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821화 (770/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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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1613년

마지막으로 북 소말리아에서 귀국한 부대는 해병 1연대와 원정군 지휘부였다. 사실 며칠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었으나 이민호가 일부러 연말연시에 맞춰서 귀환시켰다. 30일에 도착한 해병 1연대는 이틀 동안 때 빼고 광내는 작업을 전투처럼 격렬하게 진행했다.

1월 1일, 아리수 항에서 대대적인 환영식을 가진 다음 왕도에서 해병 1연대가 시가행진을 펼쳤다. 무사 귀환한 장병들을 위해 왕도의 시민들이 몰려나와서 열렬하게 환영했고, 대로 주변 건물 옥상에 오른 처녀들이 꽃비를 뿌렸다.

“이렇게 따뜻하게 맞아주시다니, 이번에 우리가 패하긴 패한 모양입니다. 그것도 크게 패한 것 같아 민망합니다.”

“무슨 소리? 해적 박멸이라는 작전 목적을 완수했으니 승리지. 행여나 장병들 사기 떨어질 말은 하지 마.”

소말리아 상륙작전 이후 해병대가 육군에 배속돼서 임시지만 감동이 최고 지휘관이었다. 이번에 승진한 해병대 사령관과 해병 1연대장 등에 이어 마지막으로 감동이 훈장을 받았다.

고산국에서 귀족 작위는 형식에 불과하더라도 감동을 공작으로 올려줬다. 후작에 머무른 감불이 투덜대겠지만 그가 공을 세울 기회는 앞으로 얼마든지 있었다.

“정말 힘겨운 전쟁이었습니다. 이런 것도 전쟁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말입니다. 마을 안에 적이 보이지 않는데 실제로는 사방에서 우리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급선을 지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분산된 병력이 걸핏하면 고립됐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겪어본 중에서 가장 어려운 전쟁이었어. 내가 그렇게 예상했을 때는 안 믿었지?”

“그래서 쌤통인가요? 하하!”

“국가 조직이 무너진 나라는 다 마찬가지일 거야. 피아를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 군은 전투를 수행해야 해. 이번에 감동이 네가 적절히 대처했다.”

“시가지 전투 훈련을 좀 더 제대로 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이번에 해병대가 아주 잘 해줬습니다.”

“피해도 가장 컸지.”

그래서 해병대에 가장 큰 포상을 내려줬다. 해병 1연대와 보급 등 각종 전투근무지원부대에 근무하는 해병 대부분이 특진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리고 부대 표창도 시행해서 기병 1연대에 이어 근위 칭호를 부여했다. 그래서 해병 1연대는 해병 근위 1연대로 공식 칭호가 바뀌었다.

사상자 분석에 따르면 방탄복과 방탄모 등 보호 장비 덕택에 즉사나 치명상을 입을 상황에서 한 단계 아래 부상으로 경감됐고, 그래서 목숨을 살린 경우가 많았다. 전사자 121명 중에서 원인별로 분류하면 총상은 30여 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칼이나 독, 그리고 몽둥이 같은 타격 무기에 당했다. 특이하게 한 명은 소말리 족 여자가 물고 할퀴었는데 창피하다고 치료를 안 받았다가 파상풍으로 죽었다.

“앞으로 이런 유형의 전쟁에 참가할 때는 병력을 투입하기 전에 한참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일본에서 그랬던 것처럼 민간인들을 몰아내서 적지를 피난민으로 덮어버리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군사 작전이라도 국가의 명운이 걸린 전쟁이 아니면 그런 짓은 쉽게 하지 못해.”

“아군 장병의 목숨을 잃더라도 감내해야 하다는 뜻인가요? 휴우~ 알겠습니다.”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우리의 적은 해적이었지 소말리아 민간인들은 아니었잖아. 앞으로 전쟁에 참전할 때 명분을 잘 생각해두도록 해.”

“예. 시가전에서 극도로 강하게 훈련시키거나, 아니면 참전을 보류하는 게 낫습니다.”

시가전 교리와 교전 경험이 충분히 쌓인 현대 미군이나 러시아 군도 큰 인명피해를 입는 전투가 시가전 상황이었다. 인명피해가 예상보다 훨씬 컸다고 감동이 혀를 내두르는 것이 신기할 것은 없었다.

이차대전 때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악명을 떨친 것은 오랜 전투로 숙련되고 잘 조직된 독일군과 잡다한 신병 부대를 다급히 구겨 넣은 소련군이 두 배밖에 안 되는 인명피해 차이를 냈다는 점이었다. 결국 이 전투는 이차대전의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체첸 전투에서 러시아군 1개 기갑여단이 그로즈니 시가지에서 몰살당한 것은 비슷한 사례 축에도 못 낀다.

고산국 영토 전체에 흩어져 있어서 그렇지 그 동안 병력이 꽤 증강됐다. 독립적인 작전이 가능한 사단이 12개로 늘고 지역 방어를 전담하거나 예비군을 소집해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부대도 꾸준히 늘려나갔다. 다만 영토가 너무 넓어서 냉전 시기 소련군처럼 모든 부대가 기동 방어를 수행해야 한다는 문제는 계속됐다.

“거인족 왕의 무덤이 발견됐다고?”

정보국 미카로부터 보고를 받은 이민호는 그저 피식 웃었다. 그러나 미카는 신빙성이 높은 정보라며 상당히 심각한 얼굴로 보고했다.

1월 11일, 연초부터 전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기원전 105년에 로마를 침공했던 튜턴 족의 전설적인 왕 튜토보드, 혹은 튜토보쿠스의 거대한 유해가 프랑스 남동부 도피네의 오래된 성 근처 옛 무덤에서 발굴됐다는 것이다.

“주 프랑스 대사관의 보고에 따르면 땅속 6미터 깊이의 벽돌무덤에서 발굴됐어요. 학자들이 실측한 것이 프랑스 왕실에 보고됐는데 키가 30피트, 폭이 12피트, 누운 높이가 8피트래요. 그리고 결정적인 증거로서 벽돌에 로마 문자로 튜토보쿠스 렉스라고 새겨진 명문도 있어요.”

“명문이 있다면 그 무덤의 주인일 가능성이 높지. 그래서 미카도 그걸 사람의 유해라고 생각하는 거야?”

“당연히 사람의 유해니까 무덤에 안치된 것 아닌가요?”

“아주 오래전에 살던 동물의 화석을 발견한 사람들이 그것을 옛날에 키가 크다고 상상했던 왕의 유해로 오인한 나머지 무덤을 만들어줬을 가능성은 없을까?”

“유해가 처음부터 무덤에 안장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뜻인가요?”

“로마에 포로로 잡힌 튜턴 족의 왕이 처형당한 직후에 남프랑스의 무덤에 묻혔을 가능성이 별로 없잖아.”

혼란에 빠진 미카가 꽤나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프랑스에 주재하는 정보국 책임자인 대사관 무관이나 프랑스 왕실에서는 튜토보쿠스 왕의 유해라고 단정 지었다. 다른 나라 학자들도 옛 기록을 대조한 다음 틀림없다고 확인했다.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선사시대에 살았던 동물들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고 성경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그래서 땅에서 발견된 거대한 동물의 화석을 종종 신화시대의 거인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흔했다.

이 시대에도 장 르아랑 2세 같은 해부학자는 그 유해가 거인이 아니라 한니발이 동원했던 코끼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실과 거리가 멀더라도 신비롭고 흥미를 끌 만한 결론에 심정적으로 기울어지기 마련이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이후 300여 년 동안 튜턴 족 거인 왕의 유해로 알려졌다가 20세기에 들어서서 마스토돈으로 추정됐다. 그리고 1980년대가 지난 다음 고생물학자들에 의해 데이노테리움의 화석으로 최종 확인됐다.

“고생물학 분야가 아직 안 생겼단 말이야.”

“전에 말씀하셨던 화석을 연구한다는 학문인가요?”

“그래. 중국에서는 공룡 화석을 갈아서 약으로 타먹는 경우가 있지. 더 이상 늦기 전에 고생물학과를 창설하고 전문가들을 양성해야겠다.”

그러나 고산국에서 토지와 땅속의 지하자원은 모두 국왕 개인의 소유이기에 고생물학이 발전할 여지가 적었다. 이민호가 생물학자와 지리학자들을 설득해서 겨우 몇 명에게 고생물학을 담당시켰다. 그리고 고산국 영토라면 어느 곳이든 땅속을 파서 연구할 수 있는 특허장을 발부했다.

왕립대학에 고생물학과를 창설했으나 교수들부터 뭐가 뭔지를 몰라 걸핏하면 이민호에게 문의하러 왔다. 이민호라고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었으니 다른 학문들처럼 시간이 해결해줄 일이었다.

2월에 독일인 천문학자 시몬 마리우스, 독일 이름 지몬 마이르가 왕도를 방문했다. 1573년생으로서 아직 젊은 학자인 그는 왕도에 도착한 직후 다짜고짜 갈릴레오의 천문대로 쳐들어갔다.

마리우스는 갈릴레오와 함께 목성의 위성을 누가 먼저 발견했는지를 두고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그러나 모든 관측 자료가 날짜별로 정리된 갈릴레오가 결국 승리했다. 겨우 며칠 차이로 갈릴레오가 먼저 관측에 성공했다고 한다. 관측 결과를 세밀히 기록한 대학원생들과 학부생들의 공이 컸다.

“마리우스 씨의 눈가가 왜 퍼런가? 갈릴레오 백작은 왜 입술이 터졌어?”

“학자들 사이에 흔히 벌어지는 격렬한 토의의 증거입니다, 전하.”

“그렇습니다, 하하! 격렬한 토의 중에 말이 생각을 못 따라가면 손발이 먼저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마리우스와 갈릴레오를 왕궁으로 초청해 대화를 나눴다. 물론 이 올빼미 같은 인간들과는 해가 진 다음에야 회합이 가능했다.

“전하! 마리우스 씨는 안드로메다 ‘성운’을 발견한 사람으로 유럽 천문학계에서 유명합니다.”

“성운이라고? 이름은 다르지만 혹시 갈릴레오 백작이 몇 년 전에 발견한 천체 아닌가?”

“성운인지 전하께서 귀띔하신 은하인지 좀 더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 발표를 미뤄둔 사이에 이 사람이 대뜸 먼저 발표를 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사실 아랍 천문학자가 먼저 관측했었지요.”

갈릴레오가 ‘항성들의 책’이라는 이름의 책을 마리우스에게 내밀었다. 아랍어를 라틴어로 번역한 책을 펼쳐본 마리우스의 안색이 허옇게 변했다.

그런데 안드로메다를 먼저 발견한 천문학자는 아랍인이 아닌 페르시아 천문학자였고, 이름은 아브드 알 라흐만 알 수피였다. 유럽에는 아조피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달의 크레이터나 소행성에 그 사람 이름이 붙었다.

“964년에 이미 발견했다고요?”

“맨눈으로 보이는 천체인데 새삼스럽게 뭘 그러나? 요즘 천문학자들은 이미 옛날에 발견된 천체를 천체망원경을 사용해서 자세히 관측하는 게 일이지.”

“그렇긴 합니다, 갈릴레오. 그래도 아직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천체가 많습니다. 요즘 천문학자들이 새로운 천체를 발견하느라 혈안이 돼서 낮에도 제대로 잠을 못 잘 정도입니다. 저도 배를 타고 고산국 왕도에 오는 동안 작은 망원경으로 관측을 계속했습니다.”

마리우스가 1610년에 발표한 논문을 갈릴레오가 이민호에게 소개한 적이 있었다. 마리우스는 천체에 관해 이 시대 기준으로 매우 특이한 관점을 갖고 있었다. 목성의 위성들의 궤도를 관측한 그는 모든 천체가 디스크 형상의 궤도를 갖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안드로메다 은하, 이 시대에 성운으로 인식된 천체도 납작한 원반형임을 확인했다.

“나도 마리우스 자네가 낸 논문을 읽어보았네. 아주 훌륭했어. 갈릴레오 백작이 추천해주더군.”

“영광입니다, 전하.”

마리우스가 감동에 젖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민호가 칭찬해준 것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기 때문이었다.

고산국의 정복왕은 천문학을 재정적으로 후원하며 심심풀이로 천문대에 가서 별 사진을 찍는 취미를 가진 사람으로 유럽에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발견을 한 천문학자에게 국적을 가리지 않고 상금을 전달하는 것으로 더 유명했다. 고산국 국왕으로부터 상금을 받게 된 마리우스는 오랜 무명시대를 끝내고 드디어 천문학계의 중심에 도달한 셈이었다.

“태양계의 행성들이 같은 면에서 움직인다는 자네 주장이 맞아. 혜성이나 소행성 일부를 제외하면 같은 황도면에서 타원 궤도를 돈다네. 태양이나 지구의 모양은 입체적이지만 운동만큼은 2차원적인 면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사실이야. 그리고 그것은 더 넓은 우주에도 적용될 걸세.”

“그렇습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우주관이 틀렸습니다. 그런데 제가 발견한 사실을 동료 천문학자들이 잘 인정해주지 않더군요.”

마리우스는 천문학계에서 이중적인 역할을 했다. 천체가 원반형 궤도로 움직인다고 주장한 이후 태양계나 은하계 자체도 원반형의 형체를 띤다는 사실이 나중에 알려지게 됐다.

그러나 마리우스는 티코 브라헤처럼 기본적으로 지동설이 아니라 수정된 천동설을 믿는 사람이었다. 즉 태양계의 행성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돌지만 태양은 지구를 중심으로 도는 우주관을 믿었다. 이민호는 그런 사소한 개인적인 신념은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언젠가는 진실이 알려질 걸세. 그런데 자네 고산국에 와서 일하지 않겠나? 고향을 떠나서 먼 곳에 정착하기가 쉽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여기서는 자네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다네.”

============================ 작품 후기 ============================

이어질 내용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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