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828화 (777/1,000)

00828  92. 1613년  =========================================================================

최근 북미를 순행하면서 덴마크까지 순행 일정에 넣는 경우가 잦아졌다. 고산국 영토도 아닌 덴마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덴마크 서인도회사에서 매년 대주주인 이민호에게 지급하는 이익 분배금이 지나치게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민호가 여러 사람 명의로 절반 이상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역시 대서양과 인도양 무역에서 고산국의 배려로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동인도회사 주식 가격이 폭등해 시세차익을 다 챙길 경우 유럽의 모든 토지를 매입할 수 있다는 추산도 나왔다.

네덜란드에서 조금씩 나눠서 보내는 막대한 배당금을 우선 덴마크 왕실에서 대리 수령했다. 그리고 이익금 수송을 일반 상선에 의뢰할 수준이 넘어가서 이렇게 이민호가 직접 함대를 움직여야 했다. 금액이 워낙 커서 다른 사람을 시키지 못하고 주인이 직접 수금하러 온 셈이었다. 덕택에 유럽의 정세 변화를 보다 더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다.

“요즘 온 유럽이 뒤숭숭한 것 같아.”

“맞아. 다들 군비 증강한다고 정신이 없어. 용병들만 신났지.”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4세와 이민호는 램지 중령이 이끄는 스코틀랜드 용병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유럽 정세에 대한 논의로 주제를 옮겼다. 쾨벤하운에도 예전보다 더 많은 군인들이 돌아다니고 전에 못 봤던 요새나 포대가 해안에 들어섰다.

“남의 신앙을 인정해주면 좋을 텐데.”

“그러게 말이야. 종교가 돈이나 권력이 되다 보니까 교황청이나 각국 왕실에서 놓아주려 하지 않아.”

“신교도 마찬가지 아닌가? 영주들이 신교로 개종하는 목적이 로마가톨릭교회의 재산을 빼앗기 위한 것이라며? 그리고 같은 신교라는 루터파와 칼뱅파가 서로 이단이라고 탄압했잖아.”

“그렇긴 하지. 어쨌든 그 동안 쌓인 모순이 한 번 대대적으로 터져야 할 것 같아. 그래야 정리할 기회가 생기지. 전쟁은 일어날 수밖에 없어.”

“비용이 너무 커질 것 같아. 비용이란 국가 전체적인 손실 말이야. 특히 인명 피해가 예상 외로 커질 수도 있어.”

이민호는 30년 전쟁 기간에 독일인의 절반 이상이 죽었다는 정도만 기억했다. 살아남은 자들도 끔찍한 상황에 처하지만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는 몰랐다.

전쟁이 일어날 경우 실제 전투에서 죽는 전사자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죽는다. 가장 큰 사망 원인은 역시 전염병이었다. 전장 정리가 제대로 안 돼 사방에 썩어가는 시체가 널려있는 것도 전염병이 창궐하는 원인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지저분한 환경에서 군인뿐만 아니라 피난민들이 이 지역 저 지역 몰려다니는 것이 전염병 확산의 가장 큰 원인이 된다.

그리고 식량이 군대에 집중되면서 기근이 아닌 시기에도 민간인들이 굶주리며, 영양실조는 인간이 전염병에 약해지는 원인이 된다. 치안의 부재로 인해 도둑떼와 강도가 우후죽순으로 생겨서 인구 감소에 한 몫 한다. 또한 전쟁이 끝난 직후 베이비 붐 현상이 생긴다는 것은 어려운 전쟁 기간 중에는 그만큼 출산이 줄어든다는 뜻이었다.

“아마 그럴 거야. 헌데 덴마크와 고산국의 동맹 말이야.”

“뭘 원하나, 크리스? 전에도 말했듯이 침략 전쟁에는 지원하지 않아. 방어전만 도와주겠어.”

이민호가 단호하게 거부하자 크리스티안 4세가 입맛을 다셨다. 만약 고산국 군대를 지원받을 수 있다면 전 유럽을 제패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기 때문이다.

유럽 다른 나라보다 덴마크에서 고산국의 진정한 힘을 더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고산국이 유럽에 보여준 것은 전력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고, 지금은 예전보다 훨씬 더 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영토를 넓힐 기회인데 아까워서.”

“이봐! 내 생각에는 덴마크가 지금 영토나 제대로 지킬 수 있을지도 의문이야. 과연 슐레스비히나 홀스타인이 덴마크 영토로 영원히 남을 수 있을까?”

“당연히 영원히 남도록 해야지.”

“슐레스비히 남부와 홀스타인에 사는 주민 대부분이 독일인이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독일어를 쓰더라도 지난 수백 년 동안 우리 덴마크 주민으로 살아왔어. 정확히는 덴마크도 신성 로마 제국도 아닌 홀스타인과 슐레스비히 주민들이지.”

“왕실에서나 그렇게 생각할 뿐, 주민들은 조금 다르게 생각할 걸?”

아직 나폴레옹이 등장해서 민족의식을 각성시키기 이전의 시대였다. 이 시대 유럽인의 민족의식이 강하다고 할 수 없지만 전혀 없다고 할 수도 없었다. 상황 변화에 따라 언제든 홀스타인은 물론 슐레스비히까지 두 공작령이 덴마크에서 떨어져 나갈 수도 있었다.

현재 두 공작령의 법적인 지위는 덴마크 국왕의 직할 영지이며 신성 로마 제국의 봉토였다. 엄밀히 구분하자면 덴마크 국왕이 개인 자격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봉신으로서 신성 로마 제국의 영지를 다스리는 것뿐이었다.

덴마크는 19세기 중반에 들어서서 분리 독립 운동이 일어나는 이 지역을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거쳐 모두 잃게 된다. 그 전에 체결된 여러 국제 조약과 협약에서도 슐레스비히와 홀스타인이 덴마크와 같은 헌법 체제 아래에 묶이지 않는 것을 매번 확인했다.

“그래도 나는 국왕이야. 내가 더 늙기 전에 후대에 자랑할 만한 업적을 세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어. 가장 인상적인 군주의 업적은 뭐니 뭐니 해도 역시 영토 확장이지.”

“쯧쯧! 헛된 꿈을 꾸는구나.”

“무슨 헛된 꿈이야? 획득한 영토 면적으로 알렉산더 대왕과 칭기즈칸을 넘어선다는 고산국왕이 내 눈앞에 계시지 않은가? 자네가 부러워.”

“부러울 것도 많다. 영토 넓히려고 전쟁하는 것은 나라 망하는 지름길이야. 그리고 나는 군사력을 투입해 정복한 영토가 거의 없어. 에스파냐로부터 구매하거나 원주민들이 원해서 영토에 편입시킨 것뿐이야.”

“자랑이다!”

이민호는 정복 군주는 결코 아니었으나, 워낙 넓은 영토를 얻은 바람에 그렇게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해서 신경 쓰지 않았다.

영토를 전쟁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 얻어서 좋은 점은 그 지역 주민들이 주도하는 분리 독립 움직임이 거의 없다는 점에 있었다. 브루나이처럼 국가가 이미 성립됐거나 카자흐스탄처럼 고산국 영토로 편입되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면 굳이 무리해서 영토로 편입하지 않았다.

기본 소득을 지급해야 하는 부담 때문에 여진족 땅이나 일본처럼 정식 영토로 편입되지 않은 지역도 많았다. 상녕 국왕과 상풍 왕자가 유구국을 고산국에 편입해달라고 몇 번이나 간청했지만 그때마다 좋은 말로 위로한 다음 사양했다. 지금도 유구국은 거의 속국으로서 항상 고산국을 대리해서 활동했다. 굳이 합병하지 않더라도 유구국은 고산국을 위한 여러 가지 일을 해주었다.

“저번에 부탁했듯이 육군 편제에 대해 조언을 좀 해주게. 우리가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그 이상은 안 나와.”

“몰라. 모른다니까. 나는 병사들을 살아있는 표적으로 쓰고 싶지 않아.”

“나는 그러고 싶나? 피아의 무기체계를 따지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방진을 선택하는 상황이잖아.”

이 시대의 집단 전술에서 방진을 형성하는 것에는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아직 화승총의 위력이 압도적이지 못한 상황에서 적의 장창 밀집방진이나 기병에게 대항하기 위해서는 이쪽 보병들도 촘촘히 밀집해서 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포병 직사에 방진이 관통당할 때마다 포탄이 지나간 길을 따라 병사들이 볼링 핀처럼 한 줄씩 우르르 무너진다. 팔다리가 날아간 동료 병사들이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사이 나머지 병사들이 할 일이라곤 피투성이가 된 사상자와 전사자를 넘어서 빈자리를 채우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 끔찍한 상황에서 병사들이 공황에 빠지거나 도망치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것이 이 시대 강병의 기준이었다. 물론 군기를 세우기 위해 방진 안에서는 폭력과 욕설이 난무했다.

“상대방 대열을 살피면서 적당히 창병 대열을 늘리거나 줄여봐. 총병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척탄병을 잘 활용하면 괜찮을 것 같아.”

“고산국 육군은 전혀 다른 무기와 전술을 쓰니까 이런 진형에는 고민하지 않은 티가 역력하군.”

“우리가 어떤 전술을 쓰는데? 본 적 있어?”

“고산국 왕립 사관학교의 전술학 교재를 입수했지.”

“풋! 그거야 역사적으로 사용된 기본적인 전술들을 나열해 설명한 것뿐이야. 고산국 전술의 정수는 육군대학이나 참모본부에 있어.”

사관학교 교재나 중대 이하 단위의 야전교범 정도는 언젠가 외부로 유출될 것을 감안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것도 가급적 외부 유출을 막아야겠지만, 막는다고 막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현대 미군에서 편찬한 수많은 종류의 야전 교범이나 기밀로 분류된 소부대 전술 따위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그래도 꽤나 참고가 된다네. 한 권에 20원이나 주고 열두 권을 구했지.”

“바가지 썼군. 그거 구내서점에서 사면 정가가 한 권에 1원이고 교육 대상자에게는 무료로 배포하게 돼 있어.”

“충분히 그 가치를 하고 있으니까 괜찮아.”

비용으로 따지자면 책값이 아니라 정보원을 파견하는 비용이 가장 컸을 것이다. 고산국 왕도나 유럽에서 가까운 새강릉, 새원산에는 정보 수집 목적으로 활동하는 외국 첩자들이 꽤 있었다.

고산국에서도 같은 목적으로 유럽 여러 나라에 정보원을 파견하므로 이 정도는 서로 모르는 체했다. 대사관 무관 같으면 대놓고 정보 수집을 하는 백색 스파이였지만 국익에 결정적으로 해가 되는 활동만 하지 않는다면 추방 조치도 내리지 않았다.

물론 정보국에서는 첩자들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한 첩자들이 중점 관리대상 목록에 오른 인물 혹은 특정 기술업종에 속한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다음 날 크리스티안에게 이끌려 덴마크군 훈련에 참관했다. 이 시대 논리에 맞게 국내외 용병들이 보병의 주력을 형성하고 귀족들은 기병, 징집된 시민들은 주로 보급부대로 참가했다.

“어떤가? 내 군대의 위용이. 여긴 겨우 5천 명이 모였지만 소집 명령만 내리면 금방 수만 명으로 불어날 거야.”

“멋지군.”

창병들이 고슴도치처럼 빽빽하게 방진을 구성한 다음 선두 몇 열은 장창을 앞으로 내밀고, 뒤로 갈수록 창을 세우는 각도를 높인 채 전진했다. 보병방진의 훈련시간 대부분이 대열을 맞추는 단순한 훈련에 소모됐다.

- 타타타타탕!

그리고 장창방진 좌우에서 나와 앞으로 배치된 총병들이 일제 사격을 하는 것도 구경했다. 명중률은 모르겠으나 흰 연기가 자욱이 피어나 연막탄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적 총병 대열의 사격뿐만 아니라 위협적인 대포로부터 장창 방진을 가리는 역할이었다.

- 두두두두두두~

기병들이 보병 방진 사이를 지나 전면으로 뛰쳐나갔다. 실제 전투에서 기병이 전면에 투입돼 보병 방진에 맞설 일은 드물겠지만 상황에 따라 이미 와해돼 도주하는 적 보병을 추격하는 용도로 자주 사용됐다.

물론 폴란드 후사르나 영국 기병은 가끔 보병 방진을 붕괴시키는 엄청난 짓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예외 중의 예외에 해당했다. 이 시기 기병은 장창 대열과 화승총으로 무장한 보병 방진 근처에서 어물쩍거리다간 피해만 누적됐다. 다만 이 시대 흑기병은 권총과 장검, 그리고 갑옷을 입고 집단으로 카라콜 전법을 수행하거나 근접 거리에서 보병들을 압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저 말들은 뭔가? 저번에 덴마크에 판매한 페르가나 말은 분명 아닌데.”

“어! 그 명마들을 기존에 전마로 쓰는 종의 암컷들한테 열심히 교배시켜서 혈통을 개량했지. 예전 전마에 비해 체구가 커지고 힘도 좋고 속도가 빨라졌는데 지구력은 확연히 떨어져.”

“저런! 지구력이 전마로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안 됐군.”

“전투할 때는 기병 한 명당 말 두 마리를 준비해야 할 거야.”

페르가나 말은 꾸준한 교배와 육종을 통해 고산국 기병의 기본 전마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지금도 페르시아를 통해 말이 세계 각국에 퍼져 나가고 있었으므로 고산국에서 독차지할 수는 없었다.

기원전에 한무제가 그랬듯이 한혈마 한 마리만 생기면 종마로서 씨를 열심히 퍼뜨려 장기적으로 개량을 진행하는 식이었다. 물론 덴마크나 한나라처럼 피가 옅어질수록 페르가나 명마의 특성이 점차 사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2014년 5월 뉴스 보도로는 페르가나 말이 세계적으로 3,100여 필에 불과하고, 그 중에서 투르크메니스탄에 2천여 필이 있다고 한다. 한 필에 13억 원이라는 높은 가격대를 형성했다.

“고맙네. 개량된 화약무기는 어느 나라든 평등하게 판매 금지했어도 덴마크에 말이라도 팔아줘서.”

“말이나 군자금, 병력이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야.”

“자네 덕택에 나는 다른 군주들에 비해 유리한 편이야. 하지만 전쟁에는 변수가 너무 많아.”

“전쟁 중에 꼭 살아남도록 하게나.”

유럽의 군주들이 거의 예외 없이 친정을 하는 시대였다. 프랑스의 앙리 4세나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도 직접 작전을 짜고 전쟁터에서 부대를 지휘했다. 스웨덴 국왕 아돌프는 군제개혁을 성공시켜 북 독일과 발트 해 연안에서 엄청난 선전을 하다가 결국 전쟁터에서 전사하고 만다.

이민호는 유럽에서 벌어질 30년 전쟁에 개입할 이유도, 여력도 없었다. 요즘 신경이 온통 건주 여진과 명나라에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의 전황이 예상 못한 방향으로 치달을 경우 언제든 병력을 투입할 준비가 돼 있었다.

“비올레타 여공작, 해중국 여왕, 북방 여공작 등등.”

“응? 자네 혹시 내 여자들에게 관심이 있나?”

“농담 말게.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고산국과 전쟁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요즘 네덜란드에서 최고급 품종으로 유통되는 튤립 구근들 이름이라네. 북미에서 품종 개량한 것도 꽤 된다고 들었어.”

“아하. 튤립이 색깔도 다양하고 특히 꽃이 큼직해서 좋지.”

“그렇지 않아도 내년부터 왕궁 정원에 심을 계획이라네.”

최근 네덜란드에서 튤립 가격이 꾸준히 높아지고 농민들 사이에 튤립 재배가 점차 확산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선물 거래를 하는 등 투기 상황에 이르지는 않았다.

요즘 고산국 농업연구소 북미 분소에서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분야가 화훼 품종 개량이었다. 그리고 특이한 꽃 모양과 색깔이 나오면 적당히 구근 수를 불린 다음 네덜란드에 수출했다.

네덜란드가 튤립 투기 열풍에 의해 망하지 않게 하려고 고산국이 알게 모르게 적극 개입하고 있었다. 그 탓에 튤립 버블이 실제 역사에서처럼 생기지 않을 수도 있었다.

============================ 작품 후기 ============================

유럽에서 당장 큰일은 없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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