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794화 (743/1,000)

00794  88. 1609년  =========================================================================

동해안 어촌마을 방파제에서 낚시한 것은 휴식을 취하려는 목적 외에도 꽤 재미가 있었다. 왕실 가족들과 함께 백화점에 가는 것보다는 이렇게 야외에 놀러오는 것이 훨씬 좋을 것 같았다.

물론 보살필 인원이 많아지면 피곤해지는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자연과 함께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아이들이 경호 문제 때문에 너무 왕도에만 갇혀 지내는 경향이 있었다. 유일한 예외로 개똥이는 이면과 어울려 잘도 돌아다녔다.

- 삐이이이익!

기차가 원숭이 광산 근처의 산길을 넘으면서 기적을 길게 울렸다. 본토의 동서 폭이 좁아 오후에 낚시를 했던 갯마을에서 왕도까지 기차로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절반쯤 채워진 객실에는 갖가지 사람들이 시끌벅적 떠들어대고 있었다. 객실에 음악방송이 나오는 것도 몇 년 전과 달라진 점이었다.

옆 좌석에 앉은 민정이 이민호의 어깨에 기대서 졸다가 퍼뜩 깨서 기지개를 켜는 일을 반복했다. 몹시 졸렸어도 민정은 호위대장으로서 임무를 잊지 않았다.

“엄마! 나 과자 사줘.”

“도착하면 집에서 밥 먹을 시간이야. 밥 먹고 나서 두 시간 후에도 과자 사달라고 하면 그때 사줄게.”

옆 좌석에서 칭얼거리는 아이를 엄마가 달랬다. 아이의 기본 소득을 착취하는 악덕 부모가 되지 않으려면 아이의 군것질 요구를 무조건 거절만 할 수는 없었다.

도박 중독자나 알코올 중독자들은 정부에서 치료를 받으라고 권해도 체면 때문에 숨어있는 경우가 흔했다. 그러나 술값과 도박 빚을 감당 못해 자식의 계좌를 건드리다가 발각돼 치료감호소에 수감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아무리 백성들이 경제적 여유를 누린다 해도 다른 문화권에서 발생하는 온갖 종류의 범죄나 사회현상이 고산국에서도 고스란히 재현됐다.

“힝~”

“에비~ 너 자꾸 그러면 경찰 아저씨가 잡아간다.”

마침 그때 진짜로 경찰 두 명이 나타나자 아이가 깜짝 놀라 움츠러들었다. 주변 승객들이 철도경찰에게 아이를 잡아가라고 을러댔다.

아이가 겁에 질려서 엄마 품에 파고들며 울자 승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주변 사람들에게 몹시 화를 내는 아이 엄마를 진정시키며 철도경찰이 아이를 달랬다.

“꼬마야! 안 잡아간다. 엄마 말 잘 듣는 예쁜 아이를 왜 잡아가겠니?”

“애 놀라요. 정복 입은 사람은 무서워 보이잖아요. 그만 가세요.”

“죄송합니다, 부인. 훌쩍~ 꼬마야, 안녕!”

철도경찰은 청원경찰이 아니라 정식 국가공무원이며 사법경찰관이었다. 고산국 해안경비대가 사법경찰권이 없어서 수사를 해군이나 일반 경찰에 맡기는 것과 차이가 있었다.

한국 해양경찰은 국제적으로는 국가의 무력집단으로 간주되는 해안경비대, 즉 코스트가드라는 명칭을 내세웠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권력기관으로서의 상징인 수사권을 지키기 위해 해양경찰이라는 명칭을 고수했다.

“철도경찰이 승객들에게 참 친절합니다, 도련님.”

“그러게. 국가경찰인데도 승객들이 잘 몰라서 함부로 대드는 문제가 있다고 들었어.”

“행동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받겠죠.”

어딜 가나 취객들이 항상 문제였다. 기차 안에서 술 취한 채 큰소리로 떠들어대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다가 싸우는 모습을 고산국에서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객실을 순찰하는 철도경찰이 재깍재깍 체포해갔다. 철도경찰은 경찰이 아닌 줄 알고 취객들이 함부로 손찌검했다가 아주 혼쭐이 나서, 나중에는 철도경찰만 나타나면 취객들이 황급히 자리에 앉아 입을 다물었다.

“도련님. 계복 형님이 요즘 공부를 많이 하십니다.”

“자기개발을 위해 공부한다는데 그게 왜 걱정이지?”

감불이 무척 걱정스런 말투로 이야기를 꺼내서 심상치 않음을 느낀 이민호가 날카롭게 대꾸했다. 계복은 전에도 대학 공부 운운했었는데 아무래도 계복과 감불, 감동 등 이민호의 친위 세력들이 공감하는 뭔가가 있긴 했다.

“제가 보기에는 나중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야 별로 중요시하지 않지만 다른 나라로 치면 계복 형님은 고산국에서 제일가는 개국공신 아닙니까?”

“흠. 혹시나 다음 대 국왕이 내칠까봐서?”

“그냥 내치기만 하면 다행일 것입니다. 계복 형님은 아마 그 전에 스스로 물러서려 하겠지만 주변 사람들이 내버려두려 하겠습니까?”

“군권을 쥐었던 개국공신을 치면서 분위기를 휘어잡는다?”

건국 초에 창업자가 죽고 2세가 즉위한 다음 개국공신들의 운명은 바람 앞에 등불이 된다. 명 태조처럼 2세가 즉위하기 전에 창업자가 한때 동료였던 공신들을 미리 제거해주는 수도 있었다. 비정한 일이지만 왕실을 튼튼히 세우기 위해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도련님이 아직 한참 젊으신데 벌써 이런 말씀을 드려서 송구스럽습니다만, 왕실이나 계복 형님이나, 혹은 저나 감동이나 앞날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물러선다고 끝날 일도 아닙니다.”

“그래. 내가 갑자기 요절하거나 비명횡사할 수도 있지. 그럼 너희들도 위험하게 된다. 너희들은 왕실을 떠받치는 가장 강력한 지지 세력인 동시에 왕실에 가장 큰 위협이 되니까.”

“그런 말씀 마세요, 주인님.”

민정이 이민호의 팔을 붙들고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질 듯했다. 후궁과 동급인 여진족 호위들의 운명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후궁들의 소생 중 하나가 새로운 군주로 즉위한 다음, 다른 소생들이나 후궁들은 불행을 면치 못하는 것이 역사의 상례였다.

“나도 미래에 대한 대비는 하고 있다. 그 중에서 너희 장군들은, 차기 국왕이 선택한 장군은 예외로 두고, 아프리카나 덴마크로 보내기로 했어. 그 전에 이미 퇴직했더라도 내가 죽은 다음에는 너희들이 말년을 외국에서 보내야 할 거야. 너희들의 2세들은 본국에서 뭘 하든지 상관없겠지만.”

“아프리카는 덥고 덴마크는 추울 것 같습니다. 에스파냐나 프랑스로 가면 안 되겠습니까?”

심각하게 여기는 계복과 달리 감불은 평소 생각이 없어서 그런지 하는 말마다 여유가 있었다.

“다른 나라는 별로 믿을 만하지 못하니까. 왕실간의 우호와 친선을 다진다는 핑계로 너희들을 왕도로 송환해버릴까 두렵다. 그때쯤 되면 덴마크와 아프리카는 경제적으로 완전히 자립할 수 있고 일부겠지만 오히려 고산국이 의존하는 면이 커질 거야. 그래서 믿고 맡길 수 있어. 왜? 외국으로 보낸다고 해서 섭섭해?”

“아닙니다. 저희들을 끝까지 책임을 져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도련님을 만난 것은 제 인생 최대의 행운이었습니다. 항상 즐거웠습니다.”

“마치 마지막 인사하는 것처럼 비장한 표정 짓지 마.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이 더 많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혹시나 도련님의 2세 때문에 제가 불행해지더라도 도련님을 원망하지는 않겠습니다. 물론 차기 국왕에게 반항하지도 않겠습니다. 천지신명께 맹세합니다.”

“항상 충실한 너희들에게 고맙다. 그런 비정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애들 교육을 잘 시키마.”

계복과 감동, 감불도 생각해보면 꽤나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다. 노비나 여진족 포로로 출발했다가 장군이 되며 이민호와 함께 나라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했다. 더욱이 아직 젊었기에 앞으로 어떤 대단한 업적을 세울지 더욱 기대가 됐다.

기차가 왕도 고북 역에 도착했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와야 하는 순간이었다. 감불이 낚싯대가 담긴 가방과 농어가 가득 담긴 얼음상자 두 개를 어깨에 메고 낑낑거리며 따라왔다. 감불이 밖에 나가면 수만 병력을 거느리는 장군이었지만 오늘 동행한 셋 중에서 신분이 가장 낮았다.

“그런데 도련님 어디 가세요? 이쪽은 왕궁 방향이 아닌데요. 승합차가 역 앞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낚시꾼이 집에 가기 전에는 당연히 어시장에 먼저 들러야지.”

“고기를 팔려고요?”

“무슨 소리야? 후궁들과 아이들 숫자에 맞춰서 더 사려고. 다 내가 직접 잡은 거다. 괜히 헛소리하지 마. 알았지?”

그날 저녁 식사시간에 이민호가 후궁들과 아이들을 앞에 두고 낚시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두 팔을 벌린 것보다 훨씬 큰 거대한 농어를 낚는 것도 아니고 아예 사투를 벌이는 장면을 과장을 섞어 상세히 묘사했다.

“고기가 얼마나 큰지 탄소 섬유로 만든 최첨단 낚싯대가 아니었으면 틀림없이 부러졌을 거야. 탄소 섬유는 일반 강철보다 열 배나 단단하면서도 훨씬 가볍고 탄성이 좋거든. 그 괴물 같은 농어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낚싯대를 부러뜨리지 못했어. 마지막 승부의 순간에 농어가 수면 위로 뛰어올라 반대쪽으로 몸을 홱 휘는 거야.”

“와아!”

“바로 이때가 승부처임을 직감하고 낚싯대를 잡고 버텼지. 줄에 여유를 주면 농어가 다시 반대쪽으로 휘면서 낚싯바늘을 털어낼 테니까. 그런데 맙소사! 괴물 농어가 당기는 힘이 얼마나 센지 낚싯대와 같은 탄소섬유로 만든 낚싯줄이 끊어진 게 아니라, 낚싯줄을 연결하는 쇠로 만든 고리가 부러지지 않겠니?”

“아아!”

마지막에 줄이 끊겨 고기를 놓치는 장면에서 아이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후궁들은 아이들이 눈치 채지 않게 이민호에게 슬쩍 눈을 흘길 뿐이었다. 함께 낚시를 갔던 호위대장 민정만 고개를 숙인 채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바마마! 다음 주 토요일에 다 함께 낚시 가요!”

“그래요! 바다에 가보고 싶어요.”

후궁들의 안색이 급격히 나빠지고 이민호는 득의만면했다. 이제 주말마다 백화점에 끌려가지 않아도 된다.

“좋지! 다음 주에 다함께 낚시하러 바다로 가자. 착하고 재미있는 갯마을 아이들하고 좋은 친구가 될 거야. 그리고 왕실 전용 낚시터와 해수욕장도 만들자.”

“와! 좋아요,”

이민호는 인공파도를 일으키는 놀이공원을 상상했다. 왕실 전용이라는 명목 하에 마음대로 실컷 뜯어고치다가 적당히 완성한 다음 일반용으로 제작하면 괜찮을 것 같았다. 고산국에서 널리 유행하는 음식이나 옷도 그렇고 놀이공원도 그렇고 왕실 식구들이 알게 모르게 모르모트가 된 경우가 많았다.

“자네가 우리 왕궁을 두 해 연속 방문하다니, 조선에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나?”

“왜? 전에도 자주 왔었는데. 마포진에서 배를 타고 전라좌수영에 가서 커다란 배로 바꿔 탄 기억이 새록새록 돋는다네. 물론 거센 파도에 그 거대한 객선도 일엽편주가 되어 승객들이 객실 안에서 나동그라지는 꼴도 자주 봤었지.”

연말에 안방준이 고산국 왕도를 방문했다. 조선과 고산국 사이에서 도서 출판 관계로 원고나 책을 주고받고 편지를 교환한 적은 많았지만 실제로 만난 것은 평생 스무 번도 안 됐다. 어렸을 때부터 천재로 이름난 안방준은 나이가 적당히 든 지금도 조선에서 나름 유명하고 바쁜 사람이었다.

안방준은 평소 주변 잡기 같은 인사치레는 생략하고 본론부터 거론하는 사람이었는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괜히 고산국을 다스리는 이민호를 칭찬하는 말부터 꺼냈다.

“고산국에는 부역도 없고 병역도 없어. 그러고도 나라가 굴러가다니 참 신기하다네. 선정을 베푸시는 우리 고산국 국왕전하의 용안을 우러러볼 만하네.”

“자네답지 않게 아부는. 조선의 전세에 해당하는 세금은 고산국에서도 받고 있네. 농지세나 건물 임대료 같은 것 말이야.”

“겨우 100년 전에는 조선에서도 전세가 핵심적인 국세 수입이었고 공물은 규모가 작아서 별로 신경을 안 썼는데 말이야. 지금은 어느새 공납과 요역이 가장 큰 문제가 됐다네.”

조선에서 국고 수입의 원천이었던 전세(田稅)는 형평을 기하기 위해 세종 때 지력과 풍흉에 따라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으로 나눠 시행했다. 그러나 이렇게 이상적인 정책도 그 시행 과정에서 점차 가장 낮은 세율로 고착되면서 문제가 생겼다. 전세 수입이 줄어들고 해마다 정부 지출이 늘어가면서 조선 조정에서는 다른 세입을 꾸준히 늘리는 수밖에 없었다.

전세는 다양한 문제로 인해 함부로 증세하기 어렵고, 가장 만만한 것이 요역과 공물이었다. 현대 한국에서 직접세를 증세하면 조세저항에 부딪히지만 간접세나 특별소비세는 비교적 인상하기 용이한 것과 같았다.

그러나 갖가지 규제 장치가 발달한 전세와 달리 요역과 공물은 조선 조정에서 제대로 통제하기 어려웠다. 중앙에서 할당량을 정해주면 지방 관아에서 알아서 각 호(戶)와 인정(人丁)에 부과하는 방식이라 폐단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 작품 후기 ============================

이어질 내용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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