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27 92. 1613년 =========================================================================
“웬 사람들이 이리 많이 나와 있지? 아이슬란드에 인구가 적다고 들었는데 내가 잘못 알았나?”
덴마크로 출발하려고 아이슬란드 왕궁에서 나오는데 레이캬비크 항구까지 가는 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있었다. 귀족들이야 국왕 행차에 인사하러 나오는 게 당연하지만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일반 민중들이었다. 이민호가 어리둥절한 가운데 헤드비히가 투덜거렸다.
“어머나! 제가 오갈 때는 본체만체하던 백성들이 유독 국왕전하만 반기는군요.”
“그래요? 좀 민망하구려. 내가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마치 북한에서 현장지도를 왔다 떠나는 지도자를 인민들이 열광적으로 환송하는 것처럼 울고불고 아주 난리가 아니었다. 바이킹의 후예라는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이렇게 감성이 풍부할 줄은 몰랐다.
“요즘 레이캬비크 주변에 지은 집들을 먼저 보세요. 여자 행정관들을 안느라 그 동안 백성들의 삶에는 신경도 안 쓰셨죠?”
“험! 험! 예쁜 집들이 많아졌구려.”
“한자 동맹 도시들 중에서도 부유한 상인들이나 살 만한 비싼 집이에요. 욕실과 주방에는 뜨거운 온수가 하루 종일 나오고 방에도 온수 배관이 깔려있어서 따뜻해요. 그리고 전등이 들어오고 각종 전기제품을 쓸 수 있어서 살기에 훨씬 편해요.”
집 모양은 눈이 많이 오는 북유럽식의 지붕이 높이 솟은 모양인데 내부는 새강릉의 민가를 그대로 베꼈다고 한다. 심지어 화장실이 수세식이며 정화조에 연결된 것도 북미의 집들과 같았다. 마을마다 하수처리장도 건설했다.
레이캬비크에 이민호가 처음 왔을 때 봤던 집들은 땅굴을 파서 돌로 대충 입구를 가린 정도였다. 귀족들의 주택 정도는 돼야 돌로 벽을 세우고 다른 곳에서 목재를 싣고 와서 얼기설기 엮은 지붕을 씌운 것이었다. 춥고 몹시 황량한 곳이라 사람들이 이런 곳에 왜 사나 싶을 정도로 환경이 열악했었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충분히 잘 살고 있으니 일단 됐고, 직업을 만들어주고 여가 시간을 즐기게 해주는 일이 중요할 것이오.”
“의식주는 전혀 문제가 아니에요. 세상 어딜 가도 이런 곳은 없을 거여요. 그래서 백성들이 전하께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어요.”
“물론 남태평양의 섬들 중에 낙원 같은 곳들이 있긴 있소.”
남태평양의 섬들을 조사한 태평양 탐사전단의 보고에 의하면 타이티가 그렇다고 했다. 거기서는 원주민들이 지천에 널린 야자수를 따고 흔해빠진 물고기를 잡아 아무 걱정 없이 살았다.
얼마 안 되는 밭일을 여자들에게 맡기고 남자들이 하는 일이라곤 그저 미모를 다듬고 몸치장만 하는 섬도 있다고 했다. 탐사전단 대원 두 명이 그 섬에 남았고, 탐사전단에게 그 섬은 상륙이 금지된 섬으로 지정됐다. 대원을 더 빼앗길 것 같아서기도 하지만, 섬사람들의 평온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일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곳인가요? 그래도 사람은 모름지기 일을 하고 살아야 해요.”
“물론이오.”
이민호가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사람이 반드시 일을 해야 하는가 하면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었다. 대학 때나 군대 가기 전후 몇 달에 걸친 백수생활은 나름대로 해볼 만했다.
아무 것도 안 하고 그저 방바닥에서 뒹굴며 노는 게 전혀 지겹지 않았다. 물론 얼마 못 놀고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지만.
현대 사회에서 갈수록 자동화 공정이 발달하면서 노동 인력은 언제나 구조조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생산력에 비해 노동력은 항상 남아돌게 된다는 뜻이다.
노동자들이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서 할 수가 없다면 노동에 기반을 둔 경제구조는 허물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국민들이 일을 하지 않거나 못하더라도 생활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줄 책무가 국가에 있다. 바로 이것이 기본소득제의 미래 전망 가운데 하나였다.
“국왕전하 만세! 만세! 만세!”
항구를 가득 메운 백성들이 이민호에게 끝없이 만세를 불렀다. 배에 탄 이민호가 만면에 미소를 띠고 헤드비히와 나란히 서서 손을 흔들었다.
“이제 보니까 행정관의 부모들하고 식사 한 번 함께 못한 것 같소.”
“전하께서 주무시는 동안 왕궁으로 초청해서 대접했어요. 명목상이지만 작위도 올려줬어요.”
“거 참 미안하게 됐소.”
여자 행정관들이 부모인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는 곳을 잠시 지켜보았다. 덴마크에는 겨우 며칠만 머무르고 다시 돌아올 예정이었고, 행정관들은 고산국 국왕의 후궁이 되면서 부모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었다. 행정관보다 부모들이 더 기뻐하는 것 같았다.
아이슬란드 모든 귀족의 딸들이 행정관 겸 후궁이 되는 것은 아니었고, 헤드비히가 여러 가지로 신중히 따져서 골랐다. 특히 지적 수준과 인성이 행정관 선발에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됐다고 한다.
“마음에 드신 것 같아 다행이에요.”
“고맙소. 험!”
사실 몹시 마음에 들었다. 첩을 골라주는 본부인의 마음이야 오죽이나 섭섭하겠지만 헤드비히도 본부인은 아니었다. 그래도 유럽에서는 비올레타만 제외하면 눈치 볼 후궁이 없는 헤드비히는 마음껏 권한을 누리는 셈이었다.
“순진한 아이슬란드 백성들에게 더욱 잘해주세요.”
“더 이상 잘해줄 것도 없을 것 같지만 계속 신경 쓰겠소.”
행정관들이 탄 다음 배가 항구를 떠났다. 커다란 체구에 얼굴이 수염으로 가득 덮인 바이킹 같은 사람들이 어울리지 않게 눈물로 환송했다. 이민호도 가슴이 찡했다. 정치가로서 드물게 겪은 뿌듯한 사건이었다.
“아이슬란드야 환경이 워낙 좋은 곳이니까 잘 살아야 마땅하오.”
“농사도 못 짓고 몹시 추운 곳인데도 전하께는 그렇게 보이는가 봐요.”
“지열발전이 아니더라도 아이슬란드는 어업만으로도 충분히 잘 살만한 곳이었소. 해적들 때문에 어업을 제대로 못해서 문제였소.”
“겸손할 필요 없어요. 전하께서는 아이슬란드를 단기간에 발전시킨 업적을 자랑할 만해요.”
바로 얼마 전까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어부들이 아이슬란드에 들를 때마다 주인 행세하면서, 얼마 있지도 않던 아이슬란드 사람들의 재산을 빼앗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그런 짓을 해도 제지할 수 있는 공권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부들이 지금은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 어부들이 해적질을 할 때마다 민병대에 몽땅 붙잡히고, 항구 거리에는 화승총과 장창으로 중무장한 아이슬란드 경찰이 순찰을 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외국인 어부들이 들락거리는 항구에는 치안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레이캬비크에서 출발해 페로 제도에서 하루 머문 다음 덴마크로 향했다. 고산국 함대는 노르웨이 인근 바다에서 수상쩍은 움직임을 보이는 범선 두 척을 발견했다. 순양함들이 당장 범선들을 포위한 다음 임검에 들어갔다.
“스코틀랜드 용병이라고?”
“그렇습니다, 전하. 저는 용병대장 알렉산더 램지 중령이라 합니다. 이쪽 부대장은 조지 싱클레어로서, 케이트니스 백작 조지 싱클레어의 동명이인인 사촌입니다.”
케이트니스는 스코틀랜드 북쪽 끝의 영지였으며, 케이트니스 5대 백작 조지 싱클레어는 스코틀랜드 국왕의 궁정 총신이었다. 용병인 조지 싱클레어는 에든버러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각종 모험에 뛰어들어 30대 초반인 젊은 나이치고는 능숙한 용병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제임스 6세는 1607년에 스코틀랜드에 속한 모든 병력에게 용병으로서 해외에 취업할 길을 열어주었다. 발트 해 연안과 독일 땅에서 활동한 스코틀랜드 용병들은 그래서 용병인 동시에 스코틀랜드 국왕의 군사일 수도 있었다. 용병치고 잘 훈련받고 용감하며 장비도 훌륭해서 고용주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오호! 자네가 찬 검 손잡이 부분이 아주 특이하게 생겼군.”
“고산국 국왕전하께 이런 형식으로 제작된 가장 좋은 검을 하나 바치겠습니다!”
“오! 그래 준다면 값을 지불하도록 하지.”
용병 부대장 조지 싱클레어가 검이 든 나무 곽을 바쳤다. 호위대장 선영이 검을 살펴본 다음 이민호에게 건네고, 고산국 국왕의 체면이 손상되지 않도록 적당한 값을 쳐주었다.
이민호가 한 손 또는 양손으로 사용할 만한 큰 검을, 특히 손잡이 부분을 자세히 살폈다. 검 손잡이 주위를 쇠로 그물 모양으로 감싼 형식이라 가벼우면서도 손을 잘 보호하게 만들었다.
바로 이것이 스코틀랜드 용병들에게 인기를 얻었다가 독일로 건너가 싱클레어 힐트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리고 다시 역으로 스코틀랜드로 건너가 특유의 클레이모어 디자인을 만들었다.
“그런데 선장은 왜 안 보이지?”
“하하! 이 배의 선장 로버트 스튜어트입니다. 알현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하.”
용병들 뒤에 숨어있던 선장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마치 후크 선장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선장은 해적선장 같구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제가 생긴 게 이래서 흔히 그런 오해를 받곤 합니다.”
로버트 스튜어트의 정체는 해적선장이 맞았다. 잠시 스코틀랜드 용병들을 노르웨이의 적당한 해안에 상륙시켜주는 계약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지 본업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노르웨이 해안에서 얼쩡거리는 건가? 램지 중령! 자부심 넘치는 스코틀랜드 용병들이 설마 해적질하려는 건 아니겠지?”
“물론 아닙니다, 전하. 저희 스코틀랜드 용병들은 이번에 스웨덴에 고용돼서 스톡홀름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쾨벤하운을 지나기가 어려울 것 같아 노르웨이에 상륙해서 산맥을 넘어가려고 합니다.”
“그런 힘든 길로 가려고? 혹시 덴마크가 스코틀랜드 용병들이 탄 선박이 외레순 해협을 통과하는 것을 거부했나?”
“일반적인 상선의 경우 그렇지 않습니다만, 저희들은 스코틀랜드 용병들 중에서도 덴마크가 아니라 스웨덴에 고용된 부대입니다. 덴마크와 스웨덴은 전통적인 적대국이라 저희들을 순순히 통과시켜줄 것 같지 않습니다.”
노르웨이가 만만해 보이지만 역시나 바이킹의 후손들이었다. 적성국 스웨덴에 고용될 스코틀랜드 용병들이 자국 영토를 지나가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들이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용병들이 지나가는 길에 부족한 보급을 핑계 삼아 민간인 마을을 약탈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이민호 입장에서는 동맹국인 덴마크의 속국 노르웨이가 외국인 용병들에게 침탈당하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이는 동맹국의 의무였다.
“그렇다고 노르웨이 해안에 상륙하면 노르웨이 사람들이 순순히 보고 있을 것 같은가?”
“그래도 저희들은 군대 조직이고 노르웨이에는 끽해야 소작농들로 구성된 민병대 수준의 허접한 부대가 있을 뿐입니다. 수준 차이가 너무 커서 감히 저희들에게 도전하려 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노르웨이 중남부 오플란(Oppland)의 오따(Otta) 근처에서 벌어진 크링언 전투에서 스코틀랜드 용병 300명 중에서 280명이 죽거나 크게 다친다. 상대는 500명의 노르웨이 소작농들로 구성된 민병대였다. 노르웨이에서 가장 유명한 대첩으로 오래도록 사람들의 입에 회자됐다.
이것은 원래 역사에서 1612년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그러나 덴마크가 스웨덴을 공격한 칼마르 전쟁이 이민호의 개입으로 흐지부지되면서 스코틀랜드 용병들이 스웨덴에 갈 일이 없었다. 그런데 독일에서 신구교 갈등이 커지고 스웨덴이 큰 전쟁에 대비한다는 이유로 스코틀랜드 용병들을 새로 고용하면서 1613년에 비슷한 일이 생길 뻔했다.
“덴마크의 군비가 강화되면서 덩달아 노르웨이 민병대의 무장도 강화된 것을 알아야 하네. 내가 중재를 해주지.”
“그래서 저희들도 상륙하는 것을 망설이던 참입니다. 전하께서 아량을 베풀어주십시오.”
“이것은 내 서명이 들어간 통과증명서라네. 내 함대가 이 범선들을 임검했으니 무사통과시켜줄 걸세. 그리고 덴마크와 스웨덴은 더 이상 적성국이 아니야. 스웨덴에 고용됐다는 이유로 외레순 해협을 통과하지 못할까봐 걱정할 것은 없다네.”
예전 같으면 다른 나라의 무장 선박과 바다에서 마주칠 경우 싸움이 나는 경우가 흔했다. 흔히 기고만장한 해적들이 고산국의 위세를 모르고 대들다가 모조리 수장됐었지만 요즘에는 태극기만 보면 무조건 한 수 양보했다.
결국 조심성이 이들의 목숨을 구했다. 만약 이들이 계획대로 노르웨이에 상륙했었다면 크링언 전투 이상으로 처참한 패배를 맛봤을 수가 있었다. 며칠 동안 신중히 상륙 지역을 고르는 도중에 고산국 함대를 만난 것은 이들에게 큰 행운이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좀 더 해보니 이들은 제임스 스펜스 경에게 지시를 받는 용병부대였다. 그렇다면 스웨덴의 욱센해나 백작과 관계됐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 겸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 1세는 반드시 왕비 때문만은 아니더라도 스웨덴보다 덴마크와 가까이 지내려 했다. 여러 나라가 복잡하게 얽힌 용병부대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친절을 베풀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오나 고산국 국왕전하께서는 스코틀랜드나 잉글랜드를 싫어하지 않으셨는지요?”
“내가 스코틀랜드를 싫어할 이유가 있나? 아하! 저번에 에든버러 포격 사건 때문에? 오해로 빚어진 일인데 양쪽이 대화로 풀어야지.”
“잉글랜드 놈들하고도 여러 모로 충돌하신 것 같습니다만.”
“조금 불편한 일이 있었지. 하지만 고산국이나 덴마크 서인도회사의 상선들이 런던에 입항하고 있네. 서로 교역을 잘하고 있는 한 적으로 삼을 이유가 없지.”
물론 아일랜드 독립군을 배후에서 조종하며 지원하는 나라는 고산국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잉글랜드가 고산국 타도를 외치며 전면전에 나서지 않는 이상 전쟁을 할 이유가 없었다. 내버려둬도 잉글랜드가 말라죽어 가고 있는데 굳이 건드려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가 없었다.
램지 중령이 지휘하는 스코틀랜드 용병들이 탄 범선들을 내버려두고 고산국 함대는 남쪽으로 향했다. 이로써 노르웨이 사람들이 대대로 자랑할 만한 대첩 하나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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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못 올리고 말았습니다.
오늘 두 편을 올리도록 노력만은 해보겠습니다만 될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