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96 89. 1610년, 모험시대의 개막 =========================================================================
89. 1610년, 모험시대의 개막
1610년 연초에 본토 중남부 옥산 등산로에서 인명 사고가 발생했다. 한겨울에 눈사태도 아닌 산사태가 발생해 다섯 명이 매몰되고 세 명이 낙석에 맞아 큰 부상을 입었다.
이민호는 이른 아침에 보고를 받은 즉시 이조에 상시 설치된 종합상황실을 방문했다. 그리고 24시간 교대 근무하는 상황실 차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정상 아래의 산장에서 대기하던 산악 안내원들과 원주민들이 부상자들을 빠르게 병원으로 후송하고 매몰된 실종자들을 수색하고 있다고 했다.
옥산이 동북아시아 최고봉으로서 3,952미터나 되며 2,750미터인 백두산보다 훨씬 높다지만 의외로 일반인들도 등반하기 쉬운 곳이었다. 사실 백두산도 차에서 내려 야트막한 언덕 하나만 오르면 아래로 천지가 내려다보인다. 높고 험한 산이라도 도로만 잘 닦으면 전문 등반 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인이 얼마든지 등정할 수 있었다.
“옥산에서 사망 사고는 처음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사고가 난 곳은 낙석이 자주 발생해서 매년 안전진단을 하는 세 곳 중에 한 곳입니다. 그러나 낙석 정도가 아니라 도로 170미터 정도가 매몰되는 대규모 산사태는 이번에 처음으로 관측됐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나보군. 고남 시장에게 연락해서 낙석지구를 피해 도로를 옮기도록 하게. 운이 나빴다고 볼 수만은 없어. 중요한 산악 등정 계획을 앞두고 불안하군.”
“송구합니다, 전하.”
이민호가 신경 써서 도시 근교의 산은 물론 옥산과 설산 등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만한 산악지역의 등산로를 넓고 안전하게 만들었다. 마차 두 대가 교차할 만한 넓은 도로에 중간 중간 휴게소와 대피소를 지었다. 산 정상은 아니더라도 그 가까운 곳에 초등학생들도 오를 수 있게 됐다.
그러다 보니 전문 산악인이라 할 만한 사람들이 보다 험한 곳을 찾아 등반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리고 보다 자연에 가까운 산을 등반하고 싶어 해서 외국으로 출정 가는 경우도 생겼다. 항공대장 이면이 이끄는 산악부도 마찬가지였다.
옥산에서 사고가 있고 나서 사흘 후 아리수 항에서 산악부 등반대가 안나푸르나 제1봉 등정 출정식을 올렸다. 항공대장 이면을 비롯해 등반대가 장비를 여객선에 옮긴 후에 환송 나온 가족들과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해군 총함장 이순신은 뭐가 못 마땅한지 자꾸 헛기침을 했고, 모친인 노부인은 손자의 손을 잡고 울먹거렸다.
히말라야 산맥 최고봉이며 세계 최고봉인 사가르마타 산, 즉 에베레스트 산 등정은 도로 문제 때문에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면도 처음부터 대뜸 히말라야에 도전할 만큼 무모한 사람은 아니었다.
안나푸르나는 카트만두 서쪽 200km에 위치한 포카라에서 가깝고 주변 고원에서 고소 적응훈련을 실시할 수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도 8천 미터 이상의 14봉, 혹은 16좌 중에서 안나푸르나에 가장 먼저 등반에 성공한 것은 그런 이유가 있었다.
“설마 겨울에 등반하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절벽을 기어오르는 건 아닐 테지?”
“물론입니다, 전하. 저도 목숨 아까운 줄을 압니다.”
“응? 정말?”
다섯 살에 망아지도 아닌 다 자란 전마를 타고 달리는 꼬마 놈이 있을 거라곤 직접 보기 전에는 상상도 못했었다. 그런 겁 없는 인간이 이면이기에 목숨을 걸고 허술한 시험기를 타고 추락해서 부상당한 적이 열 번이 넘었다. 이면과 그의 친구들이 죽음의 위험과 맞바꾸며 항공역학과 조종술 수준을 올려 지금의 항공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하! 전진기지를 설치하고 고지대 적응 훈련을 마친 다음 4월에 도전할 계획입니다. 물론 최고봉인 사가르마타 산을 정복한 다음에는 겨울 등반이나 암벽 등반을 시도해보겠습니다만, 지금은 안나푸르나에 모든 역량을 집중할 뿐입니다.”
“목숨이 가장 중요해. 도전은 다음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물론입니다. 아버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에잉! 쯧쯧!”
옆에 서 있던 이순신이 격렬하게 혀를 찼다. 그러나 이순신도 어렸을 때 이면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위험하고 짓궂은 장난을 많이 쳤다고 노모께서 웃으며 말씀하셨다. 이순신의 노모는 몇 가지 병마를 이겨낸 다음 매우 정정했다.
“그래도 준비가 부족하지 않을까? 휴가를 더 줄 테니 1년 더 훈련해서 도전하는 게 어때?”
“이제는 아무리 해도 필요한 근육이 더 이상 붙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도 이제 30대 초반입니다. 8천 미터 이상 14봉을 다 정복하려면 지금이 시작할 가장 적기입니다.”
“남들에게도 명예를 나눠줄 줄 아는 사람이 되게나.”
“안타깝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전문적으로 등산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수확의 여신이라는 이름의 안나푸르나는 오랫동안 훈련했던 저희 등반대에게 첫 번째 수확을 가져다줄 곳입니다. 이미 치밀한 계산을 마쳤고 적응 훈련도 추가로 할 예정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주십시오.”
항공대장 이면이 이민호의 질문에 가볍게 대답했다. 그러나 작년 여름부터 등반대원 전원이 1년 휴가를 얻어 체력 훈련에 돌입하고 히말라야에도 두 달 동안 답사 훈련을 다녀왔다. 절대 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 사고뭉치 개똥이, 고산국 제1 왕자 고석현도 이면을 졸라서 엄마 몰래 함께 다녀왔다. 이민호는 혜영이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 꼴을 봐야했다.
그리고 개똥이가 돌아온 바로 그날 혜영에게 회초리를 맞았다. 종아리가 벌겋게 된 채 눈물을 찔끔 흘리는 장남을 본 이민호는 그저 박장대소하며 놀려댔다. 이민호가 따로 개똥이를 혼낼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환송식이 거창하게 진행되고 이민호도 연단에 서서 짤막한 연설을 마쳤다. 역사적인 날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이민호와 등반대원들이 서로 어깨동무하고 사진을 찍었다. 기자회견도 열어서 이면이 신문기자들의 질문 공세를 너끈히 받아냈다.
왕도에 주재하는 외국 대사들도 환송식에 초빙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꼴을 즐겁게 구경했다. 저들은 아직 이번 일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틀림없었다.
기자회견에 이어서 등반대원들의 가족은 물론 항공대 장병들, 사관학교 산악부 후배들 등 부두에 모인 사람들의 환송을 받으며 여객선이 인도 벵골을 향해 떠나갔다. 가족들은 눈물을 흘리고 항공대 장병들과 사관학교 산악부 후배들은 배에서 들리지 않을 텐데도 계속 고함을 질러서 응원했다. 배는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반쯤 사라져 가물가물해졌다.
등반대원 외에도 포카라 출신 구르카 용병 두 명이 합류해 길안내를 할 예정이며, 현지에서 짐꾼들을 몇 명 고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민호가 조언해준 셰르파 족 4개 부족 중에서 2개 부족은 티베트에서 넘어와 정착한 지 얼마 안 돼서 고소 적응이 된 사람이 아직 드물다고 했다. 종교적인 문제로 셰르파 부족들이 네팔에 정착한 것은 빨라도 15세기부터였다.
그래도 티베트 자체가 고원지대이며 집단으로 히말라야를 넘어온 사람들이기에 셰르파 족은 매우 뛰어난 고소 적응력을 갖췄다. 그래서 짐꾼은 고산지대에 오래 거주한 셰르파 부족 마을에서 뽑기로 했다. 말이 짐꾼이지 고산국 등반대원들에게는 안내인 겸 훈련교관들이었다.
안나푸르나 등반대는 벵골에서 포카라까지 마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전에 고산국 함대가 벵골 해안에서 무력시위를 한 다음 벵골 주지사가 구르카 용병들에게 매우 친절해졌다. 덕택에 안나푸르나에 미리 설치된 전진기지까지 아무 문제없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너도 가고 싶어?”
“가고 싶죠. 하지만 면 형이 제가 참가하는 것을 거절한데는 이유가 있을 거여요. 제가 스스로 그 이유를 알아낼 거라고 했어요.”
배가 멀어질수록 시무룩해진 개똥이가 힘겹게 대답했다. 그 꼴이 우스워서 이민호가 물었다.
“이유야 누구나 바로 알지 않나?”
“저는 또래들 중에서 체력이 제일 강하단 말이에요. 설산 정상까지 뛰어 올라갔다 내려온 적도 있어요. 웬만한 어른들도 저보다 약해요.”
구르카 족과 함께 산악행군 훈련을 해봐야 부족함을 깨우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등산을 단순한 체력과 맞비교하는 것은 무모함의 극치였다.
“10대 후반, 20대 초반이 체력적으로 강해. 인정한다. 하지만 20대 중후반이나 30대 초반 등반가들보다는 산을 못 탄다. 그들은 수십 년 동안 산을 타기 위해 몸을 만든 사람들이야. 근육이 다르고 폐가 아예 달라.”
“윽! 하지만 세계 최고봉에 등정할 기회였는데 저를 빼고 가다니요!”
“너는 등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개똥이에게 가혹한 이야기겠지만,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현실을 일깨워줄 의무가 있었다. 왕자나 공주들은 신분을 내세워 남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수치라고 여기도록 교육받았다. 그러나 개똥이처럼 이렇게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할 수도 있는 법이었다.
“저도 정상에 등정할 생각은 없었어요. 제 한계를 아니까요. 그래도 등반에 참가해서 공략 거점에서 기다리기만 해도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너무 위험한 곳이야. 그리고 등반대는 등정 성공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단 한 치라도 낭비할 공간도, 시간도 없다. 너는 대원으로서 낭비에 해당한다.”
“너무해요! 하지만 아바마마 말씀이 사실이기에 더 슬픕니다.”
“자그마한 사고가 죽음으로 연결되는 곳이다. 더 처참한 것은 뭔지 알아?”
“뭔데요?”
등반에 참가하지 못한 것을 가장 처참한 것으로 여기는 아들에게 그런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너도 설산이나 옥산 정상에서 느꼈겠지만 고지대일수록 산소가 부족해. 옥산, 설산 정도가 아니라 히말라야 산맥 고봉들은 그 두 배 이상의 높이야. 공기가 훨씬 희박해서 체력을 최대한 아껴야 해.”
“그거야 상식이죠.”
“문제는 동료가 부상당했는데, 혹은 죽었는데도 밑으로 데려올 수 없다는 것이다. 데려올 체력이 안 되니까 그때는 동료를 버려야 해. 그런 상황을 네가 감당할 수 있겠니?”
“저는 동료를 버려두고 갈 수는 없어요! 바보 멍청이 소리를 듣더라도 동료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여요.”
이런 순진한 아들에게, 아들이 정상 아래에서 부상을 당했을 경우 동료들이 아들을 버리고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차마 말해줄 수 없었다. 이면도 다 알고 있겠지만 아직 성년에 이르지 못한 개똥이에게 모든 진실을 알려주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게 너의 또 다른 한계다. 그런 선택을 했다간 동료 대원들을 모두 다 죽이거나 큰 위험에 빠뜨리고 만다. 자연의 위대함에 도전하는 자는 동료를 가슴에 묻는 그런 상황도 감수해야 한다.”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아니. 네가 아직은 어린 것뿐이다.”
전쟁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전투 중에 아군 중에서 얼마든지 사상자가 발생할 수 있지만, 준비가 부족하거나 판단을 잘못해 사상자가 생길 경우 지휘관으로서 참담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고산국 원정군에서 아직 그런 경우가 없었지만 상황에 따라 예하 부대를 희생시켜야 하는 경우도 분명히 발생할 수 있었다.
1610년 연초부터 고산국이 주도하는 탐험의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히말라야 등반대만이 유일하게 탐험에 참가하는 것은 아니었다.
먼저 대서양 탐사전단에서 북극 탐험을 맡았다. 육상 탐사대 하나를 구성해 훈련에 들어가고 썰매를 끄는 개들은 몇 년 전에 품종 개량과 육성을 이미 마쳤다.
만약 북극점 도달에 실패하더라도 여기서 얻은 경험과 정보를 바탕으로 태평양 탐사전단이 남극에 도전할 예정이었다. 남극에서 너무 추우면 썰매 날이 얼음과 마찰을 하지 못해 썰매가 움직이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것도 같지만, 남극의 여름인 연말에 시도하기로 했다. 일단 목표는 북극점과 남극점에 세계 최초로 도달하는 것에 있기에 가장 혹독한 계절에 극점 정복을 시도할 필요는 없었다.
“극점 세 곳을 정복한 다음에는 뭘 하실 건가요?”
“그야 남북극 도달, 혹은 3극점에 모두 도달하는 사람을 만들어야지.”
“남극과 북극을 영토로 선포하지 않을 거라면서요? 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별로 의미 없는 일 같아요.”
혜영이 고개를 저었다. 등산 장비와 극지 장비를 개발하고 시험하는데 들어간 어마어마한 예산이나 항공대장 같은 중요한 인물이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아까운 것은 아니었다. 그 행동에서 의미를 못 찾았기 때문이었다.
산악인이 아닌 일반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이민호는 한 나라, 그것도 강대국을 이끄는 군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산이 거기에 있기에 오른다는 사람이 산악인이라면, 다른 나라도 아닌 고산국 산악인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오르도록 도와주는 것이 군주인 이민호의 의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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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반대원들이 말도 못하게 고생을 하겠지요. 그 전에 오래도록 훈련도 했을 것입니다.
영광은 온전히 그들의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