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834화 (783/1,000)

00834  93. 1614년  =========================================================================

“이 설계도를 저희에게 주신 것은 정상적인 외교 경로를 통하지 말고 조선인의 발상으로 가장하자는 뜻인가요?”

“그렇지. 정보국에서 포섭한 조선 양반들 중에 한 명을 골라서 상소를 올리도록 시켜. 우리가 이런 방어시설을 제안하면 우리에게 숨은 의도가 있는 줄 알고 의심할 테니까.”

짧은 기간에 끝났어도 임진왜란은 조선의 국토 전체가 휘말린 규모가 큰 전쟁이어서 조선 사회에 큰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특히 신분제의 변동이 심하게 일어났다. 일부 천민들이 전공을 세워 양반으로 신분 상승했고, 농지를 잃은 일부 양반들은 경제적 몰락이 가속화됐다.

양반이 경제적으로 몰락할 경우 자손들이 과거시험 공부를 할 여력이 부족해 그 가문이 양반 신분을 유지하기 어렵게 된다. 나라보다는 가문에 더 큰 책임감을 느끼는 가장들은 고산국 정보국 요원이 내미는 은이나 토지의 유혹을 결코 뿌리치지 못했다. 일명 포섭이라고 지칭했지만 몰락 위기에 처한 양반들에게 간첩질을 시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고산국이 조선에 비해 경제적, 군사적으로 더 강해지면서 양반들도 예전처럼 고산국을 무시하지 못하게 됐다. 그리고 인간이든 동물이든 생존을 위해 강한 쪽에 붙는 성향이 어느 정도 있기 마련인데, 양반이라는 지배층에서 꿀맛을 봤던 자들은 그런 성향이 더욱 심했다.

마치 CIA 한국 지부 요원들이 주한 미국 대사관 건물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한국의 관계, 재계, 군의 고위층 인사들이 한국의 고급 정보를 알아서 갖다 바치는 현상과 비슷했다. 그들의 심리에서 자기편은 한국 정부나 국민이 아니라 미국 정부였다.

“조선 위정자들은 괜히 쓸데없는 걱정을 해요. 조선의 무과급제자들이 우리 기병대에 근무해서 우리 사정을 뻔히 알면서 말이에요.”

고산국이 조선을 공격할 의도가 없더라도 조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고산국이 침공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믿는 조선 관료들도 은근히 고산국의 위협을 강조하기도 했다.

조선 입장에서는 당연한 반응이라 고산국에서도 뭐라 항의하지 못했다. 내부를 단속하기 위한 외부의 가상적 역할을 떠맡게 돼서 이민호도 은근히 기분이 나빴다. 조선의 진짜 적은 건주 여진이었지만 조선 위정자들은 자존심 때문에 건주 여진을 야만인 부족 취급했다. 정식 호칭 금, 통칭 후금은 아직 세워지지 않을 때였다.

“우리를 경쟁자로 여기니까. 그리고 이런 소규모 보루는 점령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고, 작은 방어시설이라는 것이 핵심이야. 왜군이 조선 남해안에 짓던 왜성처럼 작을수록 방어하기 쉬워.”

“비스듬히 경사가 져서 접근하는 동안 숨을 곳이 없군요. 보루에 오는 동안 다 죽겠어요.”

미카가 설계도를 보면서 진심으로 감탄했다. 성과 해자라는 일반적인 구조물에 더해 20세기 초반의 토치카와 보방의 상호보완적인 요새 설계 사상, 명나라의 양마장 개념이 모두 들어갔다.

이민호가 참모본부의 젊은 장교들과 며칠 동안 머리를 싸매고 만든 방어시설이었다. 만들었다가 부수거나 일부를 고친 나무모형만도 수십 개였다.

“큰 인명 희생을 각오하고 밀어붙이면 점령은 가능하지. 이곳에 배치되는 수비 병력은 화포장과 조총수, 궁수를 다 포함해서 아무리 많아도 40명이 넘지 않아야 해. 방어 시설도 딱 그 규모로 맞춰.”

“그럼 군량과 식수도 조금만 준비해놓으면 되겠어요.”

“사람이 체력에 한계가 있으니까 아무리 길어도 열흘 안에 점령된다고 봐야해. 그 전에 조선군이 병력을 동원해서 구원하든지 하겠지.”

조선에서도 압록강 너머 건주여진이 발호하는 상황을 심각하게 여기던 중이었다. 덕택에 공작이 제법 성공적으로 먹혀 들어갔다. 정보국의 배후조종을 받아 상소를 올린 양반은 벼슬을 해본 적이 없는 생원에 불과했는데도 단번에 당상관 품계를 받았다.

그러나 조선의 비변사 당상들이 과욕을 부린 게 화근이었다. 북쪽 압록강변에서 남쪽 평양과 한성으로 이어지는 도로 주변에 이런 보루를 수십 개나 쌓았다. 시멘트 수출이 잠시 중단돼 고산국 건설 현장이 마비되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설계도에서 제시한 것보다 훨씬 크게 지었다는 점이었다. 그 정도 규모라면 못해도 500명이 보루에 들어가 지켜야 하는데, 단기간에 그 병력을 소집해서 보루에 투입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기마군단의 기동속도는 아군의 파발이 달리는 속도와 비등할 정도였으니 정상적으로 명령을 받아 움직여야 하는 군대는 제대로 반응은 물론 소집 자체도 못한다.

방어시설은 넓을수록 빈틈이 많아지고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해진다. 조선이 외국군을 상대로 한성 성곽에서 방어전을 치른 사례가 아예 없었고, 계획한 적도 없었다. 실록이나 문집에는 한성의 성곽이 너무 길어서 방어가 불가능함을 지적하는 기사만 넘친다. 대신 국왕은 강화도나 후방으로 몽진하는 것을 기본 전략으로 삼고 북한산성이나 남한산성이 수도 방어의 핵심이 되었다.

“오! 갈릴레오! 새벽부터 웬 일인가?”

“제가 졸려서 간단히 말씀드리고 돌아가겠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수학자 겸 천문학자 머키스턴의 존 네이피어라는 젠트리가 로가리듬이란 것을 발견해서 책으로 발표했습니다.”

갈릴레오가 영어로 된 책을 내밀었다. 오랜만에 영문자가 가득 인쇄된 책을 펼친 이민호는 대학 때 영어원서를 받아드는 기분이었다. 그는 공대 학부 신입생 때 교양 물리, 교양 화학, 공업 수학 등을 교양이라는 명목으로 배웠다. 물론 로그는 고등학교 때 이미 배웠다.

네이피어의 책은 57페이지의 설명문과 뒤쪽에 90페이지의 자연로그 표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민호는 책을 대충 훑어보고도 로그의 이용방법을 기억해냈다.

“큰 수를 다루는 천문학자들의 계산에 크게 도움이 되겠어. 수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존 네이피어에게 상을 줘야겠군. 스코틀랜드에는 고산국의 국제우편 제도가 적용되지 않으니까 대사관을 통해 수령하라고 해야겠어.”

새로운 발견이나 발명을 한 사람에게 국적을 가리지 않고 고산국 국왕의 이름으로 상을 주고 있었다. 지금까지 케플러를 비롯해 유럽과 이슬람 지역의 많은 학자들이 상금을 받아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어? 대충 훑어보시고도 바로 의미를 파악하십니까? 역시 전하께서는 천재이십니다. 로그의 발견은 대단한 사건입니다. 천문학자들과 몇몇 대학에서 로가리듬을 바로 채용했다고 합니다. 네이피어와 오랫동안 교류했던 티코 브라헤는 이미 1590년대 초반부터 천문학 계산에 로가리듬을 활용한 것 같습니다.”

존 네이피어는 로그를 발견한 외에도 아랍 수학의 전통을 이어받았고 피보나치 함수를 연구하는 등 수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네이피어의 뼈’라는 이름이 붙은 계산자를 발명하기도 했다. 오컬트나 연금술, 특정 성서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고 수탉을 패밀리어로 거느린 마법사로 대중들에게 알려진 특이한 인물이었다.

“우리도 당장 내년부터 로그를 고등학교 수학 과정에 포함시켜야겠어. 갈릴레오 백작이 로그 개념을 쉽게 설명해줄 수 있겠지?”

“로가리듬에는 등속운동이나 여러 가지 물리학적 개념이 포함돼 정의 자체가 어렵습니다. 고등학생이 배우기에 너무 복잡하지 않겠습니까?”

“편법이긴 한데, 간단히 지수의 역함수로 정의하게. 수학적으로 풀이하자면 a의 x제곱이 b라 하면, 로그 a의 b는 x야. 오일러가, 아! 아니야.”

“어억!”

갈릴레오가 지적인 충격을 받고 돌아갔다. 올빼미 형 인간 주제에 그날 오후 늦게까지 로그와 지수의 관계를 검토하느라 잠을 못 자고 말았다. 그리고 갈릴레오는 단기간이지만 생활주기를 조정하느라 애를 먹었다.

“여행하는데 방해해서 미안하군. 백사 대감의 제자라 해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특별히 궁궐로 초빙했네.”

“영광입니다, 국왕전하. 하오나 지금은 관작을 삭탈 당하고 도성 밖으로 내쫓긴 야인에 불과합니다.”

이민호는 최명길이라는 조선의 전직 병조 좌랑을 만났다. 원래 역사에서는 인조반정의 공신이며 병자호란 전후에 주화파의 대표였으나 지금은 20대 후반 백수에 불과했다.

이민호는 최명길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를 별로 좋지 않게 생각했다. 후금이 쳐들어오기 직전에 국내에서 정권다툼을 벌여 광해군을 쫓아낸 서인 세력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인조반정에 이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의 난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평안도의 주력 병력이 사라지는 바람에 후금이 더욱 쉽게 조선을 침공한 배경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전쟁을 앞두고 주화파란 인기를 얻기 어렵고 욕을 먹기 쉬운 입장이었다.

“자네가 뛰어난 인재라고 자랑하는 이야기는 자네 스승을 통해 여러 번 들었네. 명나라와의 외교 문제로 파직됐으니 안타깝지만 앞으로 조선에서는 관직에 진출하기 어려울 거야.”

“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욕심을 버렸습니다.”

명나라에서 파견한 차관이 한성에 주재하는 동안 병조좌랑이었던 최명길이 선전관 윤우와 함께 차관의 관소를 수직하는 역할을 맡았다. 차관의 가정이 한성 거리를 오갈 때 술 취한 채로 인사말을 건네는 유생 이홍임을 가정을 호위하던 포도청 군사들이 체포한 다음, 이홍임이 가정과 밀담을 주고받았다는 식으로 무고해서 상을 타려 했다. 조선시대에 벌어진 간첩 조작 사건인 셈이다.

최명길이 조사한 다음 이홍임을 석방시켰으나, 이이첨에게 밉보여서 국왕이 친국하는 공초가 진행됐다. 그 결과 선전관 윤우는 파직으로 그쳤으나 최명길은 삭탈관작을 당한 다음 도성 밖으로 내쳐졌다.

“그렇다면 고산국에서 일하면 어떻겠나? 1, 2년 중앙정부에서 행정실무에 적응한 다음 북미나 호주의 시 하나를 맡기고 싶네. 말이 시라고 하지만 다스릴 면적은 조선 전체 면적을 몇 배나 넘어설 거야.”

“고마우신 말씀이오나 저는 이미 조선에서 관직을 지냈던 몸입니다. 고산국이 조선과 형제의 나라라 하나 외국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다른 나라에서 관직을 수행하지 못하는 저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충신이로군. 헌데 반정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나?”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광해군을 몰아내는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주모자 네 명 중에서 전체 계획을 관장한 이가 최명길이었다. 그러나 집권 후 최명길의 외교노선은 고스란히 광해군의 균형외교를 답습했다. 당대는 물론 후대에까지 욕을 먹더라도 무엇이 현실인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최명길이 이귀를 만나 반정을 모의할 단계는 아니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영창대군의 죽음이나 폐모론이 거사를 일으킬 명분이 됐다. 하지만 이미 몇 번 언급했듯이 선조 임금이 원래 역사보다 일찍 죽는 바람에 영창대군은 태어나지도 않았고 인목대비가 될 여자는 민다나오 술탄에게 시집가서 잘 살고 있었다. 이것이 조선의 역사 전개에 있어서 큰 변수가 될 수도, 전혀 안 될 수도 있었다.

“자네 친구의 부친과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좋을 걸세.”

“고산국에서도 예의주시하고 있었군요. 조선국의 주상전하께서는 설마 하고 계시는데 말입니다.”

“조선 백성들은 어느 당파가 정권을 잡든 똑같은 지배층의 교체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서 관심이 없네. 그보다는 위정자들이 합심해서 외부의 적을 물리치길 바랄 걸세.”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뛰어난 인재를 눈앞에서 놓쳤지만 이민호는 아쉬워하지 않았다. 인재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에서 만들어진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가 극히 짧은 고산국이라지만 이미 수많은 인재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조선 출신이 다수이긴 했으나 갈릴레오처럼 외국 태생도 많았다.

궁성에서 나간 최명길은 조선 출신의 지식인들을 만나고 다녔다. 보수적이라는 인상과 달리 의외로 교제의 폭이 넓어서 서얼 출신 시인이나 문장가들과도 교분을 트고 있었다.

최명길이 고산국 영토에 머무르는 동안 최고로 예우해주었다. 현실에 좌절한 지식인에게 어느 정도 위로가 될 것으로 믿었다.

광해군은 별 것 아닌 사건을 잘못 판단하는 바람에 젊고 뛰어난 전략가를 반대 당파에 넘겨준 셈이 됐다. 영창대군의 죽음이나 인목대비 폐출 사건이 없더라도 권력에서 소외된 정파에서는 언제든 왕권에 빈틈이 생기는 기회를 노리기 마련이었다.

이민호는 조만간 조선에서 큰 사건이 벌어질 것 같아 불안했다. 그래서 최고 지휘관 회의나 참모본부 회의를 소집하는 일이 잦아졌다.

“여진족 상대로는 조선을 믿기 어려워. 건주 여진의 본거지를 공격하려면 기병을 더 확대해야 해. 장갑차가 들어가기 어려운 지역이야. 항공 정찰도 거의 불가능해.”

후금이나 청나라는 팔기제도로 유명하고 뛰어난 기병들로 구성된 기마대군을 연상하기 쉬웠다. 그러나 후금을 개국하기 전의 건주 여진은 항상 방어하기 쉬운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두고 외부로 확장하는 정책을 유지했다.

개마기병과 만주 벌판이라는 인상이 강한 고구려도 교통이 불편한 산악지형을 방어에 이용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고구려 초기의 수도 국내성은 압록강이나 그 지류에서 지리적으로 가깝더라도 확실한 산중에 위치했다.

문제는 산악지대에서는 고산국의 강점인 화력과 기동력, 정찰 능력이 크게 제한된다는 점에 있었다. 넓은 평원으로 끌어내서 결전을 하는 것이 유리하나, 고산국의 강점을 이미 파악한 누르하치나 홍타이지는 이민호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줄 것 같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습작에 올려 수정해야 할 것을 바로 작품란에 올려버렸습니다. 혹시 문장이 이상하면 코멘트로 알려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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