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30 92. 1613년 =========================================================================
새강릉 시에 특별 법정이 열렸다. 국사범으로 체포된 시의회 의원들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고개를 뻣뻣이 세웠다. 방청석 절반 넘게 차지한 북미 원주민들과 아일랜드 사람들이 피고들의 추태에 인상을 찌푸렸다.
피고는 여덟 명이었다. 술에 만취한 채 길거리에서 꼬장 부리다가 지나가는 아일랜드 출신 여학생들에게 인종차별적 모욕을 한 다섯 명과, 북미 원주민들을 야만인이라고 모욕한 세 명이었다. 체포되지는 않았더라도 조선 출신 시의회 의원들에게 그런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고 봐야 했다.
“앉으시지요, 국왕전하.”
“고맙네, 대추장. 자네도 내 옆에 앉게.”
재판관석 위쪽에 커다란 좌석 세 개가 있었다. 가운데 가장 큰 자리는 국왕의 옥좌, 두 번째는 북미 여공작 비올레타의 것이었다. 고산국에서 국왕은 육군과 해군의 최고 지휘관이듯 법원에서도 판결에 직접 참가하고 판사들을 지도하는 입장이기에 방청석이 아니라 재판관 석에 자리가 마련돼 있었다.
셋 중에 가장 작은 자리는 고산국 새강릉 백작인 포우하탄 부족연맹 대추장이 앉을 줄로 알았다. 이 지역 북미 원주민들의 대표자로서 대추장에게는 법정의 상석에 앉을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제가 어찌 감히 국왕전하 옆 자리에 앉겠습니까?”
“응? 그럼 이 자리는?”
대추장이 손사래를 치는 순간 이민호는 바로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리고 좋지 않은 예상은 항상 현실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뒤쪽 재판관 출입문이 조용히 열렸다. 그리고 포우하탄 원주민 여성들이 결혼식 때나 입는 화려한 성장을 차려 입은 포카혼타스가 나타나 이민호 옆 자리에 앉았다. 평소 짧은 원피스 형식의 간편한 원주민 복장을 입을 때 발랄해 보였던 것과 전혀 달리 이때는 꽤 성숙해 보였다.
“옷이 커서 불편하겠구나.”
“이럴 때는 예쁘다고 해주셔야죠, 전하.”
“풋!”
옆에서 비올레타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비올레타는 이민호가 오래도록 공을 들여서 간신히 얻은 현명한 여성이었다. 포카혼타스가 결국 후궁 자리를 꿰차고 말 것이라는 예상쯤은 충분히 하고도 남았다.
이민호는 몹시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연신 헛기침을 했다. 방청석에 가득 찬 북미 원주민들이 탄성을 내지르고 심지어 박수까지 쳐줬다. 욕먹지 않으려면 포카혼타스를 왕실에 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그 사이 피고들이 다급하게 변호사와 뭔가 대화를 나눴다. 잠시 후 재판이 시작되자마자 아주 신경질적으로 생긴 변호사가 일어나서 재판장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의 의뢰인 세 사람은 포우하탄 원주민들과 분쟁을 겪고 있습니다. 이 재판에 포우하탄 귀족 여성이 상석을 차지한 것은 재판장님과 재판관들의 심리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국왕전하나 왕족께서 법정에 입장하시어 상석을 차지하신 사례는 건국 초부터 자주 있었소. 포우하탄 부족연맹의 지도자 와훈수나콕 대추장의 따님 마토아카 양은 조만간 국왕전하와 가례를 맺으실 분이시니 충분한 자격이 있소.”
“아직은 아니지 않습니까?”
“마토아카 양은 지금도 포우하탄 부족연맹에서 실질적인 행정을 이끌어가는 분이라고 하오. 판결에 참가하지 못하더라도 북미 여공작 각하처럼 상석에서 방청할 권리가 있소. 이의를 기각하겠소.”
삼권분립은 아직 먼 이야기였으며 법관의 정치적 중립이란 개념도 아직 생기지 않았다. 이민호는 판사들이 최대한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을 내리길 바랐으나 판사들도 이 시대 사람인지라 이민호의 요구 수준에 완벽하게 부응할 수는 없었다. 만약 법 규정과 국왕의 명령 사이에 간극이 있다면 판사들은 고민하지도 않고 국왕 명령을 따랐다.
그리고 법원도 외부로부터 견제를 받아야 할 권력조직의 하나에 불과했다. 체질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고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법관들에게 지금 당장 법원의 독립을 맡겼다간 어떻게 될지 뻔했다. 국왕이나 다른 권력자의 압력, 혹은 총칼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법대로 판결할 수 있는 판사는 현대에도 흔치 않았다. 혹시나 그런 꼿꼿한 판사가 있더라도 상급자나 동료들의 눈치를 살핀다.
“재판장님! 저 북미 원주민 처녀가 저희보다 신분이 높다는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의원님!”
“자넨 가만히 있어! 아니, 왕실 식구가 된다면 당연히 인정해야지요. 하지만 저기 포우하탄 대추장이란 자는 이곳 원주민에 불과합니다. 저희 같은 고명한 시의원이 겨우 명예 기사 작위를, 그것도 시의원 임기 동안에만 임시로 받는데 저런 원주민 추장 따위에게 백작 작위를 준 것은 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시의원이 변호사의 제지를 뿌리치고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야만인 발언이 문제가 됐기에 이번에는 그냥 원주민이라고만 지칭했지만, 야만인이라는 뉘앙스는 충분히 느껴졌다. 재판장은 발언권을 얻은 다음에 말하라고 시의원에게 몇 차례나 주의를 준 다음 대답했다.
“고산국에서는 법적으로 국왕전하와 왕실 가족을 예외로 하고 백성들 사이에서는 신분의 높낮이 차이가 없소. 귀족 작위를 받았더라도 명예뿐, 신분상 특권이 없음을 피고는 모른단 말이오?”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검사는 발언하시오.”
“피고는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같은 백성들 사이에 신분의 고하가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국기를 뒤흔드는 중대한 발언이라 사료됩니다.”
“저의 의뢰인이 실언을 했음을 인정합니다.”
“재판장님! 그런 위험한 발언은 실언이라고 인정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방금 피고의 발언은 재판에서 불리한 증거로 사용될 수 있소. 검사는 심문을 진행하시오.”
예전에 백성들이 시의회 의원들을 만나면 땅바닥에 엎드려 부복해야 한다는 조례 제정에 참가했던 자들은 모두 파면됐었다. 그러나 고산국에서 이민 온 자들 중에서 극소수에 불과한 이른바 양반 계층은 뿌리 깊은 신분제 사회의 의식 수준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
사실 그것은 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대한민국 헌법상 신분제도를 창설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재산이나 교육수준 등 갖가지 기준으로 신분의 고하를 따지곤 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니었고, 남을 멸시하고 공격하기 좋아하는 자들의 특성이었다. 문제는 그런 자들이 신분 상승 욕구가 강해서 어떻게든 남들을 끌어내리고, 심지어 갖가지 유언비어를 퍼뜨려 남의 인격을 짓밟으면서 윗자리를 차지하려고 발악한다는 점에 있었다.
순수하게 다른 이들을 위해 정치를 하려는 사람들은 그런 세태에 환멸을 느껴 나가떨어지게 돼 있었다. 결국 비슷한 신분에 비슷한 성격의 인간들만 정계에 남기 쉬웠다.
“전하! 이번 일에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오해 말인가?”
짜증나는 재판이라 얼른 끝내고 싶었으나 주둥아리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유학자 나부랭이였다. 그러나 판검사를 비롯한 법조인들도 건국 이래 수십 년 동안 법 논리로 무장한 직업인들이었다.
그래서 변호사는 가장 만만하다고 여긴 이민호를 집중 공략하려 했다. 이민호는 그런 분위기를 알면서도 화를 참고 차분히 재판을 진행했다.
“피고들은 조선에 있을 때부터 선비로서 백성들을 교화하는 일을 하늘로부터 받은 소명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옛 성현들의 말씀을 전하는 교화 과정에서 원주민들이 반발을 일으키는 일은 흔합니다.”
“백성 교화가 아니라 오랑캐 교화겠지.”
“성인들의 덕을 입지 못한 자들을 오랑캐라고 합니다만, 멸칭이 아니라 가르쳐야 할 불쌍한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을 교화하는 일은 사대부의 도덕적 의무입니다.”
고산국에 이민 온 얼마 안 되는 조선 출신 양반들 중에서 진짜 선비 같은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실력이 있다면 과거에 붙어 조선에 남았을 것이고, 유교에서 강조하는 충성심이 강한 양반들도 고산국 이민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로 무관이나 중인 신분들이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기회를 얻고자 건너온 경우가 많았다. 이민자들 중에 일부가 억지로 양반이라고 주장한다 해도 향안에 오르지 못한 애매한 신분이거나 양반 자격을 상실한 잔반 계층이었다. 이들이 고산국에서 인정되지도 않는 양반 신분을 내세워 선출직을 독차지하려 했다.
“원주민이나 유목민들이 자기들끼리 살도록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되나? 유교만이 문명이라며 그들에게 강요한다면 그대들이 그토록 욕하던 기독교인들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군.”
“전하! 저희들을 예수쟁이들과 비교하시다니, 모욕입니다.”
고산국의 문명이 유럽보다 앞서다 보니 조선 출신 양반들에게 유럽이 문명의 변방으로 인식되고, 기독교도 덩달아 낡은 종교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고산국은 조선에서 밀려난 하층민들이 세운 나라라는 인식이 강해서, 그런 나라로 이주한 유럽 이민자들에 대한 양반 출신자들의 인식은 더더욱 나빴다. 꽉 막힌 면에서 비슷한 이 시대 기독교도와 조선 출신 양반들을 같은 선에 놓으면 피차 불쾌할 것 같았다.
“서로 모욕이라 여길 거야.”
“만약 조선에서 이런 논쟁이 벌어졌다면 경향의 모든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전하께서는 꽤나 마음고생을 하셔야 했을 것입니다. 사과 교지 정도는 내셔야 할 것이옵니다.”
“오호! 급기야 조선 이야기가 나오는군. 협박을 곁들이면서 말이지.”
검사와 변호사 사이에 치열한 법리 공방이 이어지기 전에 벌어진 전초전은 여기까지였다. 일단 아일랜드 여학생들을 도깨비라 놀린 시의원 다섯 명에 대한 심리에 들어갔다.
증인들이 몇 명 증언대에 불려나가서 진술했고, 한결같이 피고들에게 불리한 증언뿐이었다. 몇몇 시의원 신분인 증인들이 피고들에게 유리한 발언을 했으나 대세에 지장은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증거가 또 있었다.
“재판장님! 시의회 의사 속기록을 증거로 제출합니다. 시의회에서 평소 피고들이 다른 인종이나 일반 백성들을 얼마나 무시하는지 명백히 드러나 있습니다.”
“대충 읽어보겠소. 흠. 유럽 이주민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 거의 짐승으로 여기는군요. 국왕전하에 대한 막말도 서슴지 않은 것 같소. 시의회 의장과 동료 시의원들이 이런 위험한 발언을 제지하고 않고 오히려 동조하는 발언도 했소. 검찰은 수사를 하고 있소?”
“물론입니다. 의사록을 증거로 범죄 혐의가 있는 의장과 시의원들을 모조리 체포하고 있습니다.”
피고뿐만 아니라 증인으로 나선 시의원들도 절대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거나 기억이 안 난다고 아우성이었다. 변호인측 증인들이 일제히 증언을 거부하고 물러났다.
법리 해석에 따라 여차 하면 참수형에 해당하는 내란죄에 저촉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피고들과 증인들은 목숨을 걸고 혐의를 부정했다.
“얼마 전에 새강릉 시의회에서 특이한 조례를 통과시켰더군. 일반 가게에서 술을 팔지 못하게 하고 술에 취한 자는 즉시 집에 돌아가야 하는, 어떻게 보면 꽤 괜찮은 조례였어.”
“제가 발의했습니다, 전하.”
이민호는 캐나다 어느 지역에 그런 법이 있다고 들었다. 편의점이나 구멍가게에서 술을 팔지 않고 사람들도 야외에서 술을 마시지 못한다. 만약 술 취한 채 거리에서 어슬렁거리다간 경찰에 잡혀가 벌금을 물게 된다.
주당들은 싫어하겠지만 안전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고려할 만한 규칙이었다. 시대를 떠나 이런 법규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이민호는 새삼 놀랐다.
“아주 훌륭해. 그런데 자네들은 왜 그 조례를 지키지 않았나?”
“그거야 백성들이 지키도록 만든 법, 아니 조례입니다. 스물도 안 된 새파란 놈들이 술 취해서 나대는 꼴을 보기 싫어서 말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스물도 안 된 청년이나 시의원이나 똑같은 백성인데 말이야.”
“저희들은 백성이 아니라 양반입니다. 그러니까 국왕전하를 보좌하면서 백성들을 교화하는 지배층이며, 국왕전하와 같은 편이란 말입니다! 재판을 당장 취소시키십시오.”
“백성들을 그렇게 교화하고 싶으면 먼저 공부를 제대로 하든지. 여기 조선에서 향시라도 붙은 사람 있나?”
몹시 흥분해서 이민호에게 따지던 시의원들이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유학을 끝까지 배우지 않았으나 이민호는 그래도 생원 타이틀이라도 땄다.
그러나 신분만 내세워 남들 위에 군림하려는 시의원들은 실상 실력은 쥐뿔도 없었다. 잘난 것은 양반가에서 태어난 출생 그 자체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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