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813화 (762/1,000)

00813  90. 1611년의 문화외교  =========================================================================

아무리 폴로네즈가 격렬한 동작이 없다 해도 춤은 춤이었고, 특히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는 군무는 가만히 있어도 체력 소모가 컸다. 쌍쌍이 걸음을 맞춰 넓은 무도회장을 몇 바퀴 돌고 나니 이것도 꽤 운동이 됐는지 헉헉거리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중년 귀족들, 특히 여성들이 버거워하고 굽 높은 구두를 신은 귀족 남성들이 고통스런 표정을 짓기에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막간을 이용해 새강릉 시립 관현악단과 새강릉 가톨릭교회 성가대 소속의 소년합창단이 합동 공연을 열었다. 소년합창단은 새강릉의 인구 구성이 그렇듯 조선계 혈통과 북미 원주민, 그리고 아일랜드 아이들로 구성됐다. 소프라노 위주의 소년합창단이 부르는 ‘살바 메(Salva Me)’는 처음 듣는 북유럽 귀족들을 전율케 했다.

“천사 같은 목소리예요. 그렇죠?”

“변성기 이전의 애들 목소리를 상업적으로 착취하는, 앗! 아니오.”

아무리 매사에 비판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해도 남의 감동과 흥취를 깨뜨릴 권리는 없는 법이었다. 괜히 눈치 없는 소리를 했던 이민호가 헤드비히에게 허벅지를 꼬집혔다.

“도대체 어떤 훌륭한 작곡가가 저런 아름다운 노래를 작곡했는지 모르겠어요. 신앙심이 투철한 사람이겠죠?”

“물론 그럴 것이오.”

리베라 소년합창단이 부른 것을 기억한 이민호는 가사도 모른 채 곡조만 악보에 적어 어용 작곡가에게 넘겼다. 창의력은 별로 없지만 편곡 능력이 좋은 작곡가가 알아서 화음을 넣고 합창곡으로 편곡했다.

새강릉 시립 관현악단이 반주만 넣어주는 것 같지만 단원들의 실력은 북미에서 가장 뛰어났다. 이들이 연주한 첫 곡은 야니가 작곡한 였는데 이민호가 기억을 되살려 간신히 악보에 절반 정도를 옮겨 적을 수 있었다.

관현악단의 연주회에서는 보컬마저도 악기로 분류됐다. 곡 도입부의 여성 이중창에 이어 트럼펫과 플루트, 하프, 바이올린 주자가 차례로 독주를 함으로써 개개인의 실력을 자랑할 수 있었다. 귀족들의 반응을 살피던 헤드비히가 웃음을 지었다.

“귀족들이 어리둥절한 것 좀 보세요.”

“만약 유럽 작곡가가 이런 경쾌한 곡을 발표했다면 욕을 많이 먹었을 것이오. 듣기 거북하더라도 고산국이 유럽과 다른 대륙이라는 것 때문에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소.”

말로는 음악을 비롯한 예술은 시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명작이 인정받기 마련이라지만, 사실은 그 사회의 사상적 흐름을 따라갔다. 17세기 초반 장중한 바로크 음악에 익숙한 유럽 귀족들이 아무런 중간 과정 없이 현대 음악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고산국이 부유하고 기술적, 문화적으로 발전한 나라라는 인상 때문에 이국적인 음악으로 평가되면서 유럽 귀족들의 심리적 벽을 넘어 수용될 수 있었다.

똑같은 음악을 조선에서 연주했을 때 양반이나 농민이나 이구동성으로 도깨비 같은 소리라며 인상을 쓰고 귀를 틀어막았다. 조선에서 보기에 고산국은 조선의 노비나 소작농, 유랑민 같은 하층민들이 가서 세운 나라라는 인상이 강했기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기 힘들었다. 반대로 구한말에 농악은 흥겨운 게 아니라 서양인들에게는 그저 시끄럽기만 한 악마의 소음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사실 현대에서도 문화적 장벽이 높았다. 인도 음식문화가 영국에서 대세가 되고 터키나 중국 음식이 미국과 유럽에서 인기를 끈 것은 20세기에서도 후반에 시작됐다. 손꼽히는 부자나라로 성공한 다음 스시를 세계에 퍼뜨린 일본보다 오히려 더 늦었다.

“다들 젊은 연주자들인데도 악기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야. 특히 저 바이올린 주자 말일세. 바이올린이 거의 자기 몸이나 다름없는 수준인데, 이제 겨우 20대 후반 아닌가?”

“이봐, 크리스티안! 저래 봬도 최소 20년씩은 한 가지 악기만 연주한 사람들이야.”

“조기 교육의 힘인가? 음악 교육을 받으려면 비용이 많이 드니까 아무리 고산국이 부유해도 극소수만 그런 혜택을 받겠지?”

“자네 생각과 정반대야. 공교육의 일환일세.”

“맙소사! 고산국에서는 교사들이 정말 힘들게 일하겠군.”

고산국에서 학교 교육이 지향하는 전인 교육에서 운동과 악기는 필수였다.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모든 학생들이 최소 한 가지씩 배우는 악기 연주 수준은 꽤 높았다. 그들 중에서 음악적으로 뛰어나고 특히 음악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음대에 진학하므로, 전반적인 수준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학생들은 가야금과 해금 등 몇 가지 전통 악기를 제외하면 죄다 서양 음악에서 사용하는 악기를 선택했다. 이런 학교 음악 교육을 실시한 지가 이미 20년이 넘어, 어렸을 때부터 서양 악기로 연주를 시작한 젊은 음악가들은 이제는 조선 전통악기보다는 서양 악기에 더 정통했다.

사실 유럽에서 오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수백 년 동안 차츰차츰 발전하거나 도태될 악기들을 미리 앞당겨 개량하고 표준화시켜버린 곳이 바로 고산국 음악계, 정확히는 이민호였다. 유럽이 유럽 음악 분야에서도 고산국에 끌려가는 형국이었다.

“그런데 자네 저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왜 안 만나나? 자넬 알현하지 못해 아주 애가 닳아 있던데.”

“바쁘다고 거절했어.”

“사실 무도회는 핑계고 정치의 연장이잖나? 목적에 맞게 외교 업무를 수행해야지.”

“아무리 프로이센이 독일과 폴란드에 이중 신속한다지만 그래도 독일 영토인 브란덴부르크가 우선일 거 아냐? 그런데도 이번 무도회에 아예 폴란드 국왕의 대리인으로 참가했다더군. 검은 독수리 문장을 박쥐로 바꾸는 게 나을 거야.”

“그렇게 말하니 호엔촐레른 가문의 문장이 정말 박쥐와 비슷하군.”

1608년에 사망한 부친 요아힘 프리드리히에 이어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 된 요한 지기스문트는 내년에 40살이 되는 한창 때였고 야심이 큰 인물이었다. 지난 11월에 폴란드 국왕 시기스문드 3세를 봉신 대 군주로서 정식 배알하고, 시기스문드로부터 프로이센 공작령의 섭정으로 공식 지명을 받았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은 프로이센 공작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가 1618년에 죽은 다음에 섭정이며 친족인 동시에 사위인 요한 지기스문트가 프로이센 공작을 승계한다. 이로 인해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과 프로이센 공작령이 일시적으로 동군연합이 됐다가 결국 프로이센 왕국으로 합병하고, 나중에는 폴란드로부터 독립한다. 나폴레옹 전쟁 때는 워털루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맡고 보불전쟁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승리하는 등 근대 독일의 모태가 된다.

이민호에게 프로이센 왕국이라 하면 군국주의 국가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만 떠올랐다. 프로이센 귀족 출신 군인들이 나치와 관계가 나쁘다지만 이차대전 때 일정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민호에게 프로이센은 20세기와 곧장 연결되는 코드였다.

프로이센 왕국의 본체는 프로이센 공작령이 아니라 베를린을 중심으로 한 브란덴부르크로서, 이민호에게 잉글랜드만큼 신경 쓰이는 곳이었다. 딱히 군사적으로 대응해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계속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내가 듣기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저 친구는 조만간 루터파에서 칼뱅파로 개종할 거야. 5년 전에 하이델베르크에 갔을 때 뭔가 일이 있었다는군.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작위를 승계하고 프로이센 공작령 섭정을 맡기 위해 아닌 척하고 있지만 곧 정체를 드러낼 거야.”

“이번에 프로이센에서 신교도와 구교도의 권리를 동등하게 인정해줬다더니 역시 이면에 그런 일이 있었군. 가톨릭 광신도인 시기스문드가 제지하지 않나?”

“폴란드에는 신교도 귀족들도 많으니까 최소한 종교만큼은 국왕 마음대로 되지 않아.”

휴식이 끝나고 다시 모든 참가자들이 무도회장에 내려가 폴로네즈 춤을 추었다. 춤과 대화를 교대하면서 분위기를 계속 환기시키는 방식이라서 대화 상대방을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막간에는 다시 여러 가지 공연이 진행됐다. 특히 북미 원주민들 중에서 포우하탄 원주민들로 구성된 악단이 출연해 주목을 끌었다. 영화 <라스트 오브 모히칸>의 주제곡과 엘 콘도르 파사를 원주민 전통악기에 맞춰 편곡하고 깃이 많이 달린 원주민 전사 복장을 한 중년 남자 가수 둘이 보컬을 넣었다. 이국적인 악단이 연주하고 특이한 발성법으로 원주민 가수가 부르는 노래라서 평소 음악인들을 후원하던 북유럽 귀족들이 호기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그리고 포우하탄 부족연맹은 고산국의 강력한 동맹이지 원주민으로서 일방적으로 지배당하는 노예 입장이 아님을 이 자리에서 음악으로 당당히 밝혔다. 음악은 가사를 못 알아듣더라도 청중들에게 감정과 뜻을 잘 전달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였다.

그 다음에 새강릉 시립 관현악단 단원 하나가 영화 미션의 삽입곡, 가브리엘의 오보에를 연주했다. 성악 넬라 판타지아 바로 그 곡인데, 엔니오 모리코네가 작곡한 기악곡에 이탈리아어 가사를 나중에 붙인 것이었다. 물론 지금은 이탈리아 이민자 필명을 사용하고 있는 이민호가 작곡자였다. 어렸을 때 기억에 남은 모든 노래를 악보에 담았다가 요즘 들어 마구 써먹고 있었다.

가브리엘의 오보에는 누가 들어도 명곡이었다. 무도회장에 모인 수백 명의 참가자들이 연주가 끝날 때까지 얼어붙어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오보에 주자가 인사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간 다음에야 이곳저곳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 이런 곡이 갑자기 튀어 나올 수가 있죠? 따분한 교회 음악이나 천박한 시장의 노래만 듣다가 오늘 비로소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기분이에요.”

“역시 비키가 핵심을 잘 짚었소. 인간애가 넘치는 세상과 자유로운 영혼이 저 곡의 주제요. 고산국의 교육 정책이기도 하오.”

“자칭 음악 애호가나 음악가들을 후원하던 귀족들이 아예 넋이 나갔어요. 이번이 아니면 언제 저런 수준 높은 음악을 들어봤겠어요?”

헤드비히가 화려한 부채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러나 헤드비히도 비올레타 대신 북미 여공작 일을 대리하느라 새강릉에 가서야 처음으로 시립 극장에서 고산국 음악을 제대로 들었다. 그리고 최고 성능의 축음기와 음반을 잔뜩 사서 어딜 가든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들었다.

“유럽 각지의 민속 음악은 계속 수집하고 있소?”

“물론이에요. 에스파냐와 베네치아를 제외한 유럽 모든 나라가 대상이며 외진 산골마을마다 샅샅이 뒤지고 있어요. 녹음과 악보 수록 두 가지로 동시에 기록하고 있어요.”

“잘하고 있소. 나중에 민요나 민속음악의 전통이 끊기면 고산국에서 찾아야 할 것이오. 그 나라 사람들이 고마워하겠지요?”

그러나 헤드비히가 대답을 아꼈다. 과연 고마워할지, 허락 없이 전통 음악을 훔쳐갔다고 욕을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멸실될 경우에 대비해서 기록할 수단이 있다면 누가 됐든 일단 기록하는 편이 좋았다. 중세 시대의 음악과 춤에 대한 자료는 겨우 이 시대에도 이미 거의 남지 않았다.

“안 도트리슈 공주가 프랑스 왕실로 시집가기로 확정된 것은 들으셨죠? 아직 어리지만 솔직히 아까워요. 어머니가 산후열로 돌아가신 다음 겨우 열 살짜리 애가 동생들을 어머니처럼 보살폈다지 않아요? 여섯 살 때 그린 초상화를 보니까 눈이 큼직하고 피부가 뽀얀 게 아주 귀여워 죽겠어요.”

“유럽 왕실에서는 너무 어린 나이에 결혼을 시키는 나쁜 관습이 있는 것 같소.”

1559년에 체결된 두 나라의 평화협정 이후 에스파냐와 프랑스는 서로 공주를 교환하는 식으로 결혼동맹을 맺어왔다. 교환이란 말 그대로 아예 두 나라에서 각각 공주를 국경지대로 데려가서 상대국의 공주와 맞교환하는 잔인한 방식이었다. 후대로 가면서 교환 방식이 조금 나아졌지만 이렇게 맺어진 부부들은 서로 정을 못 붙였다.

1601년생인 안 도트리슈는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3세의 딸로서 프랑스 루이 13세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정돼 이번에 약혼했다. 결혼식은 1615년에 열릴 예정이지만 결혼할 당사자들은 직접 참가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대리 결혼(marriage by proxy)이란 좋은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이나 아내 노릇을 다른 사람이 대리하는 것이 아니라 대리인을 보내서 결혼식만 치르는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외국 왕실과의 결혼에 대비해 안 도트리슈는 펠리페 3세의 딸로서 앞으로 태어날 자손들까지 에스파냐 왕실의 모든 상속권을 포기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지참금은 50만 크라운과 각종 보석들로 부왕 펠리페 3세가 어려운 나라 사정 가운데에서도 약간 무리를 한 셈이었다. 그리고 만약 루이 13세가 일찍 죽을 경우 공주가 지참금을 갖고 에스파냐로 돌아올 수 있도록 프랑스 왕실과 협정을 맺었다.

안 도트리슈가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의 왕비라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부부관계가 매우 나쁘고 안 도트리슈가 프랑스의 국가기밀을 열심히 본국 에스파냐에, 그것도 프랑스와 전쟁 중일 때 팔아넘기거나 이로 인해 부부 관계가 더욱 나빠진 것도 소소한 일이었다.

그러나 안 도트리슈는 루이 13세의 후계자 루이 14세의 어머니로서, 국왕이 다섯 살에 즉위하면서 프랑스의 섭정이 된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했다. 루이 13세가 죽어가면서 안 도트리슈가 섭정이 되는 것을 막으라고 유언을 남겼지만, 파리 고등법원의 판결에 의해 유언이 폐기되면서 섭정 자리에 올랐다.

“국혼이니까 미리 준비해야죠. 고산국에 수많은 왕자와 공주님들이 계세요. 그분들의 혼사도 전하께서 준비하셔야 해요.”

“다 자기들이 알아서 할 것이오. 어이! 뭘 보나?”

“아, 아닙니다.”

바로 옆에서 차르 표도르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엿듣고 있다가 화들짝 놀랐다. 이제 보니 표도르가 방금 통역도 없이 직접 조선말로 대답했고, 마르그레타와도 한글로 편지를 주고받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고산국이 강대국으로 우뚝 서면서 예전처럼 조선말로 편하게 말하기 어려워졌다.

“두 나라의 결혼을 파기시키고 우리 왕자님들 중 한 분과 맺어주는 게 어때요? 이번 국혼에 프랑스는 별로 적극적이지 않아요. 그리고 전하께서 손을 내밀면 재정적으로 어려운 에스파냐에서 쌍수를 들고 환영할 거여요.”

“괜히 끼어들어 두 나라와 관계가 소원해지면 곤란하오.”

“왜 그리 소극적이세요? 혹시 전하께서 직접 공주를 가지시려고요?”

“어린애를 두고 말이 심하시오.”

이민호가 완강히 부정해도 헤드비히의 눈이 반달로 변했다. 이민호의 나이나 정식 왕비가 없는 고산국 상황에서 안 도트리슈와의 결혼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에스파냐에서 사절단을 파견해 국혼에 대한 이민호의 의향을 은근히 떠본 적도 있었다. 물론 어린 후궁들을 키우는 일에 진저리가 났었던 이민호는 결코 그럴 마음이 없었다.

참고로 호엔촐레른 왕가의 친족 관계도를 보면 근친결혼과 세대를 넘나드는 결혼으로 인해 개 족보를 능가할 정도였다. 특히 부자지간에 자매를 배우자로 맞이하는데 아들이 먼저 맏언니와 결혼하고, 아버지는 자매 중 막내를 후처로 맞이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배우자 사이에 40년 정도 나이 차이가 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 작품 후기 ============================

문화외교편 아직 안 끝났습니다.

또 늦네요. ㅠ.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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