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808화 (757/1,000)

00808  90. 1611년의 문화외교  =========================================================================

“이것 말씀이십니까? 저와 함께 살아오면서 저를 지켜준 제 친구입니다. 첫 살인도 이 친구와 함께 했습니다. 상대는 폴란드의 제 사촌이 보낸 자객이었습니다.”

이민호의 시선을 따라간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허리에 찬 쿠크리 단검을 다정한 손짓으로 쓰다듬었다. 꼬마였을 때는 무게에 버거워했던 쿠크리 단검이 구스타브가 충분히 성장한 다음에는 작아 보였다.

구스타브가 스웨덴 왕위 계승자로서 암살자의 방문은 꾸준히 받았으나 대부분 호위병들이 차단했다. 그런데 2년 전에는 왕궁 정원사를 죽이고 그로 위장한 전문 암살자의 공격을 어린 왕자가 몸으로 받게 됐다.

늙고 어린 두 사람은 처절하게 싸웠고, 다투는 소리를 듣고 궁성 경비병들이 몰려왔을 때는 온몸에 피 칠갑을 한 구스타브가 홀로 간신히 서 있었다고 한다. 단검에 묻은 독인지 일반적인 파상풍인지 알 수 없으나 구스타브는 열흘 넘게 앓아누우며 죽을 고비를 넘겼다.

“저런! 그런데 보석으로 치장한 검은 실전용이 아니라 장식용이라네. 혹시 내게서 받은 다음 날을 세웠나?”

“국왕전하께서 주신 특별한 선물이라 날을 세우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단검은 특별해서 강하게 휘두르면 암살자의 머리를 깰 정도로 충분히 단단하고 무겁습니다.”

구르카 용병들이 적의 목을 따는데 쓰는 쿠크리 단검을 구스타브는 왕세자 시절에 둔기로 활용해 자객을 때려잡았다. 구르카 용병이나 구스타브나 무식하다고 욕할 수 없는 게, 이들은 죽음을 항상 곁에 두고 치열하게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자네를 두고 주변에서 걱정이 많더군.”

“주변이라면, 혹시 덴마크 왕실 말씀이십니까? 특별한 이름이 붙지 않더라도 칼마르 전쟁은 항상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칼마르가 원래 스칸디나비아 3국의 동맹에 붙은 이름이었는데 이제는 전쟁 이름에 쓰이게 됐군. 덴마크 군이 해협 건너편으로 전진 배치됐어. 방어적인 군사 이동이니 너무 심려치 말게.”

“저는 부왕으로부터 스웨덴의 왕좌 외에도 칼마르 전쟁, 잉그리아 전쟁, 폴란드 전쟁을 상속받았습니다. 제가 책임져야 한다면 물러서지 않을 생각입니다.”

아돌프는 아직 어려도 분명한 사자였다. 정식으로 대관식을 열기 전인데도 주변 분쟁 당사국들인 덴마크, 폴란드, 루스 차르국과 전쟁을 이어가겠다는 의향을 이민호 앞에서 명백히 밝혔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발트 해 연안과 주변국들을 완전히 제압하고 대제국을 세운다. 그러나 이민호는 북유럽 역사를 잘 몰라서 주변국들에 비해 인구가 가장 적은 스웨덴이 설마 제국으로 발돋움할까 의심했다.

그러나 현재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4세나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시기스문드 3세의 역량도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이 아돌프의 불행이었다. 최근에 내분으로 인해 약체로 지목됐던 루스 차르국도 누가 정권을 잡든 군 동원력 면에서는 스웨덴을 압도했다. 또한 덴마크의 동맹국인 고산국 국왕이며 루스 차르국의 보호자 이민호가 어린 국왕의 행보를 차분히 주시하고 있었다.

“훌륭해. 아주 훌륭해.”

“혹시 국왕전하께서는 제게 평화를 설득하러 오신 겁니까? 저는 왕궁보다 전쟁터에 더 오래 계시는 아버지를 옆에서 지켜본 것은 물론, 고산국에서 발간한 전쟁사 책들을 읽고 자라왔습니다. 전쟁 영웅이신 국왕전하께서 평화를 주선한다면 참으로 어색할 것 같습니다.”

“겸사겸사. 나는 스웨덴이 충분히 강한 나라인 것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전쟁에서 얻은 것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전쟁으로 다시 잃게 될 걸세. 스웨덴은 좋은 나라지만 자네 같은 영명한 국왕이 대대로 이어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칭찬 감사합니다만, 후대를 위해서라도 영토를 넓혀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너무 춥거든요.”

위도가 높아서 그렇지 그리 추운 곳은 아니었다. 그래도 농사에 불리한 것은 사실이라 스웨덴은 광산 개발에 국가의 사활을 걸고 있었다. 그리고 북미에서 훨씬 싸고 좋은 품질의 광물을 구할 수 있는데도 고산국은 스웨덴에서 생산한 석탄과 철광석을 수입해서 먼저 사용했다.

“덴마크에 남미 북부 해안의 땅 일부를 떼어준 것을 알고 있나?”

“예. 작은 베네치아라는 이름인데 아드리아 해와 이오니아 해 주변의 베네치아 해외 영토를 다 합한 것보다 면적이 몇 배나 더 될 것 같습니다.”

“감상이 어때?”

상대방을 놀리는 꼴이 됐지만 이민호는 반드시 구스타브의 의향을 물어보고 싶었다. 물론 당장 조건 없이 영토를 떼어준다는 것은 아니고, 서로 협력할 방법을 찾으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부럽습니다. 부러워 죽겠습니다. 저도 덴마크 국왕폐하처럼 고산국 국왕전하께 여동생을 바쳐서라도 영토를 얻고 싶습니다. 아직 어리니 조금 더 기다려주십시오.”

“아니, 꼭 그것 때문은 아닌데, 흔히들 오해하더군. 여동생을 바쳐서 영토를 얻는 국왕이라는 오명을 쓰고 싶지 않다면 그따위 계획은 포기하는 게 좋아. 그리고 베네수엘라의 자원은 기본적으로 고산국 소유라서 온전한 영토 할양도 아니야.”

“더운 땅에서 말라리아와 황열병으로부터 안전하게 사탕수수를 재배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특혜입니다. 저희도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요즘 덴마크가 서인도회사의 운송, 무역업과 베네수엘라에서 생산한 설탕 덕택에 유사 이래 최대의 호황을 구가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지나가는 개도 고산국 금화를 물고 다닌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덴마크 입장에서 주변국과 소모적인 영토 분쟁을 하는 것보다는 베네수엘라의 사탕수수 밭을 개간하고 재배하는 것이 훨씬 수지맞는 장사였다. 흔히 하층민이 개척지로 이민 간다는 통설과 달리 덴마크에서는 부농들 위주로 진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부농이든 빈농이든 베네수엘라로 이민 간 것은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다.

이민호는 고가 정책을 유지하는 도자기나 해달 모피와 정반대로 설탕은 저가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지금은 귀부인이 손님 찻잔에 직접 설탕을 타줄 정도로 비싸지만, 나중에 흔해지면 배고픈 노동자가 빵 대신 설탕물을 마실 정도로 가격이 내려간다.

설탕이 밀 소비를 줄이는 효과가 커서 현대에 개인당 설탕 소비량 1위는 선진국들이 아니라 쿠바가 된다. 현대의 연간 1인당 설탕 소비량 21킬로그램에 비해 쿠바는 61킬로그램이었다. 쿠바에 대한 미국의 무역 통제도 이유가 되겠지만, 이 정도면 곡물 대용으로 설탕을 소비한다고 볼 수 있다.

“저번에 광산을 개발하라고 스웨덴에 지원해준 자금 상당 부분이 군비로 투입됐더군.”

“주변 강대국들이 스웨덴 영토를 호시탐탐 노려서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습니다. 폴란드 국왕 시기스문드가 스웨덴 왕위를 얼마나 집요하게 노리던 자입니까?”

“좋아, 뭐. 나는 남미를 개발하기 위해 여러 나라를 후보로 꼽아두고 있어. 사정이 어려운 스웨덴도 그 후보들 중 하나야. 하지만 먼저 신뢰가 바탕이 돼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게 좋아.”

“정말입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사실 발트 해 주변에서 새 영토를 얻더라도 방어 비용도 안 나옵니다. 언제 다시 빼앗길지도 모르는 소모적인 전쟁을 지속하느니 새 영토를 개발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남미는 흑인 노예가 아니라 유럽 백인들을 동원해서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베네수엘라를 가장 믿을 만한 동맹인 덴마크에 떼어준 것도 그런 이유였고 시험적인 성격이 강했다.

수십 년 정도 시간만 주면 그 동안 불어난 고산국 백성들이 남미든 호주든 공백을 다 채우고도 남겠지만, 고산국 사람만으로 세계 인구 절반 이상을 넘기고 싶지 않았다. 노동력이 부족한 북미에서는 지금도 꾸준히 유럽 이주민들이 입국하고 있었다.

이민호가 덴마크에 제시한 지침은 식민지가 아닌 새 개척지로 이주한 주민들과 그 후손들이 본국과 계속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본국의 착취와 개척지 시민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이유로 반란을 일으켜 새 영토가 본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이민호는 결코 바라지 않았다.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리는 카니발에서 열정적으로 엉덩이를 흔드는 흑인 또는 흑인 혼혈 무희는 보기 어렵게 됐다. 그러나 아프리카 왕국이 확장을 마치고 흑인 노예무역을 근절한 다음에는 흑인 이주민들도 남미에서 받을 계획이었다.

“몇몇 국가에 할양하겠다는 남미 땅은 일반적인 영토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 돼. 포르투갈 식민지인 브라질을 제외하곤 남미에서 고산국 외의 군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만 알아둬.”

“음. 남미 전체를 고산국이 계속 영도하겠다는 뜻이군요.”

“알아들었으면 고민해봐. 국왕은 젊으니까 적군을 격파하는 것에 희열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황무지를 차근차근 개간하는 것이 나는 더 즐겁다.”

정확한 연도가 떠오르지 않았지만 조만간 30년 전쟁이 일어난다고 이민호는 기억했다. 종교적인 문제가 큰 원인이 되면서도 프랑스처럼 국익을 위해 다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30년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다른 종교에 관용을 베푼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기에 지금 당장 신구교도 간에 전쟁을 시작한다 해도 납득이 갈 정도였다.

“알겠습니다. 고산국 국왕전하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엄청난 재산을 불쌍한 나라들에 베풀어주는 분이시니 믿겠습니다. 그런데 왕궁 근처에 웬 고산국 병사들이 그렇게 많습니까?”

“스웨덴 국왕뿐만 아니라 나를 노리는 암살자가 있다는 정보를 얻었네. 자네도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왕궁 주변에 병력을 충분히 배치했어. 어린 국왕을 탐탁찮아 하는 무례한 귀족들이 있다던데 이제는 어때? 든든하지?”

경호 병력을 상주시키는 것만으로도 주재국 정부에 무거운 군사적 압력이 될 수 있다. 구한말을 보면 일본이 한 짓이었다.

현재 해병대 전체 병력이 스톡홀름에 진주하면서 네 곳에 군영을 세우고 시내 곳곳에 경비 초소를 운영했다. 물론 스웨덴 국왕의 재가를 받았지만, 이 정도로 많을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다.

이민호가 바라보는 창밖에는 완전 무장한 고산국 해병대가 소대 단위로 오와 열을 맞춰 시가를 행진하고 있었다. 얼룩무늬 전투복을 입고 얼굴에 위장까지 해서 위압적인 모습이었다. 구스타브 국왕이 해병대를 가리키며 혀를 찼다.

“마치 스톡홀름이 고산국에 정복된 것 같지 않습니까?”

“경호 병력이 조금 많은 것뿐일세. 내가 뭘 얻겠다고 스웨덴을 점령하나? 들이는 것에 비해 얻는 것은 거의 없을 걸?”

해병대에게는 즉응 파병부대 혹은 대규모 해외 원정군의 선발대 임무를 맡길 예정이었다. 그래서 해외에 병력이 나갈 일이 생기면 예전에 자주 동원됐던 구르카 여단보다 우선적으로 해병대를 지목했다. 외국 구경을 할 기회가 많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해병대 지원자들이 늘어나는 효과도 기대했다.

해병대는 개인 훈련부터 시작해서 조금 문제가 많이 생겼지만 연대 단위 전술훈련까지 마쳤다. 이제 적당한 시기를 선택해 에티오피아에 투입하면 된다. 물론 이민호는 에티오피아에 대한 영토적 야심은 전혀 없었다. 다만 해적들의 씨를 말릴 계획이었다.

“그 말씀은 맞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스웨덴 사람들 중에 고산국 국왕전하께서 스웨덴을 통치해주시길 원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고산국 백성들의 절반만큼이라도 먹고 살게 해주길 바라는 사람들 말입니다.”

“자넨 지금 즉위 초기야. 스웨덴 백성들에게는 멀리 떨어진 고산국 국왕보다 자네가 더 나은 통치자라는 사실을 증명해보게.”

“물론입니다. 앞으로 스웨덴이 예전보다 훨씬 살기 좋아졌다는 것을 확연히 느끼도록 해주겠습니다.”

구스타브는 아직 어리기도 하고 즉위 초기의 국왕으로서 포부도 컸다. 이리저리 치이고 좌절하다 보면 사람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국왕이 특권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인본주의 계통의 군주론도 일부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참! 국왕전하께 확인할 게 있습니다. 저의 부왕께서는 10월 30일에 서거하셨는데 국왕전하는 어제, 11월 20일에 도착하셨습니다. 고산국 배가 지구 반 바퀴를 돌아서 오는데 빨라도 20일쯤 걸린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20일 걸려서 왔잖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꾸민 음모론인데 이 시대에는 제법 먹혀들었다. 고산국 암살자가 잘 알려지지 않은 방법으로 스웨덴 국왕을 제거하기로 하고, 그에 맞춰 고산국 국왕이 군대를 이끌고 출발해서 스톡홀름에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부왕께서 서거하신 소식이 단 하루 만에 고산국 왕궁에 전달됐단 말입니까? 전서구가 아니라 전서응이라도 불가능합니다.”

“정신 감응, 텔레파시라는 것이 있네. 아이슬란드 여왕과 나는 너무 사랑하는 사이라서 평소에 떨어져 있어도 대화가 통한다네.”

“말도 안 됩니다!”

“그럼 이건 어때? 눈에 안 보이는 전파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지구 반대편까지 신호 정보를 전달한다네.”

“그것은 더욱 말이 안 됩니다. 차라리 정신 감응을 믿겠습니다.”

그게 훨씬 로맨틱하면서도 그럴 듯했다. 구스타브가 이민호를 의심한 것은 물론 아니었고, 다만 고산국의 빠른 정보전달 체계가 궁금한 것뿐이었다.

오래 전부터 고산국에서 방송이라는 것을 하고 수신기라는 물건을 통해 음악과 음성이 전달된다는 정보는 유럽에도 이미 전해졌다. 그러나 바로 그 전파를 통해 군사 및 정치, 경제 정보를 송수신한다는 발상은 쉽게 하지 못했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졸려서가 아니라 밤을 샜는데도 여기까지밖에 못 써서 하나만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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