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43 94. 1615년~1617년 =========================================================================
갈릴레오가 아침 일찍 입궁했다. 천문학자에게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졸음이 싹 가신 얼굴에 매우 비장한 표정이었다. 갈릴레오에게 용건을 들은 이민호는 꽤나 놀랐다.
“케플러를 돕는 건 이해하겠는데, 갈릴레오 백작이 직접 독일까지 가야 하나?”
“주로 편지만 교환했지만 케플러는 제 동료입니다. 제가 직접 가서 도움을 주겠습니다.”
요하네스 케플러가 독일 남서부 뷔르템베르크 공작령에서 마법을 사용한 혐의로 기소됐다. 40대 후반에 20대 중반 아가씨와 재혼해 신혼 재미에 푹 빠져 있던 시기였는데 참 안 된 일이었다.
이 모든 불행은 케플러의 동생 크리스토프와 돈 문제로 다투던 여자가 명확한 증거도 없이 헛소문만 듣고 고발한 탓이었다. 그 전에 그의 모친 카타리나도 마녀 혐의로 기소됐고, 1620년부터 1년 넘게 감옥에 갇혀 심한 고문을 받는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세계 천문학회장으로서 직접 뷔르템베르크로 가서 케플러를 위해 변호에 나설 예정이었다. 과학자답게 용감하게 수송기를 타고 독일까지 날아가겠다고 해서 이민호에게 찬사를 받았다. 이번 기회에 세계 최초의 세계 일주 비행을 추진했다.
“고산국의 백작을 건드릴 영주나 국가는 없겠지만, 광신도는 어디에나 있기 마련일세. 자넨 이미 신구교 광신도들의 표적이 됐으니 정 가겠다면 호위대를 붙여주겠네. 체재비와 재판 비용도 준비해주겠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하오나 호위대는 전하의 후궁 분들 아니십니까? 감당하기 어려우니 사양하겠습니다.”
“호위대에 내 후궁들보다 남자 대원이 열 배나 많아. 백작에게 부담이 안 되도록 전원 남자 호위대원으로 붙여주겠네.”
갈릴레오가 조금 실망한 얼굴로 이민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른 제안을 했다.
“저와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하는 문제로 유럽에서 종교적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교황 성하를 알현해서 담판을 지을까 합니다. 검사성부와 접촉해서 금서목록에서 천문학 서적을 빼는 문제도 논의하겠습니다.”
“교황이이나 검사성부나 다 보수적인데 괜찮겠어? 그리고 교황은 교황청이라는 조직의 수장이야. 교황과의 개인적 친분만 믿으면 안 돼.”
“저는 독실한 로마가톨릭 신도입니다. 제가 교황 성하를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겠습니까?”
“날 믿어. 큭큭! 농담일세. 로마에 가는 길에 내 편지나 배달해주게. 단순한 안부 인사야. 예조 관리도 몇 명 대동하게.”
“저의 안전을 위해서인가요? 고맙습니다, 전하.”
갈릴레오 백작을 고산국에서 교황청으로 파견하는 외교관 신분으로 격상시켰다. 갈릴레오가 교황청 검사성부에 체포돼 종교재판을 받을 일은 없을 것으로 기대했다.
1616년 3월, 지난 2월 말에 프랑크푸르트 로스마크트 광장에서 빈센츠 페트밀히와 그의 동료 6명이 교수형을 당했다는 소식이 고산국에 전해졌다. 그는 야채가게와 마늘빵 가게의 주인으로서, 1613년부터 그 다음해까지 유대인 거리를 약탈하고 유대인들을 살해한, 이른바 페트밀히 소요 사건의 주동자였다.
프랑크푸르트는 11세기부터 독일 거주 유대인들의 공동체가 자리 잡은 곳이었다. 그 전에도 1241년과 1349년 등 부정기적으로 꾸준히 학살과 약탈을 당하고 한때는 흑사병의 전염 원인이라는 지목을 받아 몰살당한 적도 있었다. 15세기에 다른 도시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프랑크푸르트로 몰려들면서 독일에서 최대 규모의 유대인 공동체로 성장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고리대금업을 하면서 이자 문제로 독일인들의 길드와 자꾸 충돌하면서 일이 점점 커졌다.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개입한 순간 그 동안 쌓였던 분노가 폭발해버린 직공들이 게토로 쳐들어가 약탈하고 불태워버렸다. 탈출한 유대인들이 다시 텅텅 빈 게토로 돌아왔으나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했다.
“그래서 고산국에 단체로 이민을 신청하겠다고?”
“그렇습니다, 전하. 저희 유대인들은 기술이 뛰어나고 큰 자본을 갖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뛰어난 상공인들이므로 어느 나라든 환영할 것입니다.”
“그래? 그럼 유대인을 환영해주는 나라로 이주하면 되겠네.”
이민호가 이죽거리자 독일의 유대인 대표들이 바로 오체투지했다. 독일에 남아있다간 계속 학살당할지도 모를 간절한 상황에서도 상대방을 떠보는 상인의 버릇을 버리지 못한 유대인들이 땀을 뻘뻘 흘렸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저희들을 살려주십시오! 저희들을 보살펴주시면 신성 로마 제국 황제폐하께 그랬던 것처럼 세금을 이중으로 바치겠습니다.”
“세금을 이중으로 안 내도 좋은데, 유대인들에게 몇 가지 제한을 가하겠다. 앞으로 유대인들은 다른 고산국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사적 금융, 그러니까 고리대금업이나 은행, 전당포 등 금융업 종사를 금한다. 조건, 아니 고산국의 국법을 받아들인다면 유대인 공동체를 안전한 곳에 마련해주겠다.”
유대인들은 단독으로 살기 어려워 거의 반드시 집단생활을 해야 한다. 종교 생활과 교육 문제도 심각했으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음식에 관련된 각종 종교적 제한이었다.
유대인 대표들이 멀리 독일에서 고산국 왕도에 오는 동안 프랑크푸르트를 떠나기 전에 미리 준비한 음식만 먹고 있다고 했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못 먹기에 여행을 떠날 때는 아예 주거지에서 먹어도 되는 음식을 마련하는 것이 상례였다.
“혹시 게토 같은 유대인들만의 거주지역입니까? 안전만 보장된다면 어느 정도 차별을 감수하겠습니다.”
“아니야. 자네들을 게토에 가둘 이유가 없지. 고산국은 백성들 일부를 특별한 지역에 거주하도록 강요하거나, 한 집단을 가난하게 만들고 나서 그 이유로 모욕하는 야만국이 아니라네.”
중세 유럽 여러 도시에서 명목상 유대인들의 종교생활을 보장해주기 위해, 혹은 약탈자들로부터 보호해주기 위해 유대인들을 특정한 지역에 집단 거주시켰고, 이곳을 흔히 게토라고 한다. 유대인들이 그 지역 주민들보다 가난한 경우는 중국밖에 없으므로, 현지인들에게 항상 질시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고산국에서는 상속이 불가능해 부의 세습이 원천적으로 차단되므로 빈부격차를 염려할 필요가 적었다. 그래도 통치자 입장에서 유대인이 껄끄러운 집단인 것만은 분명하므로 항상 예의주시하기로 했다.
“고산국에는 백성들에게 거주이전의 자유가 있으니까 유대인들이 어디에 살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다만 유대인들을 위해 북미에서도 교통이 편리해서 상공업을 영위하기 좋은 곳을 특별히 골라주겠다는 뜻이다. 종교생활 때문에라도 유대인들이 한 곳에 몰려 사는 편이 좋겠지?”
이민호가 지도에서 가리킨 곳은 새춘천, 현대 미국의 세인트루이스였다. 큰 강 여러 개가 합류하는 지점이며 대륙 횡단 철도가 지나 교통은 아주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유대인 대표들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북미 중앙에 위치하고 수로와 육로 교통의 중심이 될 만한 지역입니다. 하오나 한참 내륙지방을 저희에게 주시는 것은 해외 무역을 하지 말라는 뜻이군요.”
“어차피 기술력 격차가 커서 고산국 상품과 경쟁이 안 됐었잖아? 내수 위주로 시작해서 차차 기술을 익히도록 하게. 그리고 원주민들과 교역하면서 바가지 씌우면 화낼 테니 조심하게. 거기에 이미 은행이 영업하고 있으니 잘 이용하도록 해.”
유대인들의 무역이나 해외 네트워크를 차단하려는 것이 아니라 무역과 관련된 거대 금융을 금하려는 목적이었다. 유대인들의 상업 활동을 내버려두면 반드시 금융으로 진출해서 다른 인종들에게 증오와 약탈의 목표가 되기에 이 정도 제한은 가해야 했다.
“어쨌든 저희들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고산국에서는 다른 집단이 부유하다 해서 시기하거나 약탈하는 경우가 없네. 그리고 후대에 물려줄 것은 교육밖에 없어서 유대인들이 살기에 더 좋을 걸세. 길드나 협동조합을 통해 대출해주는 그런 꼼수를 부리지 말고 착실히 기존 은행을 이용하게.”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이민호가 유대인들에게 금융업에 진출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지난 천 년 동안 했던 것처럼 유사한 업종에 진출해서 금융으로 부를 쌓으려는 시도를 할 것이 뻔했다. 그 과정에서 탈세와 검은 돈, 관과의 유착관계 등 온갖 부조리를 저지를 가능성도 상존했다.
그러나 그런 것이 필요가 없다면 유대인들이 굳이 금융업에 진출할 이유는 없었다. 먼저 고산국에 정착한 명나라 출신 유대인들이 보석 가공과 교육에 집중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3만도 안 되는 저런 작은 상공인 집단에서 정말로 뛰어난 과학자들이 생겨날까요? 기술 수준이 낮아서 고산국의 경제제도에 적응하기도 어려울 것 같아요.”
“기대해봐야지. 어쩌면 고산국의 경제제도에 가장 어울리는 집단이 될 수도 있어. 앞으로 유대인 젊은이들의 진로를 공학을 제외한 자연과학 쪽으로 유도해. 재정 지원은 확실히 해주고.”
이민호가 혜영과 최 선생에게 유대인들을 계속 지켜볼 것을 특별히 지시했다. 유대인들은 지역 사회에 동화되지 못하고 지나친 돈 욕심 때문에 어딜 가나 뜨거운 감자였으나 적응력만큼은 최고였다.
1616년 2월 17일에 건주 여진의 누르하치가 허투알라에서 대금국 건국을 선언한 것이 주변국에 차차 알려졌다. 나중에 대청제국으로 성장한 후금으로 알려진 바로 그 나라였다. 독자적인 연호를 천명으로 지어, 명나라의 조공체계에서 벗어났음을 만방에 선포했으나 조선을 비롯한 주변국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오직 명나라가 장악한 요동 지방 군병들만 긴장 속에서 방어준비에 몰두했다.
조선에서는 대금국 건국을 큰 사건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 해에 마침 건주 여진 지역에 큰 홍수가 나서 다음 해까지 수많은 여진족들이 만포 등 압록강변으로 대규모 구걸 원정을 왔기 때문이다. 홍수로 인한 기근을 감당하지 못한 누르하치는 여진족 백성들이 조선이나 명나라로 구걸하러 가는 것을 허락해줄 수밖에 없었다.
대금국은 건국 선언을 한 바로 그 해에 국제적으로 창피를 당했고, 백성들을 먹여 살리지 못하는 약체국으로 조선에 인식돼 우습게 보는 계기가 됐다. 평안 병사 이시언이 맨몸으로 압록강을 건너온 굶주린 여진족들을 구호하느라 몹시 바빴다. 그리고 건주 여진 지역에서 많은 숫자의 노약자들이 굶어죽었다는 장계를 조선 조정에 올렸다.
자존심 강한 누르하치가 고산국 왕도에 직접 사신을 보내 식량을 요청한 것은 9월 말이었다. 후금 영토 내에서 조와 수수의 수확을 포기하고도 한참 지나고 나서 겨울이 닥쳐오기 직전이었다.
“건국을 축하하네. 그런데 대금국에 식량을 지원해달라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금국의 이웃나라들 중에서 오직 고산국만 식량 사정에 여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가난한 금국에 부디 교린의 예를 보여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조선과 명나라에도 큰 홍수가 났다고 들었네. 식량이 정확히 얼마나 필요한가? 칸이 보낸 국서에는 최대한 많이라고만 돼 있어.”
누르하치의 호칭이 대외적으로 한이 아니라 칸인 것은 여진족 외에 남몽골 여러 부족들로부터 동시에 추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실제 역사에서 청제국은 황후를 여진족이나 한족이 아닌 몽골족에서 계속 뽑았다. 청의 지배층은 청나라가 여진족과 몽골족의 연합정권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유지하려 애썼기 때문이다.
“문자 그대로 최대한 많이 부탁드립니다. 특히 저희 만주족의 주식인 좁쌀이 중요합니다.”
“이봐, 이봐. 고산국은 사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어. 동해국 영역만 해도 매년 수확하는 조와 수수만 각각 오백만 섬이 넘어. 이것을 다 보낼까?”
대금국 사신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동해국을 점령할 수만 있다면 식량 사정이 단번에 호전될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그러나 후금은 고산국의 영토나 다름없는 동해국을 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후금과 주변국들이 동시에 홍수가 났는데도 동해국은 치수사업이 잘 돼 있어서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 국력 차이였고, 또한 고산국과의 국력 차가 단기간에 좁혀질 가능성이 적은 이유였다.
“좁쌀 이십만 섬, 아니 오십만 섬을 일 년 동안만 빌려주십시오.”
“빌려달라고? 사는 것이 아닌가?”
“알고 계시겠지만 금국에는 돈이 없습니다. 일 년 후에 육십만 섬으로 돌려드리겠습니다.”
“흐음.”
이민호는 여기서 꽤나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껄끄러운 건주 여진을 이 기회에 멸망시켜버리는 것이 가장 편했다. 건주 여진이 요동을 공격하지 않더라도 명나라는 결국 내전으로 인해 망할 테니까 중국 땅에서 벌어질 판을 보다 단순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건주 여진이 사라질 경우 앞으로 격화될 명나라의 내분에 고산국이 개입할 명분이 약화될 것 같았다. 차라리 명나라가 망하지 않고 지금 이 상태 그대로 유지된다면 좋겠는데, 명나라는 멸망 과정에 이미 들어선 지 오래였고 고산국의 개입은 피할 길이 없을 것 같아 문제였다.
“어차피 이번 일을 천조에 보고해야 하니까 뭔가 대금국의 군사력을 약화시킬 담보가 필요하네. 너무 노골적인가? 먼저 제시해보게.”
“그건 곤란합니다, 전하.”
“곤란해도 국가간의 일인데 할 수 없지. 곡식 값보다 높은 가치인 말 2만 필을 일 년 동안 동해국에 맡기게. 그 사이에 태어날 망아지는 동해국 소유로 하겠네. 이 정도면 천조와 대금국 양쪽이 동시에 만족할 것 같은데 어떤가?”
건주 여진 사신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더니 쉽게 동의했다.
“말을 팔아도 좋아.”
“팔지 않고 담보로 제공하겠습니다.”
“오호?”
이로써 건주 여진에 말은 약간 남고 목초지는 크게 부족하다는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건주 여진이 산악 지역 위주로 확장했고 좋은 목초지는 고산국이 미리 확보했기에 이런 결과가 생겼다.
그러나 여차 하면 혼인동맹을 맺은 남몽골에 요청해 목초지를 빌릴 수 있으므로 목초지 부족 문제는 건주 여진에게 결정적인 약점이 되지 못했다. 그래도 현재 상태에서 건주 여진의 식량 사정이 취약하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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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건너뛰려고 했는데 의외로 사건이 많았군요. ㅋ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