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833화 (782/1,000)

00833  93. 1614년  =========================================================================

해군 총함장 이순신이 3월 중순에 소말리에서 돌아왔다. 1월 초순에 순양함 네 척과 해병대 1개 연대를 태운 수송선들을 이끌고 떠났던 이순신은 전에 육군 몇 개 사단까지 동원했던 대규모 원정 때보다 훨씬 큰 전과를 올렸다. 에티오피아나 소말리의 이맘에게 사전 통보하지 않고 해적 본거지를 급습한 것도 큰 전과를 얻게 된 요인 중 하나였다.

“오! 대군을 동원하고도 어려운 전쟁이었는데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해적을 소탕했습니까?”

“해적선을 바다에서 잡지 않고 놓아줌으로써 해적 본거지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국왕전하의 위엄으로 소말리 해적들의 출신 마을 주민들은 앞으로 농사에 전념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 봐도 한 눈에 해적임을 알 수 있는 자들을 순양함에서 잠시 잡아두었다가 일부러 저녁이 다 돼서 풀어주었다. 본거지를 들키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가며 돌아다니던 소말리 해적선은 어둠이 바다에 완전히 내려앉은 다음 본거지로 급히 돌아갔다.

전파탐지기를 통해 멀리서 해적선을 추적한 해군은 새벽에 해병대를 상륙시켜 해적 본거지 전체를 점령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해적 본거지 마을 여섯 곳을 점령해 해적들의 씨를 말렸다고 한다.

해병대가 민간인들 사이에 섞인 해적을 판별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하늘을 향해 총을 몇 방 쏜 다음, 무기를 들고 저항하거나 단신으로 도망가는 성인 남자는 해적으로 간주해 사살, 가족과 함께 도주를 시도하면 민간인으로 판단해 놓아주었다고 한다. 해병대 전사자는 딱 두 명이 나왔다.

“부상자 하나 없이 전사자만 나왔습니까? 어쩌다 죽었죠?”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격에 사망, 아니 전사한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전하.”

이민호가 보고서에 수록된 해병연대의 전투 일지를 빠르게 훑었다. 해병대가 해적 본거지 여러 곳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렀음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전사자가 나올 만한 상황은 발견되지 않았다.

“전투 상보에 전사한 상황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만.”

“자세한 것은 저도 모릅니다. 제게 묻지 마십시오. 해병대 지휘관들을 불러서 물어보셔도 잘 모르겠다고 대답할 겁니다.”

“예에?”

임진년에 해전을 여러 번 치르고도 이순신이 지휘하는 함대에서는 전투마다 보통 부상자가 대여섯, 전사자 한둘이 나왔다. 부상자 없이 전사자만 나왔기에 물어봤더니 이순신이 어색하게 얼버무렸다.

“형님. 전시에 범죄를 저지를 장병을 즉결처분을 할 수 있습니다만, 이런 식으로 장병들 개인의 비리를 감추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만약 병사들이 죄를 지었다면 정식으로 군사재판을 열어서 처벌하시지 그랬습니까?”

“부대의 명예에 관련된 사항입니다. 해병대는 무척 용감하고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저도 전하를 속이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으나, 해병대 창군 초창기라 간부들이 치부를 숨겨주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그 두 명에게는 총살형을 집행했습니다.”

“가린다고 숨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부대의 작전이나 지휘관의 명령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일탈일 뿐입니다. 군대도 인간들이 모인 조직인 이상 그럴 가능성은 언제든 있습니다.”

“꾸중을 달게 받겠습니다, 전하.”

“아이고, 형님! 꾸중이라니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고를 치는 인간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저번에도 비슷한 지역에서 비슷한 사건이 있었던 것처럼, 점령 중인 해적 본거지에서 해적이 아닌 민간인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대충 감이 잡혔다.

현대에도 형법에서 규정한 강간죄는 범죄의 심각성에 비해 몇 년 징역형에 불과하지만 전투지역이나 점령지에서 강간을 범하는 전지 강간죄는 군법에서 사형이었다. 이 시대에 정복자가 정복지에서 민간인 여자들을 대상으로 정복자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고 여기기 쉽다. 실제로 제대로 통제되지 못하는 군대나 용병부대에서 숱하게 일어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런 범죄를 눈감아줬다가는 주민들이 일으키는 대규모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점령지 관리에 애를 먹고 점령지 주둔군으로 병력을 후방으로 자꾸 빼다 보면 자칫 전체 전쟁에서 패할 수도 있다. 인도주의 운운하기 전에 이미 군사 전략의 문제였다.또한 재미는 강간범들만 보고 피해는 멀쩡한 군인들이 입는다면 형평성과 정의의 문제였다.

전에 소말리 해안마을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관개사업을 해준 적이 있었다. 그러나 해적 본거지 근처에서는 농사를 제대로 짓지 않았다고 한다. 이순신은 해적 마을에 거주하는 일반 주민들에게 밀과 호밀 같은 곡식 종자와 대추야자 묘목을 나눠주고 당분간 먹을 식량을 넘긴 다음 철수했다고 보고했다.

“힘깨나 쓰는 자들은 죄다 해적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앞으로 한 세대 안에는 소말리 해안에서 해적질을 못할 것입니다.”

“정말 해적들의 씨를 말리신 것 같군요. 남의 것을 빼앗으며 살아온 자들은 말을 해도 들어먹지 않으니 혹독하게 징치할 수밖에 없습니다. 참 잘하셨습니다. 전공을 세운 해병대원들에게 포상을 넉넉히 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전하의 은혜가 하해와 같습니다.”

지난번 토벌에 연이은 이번 해적 토벌전을 계기로 이후 수십 년 동안 소말리 사람들이 섣불리 바다로 나오지 못했다. 돛을 달고 홍해나 아덴만까지 나갈 수 있는 배 자체가 사라지고 노를 젓는 작은 어선들만 남았다.

해적들이 차지했던 해안지대에 힘의 공백상태가 생기자 소말리의 이맘이 병력을 동원해 비교적 수월하게 장악할 수 있었다. 저번 토벌전 때도 점령을 시도했다가 일부 지역에서 성공했지만 해적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물러났었다. 이맘은 고산국에 사신을 보내 해적 토벌전에 감사하는 의미로 공물을 바쳤다.

봄이 되어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과 함께 왕도 남쪽 산기슭의 마장에 나왔다. 이민호가 아이들을 데려간 것이 아니라, 학부모 자격으로 따라간 것이었다. 고산국에서는 매년 봄마다 전국의 중학생들이 사흘 동안 승마 기초를 배우고, 희망자들을 위해 초급과 중급 승마 과정이 개설돼 있다. 만 12세 이전에는 승마를 배울 수 없게 아예 법으로 규정돼 있었다.

이민호는 중학교 교과 과정에 괜히 승마를 집어넣은 것 같고, 괜히 부모가 따라가도록 규정했다면서 매년 봄마다 후회했다. 그러나 승마 교육 기간인 사흘이 지나고 나면 반드시 잊어먹었다.

“아바마마! 말이 참 예쁘게 생겼어요.”

“다리가 기가 막히게 잘 빠졌어요.”

“그래, 그래. 지도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지?”

오랜만에 왕궁에서 벗어나 들떠서 떠들어대는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어미인 후궁들, 그리고 이민호까지 모두 한 가족이었다. 왕실 가족들에게 승마를 가르쳐야 하는 상황에서 지도교사와 목부들이 바짝 긴장했으나, 여진족 출신 목부들이 차분히 준비해놓고 있었다.

제주도 출신 목부들은 혹시나 왕실 가족이 다칠까봐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탓에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 반대로 몽골 출신 목부는 절대로 좋은 승마교사가 되지 못했다. 몽골인 목부들은 다른 문화권에서는 아이들이 열 살 넘어서 처음 말을 탄다는 사실을 아직도 믿지 못했고, 다 큰 애들을 가르친다는 생각에 안전과 거리가 멀었다. 반면에 여진족 출신 목부들이 아이들의 안전에 신경 쓰면서도 열심히 가르치려 해서, 아이들에게는 가장 좋은 승마교사였다.

“대한께 경의를 표합니다. 대한의 아기님들에게 성심껏, 그리고 안전하게 승마교육을 시키겠습니다.”

“고맙소, 승마교육부장. 올해에도 암말들로만 준비했구려. 그래도 너무 커서 무섭소. 좀 작은 망아지가 낫지 않겠소?”

늙은 목부장은 임진왜란과 일본 정벌전에 참전했던 여진족 전사였다. 몸이 늙어 더 이상 전쟁에 참가할 수 없다고 한탄하기에 비슷한 신세인 여진족 노병들을 가족 단위로 왕도로 초빙했다. 늙어서도 전쟁 기술을 활용하기에는 목부가 꽤나 괜찮은 직업이었다.

“황송하오나 페르가나 말이라서 망아지도 엄청나게 큽니다. 그리고 뼈가 굳지 않은 망아지에게는 아직 사람을 태우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순한 암말들 중에서만 고르고 골랐으니 안전에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승마교육부장이 알아서 잘 가르쳐주시오.”

유럽 여러 나라에서 그렇듯 이 시대에 승마는 학생들에게 중요한 교양 과목이었다. 조선에서는 생활의 편의나 국방을 위해 말을 타고, 몽골이나 여진 같으면 생존에 필수적인 기술이었다. 어느 나라든 무관의 아이들은 이면처럼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탄다.

“전하! 말이 너무 커서 위험하지 않을까요?”

“주의사항만 잘 지키면 위험할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마.”

후궁들도 문화권별로 반응이 확연히 달랐다. 여진족 출신들은 무덤덤했고 말을 잘 타지 않는 남방 계통은 겁에 질렸다. 아무리 순한 암말이라 해도 페르가나 말의 체구가 커서 위압감을 느낄 정도였다.

엄마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처음 타는 말인데도 차분히 잘 몰았다. 물론 목부들이 말고삐 한쪽을 잡고 조심스레 말을 이끌었지만, 금방 혼자서도 잘 타게 됐다.

“주인님.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승마를 시작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이렇게 사람마다 반응이 다르다니까. 민희 너에게는 장난 같겠지만 지금 애들은 목숨을 걸고 타는 거야. 말은 자전거가 아니야. 커다란 말과 교감해야 하는 부담이 크거든.”

초대 호위대장을 역임했던 민희가 지금은 왕실 가족들의 경호와 외부 교육을 맡고 있었다. 전에는 이민호 한 사람만 지키는 걸로 충분했다면 지금은 수많은 왕자와 공주들, 그리고 후궁들의 경호를 책임졌다. 여성을 경호하기 위한 여성 경호원의 수요가 꾸준한 편이었다.

“교감하니까 자전거 같은 기계보다 말이 더 안전하지 않나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개나 고양이가 인간 아기를 조심스럽게 돌보기도 한다. 그러나 성질 나쁜 말은 기수가 어리거나 만만하면 말 안 듣고 무시하는 경우가 흔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승마를 가르칠 때는 모성애가 강해 인간 아이에게도 자상한 암말에게 시켰다.

“오! 우리 영미 잘 탄다. 금방 배우네.”

“영미 공주님 운동 신경 하나는 알아줘야 해요.”

고산국에서는 여자라고, 특히 공주라 해서 얌전할 필요가 없었다. 재능이 있다면, 그리고 흥미를 느낀다면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인구가 적은 고산국은 국가적 차원에서 여성들을 노동 현장에 내모는 게 현실이었다.

“아무리 조사해 봐도 조선에서 반란이 일어날 조짐은 전혀 없어요. 다만 압록강에서 한성으로 가는 길 주변에서 건주 여진이 보낸 간세들만 가끔 발견되고 있어요.”

“그렇게 단정 짓지 말고 계속 신경을 기울여줘. 만약 지금 이 중요한 순간에 조선 국왕이 바뀌기라도 하면 지금까지 조선을 지키기 위해 투자했던 것이 전부 날아간다. 만에 하나 조선인들 전체가 건주 여진의 인질이 된다면 우리도 마음대로 움직이기 어려워.”

정보국을 맡은 미카와, 미카를 지원하는 왕명명은 그다지 납득하지 못했으나 이민호의 명을 받들어 좀 더 자세히 조사하기로 했다. 조선은 겉보기에 매우 평화로워서, 반정이나 역모, 반란은커녕 예전에 흔했던 옥사나 흔한 당파싸움도 없었다.

물론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이이첨을 비롯한 모사들이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역사의 계축옥사처럼 정쟁에 이용할 만한 큰일은 생기지 않았다.

“건주 여진에서 평안도에 보낸 간세는 어떻게 할까요? 여진족이 아니라 조선에서 망명한 자들을 간세로 활용하고 있어서 적발하기 어려워요.”

“우리가 직접 제거할 수는 없지. 용모파기를 그려서 해당 관아에 투서를 넣어.”

“아무리 조선 화공을 흉내 내려 해도 그린 사람이 우린 줄 알아요.”

“그럼 신빙성이 더 높아지겠지. 내정간섭이 아니라 동맹국의 연합 방어 작전 개념으로 받아들이면 좋겠는데.”

“비변사 당상들과 평안감사를 접촉해볼게요.”

“뇌물을 팍팍 써도 좋아. 그리고 이걸 봐.”

이민호가 작은 보루의 설계도를 미카에게 내밀었다. 현대의 토치카와 비슷하게 두터운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구조물인데 망루처럼 꽤 높은데다가 주변에 작은 해자를 파고 안쪽에 철조망을 두른 것이 약간 달랐다.

이 시대에 건주 여진이 가진 화포는 대부분 전리품이므로 결코 명나라 수준을 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런 화포로는 아무리 쏴도 보루가 붕괴될 가능성은 없었다. 많은 병력을 투입한다면 점령을 못할 것까지는 없지만 그 전에 꽤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방어시설이었다.

“조선에서도 나름대로 북방의 위협에 대비를 하고 있어. 그러나 조선의 방어전술은 산성 위주라서 건주 여진의 기마군단이 소규모 견제부대를 남겨두고 우회해버리면 그만이야.”

“그런 식이면 한성까지 바로 뚫려요. 과감하게 남진한다면 압록강에서 한성까지 사흘 반쯤 걸리겠어요.”

이민호는 실제 역사에서 얻은 교훈의 도움을 받았지만, 미카와 왕명명은 그런 방어 전략의 빈틈을 바로 알아챘다. 산성이 일차적으로 적의 예봉을 차단하면서, 적의 주력이 우회할 경우에 대비해 산성 수비군도 기동성을 갖춰야 하는데 이 시기의 조선에서는 약간 무리였다.

조선 육군의 편제를 살펴보면 ‘현대인의 합리적인 상식’과 달리 기병이 보병보다 조금 더 높은 비율이었고, 북방으로 갈수록 기병 비율이 높아진다. 함경북병사나 남병사가 관할하는 병력은 기병이 3, 보병이 1 비율이었다.

그러나 산성에 집결하는 병력이 중앙군이나 제승방략에 의해 집결하는 그 도의 병력이 아니라 보병 위주인 속오군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공격자인 기마대군 입장에서는 보병이 지키는 산성 따위는 우회해버리면 그만이었다.

“우리가 조선에서 시멘트를 대량으로 수입하다 보니까 조선에서도 우릴 따라서 가끔 시멘트를 활용해서 건물을 짓는 것 같아. 구운 벽돌에 비해 저렴한 시멘트 벽돌도 만들어서 쓰고 말이야.”

“적 기마군단의 진격로에 이런 게 있으면 꽉 막히겠어요. 그리고 건설비나 수비병의 수도 적게 들어서 부담이 적겠어요.”

“적의 대군을 완벽하게 방어하지는 못하더라도 조선군에게 시간을 벌어주겠지. 평안감사나 병사가 이것을 잘 이용하면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어.”

군사 애호가들이 흔히 하는 말로 기마군단에 의한 참수 공격은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매우 두려운 전술이었다. 참수 공격이란 머리를 친다는 뜻으로, 말의 빠른 기동속도를 이용해 국경의 방어시설이나 방어부대를 모조리 우회해서 단기간에 상대방 국가의 수도를 점령하거나 군주를 사로잡는 전술을 말한다.

방어병력이 적보다 많더라도 정보 전달 속도가 느린 이 시대에는 제대로 대응하기 어려워 아주 효율적인 전쟁 수행 방법이었다. 실제 역사에서 병자호란 때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지 못하고 겨우 남한산성까지 가서 농성하다가 항복했다.

============================ 작품 후기 ============================

조금 더 이어질 내용입니다.

아직 몇 년 남았지만 주인공은 전쟁 준비에 한창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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