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99 89. 1610년, 모험시대의 개막 =========================================================================
5월 14일에 프랑스와 나바라의 왕 앙리 4세가 파리에서 마차를 타고 거리를 지나가다가 가톨릭 광신도에게 살해당했다. 암살범들이 1593년과 1594년에 실패한 암살 시도에 이어 집요하게 국왕을 노린 끝에 팔팔한 난봉꾼 왕, 혹은 좋은 왕이라 불리는 앙리를 기어코 죽이고 말았다.
앙리 4세는 안에서는 위그노 전쟁을 겪으면서 국왕으로 즉위하고, 밖으로는 유럽 최대의 강자 합스부르크 가문과 대결하는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승리가자 되지는 못하더라도 오롯이 살아남은 자였다. 국내 정치에서는 프랑스인들의 생활수준을 올리는 선정을 베풀어 선량왕 앙리라는 이름으로 프랑스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시해범 프랑수아 라바이약은 암살 성공 후 현장에서 체포됐고, 분노한 프랑스 민중들이 그를 린치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 철저히 보호를 받았다. 그리고 고문 위주의 수사와 재판을 거쳐 배후와 공범이 따로 없음을 확인한 다음 13일 만에 빠르게 처형이 집행됐다. 국왕 시해범에 대한 처형 방법은 사방으로 향한 네 마리 말에 밧줄을 걸고 몸을 찢어 죽이는 것이었다.
유럽에서 동양의 거열(車裂) 비슷한 형벌이 시행된 것인데, 중국에서 비롯된 거열형을 중세에 유럽에서 도입한 것이 맞았다. 능지처사는 온 몸의 살을 수천 번 각을 뜨고 뼈와 살을 분리하는 형 집행법이었다.
“시해범은 처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마지막 고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불타는 황과 높은 온도에서 녹인 납, 그리고 끓는 기름과 송진에 차례로 데쳐진 다음, 살을 집게로 찢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프랑스 대사가 직접 봤습니까?”
“예, 전하. 형 집행 전 단계부터 대중에게 공개했다고 합니다.”
유럽과 연결된 통신망을 통해 프랑스 대사의 목격 보고서가 급보로 왕도에 전달됐다. 중간에 중계기지 다수를 경유해야 해서 분량은 그리 많지 않았으나 내용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한 장짜리 통신문에 시해범의 피와 살, 고통과 비명, 그리고 시해범에 대한 왕실의 차분한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러나 주 프랑스 대사관 무관과 직원들로 위장한 정보국 유럽 파견대에서는 앙리 4세가 때맞춰 암살당함으로써 유럽 전체에 종교 전쟁이 확산되는 것을 막았다고 평가했다.
“범인의 범행 동기를 살펴보니까 광신도인 라바이약은 앙리 4세가 교황청에 맞설 계획을 세워서 분함을 참지 못해 살해했다고 해요. 프랑스 국왕이 합스부르크 가문에 맞서기 위해 이번 율리히-클레베-베르크 공작령의 후계 문제에 군사적 개입을 하려고 했는데, 범인은 이를 교황청에 대한 전쟁으로 간주했어요.”
영토가 넓어지다 보니 정보국이 하는 일이 아주 많아졌다. 영토 경계를 접한 주변국은 물론, 주요 소비 시장인 유럽의 정치적, 경제적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정보국 조직 자체가 변화했다.
미카는 정보국의 수장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국내외 정보를 취합, 분석해서 조정회의에, 또는 이민호 개인에게 보고하는 일을 계속했다. 정보국에 속한 인원은 출신지나 인종이 참으로 다양했다. 정보국은 현지 조력자 다수를 얻어 주로 그들을 통해 정보 수집 활동을 전개했다.
“앙리 4세가 공작 후계자의 종교를 군사 개입 이유로 삼아서 범인이 그렇게 판단한 것 같소. 앞으로 유럽에서 신구교 사이에 전쟁이 날 가능성이 높으니 예조와 정보국에서는 유럽 여러 나라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도록 하시오.”
“예, 전하. 정보국과 업무를 분담하고 협력을 강화하겠습니다.”
“유럽 출신 이민자들이 지원해준 덕택에 정보원이 현지에 적응하는데 문제가 없어요.”
그러나 국왕이랍시고 말로만 지시하고 끝낼 수는 없었다. 모든 국가정책은 예산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10년 동안 유럽에서 활동할 인원을 보강하고 정보국 유럽 지부와 각국 대사관의 정보업무 예산을 증액하시오. 특히 대사관 직원들은 현지인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자주 교류해서 인적 정보 자원으로 활용하시오. 이에 소모되는 선물이나 비용은 바로바로 청구하도록 예조와 정보국 직원들을 교육시키시오.”
“예, 전하. 현지에도 어명을 전해서 더욱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독려하겠습니다.”
그러나 종교분쟁 문제는 고산국이 딱히 뭔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일단은 유럽의 정치적 상황변화를 지켜보기로 했다. 유럽 여러 나라들이 관계가 서로 얽히고 고산국과는 어느 나라든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해서 고산국이 딱히 특정국가의 편을 들기도 어려웠다.
일단 고산국은 신교도 국가인 덴마크를 핵심 동맹국으로 설정하고 영토와 주권을 지켜준다는 이유로 유사시 유럽 문제에 개입할 명분을 확보했다. 또한 구교도 국가의 핵심인 에스파냐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외부 세력이 보기에 고산국은 중립을 표방하는 것 같았다. 쉽게 말해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어쨌든 일국의 국왕이 서거했습니다. 예조 판서께 다시 조문 사절 임무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마땅히 제가 할 일입니다, 전하. 내일 바로 프랑스로 떠나겠습니다.”
“그 동안 판서께서 열심히 활동한 효과가 나고 있습니다. 판서 대신 다른 젊은 관료를 조문 사절 대표로 보내면 그 나라를 무시한다고 받아들여서 참으로 곤란하게 됐습니다. 너무 열심히 일하지 마세요.”
고산국의 공식 복장은 절대 아닌데, 예조 판서는 보통 조선에서 국상 때 관료들이 입는 흰 관복에 흰 갓을 쓰고 유럽 왕실의 조문에 참가했다. 상복이 지역별로 흰색과 검은 색을 오가다가 검은색으로 통일되는 유럽의 시대적 추세에서 특이한 동양식의 흰색 상복은 유럽 정치인들의 눈에 확 띄었다.
고산국의 국제적 영향력에 더해서, 특이한 복장은 조문 외교에서 유리한 점이었다. 유럽의 외교사절들이 본국에 돌아가서 보고할 건수를 잡기 위해서라도 예조 판서와 단 5분이라도 면담을 하고 싶어 했다. 예조 판서는 강대국의 외교사절 대표답지 않게 정중한 태도와 화려한 언변으로 상대방을 사로잡았고, 개인이 가진 무형적인 자산이 국익으로 연결됐다.
이렇게 고산국을 대표하는 외교 사절로서 예조 판서는 지난 10여 년 도안 유럽 각국과 인도, 명나라와 조선까지 안 가는 곳이 없었다. 이번에도 노구를 이끌고 먼 길을 떠나야 해서 그 일을 시키는 이민호 입장에서는 몹시 안쓰러웠다.
“항상 바쁜 판서 대신 참판들이 조문 사절 역할이라도 나눠서 해줘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참판들도 다들 바쁩니다. 그리고 유럽 여러 나라의 조문 사절들이 파리를 방문할 테니 거대한 외교전이 전개될 것입니다. 유럽의 능구렁이들을 상대하려면 반드시 제가 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예조 판서가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어리버리하던 젊은 예조 관료들을 언제든 한두 단계 위의 직책을 맡을 수 있도록 꾸준히 훈련시켰고, 통역이 필요없는 국가별 전문 외교관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참판 세 자리도 누구든 판서 역할을 맡을 만한 훌륭한 인재들로 채웠다. 고산국은 조선의 직제 대부분을 도입했지만 인원이나 업무의 양과 분야 등에서 꽤 차이가 났고, 예조가 가장 대표적이었다. 그 넓은 영토에 산재한 수많은 학교에서 근무하는 교사들이 모조리 예조 소속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성 데니스 대성당에 안치될 앙리 4세의 마지막 길을 보러온다는 핑계로 파리를 방문할 외교 사절들이 유럽 여러 나라의 날고 기는 정치가들이었다. 고산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고산국 국왕의 신임 받는 대리인으로 알려진 예조 판서가 전면에 나설 필요가 있었다.
“최 판서께 항상 송구합니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그 말씀은 거두어 주십시오. 제가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일을 맡겨주신 전하께 감사드립니다.”
최 판서 부녀의 집안은 아버지는 예조 판서로, 딸은 교육국장으로서 고산국 건국과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가문이었다. 비록 고산국의 무력이 뒤를 받쳐준다지만 미수교국에 당당히 방문해서 협상을 진행할 만큼 간이 큰 인간이면서, 동시에 후배들에게는 세심한 스승이기도 했다.
최 판서가 자행한 유일한 과오는 최 선생의 이름을 지어주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최 선생의 이름은 없으며, 후궁이 된 이후 혜영 등 몇몇 주요한 후궁들만 받는 칭호인 부부인(府夫人)으로 통칭했다.
명나라가 종주국으로서의 역할이 희미하므로 고려 때처럼 국부인(國夫人)이나 국대부인으로 칭호를 상향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명나라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있는 것은 물론, 조선과의 관계를 사소한 문제로 인해 파탄으로 몰고 갈 수는 없었다.
고산국에서 여자 이름을 집계한 문서에서 양인 과부의 호칭인 조이(召史)가 가장 흔했다. 조선에서 남편을 잃고 살기 어려워진 과부들이 아이들을 안고 업고 무작정 고산국으로 향하는 이민선에 오른 결과였다.
예조 판서는 유럽으로 가고, 토르구트 족의 젊은 귀족 자제 100여 명이 고산국에 입국했다. 고산국과 몇 년 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예전보다 세상을 넓게 보던 타이지가 이대로는 토르구트의 미래를 위해 안 되겠다고 판단한 탓이었다.
젊은이들은 어른들의 허락을 받고 처음으로 멀리 말로만 듣던 고산국을 방문했기에 여기저기 구경하러 다닐 기대로 몹시 들떴다. 그러나 그들 앞에는 빡빡한 교육 일정을 짜놓고 기다리는 사관학교장, 김학이 있었다. 웃고 떠드는 귀족 자제들을 세워놓고 김학이 통역과 함께 연단에 올라왔다.
“왕립 사관학교장 김학 소장이다. 토르구트 타이지의 요청을 받아들인 국왕전하께서는 겨우 3개월, 석 달 만에 너희들을 고산국의 일반 성인들과 비슷한 지적 수준으로 만들어달라고 명하셨다.”
“에이~ 말도 안 돼요. 10년 넘게 배운 고산국 사람들을 글자도 못 깨우친 우리가 어떻게 따라잡아요?”
“선생님! 점심은 언제 먹나요?”
첫 대면은 기싸움으로 시작됐다. 토르구트 귀족 자제들은 최대한 통제에서 벗어나려 했고, 김학은 이들을 제압해야 하는 싸움이었다.
“이것은 보통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국왕전하께서 내리신 명을 받들어야 한다. 그래서 너희들은 이제부터 인간의 한계를 시험해보는 기회를 가질 것이다.”
토르구트 족이 싸우는 데에 이골이 난 몽골족 전사들이라지만 김학은 세계 최강 고산국 군대의 장교들을 길러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교수들은 이순신과 계복을 비롯해 명성이 쟁쟁한 장군들이었고 조교들은 키가 작지만 탄탄한 체격의 구르카 용병들이었다. 토르구트 귀족 자제들은 잘못 걸렸다는 사실을 아직 몰랐다.
“원래 사관학교 여름학기는 낙제생을 구제하기 위한 보충 교육 과정이다. 너희들은 고산국 사관학교의 낙제생들보다 나은 게 과연 뭐가 있는지 확인하게 될 것이다.”
김학 교장이 가리킨 곳에는 눈빛이 날카로운 사관생도 30여 명이 똑바로 도열해 있었다. 목표 의식이 없어 흐리멍텅한 토르구트 족의 귀족 자제들과 전혀 다른 태도였다.
처음에는 문명국의 장교후보생이라고 만만히 본 토르구트 젊은이들은 자기들이 단단히 착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장교가 되는 일에 인생을 건 사람들을 이길 자신이 없어졌다. 비교할수록 초라함을 느낀 귀족 자제들에게 김학 교장이 쐐기를 박았다.
“너희들이 이곳에서 지내면서 모든 것이 점수화된다. 그리고 최종 성적은 토르구트의 타이지에게 통보될 것이다. 그 자료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타이지에게 달린 문제겠지만, 아마도 그 종이 한 장이 너희들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연설을 마친 김학이 쏘아보자 토르구트 귀족 자제들이 흠칫하더니 일제히 똑바로 섰다. 갑자기 숨 막히는 긴장감이 연병장을 짓눌렀다.
“퇴교를 희망하는 생도는 지금 즉시 신청해라. 석 달 동안 관광지만 돌아다닐 것이다. 이곳에 남는 생도들은 나와 함께 학문을 배우고 신체를 연마한다.”
토르구트 귀족 자제들이 3개월 동안 눈물과 땀으로 보낸 이 교육 과정은 급조한 것치고는 의외로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됐다. 낙제생 생도들의 열의와 구르카 용병들의 실력에 압도된 귀족 자제들은 처음에는 전혀 생각도 않던 열등감까지 생기는 등 몹시 낙담했다.
그러나 거친 자연과 전쟁을 일상으로 여기고 사는 유목민들은 만만치 않았다. 귀족 자제들은 악과 깡으로 훈련과정을 견뎌냈고, 밤을 새워 공부했다.
예정보다 빠른 2개월 반 만에 준비한 모든 과정을 마친 생도들은 나머지 기간에 꿀맛 같은 휴식을 누릴 수 있었다. 이제는 일상적인 일도 제법 진지한 눈길로 대하는 귀족 자제들의 모습을 보고 이민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민호가 못 봤던 두 달 반 사이에 사람들이 확 달라져 있었다.
“교장! 원래 절반쯤 탈락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계획과 다르잖아.”
“아주 우수한 생도들이었습니다, 전하. 마치 이면 생도가 100명쯤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거 참 무서운 이야기로군.”
토르구트의 귀족 자제들은 모든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했다. 그러나 이들도 구르카 족과 겨룬 산악행군에서는 100위 안에 아무도 들지 못했다. 이민호가 그들을 안짱다리라고 비웃었지만, 고산국 출신 생도들도 이루지 못한 업적이었다.
============================ 작품 후기 ============================
진작 올렸어야 했는데 또 늦었네요.
오후에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한 편만 올리겠습니다.
2시간은 자겠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