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40 94. 1615년~1617년 =========================================================================
94. 1615년~1617년
“고산국 건국왕이시며, 대명제국의 제독 총병관 대인이시며 조선국 영중추부사이시며, 오스만 제국 황제 아흐메드 1세의 후견인이시고 이집트의 지배자이시며, 북미와 남미, 호주와 시베리아의 주인이시며, 동해국의 대한, 규슈의 주인, 바기오의 마하라자, 브루나이의 보호자, 홀로 제도의 술탄, 아이누의 국왕, 루스 차르국과 칼미크의 보호자, 하와이 대추장과 새섬 원주민들의 친구이신 고민호 대왕께 인사 올립니다.”
“그 긴 칭호를 조선말로 다 외웠구려. 중간에 이상한 칭호가 들어간 것 같지만 넘어갑시다.”
초대 무굴 제국 주재 잉글랜드 대사인 토마스 로우 경이 고산국 전권 대사 자격으로 왕도를 방문해 신임장 제정식을 거행했다. 토마스 로우 경은 1581년생으로서 잉글랜드에서도 비교적 젊은 외교관이었다. 그는 황제 자한기르의 술친구라는 입장을 최대한 활용해 무굴 제국 내에서 잉글랜드의 입지를 다졌다.
신임장 제정식이란 파견국에서 새로 임명된 대사가 접수국 국가원수에게 대사 임명장을 바치며 접수국에 도착한 사실을 보고하는 예식이었다. 대사는 신임장 제정식 이후 정식으로 외교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사진으로 봤지만 고산국의 발전상은 직접 눈으로 봐야 절감할 수 있습니다. 건국한 지 겨우 한 세대만에 이런 놀라운 업적을 이루신 대왕께 경의를 표합니다.”
“고맙소. 고산국 주재 잉글랜드 대사가 있는데도 전권 대사를 따로 파견한 이유는 아무래도 홍콩 때문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전하. 고산국과 대명제국이 협력해서 항구를 건설한 것은 동아시아 무역의 중심지로 삼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잉글랜드 동인도회사 소속 상선들이 홍콩에 자유롭게 입항할 수 있도록 특허를 내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홍콩은 자유 무역항이오. 어느 나라의 허가를 받고 말고 할 것이 없소. 언제든 자유로이 입항해서 무역을 하시오.”
홍콩은 무역하기에 적당한 지리적 위치는 물론 항구로서 입지 조건이 좋은 편이었다. 그리고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항구의 안전을 확실히 보장할 수 있는 곳이라 해적들이 얼씬도 하지 못했다.
또한 무역도시로서 필수불가결한 치안 수준도 고산국 왕도에 버금가는 높은 수준을 자랑했다. 명나라 사람들이 사소한 일로 무기를 꺼내들거나 이권을 놓고 패싸움을 벌였다가는 치안 병력에 의해 현장에서 사살되는 등 아주 호되게 당했다. 범죄 성향이 강한 자들은 아예 홍콩에서 떠나거나 다들 숨죽이고 다녔다.
“에, 그러니까 사실은 홍콩에 자유 무역을 하기 위해 말래카 해협을 지나야 합니다. 하오나 포르투갈이 잉글랜드 상선의 통행을 저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산국 특허장을 갖고 말래카 해협을 통과하겠다는 것이오? 그 문제는 포르투갈하고 협의해서 해결하도록 하시오. 다만 잉글랜드가 말래카 해협을 무력으로 점령하려고 시도할 경우 포르투갈과의 동맹 조약에 의거해 고산국이 자동 개입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기 바라오.”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전하. 포르투갈은 결코 잉글랜드 상선을 통과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동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무역을 독점하려는, 물론 고산국의 지중해 진출과 북미 개척으로 인해 포르투갈의 독점 무역 체제는 이미 무너졌지만, 포르투갈의 욕심을 자제시킬 방도가 없습니다.”
“말래카 해협이 막혔다면 수마트라 섬 남쪽을 돌아서 오면 될 것 아니오? 그렇지 않소, 선장?”
“가능은 합니다만, 해로를 새로 개척해야 합니다, 전하.”
“척도별, 지역별 해도가 한 장에 1원씩이오. 고산국이나 네덜란드의 잡화점에서 얼마든지 사시오.”
50대에 강인한 인상을 가진 선장이 대사 뒤쪽에 배석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팔 한 짝이 없고 갈고리 같은 것을 달고 있었다. 크리스토퍼 뉴포트라는 이름의 선장은 1590년 에스파냐와 전쟁 기간에 적 전함을 나포하던 와중에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뉴포트 선장? 아! 이름을 자주 들었소. 아조레스 군도에서 포르투갈 보물선을 나포해 엄청난 전리품을 분배받았다고 하던데, 아직도 바다에 나와 있소?”
“알아봐주셔서 영광입니다. 그것은 뱃사람의 숙명입니다, 전하.”
“멋지오!”
크리스토퍼 뉴포트는 사략선 선장으로 활약하며 카리브 해에서 주로 활동했다. 원래 역사에서는 17세기 초반 제임스타운에 보급품을 여러 번 전달하는 임무를 맡아, 나중에 버지니아나 켄터키 도시, 혹은 대학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Newport라는 도시들은 새로 건설한 항구에 대충 ‘새로운 항구’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고산국이 북미를 개척하고 대서양 함대가 활동 영역을 넓히면서 뉴포트 선장의 활동 영역도 대폭 줄어들었다. 사략선 선장을 관둔 지금은 잉글랜드 동인도회사 소속으로 일하고 있었다.
“대사! 잉글랜드는 무역을 하던 항구 도시를 기회를 봐서 점령해버리는 것으로 악명이 높소.”
“고산국을 상대로 그런 짓을 할 선장들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그런 짓을 했다가는 잉글랜드 동인도회사는 파산을 면치 못할 것이오. 알겠소? 선장과 선원들 개인이 아니라 동인도회사에 연대책임을 지우겠다는 뜻이오.”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 이민호가 그런 힘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대사는 몹시 긴장했다. 이민호는 잉글랜드가 아시아로 진출하는 것을 반기지 않았으나,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잉글랜드도 고산국이 아일랜드를 지원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지금까지 아무런 항의를 하지 않았다.
“명심하겠습니다. 하오나 인도에서의 일은 저희들에게 맡겨주십시오.”
“인도는 고산국과 관계가 없소. 포르투갈이든 네덜란드든, 아니면 인도나 누구를 상대로든 싸우려면 얼마든지 싸우시오.”
고산국이 인도에 개입할 명분도 이익도 없었다. 그러나 잉글랜드나 포르투갈은 명분이 없더라도 잘만 침략했다. 지금은 무굴 제국이 강성해서 큰 문제가 없기에 당분간 내버려두고 지켜보기로 했다.
무굴 제국 황제 자한기르는 토마스 로우를 단순한 술친구로서 가까이 둔 것은 아니었다. 토마스 로우가 제공하는 정보가 제국을 지배하는 황제에게 큰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전하! 혹시 잉글랜드가 포르투갈, 혹은 네덜란드와 인도의 무역권을 두고 싸우는 동안 고산국이 어부지리를 얻을 셈이십니까?”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구려. 좋은 제안이오.”
향신료 무역은 독점 체제가 아니면 큰 이익을 얻기 어려웠다. 그러나 고산국 함대가 인도양과 홍해를 종횡 무진하는 동안 유럽 국가가 섣불리 인도에 식민지를 개척하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여러 나라 상선들이 참가한 경쟁으로 인해 유럽에서의 향신료 가격은 계속해서 떨어졌다.
1614년 봄, 루스 차르국에서는 아직 겨울인 3월 초에 마르그레타가 임신했다는 소식이 고산국 왕궁에 전해졌다. 루스 차르국 황실에 고용된 고산국 출신 여의사가 따로 보고서를 보내길, 산모는 건강하고 청진기로 검진 결과 아무래도 쌍둥이 같다고 했다. 이민호가 지난 달력을 들춰봤다.
“혹시 속도 위반 아닌가?”
“제가 지켜봤는데 절대 아니에요. 현숙한 마르그레타가 그럴 리가 없어요.”
“물론이오, 비올레타. 결혼 이후 충분한 시간이 있었소. 그러나 보야르들이 이 일을 정치적으로 해석해서, 황후의 정절을 의심하는 소문을 퍼뜨릴까 염려하는 것이오.”
“이런 기쁜 일까지 정치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현실이 슬프지만 어쩔 수 없군요. 전하께서는 차르에게 절대 권력을 주실 계획인가요?”
“내버려둬도 결국 그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오.”
군주와 귀족들이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서로 견제하며 국정을 운영하는 것은 매우 이상적인 정치제도였다. 그러나 이때 폴란드와 루스 차르국을 비롯한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군주권이 지나치게 약화돼 여러 가지 문제를 노출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군주의 권력이 충분히 강해서 귀족들이 직접 공격하기 어려워지면 군주 대신 그 후계자를 공략하는 경향이 있었다. 만약 군주 측이 명분 싸움에 밀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후계자를 희생시켜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민호는 차르가 권력 확대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노출할지도 모를 약점인 후계자 문제가 가장 큰 걱정이었다.
“후계 문제로 인해 마르그레타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마르그레타와 표도르가 잘 해쳐나갈 것이오.”
그러나 일단 멀리서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고산국처럼 국왕인 이민호가 절대 권력을 쥐고 있다면 후계 문제도 아예 생기지 않지만, 루스 차르국처럼 어정쩡한 나라에서는 벌써부터 큰 문제였다.
차라리 반란이라도 일어나면 진압과정을 통해 차르가 절대 권력을 쥘 수 있겠지만, 고산국이 뒤에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보야르들이 섣불리 군사행동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제부터 군사력보다 음모와 권모술수가 더 중요해지는 궁정암투가 시작될 것 같았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만으로도 버거울 텐데 권력과 후계자를 지키기 위해 심력을 소모할 차르가 걱정돼요. 보야르들에게는 나라의 발전보다 자기 권력과 재산이 더 중요하겠지요?”
“나라에 해악만 끼치는 귀족, 특히 넓은 토지를 가진 상급 귀족은 반드시 없어져야 하오.”
어느 나라든 아직은 국왕과 귀족들의 연합 정권이었다. 조만간 프랑스를 시작으로 절대 왕정이 하나둘 생겨나겠지만 귀족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특히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은 국왕을 상대로 특권을 계속 얻어내다가 결국 나라가 망하는데 크게 일조한다. 절대 왕정 이후 유럽에서 귀족제도는 그저 고산국처럼 명목만 남게 된다.
1614년 3월 10일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가톨릭 수도사 존 오길비에 대한 공개 교수형 및 복개형이 집행됐다. 복개형이란 내장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몸밖에 드러나게 하는 사형집행 방법이었다.
존 오길비는 스코틀랜드 반프셔의 칼뱅파 신교도 집안 출신으로서 독일과 브르노 등에서 신학교육을 받았다. 예수회 소속으로서 아직도 스코틀랜드에 남아있는 소수 로마가톨릭 신도들을 위해 스코틀랜드로 돌아가 미사를 집전하다가 체포돼 순교했다.
이 소식이 고산국에 전해진 것은 3월 하순이었다. 이민호는 왕궁 대회의실에 기독교 신구교는 물론 불교와 이슬람교 등 고산국 영토 내에서 봉직하는 모든 종교의 지도자들을 소집했다. 일부는 멀리 북미에서 오느라 4월 중순 넘어서 공식적인 회합이 이루어졌다.
“8일 낮, 9일 밤 동안 잠을 재우지 않고 고문을 했는데도 오길비 수사는 끝내 신도들의 명단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종교가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는 성직자가 순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화형도 모자라 내장을 끄집어내는 야만적인 형벌이라니요. 그 동안 신교 지역에서 숱한 순교자가 나왔지만 이처럼 처참한 일은 없었습니다.”
“로마가톨릭에서 이단 재판을 열어 신교도들을 무수히 화형시킨 일을 벌써 잊었단 말입니까? 어쩌다 한 번 있는 일을 가지고 피해자 행세를 하시다니요, 정말 뻔뻔하십니다.”
- 쿵!
신교와 구교 성직자들 사이에 말소리가 커지자 호위대장 선영이 소총 개머리판을 바닥에 내리쳤다. 높은 옥좌에 앉은 이민호는 여전히 침묵한 채 성직자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다음, 모리스코의 대표로 이리 시의 이맘께서 발언하시오.”
“예, 호위대장 각하. 저희 에스파냐 출신 이슬람 공동체는 고국에서 숱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다행히 고산국 국왕전하께서 아량을 베푸셔서 새로운 땅에서는 경제적 풍요뿐만 아니라 저희들이 그토록 원했던 종교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습니다. 바로 옆에 유대인 공동체나 원주민 부족들이 있으나 종교적 갈등은 전혀 없습니다.”
종교적 핍박을 받던 자들이 힘이 세진 다음 다른 약자들에게 고스란히 같은 짓을 하는 경우가 흔했다. 그러나 에스파냐에서 추방당한 모리스코들은 북미 새원산과 이리 호수 주변에 정착한 이후 자유로운 종교생활을 하면서 몹시 만족했다. 그래서 다른 종교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없었다.
민족종교인 유대교는 다른 민족에게 적극적으로 선교를 하는 편이 아니라서 고산국에서 유대인의 종교적 영향력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고산국에서 은행이라곤 국립은행뿐이며 고리대금업 등 사적인 채권채무 관계가 금지됐다. 유대인들이 명나라에서 그랬던 것처럼 고산국에서도 교육 방면에 집중하고 있기에 경제력 집중을 우려할 필요도 없었다.
“여러 종교 성직자들의 말씀을 들어보았소. 그런데 이슬람뿐만 아니라 불교나 힌두교 등 다른 종교들도 마찬가지요. 어느 종교의 경전을 읽어봐도 다른 종교를 믿는 신도들을 살해하고 박해하라는 규정은 없소. 어째서 신실한 종교인들이 그 종교의 경전에서 금한 나쁜 짓을 하는지 모르겠소.”
쿠란에도 명예 살인이나 지참금 살인 등 여성을 억압하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 종교를 빌미로 일어나는 온갖 전쟁이나 부조리는 사실 종교보다는 주로 경제적인 요인이나 종교지도자의 야망, 그리고 토착사회의 오래된 나쁜 관행에서 비롯될 뿐이었다.
“하오나 전하! 구약성서 일부 내용에 따르면......”
“그래서 에스파냐와 이탈리아 기독교인들은 비늘이 달리지 않은 해산물을 그렇게 잘 먹는 것이오? 구약을 본받아 아비와 딸이 붙어먹소?”
“저희는 야만인이 아닙니다, 전하!”
“그러니까 성경을 인용하더라도 유리한 내용만 내세우지 말고 옛날 그 지역의 특수성을 이해하란 말이오.”
고지식한 성직자들이 이민호의 한 마디 말에 설득될 리는 만무했다. 그러나 유럽에서 그러는 것처럼 만약 고산국에서 종교로 인한 유혈 분쟁이 발생할 경우, 그 분쟁에 연루된 종교는 금지되고 성직자들은 국외로 추방될 각오를 하라는 엄중한 경고를 해주었다.
북미 동해안이라는 같은 지역에 섞여 사는 로마가톨릭과 개신교가 가장 큰 문제였다. 원래 같은 뿌리에서 나온 가지들이 더 심하게 다투는 법이었다. 가톨릭 계열인 아일랜드 이주민들과 프랑스 출신 위그노들이 현재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서로 싸우는 꼴을 보다 못한 혜영이 신도들을 분리해서 거주시키자고 제안했으나, 다른 종교를 믿으면서도 서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평화롭게 사는 방법을 백성들이 배워야 했다. 종교를 이유로 거주 지역을 분리시키면 자칫 나중에 분리 독립 문제로 사태가 확대될 경우 우려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30년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고산국 내부를 다독이는 게 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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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올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