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05 90. 1611년의 문화외교 =========================================================================
임진왜란 때 수군 장수였던 입부 이순신이 사망해서 총함장 이순신이 경기도 시흥의 장지까지 조문을 다녀왔다. 믿음직했던 동료 장수가 평화로운 시기에 죽음을 맞은 것을 두고 이순신은 여러 가지 감상이 교차하는 듯했다.
조선에 다녀온 일을 보고하기 위해 이순신이 이민호의 집무실을 찾았다. 이순신은 고산국에서 너무 고관이라서 친우의 장례에 참가하는 것도 조문 외교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어허! 그 사람, 참! 몇 년 더 기다렸다가 환갑이라도 넘기고 갈 일이지 말입니다. 쯧쯧!”
“그래도 장수로서 나라를 지키는데 큰 도움이 되고 가셨으니 회한은 없으셨을 겁니다. 조문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면서요?”
1592년 임진왜란 때 방답 첨사였던 입부 이순신은 꽤나 냉철한 지휘관인 동시에 선봉으로 나설 때는 앞뒤 가리지 않고 돌격했던 맹장 타입이라고 이민호는 평가했다. 이기는 전투 중에도 적의 수급을 챙기지 않아 조정에서 승진을 누락시키자 이순신이 다시 장계를 올려 특별히 승진을 요청했을 정도였다.
덕택에 전쟁 기간 내내 승승장구했으니 입부 이순신은 이순신에게 신세를 진 셈이었다. 그도 관직생활에 꽤나 굴곡이 많았으나 무관으로서 매우 성공한 인생에 속했다.
“예. 입부가 어려운 사람들을 평소에 잘 챙겨주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종친부에서도 장례 과정 일체를 세심하게 신경 써주었습니다. 전하께서 보내신 부의금은 조금 과한 듯했습니다.”
“입부 형님이 동료들을 챙겨주다가 집안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해서 말입니다. 그래도 가시는 길에 많은 사람들이 배웅했다니 다행입니다.”
조선의 무장들이 다 그렇듯이 그도 적당히 부패하고 적당히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이었다. 무관이 너무 청렴하면 중앙 정계로부터 의심을 샀기에 이에 대한 선제적 대응 방법이기도 했다.
출세하려면 적당히 부패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특히 조선의 무관 사회에서 잘 통용됐다. 임진왜란 직전에 조선에서 전쟁에 대비하느라 실력 위주로 장수를 선발한 것은 예외 상황이었던 셈이다.
이순신 외의 수군 장수들에 대해 조정 대신들이나 사관들이 좋은 평가를 내린 경우가 거의 없었다. 안위는 역적 정여립의 인척이고 이억기는 원균만도 못하고 몇몇 수군 장수들은 집안이 한미하니 승진시키지 말라고 임금에게 건의했다. 물론 녹도만호 이대원 같은 전사자에게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건 그렇지만 젊은 사람이 먼저 가면 저 같은 늙은이는 미안해지는 법입니다.”
“전사한 것도 아닌데 형님께서 미안하실 게 있습니까? 사람의 운명이지요.”
이순신은 환갑이 지났어도 여전히 정정했다. 몇 년 전 이순신의 환갑잔치를 국경일에 준해서 대대적인 행사로 진행해서, 민망해진 이순신이 해군 장교나 기자들을 피해 숨어 다닐 정도였다. 고산국 해군 전체에 교대로 한 달씩 휴가를 주었고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으로 참전했던 모든 조선 사람들에게 선물을 보냈다.
집안 내력인지 팔순을 넘어선 이순신의 노모도 아직 정정했다. 조선에서 사대부 가문 정2품 상계 정헌대부의 모친이었다가 고산국 해군 총지휘관의 어머니가 된 노모는 아들의 영달에 기뻐하는 평범한 어머니였다. 노모는 고산국에서 아들 이순신이 총리와 판서 등 문관들은 물론 국왕의 부친인 대원군까지 다 제치고 관계 서열 1위라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고관대작이 됐다는 사실에 기꺼워했다.
늙으신 어머니는 신분에 맞지 않게 부지런히 움직이고 일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장수하시는 것으로 이민호는 이해했다. 그러나 해군 총함장 사택에 고정 배치된 주치의와 교대로 근무하는 간호사들이 돌봐준 덕택이라고 이순신이 이민호에게 감사를 표한 적이 있었다. 이민호는 이순신의 노모가 별 일 없이 오래도록 사시다가 가실 때 편안히 돌아가시길 바랐다.
“예전 수군 장수들이 하나둘씩 떠나고 있습니다. 형님께서는 부디 오래오래 사셔서 고산국과 조선을 지켜주세요.”
“제가 할 일입니다. 이미 늙은 저에게 계속 큰일을 맡겨주셔서 부담스럽지만 하는 데까지 해보겠습니다.”
원래는 이민호와 이순신이 7년을 이야기했다. 임진왜란 기간 동안 조선에 대한 무제한적인 지원의 대가로 이순신은 자기 인생을 고산국에 저당 잡혔다. 비록 몸은 고산국에 있어도 이순신은 여전히 조선의 충신으로 남았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순신이 나라를 저버리고 좋은 대우에 혹해서 고산국으로 갔다고 비난했다. 모르고 그럴 수도 있지만, 알고도 남을 비난하기 좋아하는 인간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 법이었다.
조선 출신이 많아서라고 흔히 이야기하지만, 이순신이 살아서 버티는 한 고산국은 조선에 적대적인 정책을 사용할 수 없었다. 막내아들 이면을 고산국에 데려온 것도 조선의 미래 안위에 대한 보장으로 이민호는 받아들였다. 이순신이 아들 중에서 유독 이면에게만 미안해하는 것을 보면 이민호가 추정한 것이 맞았다.
“저는 전하를 믿습니다. 그리고 고산국도 이미 저의 조국입니다. 고산국과 조선 사이에 불행한 일이 생기면 안 될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조선과 고산국은 영원히 형제국입니다. 저번에 흠정헌법을 만들 생각을 했을 때 반드시 관련 조항을 넣으려고 했습니다.”
“전하 같은 분으로 왕통이 이어진다면 고산국은 반드시 천하제일의 나라라는 지위를 계속 유지할 것입니다.”
고산국이 이미 명나라를 앞섰다고 누구나 인정하고 있었다. 고산국은 영토도 넓고 군사력은 세계 최강이었다. 지금도 기회가 생길 때마다 해군과 육군을 확장하고 있었다.
고산국이 그 지위를 차지하는데 이순신의 역할이 지대하다고 볼 수 있었다. 이순신은 해군을 누구보다 완벽하게 통솔했으며 이민호가 부재중일 때는 본토를 지켰다.
이민호의 부친이 대원군으로서 국왕 부재시에 명목상 왕도와 본토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지만 실상은 해군 총함장의 지휘를 받았다. 공식적인 지휘체계와 다른 인적 관계가 앞서는 것을 몹시 혐오하는 사람이 이민호였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순신이 지켜준다는데 싫어할 사람은 없었다.
“조선에서 대우는 잘해주던가요?”
“물론입니다. 이 상국이 접반사로 나서 주셔서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백사와 한음 등 이 씨 정승들이 많은데 누구 말씀입니까?”
“아! 오리 이원익 대감 말씀입니다.”
이원익이 영의정으로서 이순신의 접반사를 맡았다면 조선으로서는 최대한의 예우를 해준 셈이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들마다 접반사가 붙어서 여러 가지 보급 문제를 해결해준 적이 있었다. 실제로는 명나라 장수들이 접반사를 통해 조선군의 지휘체계에 개입하기도 했다.
이번에 이순신이 시흥에 갔을 때 호위 병력으로 해병대 1개 대대와 왕립 의장대가 동원됐다. 상륙함대는 강화도에 정박하고 상륙정으로 옮겨 탄 병력이 노량진에 도착할 때부터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리고 멋진 예복을 입은 의장대와 장갑차 몇 대, 기마대열이 시흥으로 행진하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구경했다고 한다.
“오리 대감은 대동법을 추진한 공이 큽니다. 원래 서인 율곡께서 주창한 정책인데 지금은 남인이 추진하고 서인이 반대하는 꼴이 됐습니다.”
“물론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안방준 그 사람을 설득해주신 덕이 크지요. 시간이 흐를수록 대동법 시행이 안정되면서 조선 백성들 사이에 칭송이 자자하다고 합니다.”
“대동법을 이용해 앞으로 군역도 대체될 것 같습니다.”
“군인으로 근무하는 대신 쌀을 낸다는 말씀이십니까? 어허! 큰일 나겠습니다. 조선의 북방이 계속해서 시끄러운데 말입니다.”
“조선에는 병력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군역을 백성들에게 공평히 배분하고 정예 강병을 만들려면 고산국처럼 세금으로 직업군인을 키우는 게 낫습니다.”
현대 한국인들은 대부분 믿지 못할 자료이겠지만 이 시대 조선군 병력은 인구 비례로 따져서 현대 한국보다 많았다. <서애집 9권> 서(書), 총병 유정에게 주는 글에서 ‘대개 전라도의 여러 가지 군정(軍丁)을 호수로 계산하면 83,685명이고, 충청도에 40,530명이고, 경상도에 94,056명인데 이것은 평상시 정원입니다.’라고 나온다.
<서애집 18권> 팔도군안 편에서는 조선에 병력이 35만이나 된다. 선조실록 27년 6월 21일 기사에는 전라수군 11,836에 보인 포함해서 47,300명, 충청수군 6,853명에 보인 포함 27,400명이라고 기록됐다. 충무공 계사년 장계에서도 전라수군 4만 여 명이라는 기사가 보인다. 삼남 지방에서는 수군이 육군보다 훨씬 많았다.
이것은 수군 정병 1인당 3정(丁)씩 배정되는 보인(保人)의 숫자 때문이었다. 평소에 정병의 재정적 지원을 맡은 보인도 총동원령이 내려지면 계사년 초 웅천 해전 때처럼 소집돼 전쟁터에 투입된다.
물론 수군의 판옥선 숫자가 고정된데 비해 병력만 많아지면 수군의 작전 능력은 그대로인데 괜히 보급 부담만 가중될 뿐이었다. 그래서 실제 역사에서 이순신이 장계를 올려 봄에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이유로 보인들의 해산과 귀향을 조정에 건의했다.
군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전시에 급한 마음에 병력 총동원을 결정하면 이렇게 된다. 병참 능력을 넘어서는 병력을 소집하는 것은 그 자체로 재앙이며 가만 놔두면 곧 한 방면의 전선이 자동으로 붕괴될 뿐이다.
“병력은 많을수록 좋습니다만, 고산국 해군 정도라면 어느 나라 해군과 싸워도 질 것 같지 않습니다.”
“고산국 해군이 아니더라도 형님은 누구하고 싸워도 질 것 같지 않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명량해전 때 판옥선 13척으로, 그것도 전투 초반에는 대장선 달랑 한 척만으로 왜군 수백 척을 막아낸 이순신이었지만 역시나 병력이 많은 쪽을 선호했다. 적보다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으면 변수가 줄어들어 보수적으로 전술을 운용해도 승리를 얻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제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닙니다만. 어쨌든 그건 그렇고, 기병연대처럼 고산국 해군과 조선 수군 사이에 인적 교류를 하자는 제안을 오리 대감이 해왔습니다. 하급 지휘관들을 서로 상대방에 파견하자는 내용입니다. 기병 지휘관들이 개인 자격으로 상대국 군대에서 활동하는데 반해 이번은 공식적인 교류 차원입니다.”
“오오! 우리가 제안해도 젊은 장수들이 충격을 받을까봐 두려워 조선에서 거부할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충격은 전하께서 세상에 나오고 나서 20년 동안 이미 충분히 받은 것 같습니다.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은 조선보다 오히려 고산국 도시에 가까운 풍경이 됐습니다. 그 동안 조용히 지켜보던 조선의 상께서 이번 조문을 계기로 의외로 적극적으로 나오신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민호 입장에서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가 광해군이었다. 공적인 관료체계보다 사적인 인원을 움직여 정보를 수집하고 결정을 내리는데 익숙한 것도 이민호와 닮았다.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서 이민호가 정보국이라는 공적 기관을 탄생시킨 것과는 반대로 광해군은 국왕 개인의 비밀 조직으로 유지해서 비난을 샀다.
“당연히 받아들여야지요. 세상이 무척 넓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형님께서 조선 수군에서 일하는 후배 청년 장수들을 위해 좋은 훈련 계획을 세워주십시오.”
“고산국 입장에서 그들은 외국군입니다. 함포 사격이나 기관 정비 같은 것을 직접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지리 정보와 항해에 관한 지식 대부분을 전수하면 좋겠습니다. 이 기회에 에티오피아 해적 소탕 작전을 대대적으로 전개할까 합니다.”
“그게 좋겠습니다. 에티오피아에 원정을 떠날 때는 해병대도 잊지 말고 대동하십시오. 지상전이 의외로 많을 것입니다.”
“해전은 거의 없을 거라고 봅니다. 얼마 전까지 고산국 상대로 해전을 시도할 생각을 하던 멍청이들은 지금쯤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손대기 전에 이미 경쟁자들에게 제거됐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산국 해군은 해군인데도 해전을 할 수 없었다. 거대한 철선이 나타나기만 해도 상대편이 겁에 질려서 도망가기 바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해군의 불행이 아니라 자부심이었다.
함선이 거대해지면서 해군 작전이 편해진 반면 해병대는 더욱 많은 일을 넘겨받아야 했다. 한때 함선 소속 전투병이었던 해병은 해병대로 확대되면서 진정한 전략 기습 상륙군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상륙함들이 꾸준히 건조됐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선선하네요. 여름이 가도 여전히 졸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자야 해서 오늘도 한 편만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