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801화 (750/1,000)

00801  89. 1610년, 모험시대의 개막  =========================================================================

어느 날 저녁 개똥이가 시무룩해져서 왕궁으로 돌아왔다. 대대별로 돌아가면서 실시하는 구르카 용병들의 산악 행군 훈련에 얼마 전부터 다른 부대 군인이나 민간인도 참가가 가능하도록 했다. 개똥이가 거기에 참가했다가 탈락한 것은 물론 안 좋은 일을 당한 모양이었다.

“눈가가 시퍼렇게 멍들었네? 혹시 뭐 잘못하다가 맞았어?”

“뛰다가 넘어졌습니다.”

나중에 구르카 부대 지휘관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어봤더니 개똥이가 친구들과 모의해서 출발 직후에 구르카 용병 하나를 붙잡아 눌렀다고 한다. 구르카 용병 100명이 낀 달리기에서 100위 안에 들면 큰 상을 받을 수 있으므로, 비열하지만 일단 한 명을 탈락시키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구르카 병사들은 혼자서도 충분히 강해서, 판정관이 개입할 틈도 없었다. 개똥이를 비롯해 몸을 잡거나 짓누른 다섯 명을 모조리 때려눕히고 쿠크리 검을 빼내든 순간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구르카 병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민간인과 다른 부대 군인들을 차례로 제쳐가며 100위 안에 가뿐히 들었다.

쿠크리 검 하나로 인도 열차 강도 수십 명을 때려잡고, 혼자 지키던 초소를 공격해 온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전사 수십 명을 모조리 신의 곁으로 보낸 자가 구르카 용병이었다. 어떤 수를 쓰더라도 구르카 용병을 이겨보려는 개똥이의 의지는, 처자식을 먹여 살리려는 구르카 병사의 절실함보다 약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너 이제 열여섯 넘었다. 성인이 됐으면 모든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솔직히 말씀드려 무력을 쓰긴 했지만 범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충분히 응징을 당했습니다.”

“왕자 신분을 내세우지는 않은 것 같구나. 얼굴에서 점 떼어라.”

형벌이 가혹한 시대에 고산국만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성인이 되기 직전인 15세 남녀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교육이 형법이었다. 성범죄와 살인을 비롯한 몇몇 반인간적 범죄를 저지를 경우 미성년자에게도 형법이 적용됐다.

“아바마마! 지금 대서양 탐사전단에서 파견한 탐험대가 북극점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루 이틀 뒤에는 결과가 알려질 것입니다. 아바마마께서는 혹시 직접 탐험에 참가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으십니까?”

“없어. 거긴 너무 춥거든.”

이민호가 귀를 후비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지구의 3극점인 남극이나 북극, 히말라야가 춥지 않더라도 이민호가 직접 가서 생고생할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저 최초로 3극점을 정복한 사람이 고산국 국적이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민호는 국왕으로서 민간 탐험대에 대한 정부의 지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탐험 자체를 주도하고 있었다. 역시나 개똥이가 몹시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려울수록 도전해보고 싶어 해야 발전이 있다고 배웠습니다.”

“내가 도전을 거듭해서 지금보다 더욱 발전을 시켜야 할까?”

고산국이 건국 이래 단기간에 급속히 발전하면서 일부 백성들은 그 변화를 따라오지 못해 허덕이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데도 때로는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왕도가 유일한 예외로서, 이민호가 이 도시에서 갖가지 시험을 해보고 괜찮으면 개선, 별로면 폐기시켰다. 제도나 물건, 건물이나 마찬가지로 일관되게 적용했다.

“정체는 쇠퇴의 시작을 알리는 법입니다. 설마 창업군주 시대가 고산국에서 가장 번영했던 시대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기고 싶지는 않으시겠지요?”

“그럼 내가 후대 교육을 잘 못했다는 뜻이지. 다음 대나 다다음 대에 성종의 묘호를 받는 국왕이 등장하길 기대하고 있다.”

물론 국왕 제도가 그때까지 존속한다면, 이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생략했다. 개똥이를 보면 장남이며 왕비에 가장 가까운 혜영의 소생이면서도 딱히 임금 자리에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마치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공부를 멀리 했고, 부왕인 이민호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이민호의 부담을 줄여주려는 혜영의 의도가 많이 반영된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개똥이가 인간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다들 아직 어려서 성인이 된 다음 어떤 능력을 발휘하게 될지 아무도 모르니 세자를 선정한다면 좀 더 기다려야 했다. 이민호는 그저 자식들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했을 뿐, 선택은 전적으로 그들에게 맡겼다. 어떤 후궁은 이민호에게 자식이 많아서 생긴 여유라고 투정을 부렸다.

“그건 그렇고, 너도 이제 만 16세가 넘었다. 비록 고등학생이라도 나이는 이미 성인이 되었다. 일반 백성들보다는 조금 이르지만, 왕가의 번창을 위해 가정을 꾸릴 때가 됐다는 뜻이다.”

“어휴! 저는 아직 멀었습니다. 배울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배우자와 함께 인생을 계획하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아바마마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아직 정신을 못 차렸습니다.”

그럼 사용한 휴지나 제대로 치우라는 소리가 혀끝까지 나왔다가 꿀꺽 삼켰다. 혜영이 개똥이를 보러 갔다가 책상 위에 뭉친 휴지를 발견해 휴지통에 치워줬다. 이민호와 혜영은 개똥이가 고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기뻐했지만, 개똥이에게 영원한 흑역사로 남을 것이다.

“네가 정신을 못 차렸으니까 일찍 장가를 보내려는 게야. 그리고 가정이란 두 사람과 부모 혹은 자녀가 함께 만들어가는 생활이다. 다양한 일을 해결할 능력을 키울 수 있고, 배우자로부터 배우는 점이 많다. 평생 사랑할 만한 마음에 드는 동반자를 만나는 것은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다.”

개똥이가 갑자기 의아한 표정을 짓기에 화가 났지만, 모르는 체하고 넘어갔다. 운이 좋은 이민호는 삶의 동반자를 여러 명 만난 셈이었다.

“전에 한 번 심각하게 고민해봤는데, 지금은 별로 생각이 없습니다.”

“왕족이면 내명부의 일이 네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네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개똥이 이 자식이 이민호를 향해 씩 웃었다. 아내를 많이 얻었다가 애비처럼 고생하기 싫다는 뜻이 틀림없었다. 이민호는 부아가 치밀었으나 이 문제로 직접 대화해봐야 좋을 것이 없어 넘어갔다.

고산국 백성들은 국왕에게 부인이 너무 많아 부럽다기보다는 오히려 불쌍하게 여기는 식으로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백성들을 위해 죽도록 일하는 것도 부족해 국가를 위해 여러 나라의 공주들과 정략결혼을 해서 밤에도 편히 쉴 틈이 없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많은 게 결코 좋은 게 아니라는 명백한 산 증인이 됐다.

그래서 고산국에서는 일부일처제를 법적으로 강요하지 않는데도 대체로 남녀 한 쌍으로 가정이 이루어졌다. 여초현상이 심각해질 때마다 은근히 시집 못 간 여자들을 남자들이 책임져야 한다고 신문 사설 등을 통해 분위기를 띄워봤으나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다.

고산국에는 적자와 서자의 차별이 없다 못해 아예 구별하지 않았다. 사생아라는 개념도 없었다. 이 시기 유럽에서 사생아는 빚을 못 갚은 채무자처럼 형사 범죄자 취급을 받아서, 영국 같으면 해군에 끌려가는 대상 중에서도 1순위였다. 개인이 자기 책임이 아닌 이유로 처벌을 받는 불합리한 제도였고, 범죄자들이 끌려가 복무하는 영국 해군은 전혀 영광스럽지 않았다.

“아바마마! 저는 왕립사관학교에 입교하고자 합니다.”

“설마 사관학교 산악부에 들어가려고 굳이 사관학교에 가는 거야?”

“어? 면 형이 아바마마께 말씀드렸습니까?”

“너나 면이나 하는 짓이 뻔하지. 사관학교가 요즘 경쟁률이 센데 네 실력으로 되겠어?”

예전에 부사관과 병들을 단기 양성과정을 거쳐 장교로 임관시켜주던 시대는 이미 끝났다. 물론 지금도 그 과정이 남아있지만 이제는 보통 4년의 사관학교 과정을 거쳐야 장교로 임용되는 분위기가 자리 잡았다.

“시험을 보면 제가 왕자인 줄 알 테니 정원 외로 합격시켜 줄 것입니다.”

“얼씨구? 그건 권력형 비리 아니야?”

물론 농담이었고, 개똥이는 정상적인 시험을 통해 합격할 것으로 믿었다. 아무리 공부를 안 한다 해도 국왕과 총리인 이민호와 혜영의 피를 절반씩 물려받은 인간이 개똥이었다. 유전적인 요인만큼 가정환경도 중요하게 작용해서, 개똥이의 머리는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책상에 앉아 책을 읽는 것을 들킬 때마다 혜영이 매섭게 노려보는 분위기라서 개똥이가 고민이 많을 것 같았다. 꼭 아버지라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개똥이는 절대 공부를 못하지는 않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성격이 비뚤어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개똥이는 훌륭했다.

“네가 고생이 많다.”

“고등학교 졸업한 다음에 제가 왕실에서 나가려는 것을 이해해주시겠지요?”

“안타깝지만 이해하마. 네 어미가 고집이 좀 세다. 네 어미가 나를 위하고 너를 위한다는 일념으로 그랬다는 것만 이해해주렴.”

“충분히 이해합니다.”

“미안하다.”

개똥이를 세자로 책봉하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자식은 개똥이만이 아니었고, 다른 아이들에게도 기회는 열려 있었다. 왕좌는 차지하기까지 위험하고 험난한 자리였고, 오른 다음에는 외로운 자리였다.

조선에서는 적장자가 세자가 되고 나중에 왕위를 이어받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조선 왕조 통틀어 스물아홉 명의 세자들 중에서, 적장자로서 세자가 됐다가 즉위한 경우는 단 일곱 번에 불과했다. 세자는 미래의 권력이지만 현재 아무런 힘이 없는 상태에서 국왕의 견제를 받고 정적들로부터 모략을 당하는 자리였다.

고산국의 이른바 식자들은 개똥이가 정실 소생이 아니기 때문에 국왕이 정실 왕비를 얻어 적자를 생산하길 원했다. 조선 왕실과의 국혼을 추진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그럴 생각이 없었고, 전제군주정이든 입헌군주정이든 왕위를 물려줘야 한다면 현재의 자식들 중에서 고르겠다고 다짐했었다.

고산국 생활백과 식생활 편을 발간했다. 조선이나 기존 국가들과 가장 많이 다른 주생활 편을 먼저 발간했고, 식생활 편은 집필을 맡은 혜진이 내용을 충실히 하려다 보니 의생활에 이어 세 번째로 세상에 나오게 됐다.

국내는 물론 명나라와 조선,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식생활 편부터는 아예 고산국에서 직접 해당 국가 언어로 번역해서 출판했다. 시간이 흘러 조선말이 퍼지면서 원어로 읽는 유럽인, 아랍인들도 꽤 됐다.

식생활 편 외국 장에서는 명나라와 조선 궁중요리, 오스만 제국 황실 요리와 이탈리아 상인들의 음식문화를 다뤘다. 고산국은 조선과 식생활 대부분을 공유하면서 다른 나라 음식문화를 대폭 받아들였다. 태국과 이탈리아는 물론 이민호가 몇 가지 알려주고 혜진이 연구 끝에 실체화한 국적 미상의 음식들도 큰 인기를 끌었다.

곧이어 성생활 편을 출간할 예정이라 백성들로부터 많은 기대를 모았다. 각종 체위가 그려져 있고 동서양의 각종 성전을 인용한 것은 물론 각국의 춘화집도 천연색으로 집대성했다. 수위가 너무 높아서 고산국 사상 최초로 16금 딱지를 붙일 계획이었다. 그럼 미성년자들이 호기심을 갖고 더 보게 돼 있다는 사실을 기획자들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이 책이 휴지 판매량 상승에 일조하게 될 것이다.

다른 생활백과처럼 성생활 편도 국왕인 이민호가 최종 원고를 감수했다. 국왕이 최종 원고를 승인하기 전에 후궁들을 대상으로 직접 시험해봤다는 민망한 소문이 나돌았다. 왕실에서는 못 들은 척하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호기심 많고 책임감 강한 이민호는 실험정신도 강한 편이었다.

대서양 전단 북극 탐험대가 왕도에 입성했다. 한산했던 안나푸르나 등정 성공 때와 달리 이번에는 영토 문제가 걸렸다고 오해한 많은 시민들이 성공 축하 겸 환영식에 참가하기 위해 아리수 항에 몰려들었다.

상인들은 본토에서 유럽까지의 운송기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는 북극항로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겨울에는 얼음이 확장되고 이 시기에 온도도 낮아 제대로 항로를 활용하기 어려웠다.

북극 탐험 과정 중에 큰 희생을 각오했으나 투입된 인원이 많고 준비가 철저해서 예상보다 훨씬 적었다. 희생자는 썰매 개 한 마리, 그리고 북극곰 16마리였다. 개는 개들끼리 싸우다 다리에 큰 부상을 입은 다음 버려졌고, 북극곰들은 탐험대 혹은 전방 식량 추진기지에 접근하다가 사살 당했다. 사나운 북극곰들이 사람을 먹잇감으로 알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이보시오, 탐험대장! 정말로 북극점 위에서는 나침반 바늘이 빙글빙글 돌았소?”

“하하! 항공대장님은 호기심이 많으시군요. 그것은 미처 확인을 못해봤습니다. 다만 북극점 주위를 몇 바퀴 돌면서 나침반 바늘이 일정한 지점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했을 뿐입니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항공대장 이면이 북극 탐험대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번에도 화동으로 참가한 개똥이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탐험대장의 말에 집중했다.

“정말로 북극점에 태극기를 꽂았소? 나중에 가면 태극기가 펄럭이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거요? 사진으로 이미 봤지만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소.”

“북극점에 고산국 왕실기를 확실히 꽂았으니 항공대장님이 다음에 확인을 해보시지요.”

“흠! 안식년을 이번 등정을 위해 준비하는데 써버려서 말이오.”

“저희야 탐험 자체가 원래 하던 일이지만 항공대장님은 그런 어려움이 있으시군요.”

이면이 고개를 돌려 이민호에게 시선을 향했다. 무엇을 원하는지 이민호가 바로 알아챘다.

“뭐? 항공대에 탐사단을 만들어달라고? 웃기지 마! 항공구조단을 만들어서 다른 탐사단 보조 임무나 줄까보다.”

“그런 임무라도 좋습니다, 전하!”

이면이 넙죽 받아들였고, 이민호는 이마에 손을 짚었다. 약속했으니 하는 수 없이 중앙과 각 지역별로 항공구조단을 창설하기로 했다. 헬리콥터가 아직도 실험실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해 애로사항이 있었지만 수상비행기도 구조작전에서 장점이 많은 비행기였다.

항공대장은 북극 탐험대장에게 얼음과 물 양쪽에 착륙할 수 있는 수상비행기의 효용성에 대해 신나게 떠들었다. 그러나 탐험에 비행기를 동원하는 것이 순수한 인간의 힘만으로 이룩한 성취감을 떨어뜨릴까 우려한 탐험대장은 별로 탐탁찮은 표정이었다. 이 문제는 심도 깊은 장기간의 대화가 필요했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ㅜ.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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