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11 90. 1611년의 문화외교 =========================================================================
밤에는 순양함에 돌아와서 쉬었다. 암살을 겁낸다고 이민호를 비웃던 크리스티안 4세는 국왕좌승함 주갑판 아래의 어두컴컴한 방 한 칸을 얻어 들어갔다. 크리스티안이 이민호에게 잘 보였다면 주갑판 상층의 넓은 방을 내줬을 것이다.
“요즘 고생이 많소.”
“아니에요. 오히려 재미있는 걸요? 그러니까 비올레타님은 안심하고 천천히 복귀하셔도 된다고 전해주세요.”
초저녁부터 침전을 차지한 헤드비히 여왕이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이민호가 헤드비히의 머리를 쓰다듬자 강아지처럼 눈을 감고 웃었다.
비올레타가 왕도에 돌아와 출산과 육아에 전념하는 동안 헤드비히 여왕이 대서양 무역 전반을 대리하고 있었다. 아이슬란드 통치 전반과 덴마크 서인도회사 경영도 여전히 맡고 있으니 바쁜 것은 틀림없었다.
“담배 종자는 또 어떻게 구한 거요?”
“작년 초에 트리니티 섬에 다른 담배 품종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배 수리를 가장해서 상선을 며칠 정박시켰어요. 그 뒤의 일은 말 안 해도 뻔하겠죠?”
카리브 해 남동쪽이며 베네수엘라 바로 북쪽의 섬이 스페인어로 트리니티 섬, 다른 말로 트리니다드 섬이었다. 현대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본섬이었다.
여기 원주민들이 북미 대륙과 다른 종류의 담배를 피운다는 소문을 듣고 헤드비히가 국영상단 소속 상선에 특별 임무를 주었다. 에스파냐는 동맹국인 고산국 상선의 입항을 거부하지 못했고, 선장이 에스파냐 관리들에게 뇌물이 보낸 다음 이야기가 바로 끝났다.
“바하마에서는 새로운 시가 품종을 얻었다면서요?”
“농업연구소 연구원들이 북미 각지에서 들어오는 식물을 연구하느라 너무 바빠서 얼굴이 누렇게 떴어요. 그래서 교대로 바람이라도 쐬고 오라고 탐사선에 딸려 보냈는데 우연히 발견했나 봐요.”
농업연구소 연구원들은 아이누 섬 분소든 북미 분소든 어딜 가든 일감에 치여 살았다. 새 품종을 입수하면 기존의 다른 품종과 교배시켜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내는 것도 농업연구소의 일이었다.
모처럼 휴가 겸해서 탐사선에 동승시켰더니 연구원들이 제 버릇 개 못 줬다. 이들이 새로운 식물을 찾아 숲을 뒤지다가 새 시가 담배 품종을 알아보고 대뜸 가져와서 연구했다. 대량 재배한 다음에는 에로틱한 이미지를 무기로 삼는 에스파냐의 쿠바산 시가를 품질과 향으로 압도해서 최근 판매량이 역전 추세에 들어섰다.
“여왕이 혹시 담배를 피우는 것 아니오?”
“그럴 리가요. 가끔 호기심이 들었어도 이름 때문에 손도 못 댔어요.”
고산국에서 생산하는 담배는 종이포장에 여러 언어로 각종 살벌한 경고문이 붙은 것은 물론 이름마저 위협적이었다. 니코틴 함량에 따라 폐암 말기나 후두암 2기, 식도암 같은 이름이 붙으면 소비자들이 담배를 사기 전에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한 개비라도 덜 피우게 된다.
물론 담배라는 중독성 독극물을 팔면서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이었다. 이민호가 미국 사법제도의 징벌적 배상을 염두에 두고 이런 조치를 미리 해둔 것이다.
그리고 고산국 담배 수입량이 많은 나라 순서대로 병원을 세워주는 것으로 마음의 부담을 덜었다. 새원산과 새강릉에 세운 의대에 입학하는 학생들 중 절반이 유럽 출신 유학생들이었다. 외과와 세균학을 중심으로 발전한 고산국과 마카오의 의학을 세계가 공유한다는 말이 이렇게 구호에 그치지 않았다.
“무도회 첫날에 입고 나갈 옷인데 어때요?”
“오! 그대가 입으니 아름답고 우아하고, 그런데 등이 너무 많이 파인 것 아니오?”
새 옷을 자랑하는 여자에게 습관처럼 찬사를 늘어놓던 이민호는 헤드비히가 한 바퀴 빙글 돌자 멈칫했다. 전반적으로 보면 일부러 의상의 조화를 파괴하면서 화려한 장식을 하는 바로크 양식의 특징이 녹아들긴 했다. 그러나 이 시대 유럽 의상의 사조인 무거움보다 가벼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열대에 가까운 고산국의 특징이었다.
“제가 다른 귀족 여성들과 비슷한 옷을 입을 수는 없지 않겠어요? 호호!”
“보석 장식은 적게 했구려.”
“여러 개보다는 하나라도 인상적인 게 더 나아요. 전하께서는 이렇게 큰 루비의 가격이 얼마나 되는지 신경을 별로 안 쓰시는 것 같아요.”
이마 위까지 내려온 얇은 왕관인 티아라 중앙에 큼지막한 루비가 박혀 있었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질 리가 없는 크기였으니 이민호가 인공적으로 만들어준 것이었다. 당연히 비싸게 느껴질 리가 없었다.
“전에 에메랄드빛으로 무도회 옷을 만들어보라고 하지 않았소?”
“물론이에요. 머리도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땋을 테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소피에와 카트리네는 전하를 모시고 있거라.”
“예, 여왕폐하!”
헤드비히가 시녀들과 함께 옷을 바꿔 입으러 간 사이에 이민호가 여기사들과 눈이 마주쳤다. 이민호가 씩 웃자 여기사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어렸을 때부터 헤드비히와 같이 자란 귀족 영애들은 결국 운명을 같이 하고 있었다. 원래 여기사들은 호위를 맡고 나나, 리네, 요한나 등은 문관 분야를 도왔다. 그러나 일이 많다 보니까 문관과 무관을 구별해서 일을 나눌 수가 없었다.
“여왕을 모시느라 항상 바쁘다는 말을 들었다. 수고가 많다.”
“저희들의 기쁨입니다, 전하.”
여기사들은 그저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진정으로 기뻐하는 것 같았다. 유럽의 귀족 여성들 중에, 아주 가끔 어린 국왕의 섭정을 맡는 일을 제외하고 여자가 이렇게 사회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헤드비히를 모시는 영애들은 중요한 일을 함께 한다는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기사 훈련은 계속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전하.”
“무술이 실제 경호 상황에서 도움은 별로 안 되더라도 건강과 자신감을 위해서라도 꾸준히 하도록 해라.”
“명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덴마크 여기사들을 벌써 몇 십 번씩 안았지만 대답하는 말투는 여전히 딱딱했다. 주인과 남편을 공유하면서 아무래도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는 불쌍한 여자들이었다.
여기사들의 큼지막한 엉덩이와 탄탄한 복근이 떠올라 침을 꿀꺽 삼킬 때 헤드비히가 침전으로 돌아왔다. 남들 앞에서는 근엄하고 이민호에게만 귀엽게 행동하던 헤드비히가 어떤 애니메이션 여주인공과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변신해서 돌아왔다.
에메랄드 드레스를 입고 풍성한 백금발을 한 쪽으로 땋으니 겨울 왕국의 여왕 그대로였다. 게다가 헤드비히는 얼음과 눈의 나라 아이슬란드의 여왕이었다.
“오! 진정 아름답소!”
“어머나! 제가 입은 옷에 전하께서 이토록 진심으로 감탄하시는 것은 처음 봐요.”
“그대는 언제나 아름답고 우아하오. 우리 함께 눈사람 만들러 갈까요?”
“좋아요! 지금 당장 나가요.”
“안타깝지만 이제 밤이 됐소. 그리고 그렇게 얇게 입고 나가도 되는 거요?”
“추위에는 익숙하거든요!”
그러나 이민호는 어렸을 때처럼 여전히 추위에 약했다. 눈사람은 아침에 만들기로 하고, 밤에는 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헤드비히는 얼마 안 되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침대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여기사와 문관들도 차례로 안아주었다.
왕궁 무도회를 하루 남기고 자그마한 시골 읍내 같은 스톡홀름 시가지는 외국인 손님들로 미어 터졌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외국과의 교역이 줄어들면서 외국에 전쟁하러 갈 때 외에는 외국인을 본 적이 거의 없는 스웨덴 자유민들이었다. 검소할 수밖에 없는 스웨덴 귀족들과 다른 외국 귀족들의 화려함에 몹시 놀랐다.
어린 국왕의 즉위를 불안해하거나 정권을 탈취할 기회로 여겼던 스웨덴 귀족들은 외국 귀족들의 연이은 방문으로 인해 며칠 사이에 완전히 바뀌었다. 유럽의 변방인 발트 해 연안에서도 더더욱 변방인 스웨덴이 일시적이나마 북유럽 외교가의 중심으로 변한 탓이었다.
외국 손님들을 맞이하고 접대하는 일에 동원된 스웨덴 귀족들은 바쁜 와중에도 몹시 기뻐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좋은 관계를 맺었는지 모르겠지만 고산국 국왕과 친밀한 것처럼 보이는 구스타브 2세 아돌프를 찬양하기 바빴다. 당분간 스웨덴 귀족들이 구스타브 2세 국왕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킬 염려는 없었다.
“작은 도시에 작은 왕궁이에요. 하지만 가난한 스웨덴 자유민들처럼 왕성도 검소한 것이 마음에 들어요.”
“맞소. 백성들은 가난한데 왕만 부유하면 그것만큼 꼴불견도 없을 것이오.”
외국에서만 사용하는 특별히 화려한 국왕 전용 황금마차를 타고 이민호와 헤드비히가 크로노르 성으로 향했다. 이 시기 스톡홀름은 인구가 1만 명 정도에 불과한 작은 도시였다. 왕궁이 위치한 교역도시일 뿐, 아직 스웨덴의 수도로 공식적으로 지정되지도 않았다.
스웨덴 왕궁인 크로노르 성도 도시 규모에 걸맞은 작고 낡은 성이었다. 그러나 며칠 사이에 성벽과 세 곳의 원형 방어탑에 온갖 화려한 치장을 해서 전혀 초라하지 않았고 밤에는 여러 가지 빛깔의 전등이 깜빡거려 더욱 화려했다. 외국 손님들에게 비웃음을 살까 노심초사했던 스웨덴 국왕과 귀족들이 한시름 놓았다.
- 빰빠바아아~
마차가 크로노르 성으로 들어서는 순간 성벽에 늘어선 나팔수들이 일제히 팡파레를 울렸다. 마찻길마다 정복을 입고 화려하게 치장된 모자를 쓴 근위병들이 늘어서서 왕궁에 화려함을 더했다. 이런 사소한 것까지 왕궁 무도회라는 이벤트의 성공을 위해 신경 써야 했다.
“폐하!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차르는 작년에 고산국 왕도에 와서 보지 않았나?”
“벌써 일 년이나 지나서 몹시 격조했습니다.”
다 한통속이긴 하지만 루스 차르국의 차르 표도르도 스웨덴을 방문해서 자리를 빛냈다. 외국 국왕과 여왕을 합해서 벌써 네 명이었다. 무도회가 날이 갈수록 무게감이 달라졌다.
신성 로마 제국 선제후 일곱 명 중에서 네 명이 참가했고, 불참한 곳에서는 젊거나 중년의 후계자를 보냈다. 그 외에 독일 영토 내에서 거의 독립적인 공작과 백작 가문에서도 다수가 참가했다. 덴마크 귀족들과 루스 차르국의 보야르들은 물론 네덜란드와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 심지어 적대국인 폴란드에서도 귀족 다수가 참가했다.
한자 동맹 도시들에서는 도시의 행정을 책임 진 주요 상인들 거의 전부가 참석했다. 발트 해 무역이 쇠퇴하면서 덩달아 쇠락하던 교역 도시들은 고산국 덕택에 대서양 무역에서 일익을 담당하면서 소생하게 되었다. 혹시나 교역에 중요한 정보라도 얻을까 해서 상인들이 부인이나 딸들과 함께 무도회에 몰려들었다.
“폐하! 마르그레타 공주는 잘 지내고 있죠? 헤헤!”
“이봐, 이봐! 연애문제는 당사자하고 알아서 해결해.”
작년에 차르가 고산국 왕도를 방문한 것에는 불순한 목적이 숨어 있었다. 예전에는 소문만 들었다가 마르그레타의 사진과 그림을 보고 홀딱 반한 표도르가 직접 왕도로 찾아온 것이다. 이민호는 어이가 없었으나 정성이 갸륵해서 특별히 마르그레타를 만나게 해줬다.
마르그레타는 표도르를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젊은 차르가 잘 생기긴 했지만 매우 지적으로 성장한 마르그레타는 이성의 외모에 흔들리지 않았다. 표도르가 황태자 시절 이 시대 기준으로 세계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지만 그것은 유럽 기준이라서 마르그레타가 콧방귀를 뀔 정도였다. 표도르가 자랑하는 무위는 웬만한 고산국 부사관에도 못 미쳤다. 도대체 잘 났다고 내세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다급해진 표도르가 승부수를 띄웠다. 고산국에 있는 것보다 모스크바에서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설득한 것이다. 이민호의 후궁들보다 더 중요하고 다양한 일을 맡기겠다는 꼬드김에 그렇지 않아도 국가 경영에 야심을 품고 있던 마르그레타가 꽤나 흔들린 것 같았다. 요즘은 둘이 편지를 교환하는 단계였다.
“그리고 내 칭호는 폐하가 아니라 전하일세. 명목상일 뿐이지만 아직 종주국이 있어.”
“명나라 말씀이라면 지금 엉망이던데 말씀입니다.”
“그러게 말일세.”
이민호가 보기에도 명나라는 답이 없었다. 환관 광세사들의 발호로 인해 상업이 완전히 마비됐는데도 황제는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사실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주상아 공주가 슬퍼할 것 같아 황제가 일찍 죽도록 비만을 유발하는 음식 선물로 공작을 할 수도 없었다.
“자! 곧 불꽃놀이가 시작될 거야. 테라스로 나가지.”
이민호가 왕궁의 주인인 구스타브와 크리스티안, 표도르, 헤드비히를 이끌고 테라스로 나갔다. 어둑어둑해진 수로에 정박한 순양함들이 축제용 전등을 밝혀 화려한 밤을 만들어냈다.
- 퍼벙! 펑!
“와! 대단합니다.”
무도회 전야제를 맞아 초저녁부터 화려한 불꽃놀이가 시작됐다. 유럽에서 볼 수 없는 화려한 불꽃놀이에 국왕들부터 감탄했다.
고산국에는 무연화약 말고도 흑색화약이 얼마든지 있어서 왕도뿐만 아니라 각 도시에서 자주 불꽃놀이를 열었다. 예전처럼 단순히 확 터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가 지연해서 터지고 화약에 몇 가지 금속을 섞어 갖가지 색깔도 넣었다. 자주 사용하다 보니 무연화약 포탄보다 불꽃놀이 탄이 훨씬 많이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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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회 후딱 쓰려고 했었는데 준비과정이 길군요. 다음이 무도회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