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839화 (788/1,000)

00839  93. 1614년  =========================================================================

추석 연휴 마지막 날에 알비노인 여류 언어학자 자매를 안았다. 원래는 혜영과 최 선생에게 왕실 예법을 교육받고 주상아 공주 등으로부터 갖가지 미용 비법을 전수받아야 하지만, 모스크바로 출발할 날이 며칠 안 남아 서두른 편이었다.

둘은 이민호의 요구에 의해 그 동안 검게 염색했던 머리와 눈썹을 원래대로 하얗게 하고 눈동자도 원래 색깔인 빨갛거나 보라색인 채로 침전에 들어왔다. 이민호가 원색이 잔뜩 들어간 신부들의 주름진 치마와 흰 블라우스를 차례로 벗겼다.

속옷까지 벗긴 다음 침대에 들어왔으나 머리에 쓴 화관과 목걸이는 리투아니아 지역에서 신부의 상징이라 그대로 두었다. 둘은 남자 앞에서 알몸이 된 것보다는 하얀 머리칼과 눈썹, 특이한 눈 색깔을 더 부끄러워했다.

“나타샤부터 오너라.”

“예, 전하.”

나타샤가 몹시 긴장하고 있어서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 온몸을 천천히 만지면서 긴장부터 풀어주었다. 스텔라가 나타샤 옆에 엎드려서 언니의 손을 꼭 쥐어주었다.

언니의 앞모습과 여동생의 뒷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고 언제든 만질 수 있었다. 허벅지 사이로 이민호의 손이 파고들어가자 스텔라가 움찔했으나 가만히 있었다. 알비노라서 피부가 더 하얀 편이었지만 리투아니아의 젊은 여자답게 둘 다 체형이 가늘고 긴 편이었다.

“아!”

“아파?”

“아니에요. 계속해주세요.”

나타샤의 붉은 눈이 잠시 감겼다가 떠지며 눈물이 옆으로 또르르 흘렀다. 스텔라의 손을 잡은 나타샤의 손목에 힘줄이 불거진 것으로 보아 아픈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았다.

“드디어 전하와 이어져서 가슴이 벅차도록 기뻐요.”

“나도 기쁘단다.”

이민호가 천천히 하체를 움직이며 나타샤와 처음으로 하나 된 느낌을 만끽했다. 현재 나타샤와 스텔라는 박사과정을 밟고 있어서 조만간 학위를 받으면 후궁들 중에서 가방끈이 가장 긴 여자들이 될 예정이었다. 학위나 지식 같은 것 없더라도, 알비노라는 특이함이 없더라도 둘은 매력적인 여자들이었다.

옆에서 스텔라가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는 것이 귀여웠다. 아마도 30분 이내에 언니와 자세가 뒤바뀌어 이 자리에 누워있을 것이다. 둘은 외부 활동에 제약을 심하게 받기에 이번에 모스크바에 못 데려가서 안타까웠다.

9월 하순, 곰나루에 도착해 아사달에서 하루 묵고 모스크바로 향하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탔다. 짐은 이미 보냈고 신부와 사람들만 단출하게 타서 국혼을 올리러 가는 행렬치고는 복잡하지 않은 편이었다.

국왕 전용 열차는 내부 편의 시설은 물론 경호를 위한 만반의 시설을 갖췄다. 신부가 거주하는 전용 칸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꽤나 깔끔하게 만들어 마르그레타가 불편하지 않도록 신경을 써서 제작됐다.

국영 시베리아 철도회사는 승객 수와 화물의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어느덧 흑자로 전환된 지 오래였다. 철도 주변 주민들에게서 목재나 양 등 현물을 요금으로 받아 종점인 아사달에서 파는 관행이 시베리아 철도의 흑자를 더욱 증가시켰다.

시베리아의 짧은 가을은 몹시도 화려했다. 지평선이 보이는 들판은 온통 붉게 물들었고 저 멀리 산 정상에는 벌써 흰 눈이 쌓여 있었다. 사진에 담고 싶은 화사한 풍광이었으나 이런 풍경이 거의 1만 km 가깝게 이어진다는 것이 문제라면 아주 큰 문제였다.

“어때? 지긋지긋하지?”

“저를 용서해주세요.”

국왕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항공기 대신 철도를 강력히 추천한 사람이 호위대장 선영이었다. 그러나 중간 중간 역에 내려 잠시 쉬는 것을 빼면 하루 24시간 달려야했기에 열차에 탄 사람들은 아주 지긋지긋했다.

그 동안 배를 타고 한 달 넘게 여행한 적도 많았었지만 배와 달리 기차에는 공간이 부족해 지겨움을 더했다. 그리고 배에 타는 것은 파도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며 멀미를 일으키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기차가 달리면서 철로와 바퀴가 마찰하며 끊임없이 발생시키는 소음과 진동을 온몸으로 받는 것이 훨씬 더 끔찍했다.

지금이라도 비행기를 탈 수는 있었다. 그러나 모스크바에 가까워질수록 지금까지 고생한 것이 아까워서라도 더더욱 비행기로 옮겨 타기 어려워졌다. 주간에는 정찰기들이 교대로 이륙해 최소 한 대는 열차 상공에 떠서 열차와 철도의 안전을 확인했다.

“호호호! 아바마마! 저 예쁘죠?”

“메기! 이게 무슨 짓이니?”

“응. 예뻐. 알았으니 그만 돌아가라.”

마르그레타가 신부복을 입고 국왕 전용칸에 들어왔다. 그리고 한바탕 빙글빙글 춤을 추고 나서 돌아갔다. 비올레타와 시녀들이 마르그레타를 말리다가 사흘째부터는 아예 포기했다.

“주인님 설사하셨네요.”

“똥이라도 드세요.”

시간 보내기에는 화투만큼 훌륭한 놀이도 드물었다. 며칠 동안 서로 딱밤 때리기를 해서 이민호와 호위들의 이마가 퉁퉁 부었다.

“그나마 넓은 전용칸에 탄 우리도 지겨운데 이 열차를 타고 오가는 일반 승객들은 얼마나 지겨울까?”

“그들은 중간에 내려서 며칠씩 쉬었다 가니까요.”

“우리도 하루쯤 쉴까?”

“안 돼요. 쉬더라도 모스크바에 도착해서 쉬세요. 중간에 내리면 다시 열차에 타기 어려워져요.”

호위대장 선영이 단호히 거부했다. 건국 초부터 신입 호위들의 교육은 거의 전적으로 기존 호위대가 맡았다. 전임 호위대장들이 아주 유능하면서도 고지식한 호위대장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그럼 심심한데 밤일이나 할까?”

“그것도 안 돼요! 이곳 내명부 분소는 비올레타님이 맡고 계세요. 전하께서도 비올레타님이 작성한 계획대로 호위나 후궁들에게 성은을 베푸셔야 해요.”

선영은 경위뿐만 아니라 이 문제에서도 고지식했다. 성질이 난 이민호는 대낮부터 침대에 드러눕고 말았다.

10월 9일에 모스크바 역에 도착했다. 모스크바 역사는 예전보다 훨씬 그럴 듯하게 거대한 3층 석조 건물로 개축돼 있었다.

모스크바 시내도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몇 번의 대화재와 반란으로 인해 곳곳에 화재로 무너진 건물들과 허름한 오두막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깔끔하게 치워졌다. 그리고 새로운 건물들이, 그것도 커다란 2층이나 3층 석조 건물들이 시가를 채워나가고 있었다.

왕궁과 가까운 모스크바 역에 차르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환영 나왔다. 이 시기 모스크바 시민들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최소 10만 이상이 역 광장과 가도에 늘어서서 열렬히 환영해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차르의 건강한 모습을 다시 보게 되어 매우 기쁘오.”

이민호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차르의 낯짝만 보면 눈살이 찌푸려지고 이를 갈게 되는 습관만은 변하지 않았다. 비올레타가 살짝 허리를 꼬집어 이민호가 표정을 풀었다.

“출발!”

차르는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환대를 해주었다. 이민호와 비올레타, 마르그레타가 탄 마차 앞에서 커다란 백마를 탄 차르가 직접 인도했다.

차르는 10만 환영 인파 앞에서 고산국과 차르 가문의 결합을 확실히 선언하는 정치적 효과를 노린 것 같았다. 마차 앞뒤를 루스 차르국이 아닌 고산국 병력이 호위했으나 기병연대 지휘관은 차르의 명령을 들어주는 척 움직여줬다.

“차르께서 아주 늠름해졌어요, 전하.”

“전에 비리비리하던 때보다 낫긴 하오.”

한창 성장기에 말라 보이는 때에는 누구나 빈약해 보였다. 특히 차르는 매일 여러 시간 개인교수를 받느라 책을 끼고 다녀서 학자 같다는 인상이 더 강했다. 그러나 성장을 마치고 나니 제법 봐줄 만했다.

“아바마마! 차르는 전에도 무예를 잘했거든요?”

“시집가기 전부터 아버지보다 남편을 편드는구나. 섭섭하다.”

“아잉~ 아바마마~”

마르그레타가 애교를 부리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일 것 같아 이민호는 더욱 섭섭했다. 사실 비올레타가 더 섭섭할 것 같았다.

이민호는 외정과 내치로 바쁘고 후궁 숫자가 너무 많았다. 정을 듬뿍 쏟아 키웠던 자식을 시집보내는 마음이 아플 것 같아 이민호가 비올레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각국의 외교사절들과 접견했다. 유럽 대부분 국가들과 오스만 제국, 페르시아에서도 축하사절단을 모스크바에 파견했다. 이들로부터 자국 왕자나 공주의 초상화, 혹은 최근 유럽에 퍼지고 있는 사진 수백 장을 받았다. 이민호는 국혼 요청을 사양하느라 바빴다.

그러나 외교 사절들의 분위기가 아주 약간 뒤숭숭했다. 루스 차르국 영토에 관심이 많은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스웨덴에서 파견한 외교관들의 표정이 특히 굳어 있었다. 그러나 외교관의 본분을 잊지 않고 겉으로는 환하게 웃으며 서로 인사를 나눴다.

“전하. 저번보다 외교 사절들이 더 긴장한 것 같아요.”

“비올레타가 잘 봤소. 거대한 전쟁을 앞두고 편 가르기가 이미 대충 끝난 것 같소.”

며칠째 계속되는 외교 사절 접견을 마치고 차를 마시는데 차르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비올레타는 물론이고 마르그레타도 알아채지 못하는 차르의 속셈을 유일하게 이민호가 읽었다.

“안 돼!”

“뭐, 뭐가 안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유럽에서 일어날 전쟁에 참가하면 안 된다고! 루스 차르국에는 참전할 명분도 없고 힘도 없어!”

명목상 신교와 구교의 싸움에 정교회를 국교로 삼은 루스 차르국이 참전할 이유가 없었다. 차르는 이 기회에 국경선을 서쪽으로 확장하고 싶겠지만 폴란드의 공격을 막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폴란드가 신성 로마 제국의 내전에 참전한다면 폴란드 동쪽 국경에 빈틈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내전이라 부르기도 어렵고, 더더욱 폴란드는 그 전쟁에 참전하지 않는다. 오히려 동쪽이나 남동쪽으로 밀고 나올 기회를 노릴 거야. 황제와 귀족들이 연합한 폴란드의 침공을 막아낼 자신 있어?”

“연합하면 어렵습니다만, 설마 서로 견제 중인 폴란드 황제와 귀족들이 연합군을 구성하겠습니까?”

“지금까지 항상 그랬듯이 급해지면 연합하겠지.”

지난 세기에 루스 차르국은 북해나 흑해로 진출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내분으로 인해 약해지면서 스웨덴과 폴란드에 치이고 크림한국과 코사크에 약탈당하면서 루스 차르국은 전형적인 내륙국으로 위축됐다.

내전에서 벗어난 루스 차르국은 이번에 발트 해로 진출할 도시를 건설하고 볼가 강을 통해 흑해로 진출할 길을 열었다. 그리고 폴란드와의 국경 지역인 스몰렌스크에는 요새를 단단히 쌓았다. 어느 쪽이든 다른 세력에서 감히 방해하지 못한 것은 고산국이 루스 차르국 뒤에 단단히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트렐치가 정예병이라 하나 내전을 거치는 과정에서 거의 세습제로 이행되고 있어. 정규군이 아닌 군사집단이란 자기 이익 챙기기에 급급한 용병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들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는 편이 좋아.”

“명심하겠습니다. 저도 불안하던 참입니다.”

실제 역사에서 스트렐치는 규모를 계속 확장해 17세기 후반에 가면 5만 5천 병력 중에서 2만여 명이 모스크바에 주둔했다. 그리고 표트르 1세와 이반 5세 사이에 벌어진 후계 분쟁에 가담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강제 해산된다.

스트렐치는 로마황제의 제위를 경매에 붙였던 황제 근위대나 노예군대였다가 정권을 찬탈한 예니체리와 흡사한 길을 걸었다. 정당성 없는 무력집단이 권력을 노리면 결국 처형되거나 해산되는 수밖에 없었다.

“차르는 젊은 군주라서 앞으로도 정복 전쟁의 유혹에 시달릴 거야. 그러나 지금은 군사력도 약하고 제위가 안정적이지도 않아. 후계자가 성인으로 자랄 때까지는 정복 전쟁을 꿈도 꾸지 말게.”

“알겠습니다. 사실 마르그레타 양과 이미 합의한 사항이기도 합니다. 그 동안에는 마르그레타 양과 함께 내정과 군사력 재건에 집중하겠습니다.”

“차르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불가피하게 전쟁에 참전하는 수도 있을 거여요. 그런 전쟁까지 말리지는 않을 게요.”

“오! 나의 태양! 그대는 나의 영원한 동반자요.”

차르와 마르그레타가 서로 마주보며 눈꼴 시린 장면을 연출하자 이민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 밤이 늦었다.

“마르그레타! 이틀 후가 결혼식이다. 이만 일어나렴.”

“히잉~ 아바마마!”

조금이라도 함께 있고 싶어 하는 마르그레타를 비올레타가 매정하게 끌고 나왔다. 그리고 시집갈 날을 하루 앞둔 딸에게 어머니로서 폭풍 같은 잔소리를 쏟아냈다. 이민호가 낄 자리는 없었다.

결혼식은 그야말로 성대하게 거행됐다. 지난번 차르의 누나 크세니아와 덴마크 요한 왕자의 결혼식처럼 수많은 외국 외교사절들과 국내 보야르들이 자리를 빛냈고, 장중한 분위기 속에서 정교회 사제들이 엄숙하게 식을 진행했다. 비올레타가 결혼식장에서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반 대제의 거대한 종탑과 성 바실 대성당 사이의 붉은 광장에는 주변 도시에서 찾아온 축하객들을 포함해 20만 가까운 인파가 몰려들었다.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차르를 비롯한 고위 인사들의 경호와 도로 통제는 고산국 병력이 맡았다. 거대한 페르가나 말을 타고 번쩍거리는 의장용 갑옷과 투구를 착용한 기병연대의 위엄 앞에서는 내전 기간 동안 수없이 실전을 겪었다는 스트렐치도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었다.

모스크바에서 거행된 결혼식에 고산국에서 1개 기병연대 이상을 동원한 것은 바로 이 스트렐치의 존재 때문이었다. 폴란드를 상대로 싸울 때는 든든한 우군이었으나, 신뢰할 수 없는 무장집단은 적이나 다름없었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중간 몇 년은 한꺼번에 서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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