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24 92. 1613년 =========================================================================
1613년 가을에 북미 동해안과 아이슬란드를 순행했다. 새강릉의 별궁에 도착했더니 어느덧 10대 중반으로 자란 포카혼타스가 소식을 듣고 달려와 이민호의 목에 매달렸다.
“이봐! 호위들이 본다. 그만해.”
“어때요? 조만간 저도 저분들처럼 전하의 후궁이 될 텐데요. 그렇죠, 언니들?”
물론 포카혼타스가 아직 어리기에 그럴 일은 없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이 시기에 제임스타운의 백인들에게 납치되어 백인 포로들과 교환하는 협상을 포우하탄 대추장과 벌이게 만든다. 그리고 디즈니 애니메이션처럼 군인이나 대장이 아니라 담배 농사꾼에게 시집간다.
“처녀가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다니, 부끄럽지도 않아?”
“어렸을 때부터 전하의 배필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이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뭐야? 평강 공주도 아니고.”
“그럼 전하께서는 바보 온달이네요? 호호!”
포카혼타스는 원주민인데도 말하고 옷 입는 것조차 고산국 아이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포우하탄 대추장의 딸은 조선말을 완벽히 구사할 뿐만 아니라 조선과 고산국이 공유한 역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포카혼타스는 현재 원주민이 다니는 고등학교가 아니라 새강릉의 왕립 고등학교에 다녔다.
전에 이민호가 포카혼타스와 그의 아버지에게 왕자들하고 선을 보라고 권했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신랑은 이민호가 아니면 안 된다고 했다. 살짝 기분은 좋았으나 아직 설득할 시간이 있어서 내버려두고 있었다.
“우리 귀여운 장난꾸러기의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지?”
“이번에는 오스만 제국에 놀러가셨어요. 이름하야 우방국 순방이래요.”
“대추장이 이제는 국왕 허락도 안 받고 외국에 가네.”
“시청에 여행신청서를 집어던진 즉시 떠나셨어요.”
포우하탄 대추장은 일반적인 고산국 사람과 다르기 때문에 외유를 떠나기 전에 어느 정도 교육과 경호를 받아야 했다. 왕실을 제외하고 고산국에서 개인 소득과 재산 랭킹 1위가 바로 대추장이었다.
포우하탄 부족 연합을 고산국에 받아들이면서 모든 토지를 국왕 소유로 돌렸지만, 원주민들에게 토지 소유권 개념이 없는 것은 여전했다. 결국 대추장에게 속한 원주민들의 넓은 농지에서 지은 담배 농사 전체 수입의 4분의 1 정도가 대추장 한 사람에게 들어갔다. 물론 대추장도 원주민들을 위해 돈을 썼지만 쓰는 속도보다 쌓이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그래서 대추장에게 일부러 귀족 작위를 주고 일반인과 달리 외국을 여행할 때 국왕 허락을 맡도록 법을 바꿨다. 예조 관리가 귀족을 따라다니면서 안내를 맡는 규정도 있었다. 과다한 부를 소유한 대추장 개인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대추장은 이런 제한이 싫어서 여행신청서를 제출한 즉시 외국으로 떠나버렸다. 딸에게 장난꾸러기라고 별명을 지어준 대추장은 키만 컸지 장난꾸러기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 다행히 정보국에서 해외 파견 요원들을 대추장에게 급파해 경호 공백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매년 두 번씩 나가네. 대추장은 세계를 다 돌아보고 싶은 거야?”
“외국 풍경이 달라봤자 얼마나 다르겠어요? 아빠는 스위스의 산과 이집트의 사막이 북미 대륙 안에 모두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건 그렇지. 그럼 뭐하러 간 거야?”
“단순한 먹거리 여행이에요. 오스만 제국에는 여러 민족들이 섞여 살아서 음식이 다양하거든요.”
“끙! 팔자 좋다. 업무보고는 내팽개치고 도망갔다 이거지?”
현대의 북미 원주민들이 마약이나 도박, 알코올중독에 빠지는 것은 실업과 생활에 대한 좌절감 때문이었다. 그래서 주정부에서 원주민 보호구역에 카지노를 설립해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준 이후 실업이나 마약 문제가 상당 부분 해결될 수 있었다.
포우하탄 대추장은 돈도 많이 벌고 삶이 여유로워서 그런 유혹에 넘어갈 일은 없었다. 남는 돈과 시간으로 딱히 더 유용하게 쓰라고 권하기도 어려워 내버려두었다.
“포우하탄 부족연맹에 대한 제반 업무 보고는 앞으로 제가 할 거여요.”
“뭐? 넌 아직 어리잖아.”
“몇 년 전부터 제가 조사해서 작성했단 말이에요. 단순한 우리 아빠가 설마 그런 복잡한 문서를 작성했겠어요?”
“그랬었구나. 그래도 대표자 자격이 있어야지.”
“전하~ 원주민들을 상대할 때는 제가 쓸 만하지 않겠어요?”
포카혼타스가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이민호에게 매달렸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말고 역사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포카혼타스는 경건한 종교인이며 매사에 언행이 무거운 편이었다. 그러나 이런 특성이 고착된 것에는 백인들에게 납치당한 이후 자유를 상실한 탓이 컸다.
“그래, 알았다. 좀 떨어져서 말해.”
결국 업무 보고를 포카혼타스에게 맡겼다. 그런데 대추장이 없는 틈을 타서 포카혼타스가 맹랑한 짓을 준비하고 있었다.
“샛강에 마차가 교차해서 지나갈 만한 넓고 큰 다리를 세 군데에 건설하면 보다 원활하게 물류 문제가 해결될 거여요. 그리고 이곳 새강릉에서 북쪽으로도 다리를 놓는 것이 어떻겠어요?”
“강 하구가 지나치게 넓어서 너무 큰 공사가 될 거야. 그리고 비용 문제 때문에 새강릉 시청에서도 포기한 줄로 알고 있어. 국가예산을 받아와야 할 거야.”
강폭이 5km에서 10km에 이르는 샛강 하구에 다리를 건설하는 공사는 한 마디로 대역사였다. 고산국 왕도를 흐르는 아리수 강 하구는 샛강보다 훨씬 좁은데도 아직 다리를 놓지 않았다. 경제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럴 필요 없어요. 그 다리를 원주민들이 주로 이용할 테니 아빠 돈으로 만들면 돼요.”
“쿨럭! 다리 하나를 만드는데 얼마나 큰돈이 드는지 알아?”
“알아요. 유럽에서 웬만한 영지를 몇 개나 사들이고도 남을 금액이에요. 하지만 담배 농사를 짓는 원주민들이 그 동안 모은 돈을 아빠가 관리하는 것뿐이에요. 그 돈은 원주민들을 위해 쓰는 게 당연해요.”
새강릉 주변 농촌 지역에서 포우하탄 부족 연합 소속 원주민들은 대부분 부농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원주민들이 전통적으로 훌륭한 담배 농사꾼이기 때문이다. 가장 힘든 밭을 가는 일을 시청에서 도맡아준 이후 원주민들의 담배 농사 경쟁력이 몇 십 배로 뛰었다.
뒤늦게 담배 농사에 뛰어든 고산국 본토 출신 농민들에게 담배 농사법을 자세히 알려줘서 새강릉에서 원주민들은 큰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대부분 원주민들이 넓고 좋은 집에서 살면서 마차도 집집마다 한두 대씩 갖췄다. 샛강에 다리를 놓자는 주장은 포우하탄 마을과 새강릉 사이 도로가 몹시 혼잡하고 매년 급증하는 마차 통행량에서 비롯됐다.
“아빠도 아시니?”
“예. 출발 직전에 제가 다리 몇 개를 놓겠다고 했어요. 포우하탄에서 새강릉까지 오는 시간이 절반으로 줄어들 거여요.”
대추장은 작은 개울에 다리를 놓는 것으로 알았을 것이다. 대추장이 여행에서 돌아와서 은행계좌가 절반 이하로 줄어든 것을 발견하고 화를 낼지, 아니면 잘했다고 할지 알 수 없었다.
“강을 두 번이나 건너야 하기 때문에 포우하탄 마을에서 새강릉까지 오가기 불편한 것은 안다. 하지만 아빠가 가진 돈은 원주민들의 돈이 맞다. 그리고 대표자는 네 아빠야. 다리 설계를 하고 비용을 산출한 다음 아빠에게 정식으로 허락을 받도록 해라.”
“네에~ 그렇게 할게요. 전하께서 허락하셨으니 아빠가 반대하지는 않을 거여요.”
“내가 허락한 것은 아니고, 자체적으로 결정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포카혼타스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었다. 다리 건설 문제에서 이민호 이름을 파는 것 같아 부담이 들었다.
“그런데 강에 다리를 세우면 배가 상류로 올라가기 어려워지잖니? 그럼 일부 구간에는 다리를 건설하고 반대쪽에는 지하 차도를 만들면 어떨까?”
“강 밑에 거대한 땅굴을 파서 마차들이 지나도록 한다고요? 그것도 좋은 방법이겠어요. 다리와 지하도로 중간에는 인공 섬을 만들어요!”
“인공 섬이라니, 다리와 지하도 건설에 큰 도움이 되겠구나.”
이민호가 한 마디해서 건설비가 단숨에 몇 배나 뛰게 생겼다. 고산국 건국 이래 최대의 토목공사가 북미에서 벌어질 판이었다. 그것도 거의 순수하게 원주민 자본으로.
“그런데 이렇게 큰 공사를 맡은 건설회사가 있을까요? 국영 건설회사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요.”
“당연히 여러 회사가 합작해서 구간별로 나눠서 건설해야겠지. 그리고 시청이나 중앙정부에서 건설을 주도하고 감리도 직접 맡는 편이 좋을 거야.”
“저도 참가할래요!”
“그래, 그래. 제안자니까 당연히 참가해야지.”
새강릉 행궁에 거하는 단 며칠 동안 교량과 지하도의 기본 설계도와 모형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새강릉 시청에서도 교량공사의 타당성을 판단하기 위한 예비조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모든 일은 포우하탄 대추장이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진행될 예정이었다.
새원산을 들른 다음 카나타 마을에 갔다가 마침 모피를 팔러 온 샹플랭을 만나 잠시 대화를 나눴다. 샹플랭은 고산국 몰래 퀘벡을 건설했다가 왕도로 끌려갔던 프랑스 사람이었다.
“그래. 원주민들하고는 잘 지낸다지?”
“그렇습니다, 전하. 지난번에 전하께서 조언해주신 대로 물물교환에서 폭리를 취하지 않으니까 상황이 여러 모로 더 좋아졌습니다.”
“서로 믿고 교역 규모가 커지면 더 큰 이익을 얻게 되는 법이지.”
“그렇습니다. 원주민들과 가격문제로 다투는 경우가 드물어 치안 유지비용도 대폭 줄어들었습니다.”
프랑스의 탐험가 및 지도 제작자이며 원래 역사에서 퀘벡 개척자인 사무엘 드 샹플랭이 고산국에 정식으로 이민을 왔다. 이민호에게 용서를 받은 그는 누벨 프랑스를 개척하지는 못했지만 고산국 해군 함선들에 의해 초토화됐던 퀘벡 지역을 다시 근거지로 삼아 원주민과 교역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샹플랭을 비롯해 초기 퀘벡 개척에 참가한 프랑스인들은 고산국 해군에 의해 굴비 엮듯이 줄줄이 묶여서 왕도까지 끌려왔었다. 재판과정에서 조국 프랑스의 무력함과 퀘벡 개척을 사실상 지시했던 앙리 4세가 발을 빼면서 이들은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졌다.
그리고 저번에 앙리 4세가 죽고 나서 그 동안 재판과정을 돕던 프랑스 외교관들마저 손을 떼었다. 배반감을 느낀 샹플랭을 비롯한 개척자들이 확실히 고산국으로 넘어오게 됐고, 이들의 희망에 따라 다시 퀘벡에 정착했다.
“안색이 좋지 않구먼. 사무엘 자네가 프랑스를 배반한 것이 아니야. 프랑스가 자넬 배반했었지.”
“그렇긴 합니다만 마음이 불편한 것은 여전합니다. 죄송합니다.”
“흠! 프랑스가 여전히 자네에게 마음의 조국이라 해도 상관없네. 고산국에 있는 동안이라도 고산국을 위해 일해주면 그것으로 충분해. 나중에 은퇴하고 나서 프랑스로 돌아가더라도 뭐라 하지 않겠네.”
“그럼 안 됩니다. 저는 고산국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라는 케네디의 명언이 있다. 국가가 그런 요구를 국민에게 한다면, 거꾸로 국가도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다.
그러나 고산국이 아무리 이민자들에게 잘해준다 해도 정서 문제는 어쩔 수 없었다. 고향에는 애틋한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잠도 못 자는 지옥 같은 삶이었던 육아기간이 늙어서 추억으로 미화되듯이, 노예 같은 삶을 살던 젊은 시절이 노인이 되면 그 시절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채색되듯이 고향이라는 말에도 힘겨웠던 시절은 망각되고 아련한 행복함만이 남는다.
“이민 1세대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게 당연해. 그러니까 내가 진정으로 고산국 백성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2세대부터야. 완벽한 충성심을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부담스러워 할 필요 없어.”
“그, 그러셨군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그렇다 해도 배신하는 것은 용서 못해.”
“물론입니다, 국왕전하! 비록 제가 이미 프랑스를 떠났지만 프랑스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샹플랭과 프랑스인들 덕택에 추워서 어느 누구도 가기 싫어하던 북미 북쪽 지방 개척의 물꼬를 틀 수 있게 됐다. 퀘벡을 정식으로 고산국 도시로 인준하면서 새함흥이라는 이름으로 바꿀까 하다가, 원주민들의 언어에서 비롯된 이름이라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추운 곳이라도 마다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다른 프랑스 농민들은 온화한 미시시피 강 유역에 주로 정착하는데 말이야.”
“그들은 농민이고 저희들은 상인과 개척자들입니다. 어려울수록 보람이 더 커집니다.”
“좋은 마음가짐이야.”
고산국이 군사력과 여진 기병으로 강하게 억누르고 있어서 원주민들이 섣불리 분쟁을 일으키지 않으려 했다. 물론 고산국 정착민들이 먼저 원주민들의 기득권을 인정해줘서 분쟁의 소지 자체를 없애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고산국이 북미에 진출함으로써 지금까지 원주민들이 얻은 것이 잃은 것보다 훨씬 많았다. 아이들이 더 이상 어려서 죽지 않는 것이 의사들이 예방접종을 할 때 사용한 자그마한 주사 바늘과 관계있다고 생각해서 바늘을 오용하는 것을 제외하면 고산국이 진출한 이후 원주민들에게 나쁜 일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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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폭이 넓어서 교량 공사가 아마도 현대 기준으로도 몇 조 단위 규모일겁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