은 경우도 많았지만 베트콩 저격수들이 활동하는 지역에서 미군 병사들이 대놓고 간부에게 거수경례를 해서 저격을 유도한 경우도 흔했다.

사실 잠시만 지켜보면 소부대 내에서 누가 지휘관인지 쉽게 구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잠시라는 시간은 저격수를 퇴치하거나 저격으로부터 피하는 귀중한 시간이 될 수도 있었다.

“이번 반란군은 상당히 체계적이야.”

“맞습니다. 어이없게도 반란군 주제에 우리 고산국의 무기체계나 편제, 전술 등을 죄다 따라 하고 있습니다. 반란을 일으키기 전부터 우리가 진압하러 올 줄 알고 미리 대응책을 준비했다고 봐야 합니다.”

“우리 입장에서야 짜증나지만, 반란군이 명나라 군대보다 훨씬 낫다.”

이민호가 막사 구석에 쭈그려 앉은 환관에게 슬쩍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환관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이 젊은 환관은 감군(監軍) 자격으로 진압군 지휘부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역대 중국 왕조에서는 전략 전술이나 군대 일을 전혀 알지 못하는 환관들이 감군에 임명돼 장수들의 지휘권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부대를 직접 지휘하는 경우가 흔했다. 그래서 1449년 환관 왕진이 정통제에게 친정을 부추겨 토목보의 변이라는 굴욕적인 패배를 맛보게 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 실전에서 자주 발생했다.

요동 주둔 기마병인 북병과 여진족 기병이 싸울 때에도 문관이 아닌 환관이 감군으로 자주 임명됐다. 그런데 어느 환관이 말을 못 탄다는 핑계로 말이 아닌 가마를 타고 다니면서 위세를 부린 적이 있었다. 당연히 북병의 주력인 명나라 기마병들이 가마의 이동 속도에 맞추느라 기동 속도가 확 떨어졌다. 그리고 기병끼리 격돌하다가 명군이 패해 후퇴했을 때 가마에 탄 환관은 여진 기병으로부터 도망치지 못하고 잡혀죽었다.

중국 역사에서 환관이 군대를 감독하는 전통은 꽤 오래 됐다. 11세기 초반 북송 인종 연간에는 환관 감군 황적화가 군대의 지휘권에 간섭하는 바람에 대장 유평이 전사한 적이 있었다. 조정에서는 군중의 환관 감군을 철폐해달라고 황제에게 요청했으나, 환관들의 힘이 강해서 섣불리 제도를 바꾸기 어려웠다.

당시 재상 여이간은 감군의 추천권을 환관을 관리하는 도지들에게 맡기고, 나중에 결과를 보고 나서 환관 감군과 그를 추천한 도지에게 책임을 지우자는 식으로 황제에게 건의했다. 그러자 바로 다음 날 도지들이 황제를 알현해 환관 감군 제도의 철폐를 요청했다.

여기서 얻을 역사적 교훈은 사대부들에게 칭찬을 받은 재상 여이간의 지혜로운 책략이 아니라, 환관 감군의 폐해를 잘 알면서도 역대 중국 왕조에서 없애지 않았다는 것에 있었다. 장수에게 전적으로 병권을 맡겼다가 당나라처럼 반란으로 나라가 망하느니, 차라리 문관이나 환관을 감관으로 임명해 장수를 견제하려는 것이 이유였다.

“반란군이 지연전을 펼치며 후퇴하는 와중에도 꾸준히 반란군 포로들을 대량으로 수집하고 있습니다. 오늘 잡은 반란군만 물경 5천에 달합니다. 지금 포로들이 도착할 시간이 됐습니다.”

“지금까지 잡은 포로가 2만이 넘어가는구나. 일부러 포로를 남김으로써 우리 군의 보급 사정을 악화시키려는 전술은 아니겠지?”

“남경 조정이 제대로 보급을 못해주니까 그런 상상도 가능하겠습니다.”

“다음부터는 아예 우리가 우리 군의 보급을 맡아야겠어. 보급품 운반과 경비에 투입하려면 원정군 병력을 서너 배로 늘려야겠지만 이런 식이면 너무 불안해.”

보급은 현지 인력을 동원하는 것이 가장 싸게 먹히고 효율적이었다. 그러나 관리들의 부패로 인해 명나라의 동원체계가 무너지는 판에 인력 동원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남경 조정에 압력을 가하고 감군을 윽박질러도 보급품 운반에 필요한 인원과 수레를 충분히 구하지 못했다. 다른 곳에서라면 장수들에게 큰소리 치고 다녔을 감군이 막사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이유였다.

“포로들이 도착한 것 같습니다.”

“구경이나 해보자.”

이민호가 감불과 접반사, 감군을 데리고 포로 행렬을 관찰했다. 무기를 압수당하고 풀이 죽은 채 힘겹게 걷는 포로들을 상상했으나 오늘 잡힌 포로들은 상상한 것과 정반대였다.

포로들은 반란군 주제에 여느 명나라 군대에 못지않은 체격이 좋은 젊은 장정들로 구성돼 있었다. 군적의 갱신이 느린 것은 조선과 마찬가지라서 명나라에서도 중년이 병사들의 대종을 이루지만 반란군은 순수 지원제라서 젊은이가 대다수였다.

“땅을 물려받지 못해서 유랑하는 차남 이하 농민들인가? 패잔병들의 눈빛이 제법 살아있군.”

“감히 도련님을 노려보는 것 같습니다.”

감불이 흥분해서 나서기 전에 이민호가 말렸다. 반란군 포로들이 증오를 가득 담은 눈길로 노려보는 동안 옆에서 쩔쩔 매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포로들이 내가 아니라 감군을 노려보는 것 같아.”

“아하! 감군이 갑옷을 입었어도 수염이 없으니까 환관인 줄 대번에 알아보는군요.”

이 시기의 반란은 주로 환관으로 이루어진 광세사들이 발호한 탓에 일어났다. 환관들은 황제로부터 지역을 나눠받은 다음 그 지역 내의 모든 것에 세금을 물리다 못해, 은광이 발견됐다는 이유로 남의 집을 허물겠다고 위협해서 돈을 뜯어냈다.

환관들의 수탈은 가난한 농민보다는 돈 많은 상인과 직공들에게 집중됐다. 그러나 도처에서 상업이 마비되니까 농민들이 세금 외에도 더 큰 경제적 부담을 지게 됐고, 이것이 농민반란이 자주 일어나는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보게, 감군!”

“예! 대인!”

이민호가 오랜만에 불러주자 환관이 연신 굽실거리며 하명을 기다렸다. 허리가 굽혀지는 각도와 속도, 그리고 가느다란 목소리의 떨림을 들어보니 이 정도면 황제를 가까이 모실만한 충분한 실력이었다.

“저 포로들은 어떻게 처리할 건가?”

“반역죄는 3족을 멸하는 게 원칙입니다만, 이번에 잡힌 반역자들이 너무 많아서 문제입니다. 황상께 조칙을 내려달라고 청했으니 두세 달 뒤에 결정될 것입니다.”

“두세 달이라. 황도까지 왕복하는데 시간이 많이 단축됐군 그래.”

감군이 황제에게 보고했으니 이제 저들의 운명은 전적으로 황제의 게으름에 달려 있었다. 반란군도 황제의 신민인지라 장수나 감군 선에서 마음대로 처분하지 못한다는 점이 오히려 반란군 포로들에게 큰 행운이었다.

“전하! 명을 받들어 문사 복장을 한 자들을 따로 추려왔습니다.”

“오! 수고했네.”

헌병 장교가 인계한 문사는 모두 세 명이었다. 문사가 일개 반란군으로 반란에 가담할 수도 있겠지만 자부심 강한 명나라 문사들의 특성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문사 복장을 하고 나설 정도면 반란군에서 어느 정도 높은 위치를 확보했다고 봐야 했다.

“네놈들이 황상께 흉측한 야심을 품고 들고 일어난 놈들이냐?”

이민호가 능숙한 중국어로 문사들을 꾸짖었다. 이곳이 절강성이라 말이 안 통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문사들과 대화가 매끄럽게 진행됐다. 평생 조정에 진출할 목적으로 공부했으니 언어의 장벽은 이미 뛰어 넘은 자들이었다.

“아닙니다! 저희들은 일편단심으로 황상께 충성하는 자들입니다. 환관 광세사들과 탐관오리들을 처단해 황상의 은덕이 천하에 퍼지길 바라는 순수한 마음에서 거병한 것뿐입니다.”

“너희들이 그렇지 뭐. 혹시라도 반란이 성공하면 권력을 차지하겠다는 욕심 정도는 있겠지?”

“환관과 탐관오리들을 처단하고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린 다음에는 다시 낙향해 책을 벗 삼아 인생을 보내려 했습니다.”

“만약 성공하면 과연 그렇게 될까? 조정을 제자리로 돌리는데 100년쯤 걸린다고 하겠지.”

이민호가 마음껏 비웃고 문사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문사들이 그렇게 말하면 이 순간만큼은 거짓말은 아니라고 봐야 했다. 반란군을 이끄는 지도부 일부가 황제에게 역심을 품고 있다 해도, 문사나 일반 반란군들은 황제에게 충성하기 때문에 무기를 들었다고 진심으로 말할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권력층에 끼지 못해 불행하다고 한탄하는 문사를 반란군이 군사(軍師)로 초빙할 경우, 나중에 백이면 백 배반하고 조정에 붙었다 해서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문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황제에게 충심을 바쳤기 때문이다.

반란을 처음 일으킬 때 주동자들도 탐관오리와 환관들을 타도해 황제의 도가 천하에 미치게 하자는 명분을 내세웠다. 어느 반란군도 거병 초기 단계에서 황제를 쳐 죽이자는 소리는 감히 하지 못했다. 그러나 반란군의 세가 커지고 지도부가 확고한 통제력을 장악한 다음에는 거병의 목적이 차츰 변질되게 마련이었다.

“반란 수괴라는 절강의 소금장수들은 어디에 있지?”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됐는지 저희들은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황상께서 직접 하문하시면 대답할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저희들은 대역죄인이 아니라 오직 황상께만 온전한 충성을 바치는 충신들입니다.”

“황상께 반란 진압 조칙을 받은 나에게 말하면 안 돼?”

“어? 그게. 안됩니다. 절대 안 되는데, 그것 참.”

이민호가 허리에 찬 상방검을 툭툭 건드리자 문사들이 심각한 인지부조화에 빠졌다.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니 반란 주모자인 절강의 염상들 중에서 몇은 죽고 몇은 도망간 것 같았다.

그들 중 몇이 살아남았다 해서 반란군을 제대로 지휘할 수 없을 테니, 이번 반란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간 셈이었다. 문사들을 조금 더 갖고 놀려는데 감군이 소리를 질렀다.

“대인! 저 불측한 자들을 당장 참수해야 합니다.”

“포로 처분 문제는 감군이 알아서 하게.”

문사들이 환관들을 비난한 이상 환관들도 이에 대응해 문사들을 핍박했다. 모든 난국의 원인으로 환관들을 지목한 동림당 유생들을 환관들이 지독하게 증오한 것도 이유가 같았다. 환관들은 자기들이 부패한 것이 아니라,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면서 정당한 대가를 얻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당한 대가의 기준이 남들이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달라서 문제였다. 환관들은 출세하기 위해 포기한 남성성에 매우 높은 가치를 두었기에 그런 차이가 생겼다. 아무리 채우고 채워도 환관들의 물욕은 끝이 없었다.

반란군에 가담했던 문사 세 명은 반란군 포로들이 끌려가는 길옆에 꿇어앉아 묵묵히 칼을 받았다. 포로들에게 본보기가 될지, 목숨 걸고 탈출할 계기를 만들어줄지 알 수 없었지만 환관들 입장에서는 결코 살려두기 어려운 자들이었다.

군감을 따라다니는 체격이 큰 환관이 커다란 칼을 휘두르는 순간 문사의 머리가 높이 치솟았다. 문사가 마지막으로 본 장면이 무엇인지, 무엇을 생각했는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었다. 이민호는 두 번째 문사가 붉은 저녁노을 아래에서 피를 뿌리는 장면을 본 직후 막사로 돌아갔다.

“주인님은 명나라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게 만들어줄 수 있잖아요.”

“나더러 명나라의 주인이 되라고? 난 찬탈자가 되기 싫어. 공주가 슬픈 눈길을 보내는 꼴도 보기 싫고.”

“이대로 두기에는 명나라 백성들이 너무 고달픈 것 같아요.”

“그렇다고 외국인이 도와줄 방법은 없어. 이런 끔찍한 상황이 지속되는 것이 싫으면 제대로 반란을 일으켜서 조정을 뒤엎든지.”

이민호가 침상에 드러눕자 호위대장 선영이 군화를 벗겼다. 어쩐지 선영이 씩 웃는 것 같았지만 모른 척했다.

============================ 작품 후기 ============================

아직 결정적인 반란이 일어나기 전입니다. 이자성의 난과 성격이 약간 다르나, 발전과정에 있는 반란으로 묘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