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14 90. 1611년의 문화외교 =========================================================================
“첫째 왕자님이 어느덧 17세가 넘으셨어요. 고산국 기준으로 작년에 이미 성인이 되셨다는 뜻이에요.”
“혼사 문제 말이오? 내가 보기엔 아직 멀었고, 그 문제는 개똥이가 알아서 잘하고 있소.”
아직 고등학교 재학 중이라 개똥이는 왕립 사관학교 산악부의 객원 부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현대로 따지면 대학 동아리의 정식 부원이 아닌 주니어 부원에 해당했다. 그런데 함께 산행을 하는 어느 씩씩한 여자 사관생도 산악부원에게 반해 졸졸 따라다니는 모양이었다.
남자가 10대 후반에는 또래 여자애들보다 성숙한 연상의 20대 초중반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경우가 흔했다. 물론 남자들이란 20대 후반이 돼서도, 나이가 더 들어서도 20대 초중반에게 가장 큰 매력을 느낀다. 이민호는 그것을 임신과 관련된 남자들의 본능으로 알고 있었다.
“내가 자식들에게 왕족으로서 특권을 주지 않았으므로 왕실의 일원으로서 책임도 지우지 않을 생각이오. 외국 왕실과의 정략결혼에 공주나 왕자를 이용하지 않겠다는 뜻이오. 그래서 성인이 된 다음 적당한 상대들과 만나보고 그 중에서 가장 좋은 사람과 결혼하라고 권했소.”
“그러면 안 돼요. 잘못하면 연애 문제로 인해 특히 공주님들이 아픔을 많이 겪을 수 있어요.”
“물론 남자들은 기본적으로 다 늑대고 상대가 공주라면 놈팡이 놈들의 공략 대상으로 떠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소. 나도 아비로서 아들보다 딸자식들이 더 걱정이오만, 그 어미들이 단단히 단속하는 것 같소.”
이민호가 슬쩍 고개를 돌리자 눈이 마주친 표도르가 화들짝 놀라 제자리에 바로 앉았다. 똑똑하고 예쁜 마르그레타를 시집보내기에는 매우 아깝지만 표도르 정도면 사실 놈팡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아직 어려도 루스 차르국에서는 버젓한 차르, 여러 민족의 군주인 황제급에다가 지식과 통치능력은 그럭저럭 쓸 만했고 인간성도 제법 돼 먹었다. 이민호가 보기에는 느끼하게 생긴 기생오라비지만 차르를 먼발치에서 본 고산국 후궁들이 이구동성으로 귀티가 나고 잘 생겼다고 칭찬하기 바빴다.
“비올레타님은 차르가 사윗감으로 딱히 마음에 드신 것은 아닌가 봐요.”
“당장 나하고 비교될 테니 세상 어느 놈이 비올레타의 눈에 차겠소? 하하하!”
큰소리치는 이민호를 보면서 헤드비히가 피식 웃었지만 사실과 전혀 동떨어진 자기과시만은 아니었다. 군주는 정치적 업적으로 자신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표도르는 아직 어리고 국내 상황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다.
차르의 유일한 업적이라곤 고산국 국왕과의 개인적 친분을 바탕으로 국내외적 안정을 기한 것뿐이었다. 최근 루스 차르국은 대기근이나 폴란드의 침공 가능성 등을 모두 고산국에 기대어 해결할 수 있었다. 차르에 대한 국내외적 평가가 좋을 리 없다는 사실을 아는 표도르가 잔뜩 울상을 지었다.
“저도 잘할 수 있습니다!”
“그래. 잘 해야지. 수백만 백성들을 먹여 살리려면 차르의 어깨가 무거워.”
시베리아 전체를 먼저 손에 넣은 다음부터 고산국과 루스 차르국의 관계가 훨씬 우호적으로 돌아섰다. 만약 시베리아를 루스 차르국이 차지했다면 북방 영토의 경계선 문제로 크게 걱정했겠지만, 이제 루스 차르국은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그저 그런 동유럽 국가들의 하나에 불과했다.
앞으로 루스 차르국에 적당히 잘해주면서 고산국의 영향력 아래에 묶어두는 편이 나았다. 최근에 극도로 약화된 루스 차르국 입장에서는 폴란드나 스웨덴의 침공, 그리고 코사크 외에 여러 타타르 민족들의 반란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고산국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더욱 마르그레타 양이 제게 필요합니다. 마르그레타 양이 루스인들을 편안하고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만들 갖가지 제안을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시끄러!”
어느 국혼이나 다 그렇듯 특히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부부는 애정 없는 결혼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그래서 애초에 후계자 생산을 할 기회가 적은데도 자식을 낳지 못하면 온갖 비난을 외국 출신 왕비 혼자서 뒤집어썼다. 본국에 국가기밀을 알린다는 간첩 혐의를 받기도 쉬웠고, 실제로 그런 일이 흔해서 괜한 트집만도 아니었다.
시집보내는 입장에서도 국가기밀 유출을 걱정해야 했다. 조선에서도 오래된 집안의 안주인들이 딸이 아니라 며느리에게만 장맛을 전수하는 것처럼, 보통 공주들은 자국의 기밀 정보에 접근하는 길을 완전히 통제받는다. 특히 고산국에서는 기술 유출과 통치 방식 유출을 신경 써야 했다.
사실 기술 유출은 크게 걱정할 것은 없었다. 고산국 기술자들은 다른 나라에서 일반 공인이나 장인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술자가 망명한 나라에서 그 기술자 당대만 보장해주리라는 것을 누구나 예측할 수 있었다
만에 하나 고산국의 중요 기술을 빼내서 망명하더라도 유럽의 기술 수준으로는 공장 설비를 제대로 갖추기 어렵고 원료나 연료 구하기도 힘들었다. 전기도 내연기관도 없어 기계장치의 동력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어쩜 저리 아름다운지요. 저도 배우고 싶어요.”
“새강릉 교육청에 신청하면 춤 선생을 새강릉 별궁에 파견해 줄 것이오.”
다시 폴로네즈를 마치고 막간에 현대 무용과 사교춤을 선보였다. 발레와 사뭇 다른 현대 무용에 귀족들 중에서 남자들이 아닌 여자들이 넋을 잃고 바라봤다.
사교춤(social dance)과 볼룸 댄스는 이 시대 유럽에서도 유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산국 무용수들이 다양하고 화려한 춤동작을 선보임으로써 사교춤에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던 귀족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북유럽 귀족들은 자기들이 직접 추는 폴로네즈보다는 막간에 공연되는 춤과 음악에 더 매료됐다. 가야금과 해금, 대금이 멋진 앙상블을 이룬 국악 공연도 선보였다. 특이한 음색의 악기와 곡조가 유럽 귀족들의 시선과 귀를 사로잡았고 한복을 입은 여성 연주자들이 미모를 마음껏 뽐내기도 했다.
이 정도면 대단히 성공적인 문화공연이라 볼 수 있었다. 짧은 시간에 이 정도 수준의 공연을 준비한 관현악단과 기타 관계자들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총감독 정상태가 전하의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그대가 새강릉 관현악단의 총감독으로서 오늘 공연한 음악과 춤을 연출했소?”
“그러하옵니다, 전하. 급히 유럽으로 오느라 준비한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배에서 단원들과 함께 연습하고 가수나 무용수들과도 음악을 맞춰보았습니다.”
그 외에 북미 원주민들은 자기들이 부를 노래의 가사를 직접 지었다. 그리고 악단 소속 작곡가와 지휘자가 단 며칠 만에 대부분의 곡을 편곡하는 등 다들 수고가 매우 많았다.
관현악단의 규모가 커지면서 악장, 총감독, 상임지휘자, 지휘자, 부지휘자 등등이 일을 나눠서 맡았다. 그 중에서도 총감독은 음악 공연의 연출자라고 할 수 있었다.
“기대보다 잘해줘서 몹시 기쁘오. 그래서 관현악단에 상을 내리고 싶소. 무엇이 좋겠소?”
“영광이옵니다, 전하. 새강릉 시립 관현악단을 시립 교향악단으로 확대할 수 있도록 윤허해주오소서!”
관현악단이나 교향악단이나 원래는 같은 말이었으나, 고산국에서 사용하는 용례가 조금 달랐다. 관현악단은 실내 연주를 주로 하고 오페라나 연극에서 반주를 해주는 소규모 악단을 지칭했다. 물론 실내악단이나 합주단보다는 대규모였다. 반면 교향악단은 정식 단원이 100명이 넘어가고 대극장이나 운동장 같은 넓은 곳에서 독자적으로 연주회 개최가 가능했다.
“그것은 인원과 예산이 문제가 아니오?”
“시립 관현악단이다 보니 시의회의 예산 통제를 받습니다. 그런데 시의원들 일부가 교향악단 창립은 예산 낭비라고 반대하고 있습니다.”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시 예산이 자기 돈이 아닌데도 아깝게 느껴지겠지요.”
꼰대들이 다 그렇다는 말은 생략했다. 이민호가 국왕으로서 정보국과 경찰을 동원해 비리에 관련된 추밀원과 시의회 의원들을 계속해서 추려냈지만 권력 지향적인 사람들의 기본적인 성향까지 바꿀 수는 없었다. 그리고 시의회가 이제는 제법 시 정부를 견제하거나 감시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서 숙정 작업이 느슨해지는 추세였다.
“새강릉 시립 관현악단을 시립 교향악단으로 확대하라는 어지를 새강릉 시청과 시의회에 내리겠소. 예산이 문제라면 내탕금 일부를 내주겠소. 그러나 이럴 경우 마땅히 교향악단 이름 앞에 시립이 아닌 왕립이 붙어야 할 것이오.”
“서, 성은이 망극하입니다, 전하! 왕립 새강릉 시 교향악단으로 정하면 될까 하옵니다.”
스페인 축구 클럽 이름에 레알이 붙는 것이 이민호의 뇌리에 떠올랐다. 시 소속 단체라 해서 왕립이 못 붙을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받고 싶은 상을 말해보라니까 개인적인 영달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대뜸 관현악단의 숙원사업부터 청원하는 총감독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그 전에 관현악단의 연주와 가수들의 노래, 무용까지 세심하게 주제와 음량을 계산해 잘 배치했다. 전속 작곡가를 따로 고용했는지 편곡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새원산이 상업과 공업 도시인 반면 새강릉은 농업 위주였고 교육이 그 다음이었다. 북미 동부에 위치한 두 도시의 주민들 사이에 은근히 라이벌 의식이 발동해 뭘 하든 다른 도시의 눈치를 살폈다. 이번에 시립 관현악단이 왕립 교향악단으로 개편되면서 새강릉이 조금 앞서가게 됐다.
“앗! 새해가 떴어요!”
“오! 정말이오. 우리가 밤을 샜구려.”
찬란한 태양이 떠오른다는 말이 있지만 이곳은 위도가 높은 북유럽이었다. 한낮에도 태양 고도가 낮아 새벽 일출은 그야말로 희미하다 못해 흐리멍텅했다.
그러나 이로써 1611년이 끝나고 1612년의 새아침이 밝아오고 있다는 선언이 됐다. 시종장이 무도회장 한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 쿵! 쿵! 쿵!
“여러분 주목하십시오. 고산국 국왕전하의 폐회 선언이 있으시겠습니다.”
무도회 개회사를 구스타브 스웨덴 국왕이 맡았기에 폐회사는 이번 무도회를 전폭 지원한 이민호에게 돌아왔다. 물품과 병력 지원이야 그렇다 치고, 지난 20년 동안의 교육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이제 고산국 음악인들은 유럽에 비해 수준이 절대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재미있게 즐기셨는지요?”
“예에!”
“밤을 지새웠는데도 목소리에 힘이 넘치는 것 같습니다.”
북유럽 국가 출신으로서 무도회에 참가한 귀족이나 대상인들은 스웨덴에 오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최고급의 다채로운 공연을 즐길 수 있었다. 무도회에서 듣고 본 것들이 앞으로 유럽 사교계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그리고 무도회 참가자들 개개인의 지위가 높아 정치 협상이 새해 둘째 주말까지 이어질 예정이었다. 이민호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를 비롯해 하루 두 개씩 북유럽 영주나 정치인들을 만날 약속을 잡아두었다.
상인들은 모처럼 마주친 기회에 활발하게 상담을 해서 이익을 챙겼다. 헤드비히를 알현하려는 상인들로 인해 덴마크 동인도회사 상선이 정박한 부둣가가 문전성시를 이뤘다.
“음악과 춤은 인류가 사라질 때까지 인간들과 함께 할 것이오. 왕족과 귀족들은 더욱 훌륭한 음악을 즐기기 위해서라도 음악가들에 대한 지원을 강화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소. 자! 이것으로 스웨덴 왕실의 연말 무도회를 마치겠소. 즉위 직후의 뒤숭숭한 분위기에서도 이런 훌륭한 무도회를 마련해주신 스웨덴 국왕폐하는 물론이고 오늘 공연에 참가한 음악가와 무용수들에게 박수를 쳐줍시다.”
“와아!”
무도회 참가자들이 정말 열화와 같은 박수를 쳐주었다. 고산국왕과 음악가들을 초빙한 것으로 잘못 알려진 구스타브 국왕이 온갖 찬사를 다 받았고, 외교적으로도 고산국과 함께 승자로 기록됐다. 새강릉 관현악단 단원들과 무용수들, 가수들이 차례로 나와 인사할 때마다 박수소리가 높아졌다.
고산국은 이번 기회에 신생국답지 않은 문화적 역량을 대외에 과시했다. 더욱 많은 유럽의 예비 음악가들이 새원산이나 새동래의 음대나 음악학원에 입학하게 될 것을 기대하게 됐다.
새강릉 관현악단은 조선 혈통과 아일랜드 이주민, 그리고 북미 원주민들이 뒤섞인 악단이었다. 이번에 공연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비록 북미 동해안 일부에 국한된 이야기겠지만 인종 화합에도 크게 기여했다.
현대 미국이 인종의 용광로라고 하지만 백인과 히스패닉, 흑인 등으로 서열이 매겨진 불완전한 화합이었다. 그러나 고산국에서는 조선 출신이나 그 혈통이 약간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겠으나 권리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고국에서 받았던 인종차별의 설움을 고산국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북미 원주민들은 정복당한 피지배자가 아니라 북미의 원래 주인으로서 더욱 적극적으로 이주민들을 포용했다.
============================ 작품 후기 ============================
간신히 올리고 자러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