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809화 (758/1,000)

00809  90. 1611년의 문화외교  =========================================================================

알현실에서 나온 이민호를 헤드비히 여왕과 그 오빠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가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헤드비히가 이민호에게 뛰어들어 목을 잡고 매달렸다.

“제가 곤란하다니까 바로 와주셨군요. 고마워요, 내 사랑.”

“상황 변화가 심해서 놀랐을 텐데, 그 동안 잘 막아냈소.”

카를 9세 서거 직후의 시기를 좋은 기회라 판단한 덴마크가 해군을 동원해 스웨덴의 칼마르를 공격하려고 했다. 반대로 스웨덴은 해협 북쪽의 덴마크 영토를 점령하려고 군대를 움직였다.

헤드비히는 땅과 바다에서 진행되는 두 가지 군사적인 움직임을 차례로 무리 없이 막아냈다. 두 나라의 군대가 동시에 소집돼 흉흉한 분위기에서 헤드비히가 이민호의 위세를 등에 업고 덴마크와 스웨덴의 호전성을 억누를 수 있었다.

덴마크 왕실은 서인도회사에서 얻는 이익 때문에 이민호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스웨덴도 철광석과 철, 석탄 수출을 유럽보다는 고산국에 의존하고 있었기에 밥줄이 끊기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예전의 칼마르 동맹이 종주국인 덴마크가 일으킨 잦은 전쟁 탓에 스웨덴의 철 수출이 차질을 받은 문제로 인해 해체된 것을 감안하면, 스웨덴 경제가 얼마나 철에 의존하는지 알 수 있었다.

“험! 험! 사람들 보는 데서 과한 애정 표현은 삼가도록 해라.”

“흥! 오빠는 새언니한테나 신경 쓰세요. 이 기회에 함께 오지 그랬어요?”

어째서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 왕궁에 적대국인 덴마크 국왕이 와 있는지 이민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가 스웨덴 귀족들을 대거 학살한 스톡홀름 피바다 사건이 1520년에 일어났으니 아직 100년도 지나지 않았다. 만약 고산국 해병대가 스톡홀름을 장악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학살당한 스웨덴 귀족들의 후손을 자처하는 자들이 크리스티안 4세에게 줄줄이 결투를 신청했을지도 몰랐다.

고산국 함대가 복잡한 피오르드 해안을 따라 스톡홀름 항에 정박하자 스웨덴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고산국 입장에서도 예전에는 꿈도 못 꿀 해로였으나 그 동안 스웨덴과 교역하는 덴마크 서인도회사는 물론 한자 동맹 도시 상선들을 통해 스톡홀름에 진입하는 해로를 아주 상세히 파악해두었다. 복잡한 항로가 더 이상 스톡홀름의 안전을 책임져주지 못했다.

“여왕과 달리 왕비는 왕이 외정 중일 때 궁정에 남아있어야 하는 거야. 그런데 스웨덴 귀족들이 우리 친구를 무서워하나봐? 듣던 것과 달리 아주 쥐 죽은 듯이 고요해.”

“헤헷! 역시 우리 남편이에요.”

어린 국왕 구스타브를 만만히 보거나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시기스문드를 다시 스웨덴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귀족들이 바로 이틀 전까지도 암중에 회합을 해서 군사를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고산국 함대가 스톡홀름에 입항하고 해병대를 상륙시키자 놀란 스웨덴 귀족들이 모든 회합과 군사행동을 취소하고 말았다.

원수 국가인 덴마크 국왕이 오늘 스톡홀름에 거의 단신으로 입성했는데도 스웨덴 귀족들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괜히 고산국에 밉보였다가 단치히나 프로이센 꼴이 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구스타브가 먼 친척이라면서? 어려운 시기에 좀 도와주고 그래야 나중에 은혜를 갚을 거 아냐. 남의 불행을 기화로 칼마르를 해군으로 공격했다면 두고두고 안 좋은 소리 들었을 거야.”

“아주 좋은 기회였는데 비키가 말리기도 하고, 내가 신사라서 그만 뒀어. 장례식과 대관식 이후에 공격해도 되니까. 자네 설마 베네수엘라를 돌려달라고 하지는 않겠지?”

이민호가 크리스티안 4세에게 웬만하면 주변국과 전쟁을 하지 말고 베네수엘라 경영에나 신경 쓰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크리스티안은 대대로 원수였던 스웨덴을 엿 먹일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베네수엘라는 이미 덴마크에 할양했으니 조약에 규정된 대로 석유가 나는 곳을 제외하고는 이민호가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고산국에서 통제권을 갖고 있는 곳이 있었다.

“오호! 그래? 베네수엘라로 가는 이민선을 장기 수리를 할까 생각 중인데 말이야.”

“형님! 제발 살려주세요! 설마 악마에게 영혼을 판 독일인 선장과 선원들처럼 불쌍한 개척민들을 영원히 바다를 헤매게 만들지는 않겠지?”

북해의 바다를 영원히 헤매는 독일 상선의 전설이 16세기 이후에는 네덜란드 탐험선으로 바뀐다. 플라잉 더치맨, 방황하는 네덜란드인들의 전설은 확실한 유령선이었다.

“요즘 덴마크 상선들도 원양항해 능력이 향상되지 않았나?”

“그래도 상품 운송에나 범선을 사용하지, 베네수엘라 개척민들을 범선에 태우기는 어렵다네.”

“덴마크도 인구가 적은데 허망하게 죽으면 아깝겠지.”

고산국의 선박 건조 기술과 항해술, 지도가 유럽 각국에 확산된 덕택에 범선으로 대서양을 건너는 것도 예전에 비해 많이 안전해졌다. 북미와 유럽 사이에 전개되는 대서양 무역의 규모가 급격히 성장하면서 고산국 선박만으로 감당할 수 없어 덴마크와 네덜란드 상선들이 운송에 대거 참가했다. 조건은 노예무역을 하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아니!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여기 우리 친구 덕에 왔지. 원래 칼마르를 공격하려 했는데, 저 친구 여편네가 말려서 포기했어.”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크리스티안 4세를 만나면서 실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림만으로 보면 분명히 고산국 국왕의 중재 하에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에 평화협정을 체결하려는 모양새였다.

“저희도 남쪽의 덴마크 영토를 공격하려 했다가 아이슬란드 여왕폐하의 권고로 그만두었습니다.”

“자네나 나나 고산국에 찍혀서 좋을 건 없잖아? 그래서 휴전 협정이나 체결하면 어떨까 해서 자네 의향을 떠보려고 왔어.”

“제가 독단적으로 결정하기 어렵군요.”

스웨덴에는 평의회가 있어서 국왕의 권한을 제한했다. 주로 귀족들이 이끄는데 그 전에 카를 9세가 공작 시절에 시기스문드 국왕을 견제하고 심지어 추방하고 폐위하는 데에도 평의회를 이용했었다.

카를 9세가 국왕이었을 때 평의회는 무척 협조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구스타브가 즉위하자 평의회가 매사에 어깃장을 놓기 시작했다. 대관식도 카를 9세가 서거한 직후 구스타브의 친위 세력이 추진했으나 평의회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다.

“그리고 고산국이 함대와 군대를 동원해 스톡홀름을 점령하다시피 한 강압적인 분위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체결된 그 어떠한 조약도 법적 정당성을 잃을 것입니다.”

“응? 나는 그냥 대관식에 참가하려고 왔지.”

“대관식 준비는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귀족들이 어떻게든 대관식을 늦추려 할 것입니다. 마치 폴란드의 셰임처럼 그 사이에 귀족의 권한을 확대하려고 노력하겠지요.”

고산국 군대 덕택에 지금은 잠잠하지만 어린 국왕을 왕좌에서 끌어내리려고 시도하는 스웨덴 귀족들이 있었다. 이들은 평의회를 통해 국왕이 어리다는 이유로 대관식을 연기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분명히 부왕으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루스 차르국의 사례처럼 대관식 전에는 제대로 권한을 행사하기 어려운 반쪽짜리 왕이었다. 그 기간에 귀족들이 전횡을 할 기회가 생긴다.

“그럼 스웨덴 국왕의 이름으로 대관식을 열자!”

“이봐, 크리스티안! 네 멋대로 할 거야?”

“귀족들이 대관식을 안 열어준다면 왕이 직접 열어야지.”

크리스티안과 이민호가 장난스럽게 웃고 떠드는 와중에 구스타브만 난처하게 됐다. 구스타브 입장에서야 즉위 초기부터 강한 권력을 쥐었으면 좋겠지만 스웨덴 귀족들도 결코 녹록치 않았다.

그렇다고 외국 국왕들에게 의존했다가는 초반 반기를 억누를 수야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외세에 의존하는 매국노 국왕 취급을 받게 된다.

“구스타브! 지금은 스웨덴 귀족들이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어. 왕권이 불안정한 이 시기에 자네는 이 기회를 어떻게든 이용해야 해. 즉위 초기라도 국왕의 위엄을 드러낼만한 행사가 없겠나?”

“그거야 내 전문이지. 왕궁 무도회를 여는 거야! 스웨덴은 물론 주변 국가의 모든 귀족들을 초청해서 실컷 먹고 마시고 춤을 추게 하는 거지. 전쟁이나 사냥대회보다 백 배 나아.”

하도 어이가 없어서 이민호와 구스타브가 동시에 이마에 손을 짚었다. 심각한 분위기에서 갑자기 귀족 여자들이나 좋아할 무도회 이야기를 꺼낸 것에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이민호는 재화를 선물하는 것도 아니고 일부러 불에 태워 없앰으로써 재력을 과시하는 북미 원주민이나 남태평양 원주민 추장 이야기가 떠올랐다.

“오빠 말이 맞아요. 연회나 무도회는 주최자의 인적관계와 재산을 자랑할 좋은 기회여요. 귀족들이 향락과 사치를 좋아해서 무도회에 참가하는 게 아니라 인적관계를 쌓으려는 거여요. 그러니 되도록 크고 화려하게 무도회를 여는 게 좋아요.”

이민호의 생각과 달리 크리스티안의 제안에 헤드비히가 찬성하고 나서는 것을 보면 뭔가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았다. 외진 곳에 위치한 스웨덴이나 바다 건너 고산국보다는 아무래도 덴마크 왕실이 유럽 왕실과 귀족 문화에 정통했다.

“그렇다면 스웨덴 국왕의 즉위를 축하하는 국제적인 무도회를 추진해봅시다. 내 생각에는 원수 사이인 덴마크보다는 신성 로마 제국과 루스 차르국의 귀족들을 섭외해보는 게 좋겠소.”

“그래요. 스톡홀름까지 고산국 군함에 태워준다고 하면 독일의 젊은 귀족들이 대거 참가할 거여요.”

“군함 말이요? 어휴! 알았소.”

고산국 해군에서 손님들은 거주시설이 갖춰져 있는 수송선에 태우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거리가 짧아 이번에만 특별히 순양함에 태우기로 했다. 순양함에도 손님용 객실이 있어서 하루 이틀 정도 숙박하는 것은 가능했다.

그리고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순양함의 화력 시범도 하자고 헤드비히가 제안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고산국의 전쟁 교리였으므로 앞으로 적이 될지도 모를 독일 귀족들의 기를 죽이는 것도 괜찮은 방법 같았다.

30년 전쟁에서 단순히 신교와 구교로만 편을 구별할 수 없었고 다양한 당사자들에게 그 숫자만큼 많은 참전사유가 있었다. 덴마크와 스웨덴은 같은 신교 국가였지만 서로를 견제하느라 당연히 반대쪽으로 참전했다.

“이봐, 매제. 귀족들만 흥청망청해서는 안 돼. 평민들에게도 뭔가 떨어지는 것이 있어야 불만을 죽일 수 있어. 자네가 비용을 쾌척해줄 거지? 스웨덴과 덴마크의 평화를 위해서 말이야. 싫으면 내가 좋아하는 전쟁을 하게 되는 거지.”

“끙! 알았네.”

발트 해 연안 국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곡물을 수출하는 나라가 폴란드였다. 그러나 스웨덴 왕자로서 먼저 폴란드 국왕에 올랐던 시기스문드가 당연한 권리였던 스웨덴 국왕의 왕좌에서 쫓겨나자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최악으로 달렸다.

스웨덴은 철과 석탄을 수출하고 곡물을 수입하던 나라였다. 그런데 수출과 수입 양쪽 모두가 폴란드에 막히면서 백성들의 삶은 몹시 고달파졌다. 그런 불만을 바탕으로 스웨덴 귀족들이 새로운 국왕에게 반기를 들려고 계획했던 것이다.

“명칭은 스웨덴 연말 왕궁 무도회로 하고 귀족들과 대상인들 위주로 초청장을 발부하자. 선제후들을 빠뜨리면 안 돼. 눈치가 있다면 늙은이들은 자리를 지키고 후계자를 대신 보내겠지.”

“여기 루스 차르국의 보야르들 목록이 있어요. 그런데 귀족들을 수용할 거주시설이 충분할까요?”

“없으면 만들어야지. 참! 왕궁에서 항구까지 길을 포장해야겠어. 그 길을 왕복할 공용 마차도 최대한 화려하게 꾸미자.”

덴마크 왕실의 왕족 남매인 헤드비히와 크리스티안이 신이 나서 적대국 관계인 스웨덴 왕실 무도회를 준비했다. 이민호는 필요한 물건을 무한정 공급해주는 물주 역할이었고, 주인인 구스타브는 이번 일에서 초청장에 이름만 빌려주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였다.

“어이! 부자 친구! 평화를 지키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고 생각하나? 자넨 전쟁을 통해 이익을 많이 얻었다지?”

“아니야. 전쟁에 비하면 평화가 훨씬 이익이야. 일단 전쟁을 하면 본전 찾기도 어려워. 조선이나 일본에서 전쟁을 해보니까 전쟁 비용보다 복구비용이 장기적으로 어마어마하게 많이 들더라고.”

“구스타브! 들었지? 네가 존경하는 정복왕 고산국 국왕폐하의 말씀이시다. 명심해라.”

“제가 누구를 존경해요? 오해하신 겁니다!”

구스타브가 얼굴이 벌겋게 변하면서 응접실에서 홱 나가버렸다. 크리스티안이 씩 웃었다.

“구스타브가 새 영토를 정복하고 싶어도 이제 남은 땅이 없어. 전쟁해서 영토를 넓히기도 쉽지 않지.”

“인구가 너무 적어. 나도 건국 초에 내내 인구 부족에 시달렸지.”

“북미와 남미, 호주가 전부 고산국 영토라니, 부럽다. 에스파냐와의 관계를 그런 식으로 이용할 줄은 몰랐어.”

“운이 좋았지. 아니, 영토가 너무 넓어서 골치가 아파.”

“그건 그렇고. 구스타브의 야심에 불을 지른 것은 바로 자네야. 자네가 업적을 자랑하는 것도 좋지만 젊은 국왕이나 귀족들에게 괜한 호승심을 불러일으킨단 말이야. 여차 하면 덴마크가 제1타로 당하게 생겼어.”

“그것 참 미안하게 됐군. 스웨덴이 전쟁을 걸면 잘 막아보게.”

현대 지도에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남단까지 스웨덴 영토지만, 이 시기에는 아직 덴마크 영토였다. 덴마크가 강제로 스웨덴의 땅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덴마크인의 조상 데인인이 스칸디나비아 반도 남단 스카니아에서 발생했다.

============================ 작품 후기 ============================

다음회는 무도회입니다. 쿨럭~

일단 오늘도 한편만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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