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823화 (772/1,000)

00823  92. 1613년  =========================================================================

자바 섬 마타람의 술탄 아궁이 즉위 인사를 하러 왕도를 방문했다. 얼굴에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고산국 왕도의 발전상을 보고 기가 질린 것이 역력한 표정이 대화중에 가끔 드러났다.

알현 전에 육군의 대대 전술훈련을 참관했던 것이 가장 결정적이었다. 훈련 참관은 고산국 외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고산국의 힘을 잘 모르고 기고만장했던 외국 외교관들이 장갑차에 항공기까지 동원된 훈련에 참관한 다음 유순해지는 것은 아주 금방이었다. 외교관들은 자국이 고산국 군대에 의해 초토화되는 상상을 하며 치를 떨곤 했다.

“오랜만일세. 부친께는 안 됐지만 참으로 오래 기다렸겠어. 덕택에 왕세자로 지내면서 많은 경험을 쌓았겠지.”

“전대 술탄의 국장 때 고산국에서 대규모 조문단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대 술탄께서는 나라를 반석 위에 올린 훌륭한 군주셨습니다.”

마타람의 2대 술탄 세다 잉 크라피아크는 농업을 육성해 마타람의 기반을 닦았다. 그러나 무역도시 수라바야를 대대적으로 침공했다가 철통 방어에 막혀 소득 없이 물러서기도 했다. 수라바야는 고산국과 접촉하고 네덜란드 해적들에게 약탈당한 이후 예전에 비해 화력이 많이 강화됐다.

자바 섬 중앙 내륙지방에 위치한 마타람은 농업 생산력을 기반으로 서쪽과 북동 해안에 산재한 무역도시들을 집어삼킬 힘을 기르고 있었다. 그 동안에는 무역도시들이 필요가 없거나 자바 섬이 평화롭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힘이 부족해서 침공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궁이 올해 술탄으로 즉위했을 때 마타람은 이미 충분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고산국에 복속한 무역도시들을 고산국이 계속 지켜줄지 확인하러 아궁이 직접 왕도를 방문한 것으로 봐야 했다.

“물론이야.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마타람을 강하고 좋은 나라로 만들도록 하게. 부친과 맺은 조약과 여러 가지 약속은 이번 술탄에게도 이어질 걸세.”

“감사합니다. 해안의 무역도시들과도 평화롭게 지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만 마타람과의 교역을 확대해주시길 간청 드립니다.”

“그렇게 하도록 총리에게 지시를 내리겠네. 필요한 것은 실무자들을 시켜 예조와 협의하도록 하게. 고산국에서는 앞으로 마타람을 자바 섬의 맹주로 인정하겠어. 그러니 마타람에 비해 보잘 것 없이 자그마한 해안 도시들을 술탄은 신경 쓰지 말게나.”

이로써 교환 조건이 성립됐다. 술탄 아궁이 수라바야와 말랑, 투반 등의 무역도시들과 마두라 섬을 공격할 일은 없어졌다. 그러나 마타람 입장에서 넘치는 힘을 투사할 곳이 필요할 테니 자바 섬 서쪽 지역이나 바다 건너 다른 곳을 공략할지는 모를 일이었다.

실제 역사에서 아궁은 보르네오 남부와 발리 섬을 공격했다. 현재 브루나이는 고산국의 피보호국 입장이므로 안전했고, 발리는 어떻게 될지 아직 알 수 없었다. 고산국 입장에서 해군이 약한 마타람에 의해 해로가 차단될 염려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무역 상대방이 많을수록 좋기에 기존 무역도시들이 당장 마타람에 흡수되지 않기를 기대했다.

“에. 말씀드리기 황송하오나 제가 고산국 공주님들 중에 한 분하고 맺어진다면 앞으로 두 나라 관계가 더욱 좋아질 것 같습니다.”

“술탄은 이미 결혼했지 않나? 자식들이 이미 장성한 것으로 아는데?”

술탄 아궁은 1613년부터 1645년까지 재위한다. 이민호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아궁을 국혼 대상자로 삼을까 고려해보겠지만 미래는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고산국 공주들을 정략결혼에 내몰 생각도 없었다.

“험! 험! 국혼이란 당사자의 처지나 의사가 중요하지 않은 법입니다. 왕족들의 의무이기도 한 것이 정략결혼 아니겠습니까?”

“일부다처제야 무슬림의 전통이고 나도 그러니까 뭐라 하지 않겠어. 하지만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문제야. 차라리 장성한 자식들끼리 선을 봐서 서로 마음에 드는 배우자를 찾는 게 어떨까?”

“미래를 위해서 그것도 좋겠습니다. 비록 자식들의 배우자를 구해줘야 하는 부모의 의무를 포기하는 것 같지만 말입니다. 이번에 왕자와 공주들을 몇 데려왔으니 바로 선을 보게 하시지요.”

술탄 아궁이 내키지 않더라도 동의하고 양쪽에서 열 명씩 나서서 선을 보게 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서 두 나라 공주들은 다른 나라 왕자들에게 예외 없이 퇴짜를 맞았다. 마타람 공주들은 키가 너무 작고 못 생겼다는 이유로, 고산국 공주들은 여자치고 키가 너무 커서 위압적으로 보인다는 이유였다. 성격도 서로 맞지 않아 마타람 왕자들 입장에서 고산국 공주들은 너무 드세 보였다.

사람의 키가 크다고 반드시 인종적으로 우월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키가 큰 것으로 알려진 인종에서도 키 작은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고 건강하게 잘 살아갔다. 그러나 어렸을 때 영양부족으로 인해 발육부진에 빠지면 자칫 평생 잡다한 병으로 고생할 수도 있었다. 이민호가 영유아 영양에 특히 신경을 쓴 것은 평균 신장을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보기엔 마타람 공주들이 다들 예쁘고 귀여운데 말일세.”

“제 눈에도 그렇게 보입니다. 고산국 공주님들은 장군감을 낳으실 만한 훌륭한 체구입니다. 군주끼리 딸을 서로에게 시집보내면 어떻겠습니까?”

“고맙지만 지금도 너무 많아서 사양하겠네.”

“저보다 여자를 많이 거느린 군주는 처음 봅니다. 물론 부럽지는 않습니다.”

“내 고충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서 반갑군.”

서로 쑥스러운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 마타람 술탄과 사절단이 왕도에 머무는 동안 최고의 예우를 해주고 선물도 많이 보냈다.

몇몇 왕자들이 고산국에 남겠다고 떼를 써서 술탄에게 호된 꾸중을 들었으나 결국 왕립대학에 무시험으로 입학함으로써 왕도에 남게 되었다. 왕도에 여러 나라의 왕자 혹은 족장 후계자들이 너무 많이 살아서 경호 인력 부족 문제가 심각했다.

얼마 후 마타람이 바닷가로 진출하면서 자바 섬의 무역구도가 확 변했다. 식량과 군사력을 쥔 쪽이 무역에서도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마련이었다. 전쟁이 없더라도 주변 무역도시들은 조만간 마타람에 흡수될 운명일지 몰랐다.

생선회와 초밥, 육회 등 날 음식에 대한 판매제한 조치를 풀었다. 건국 이후 금지했던 복어 조리와 판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식도락가들의 꾸준한 요청이 아니었더라도 어업연구소와 국립병원에서 오랜 기간 공동 연구한 다음 이번에 정책을 변경할 수 있었다. 식품 보관 방법이 발달하고 식중독에 대한 치료법이 그 동안 많이 발전한 덕택이었다.

대신 식품 재료에 대한 엄격한 관리와 조리법을 지키는 등 까다로운 조건을 전제로 판매허가를 내주었다. 요리사들은 일정 시간 교육을 받고 시험을 통과해야 이런 식품들에 대한 조리 면허를 받을 수 있었다.

“이제 식품 안전에 자신이 생기셨나 봐요? 백성들에게 조금이라도 위험한 음식은 못 팔게 하셨잖아요.”

“솔직히 잘 모르겠어. ‘설마 무슨 일 있겠어?’하는 식으로 식품 안전에 개념이 없는 사람들 때문에 앞으로도 매년 사고가 날 거야.”

“그런데 왜 판금조치를 풀어주셨어요?”

“먹을 놈들은 지금까지 계속 숨어서 먹었으니까. 차라리 양지로 나오게 하는 편이 좀 더 안전하겠어.”

판매금지 기간 동안 죽어라 말 안 듣고 그런 음식을 숨어서 먹던 인간들 중에서 상당수가 먹다가 죽거나 병원에 실려가 크게 고생했다. 더 이상 내버려두고 볼 수가 없어 일정한 제한 조건 아래 판매금지를 풀게 됐다.

“그래도 왕실에서 그런 음식은 금지에요. 왕실 가족에 대한 자그마한 위험이라도 용납할 수 없어요.”

“왕실 음식에 대한 규제는 혜영이 알아서 해.”

일단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으나 왕실에서 지원자를 모아 육회와 생선회, 초밥 시식회를 열었다. 백성들이 먹는 음식은 뭐든지 한번쯤 먹어봐야 한다는 것이 혜영의 철학이었다. 식재료에 대한 철저한 검사를 한 다음 최고 요리사가 조리하는 가운데 의료진을 연회장에 대기시킨 다음 시식회를 열었다.

“보기에는 끔찍한데 입안에 들어가자마자 고기가 사르르 녹아요.”

“이게 고기 맛이 아니라 참기름 맛 아닌가요?”

“회자(膾炙)된다는 말에서 회가 원래 생선이 아니라 육고기 이야기가 맞아요.”

육회에 도전한 왕실 식구들은 얼마 없었으나 그런대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민호는 살모넬라균이나 기생충 등 온갖 안 좋은 이야기가 떠올랐으나 눈을 질끈 감고 입에 넣었다. 생각보다 맛이 좋았으나 많이 먹을 만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생선회 종류가 다양해도 먹어보면 그게 그거 같아요. 비록 잡어라도 어부들이 잡자마자 회를 뜬 것은 정말 맛있다고 들었어요.”

“조리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이런 것을 먹는 것 아닌가요?”

“멀리서 잡아온 어부들에게 미안하지만 그 비싸다는 참치 뱃살 맛은 그저 그래요.”

왕자와 공주들의 시큰둥한 반응에 회를 고급 음식으로 생각했던 이민호는 어리둥절했다. 사실 이민호도 회 맛을 제대로 몰랐다. 고기와 다양한 음식을 먹던 한민족에게 생선회는 그다지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는 음식 같았다. 초밥도 비슷하게 서민 음식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오! 복어 찜은 참 담백해요.”

“복어 독이 그렇게 위험하다면서요? 맛은 아주 좋아요. 목숨 걸고 먹을 만하겠는데요?”

복어 요리 중에서도 껍질째 썬 회는 별로였고 찜이 가장 좋은 반응을 얻었다. 단순히 담백한 맛이라면 다른 물고기에서 충분히 맛볼 수 있었으나 복어 살만의 맛은 특별했다.

“내장이나 알집 같은 독이 많은 부위에 가까울수록 더 맛있다고 들었습니다. 독이 살짝 섞인 것은 더더욱 맛있다던데요. 제가 먼저 도전해보겠습니다!”

“개똥이 이놈아! 누구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려고?”

심지어 음식을 먹을 때에도 용감한 개똥이는 혜영이에게 귀를 잡혀 끌려갔다. 왕립 사관학교 1학년 생도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우라 부의 패륵 부잔타이가 백성들을 이끌고 동해국에 망명했다. 건주 여진에게 백성과 영토를 야금야금 빼앗기다가 어느덧 중심지까지 공략 당하자 결국 탈출하고 만 것이다. 부잔타이는 오랜 적이었던 건주 여진에 항복하거나, 이런 상황에 몰릴 때까지 도와주지 않은 예허 부에 귀순하느니 차라리 고산국의 그늘 아래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오래 버텼지만 어느덧 홀로 고립된 탓에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패장을 이렇게 성대하게 맞아주시니 더욱 부끄럽습니다.”

“쯧쯧! 정말 안 됐네. 앞으로 기회가 있을 테니 너무 낙심하지 말게나.”

싸움에 지친 백성들을 동해국 아사달에서 쉬게 하고 부잔타이만 단신으로 곰나루에서 배를 타고 고산국 왕도로 찾아왔다. 이민호는 외국 국왕을 영접하는 예로 부잔타이를 맞이한 다음 접견실에서 대화를 나눴다.

“패륵이 그 동안 독립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으로 알고 있네. 건주 여진을 상대로 지나치게 중과부적이었으니 우라 부가 멸망한 것은 어쩔 수 없지.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

“국왕전하께서 이 몸이 밉지 않으시다면 고산국의 속국이 되어 작은 마을의 추장으로서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혹시 저희 우라 부에게 땅을 내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우라 부가 멸망할 것에 대비해 이미 흑룡강 중류 지역에 충분한 면적의 농경지와 목초지를 개간해두었다. 우라 부가 그 동안 동해 여진과 교역을 하면서 잘 지내왔으니 동해국에 녹아드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이민호 입장에서는 이번 일로 인해 공짜로 기병을 1만 가까이 얻게 됐다.

“물론 저번에 패륵과 약속한 대로 땅을 내줘야지. 그런데 패륵은 혹시 건주 여진에 원한을 갖지는 않았어?”

“감사합니다. 패장이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다만 국왕전하께서 건주 여진을 토벌하실 날을 기다렸다가 그 날이 오면 그 동안 기른 군사를 이끌고 참전하고 싶습니다.”

해서 여진 4부 중에서 하다 부와 후이파 부는 아주 잠깐 사이에 건주 여진이 집어삼켰다. 그러나 우라 부는 건주 여진과 계속 싸움을 해왔기에 결정적인 전투에서 패한 직후 백성들과 함께 간신히 몸만 빼서 탈출할 수 있었다. 비록 패했지만 군사적 역량은 부잔타이도 떨어지지 않는 편이었다.

이제 해서 여진에는 예허 부만 남아서 건주 여진에 저항하고 있었다. 예허 부가 믿는 세력은 오직 혈통이 가까운 몽골 부족들뿐이었으나, 누르하치는 예허 부를 견제하기 위해 더 많은 몽골 부족들과 혼인동맹을 맺었다.

예허 부도 얼마 못 가서 건주 여진에 흡수될 것이 명약관화했다. 실제 역사에서 예허 부는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주력 병력을 잃고 그 직후에 멸망한다.

“패륵 자네가 미인에게 홀렸다는 악평이 떠돌던데 말이야. 아내로 맞은 누르하치의 딸에게 촉 없는 화살을 쐈다며?”

“동가 공주 말씀입니까? 그저 젊었을 때 한때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고산국에서 발행하는 잡지를 보면서 새로 눈을 뜨게 됐습니다.”

“그래? 좋은 일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군.”

이민호가 소유한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것 중에 하나가 도색잡지는 아니고 노출이 약간 심한 여성 사진 위주의 성인용 잡지였다. 출판사 편집방침에 비밀 사주인 이민호의 개인 취향이 반영됐다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이 어찌어찌 우라 부까지 흘러 들어간 모양이었다.

“잡지를 보면서 상상할 때는 고산국에 선녀 같은 미인이 흔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왕도에 와보니 전혀 아니었습니다!”

“화 내지 말게. 사진이란 것은 수백 장 중에서 한 장을 건지는 수준이라네. 그리고 사진에 살짝 손을 댈 수도 있지.”

사기 당한 부잔타이를 영빈관으로 초대해 일단 푹 쉬게 했다. 부잔타이는 누르하치의 사위인데도 건주 여진을 상대로 치열하게 저항했다. 여자 하나 때문에 예허 부에게 조종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사실 정치적 문제가 결정적이었다. 사나이는 남의 밑에 있지 않는 법이라는 말이 북방 유목민들 사이에서 여전히 통용됐다.

============================ 작품 후기 ============================

전란의 시대는 동서양 양쪽에 한꺼번에 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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